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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1 - 영국의 탄생과 스톤헨지를 건설한 브리타니아!
브리튼으로 불리는 앵글로 색슨족의 나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드 여왕은 1588년 7월 말에
세계 최강인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칼레에서 쳐부숨으로써 유럽 제1의 강대국으로
떠올라 식민지 제국을 만들고 이후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해가 지지않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 영국 이민자들이 아메리카로 이주해 건국한 나라 미국은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모국인 영국과 바톤 터치를 해서 오늘까지 100여년 이상을 세계 유일의 강대국으로
지위를 누리니.... 앵글로색슨족의 나라 영국의 역사를 정리해 보려는데, 브리튼은 브리타니아
에서 온 말로 그리스인이 보니 프리타니카이( 몸에 문신을 한 사람들 )라 불렀던 데서 유래합니다.
앵글로족은 리투아니아에서 서진해 왔고 색슨족은 덴마크 남쪽에서 한갈래는 동진하여 독일의
작센이 되었고 다른 갈래가 바다를 건너 영국을 침략했는데, 7세기에 앵글족 노섬브리아
의 에드윈왕이 패권을 잡아 영국 일곱 나라를 대표하면서 노섬브리아가 속한 “앵글족의 나라”
에서 “잉글랜드 England ”가 나왔으며 "앵글족 랭귀지” 에서 “잉글리쉬 English” 가 탄생합니다!
이는 947년에 거란이 중국 북부를 점령하는데, 거란의 중국어 발음인 치단 Qidan 이 유럽에
전해져서는... 중국을 한때 키타이 Qidai 로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후 유럽에서
중국을 통일 했던 "진" 나라의 중국어 발음인 "친" 을 사용하니 치나가 되고 후일 차이나
China 로 바뀌었지만 영국은 노섬브리아가 패권을 잡으니 "색슨랜드" 가 아닌 “잉글랜드”라?
해서 영국을 잉글랜드라고 부르는 분도 있지만 정식명칭은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이며 약칭은
브리튼이라고 하는데, 영국은 구성국 중에 하나인 잉글랜드의 한자 표기로
영(英) 의 중국어 발음 잉(Yīng) 에다가..... 나라 국(國) 은 랜드(land) 를 의역한 것입니다.
영국의 국명은 19세기에 일본을 통해“영길리” 라고 조선에 전해졌는데, 일본인들은 잉글랜드
를 뜻하는 포르투갈어 잉글레스(inglês) 음역 이기리스(イギリス) 라는 음을 한자로 英吉利
(영길리) 라고 작명했다가 나중에 英國(영국) 이 됐으며 또 프랑스는 佛蘭西(불란서)로,
포르투갈어 pão 나 스페인어 pan 은 パン(빵) 이라고 만들어 (造語 조어) 조선에 전해 집니다.
일본인들은 에스파냐(스페인) 는 西班牙(서반아) 로 도이칠란트(독일) 는 德國(덕국) 으로
번역했으며 united states of america 는 米國(미국) 이라고 번역(조어) 했는데,
“아메리카” 에서 “메” 를 취해 음으로 “메이 米” 로 그리고 뜻으로는 캘리포니아에서
쌀이 많이 나니 쌀“미 米”자를 취하고 나라“國(국)” 자를 더해 米國(미국)이 된 것 입니다.
우리는 영국을 하나의 나라로 생각하지만.... 월드컵 축구에서 보면 영국(잉글랜드)팀, 스코틀랜드팀,
웨일즈팀에 북아일랜드팀 4개가 따로 출전하며 또 세계 럭비대회를 보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 아일랜드 및 프랑스 6개 나라가 출전하는 것을 봅니다?
FIFA 월드컵 축구는 네나라가 따로 참가하면 되지만 올림픽에는 한나라로 참가해야
하는데, 축구협회가 넷이니 팀 구성이 번거러워 웨일즈, 북아일랜드 및 스코틀랜드
세 나라는 늘 불참하다가 런던올림픽을 맞아 단일팀을 구성했는데, 웨일즈인으로
주장인 긱스는 영국 국가 제창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지요? 자기 나라가 아니니까.....
영국은 서로 다른 나라로 먼저 웨일즈가 통합(침략?)되고 그후 1707년에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통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되었으며 또‘유나이티드 킹덤’이라고도 했는데 1801년
에는 아일랜드 왕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통합되며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을 구성
했으나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분리되니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으로 바뀝니다!
그동안 영국을 세번 여행했는데 마지막 여행때 웨일즈를 방문했으니 콘위에서 버스를
타고 카나번으로 가다 보니, 투박한 돌로 벽을 붙인 교회를 지나 버스 정류소는
듣던대로 “Bus Stop" 위에 ”Safle Bws" 라고...... 켈트족의 웨일즈어로 병기된
것을 보았는데 영국과 웨일즈,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언어가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영국의 국기는 유니언잭(Union Jack) 이라고 부르는데 하얀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잉글랜드의 깃발에서 푸른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진 스코틀랜드의 기가
합쳐져 1600년대에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1801년에 아일랜드의 성패트릭의 기가
합쳐졌는데 드래곤이 그려져 있는 웨일스의 깃발은 유니언기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국을 의인화한 인물은 "브리타니아" 라고 하는데 로만 브리튼 시절에 처음 유래
하였으며, 금발이나 갈색 머리를 하고 그리스 투구를 쓰고 있으며 하얀
로브를 걸치고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되며 포세이돈의 삼지창과
방패를 가지고 있고 국장에는 사자와 유니콘, 혹은 드래곤이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선사시대에 영국에 거주하던 원주민인 이베리아인들은 서남부 솔즈베리(Salisbury) 평원에
스톤헨지(영어: Stonehenge)는 라고 불리는 거석기념물(巨石記念物)을 만들었으니
높이 8미터, 무게 50톤에 달하는 거석 여든여개가 세워져 있는..... 환상 열석 유적입니다.
오래전에 영국 전국을 일주하는중 바쓰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만에 솔즈베리 Salisbury
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들판을 달려 20분후 내려서 언덕을 올라가니 지름 114m
의 도랑과 도랑 안쪽에 만들어진 제방에 둘러싸여 2중의 고리 모양으로
세워진 8톤에서 45톤에 이르는 82개의 입석(立石) 으로 이루어진 거석군을 보았습니다.
중심부에는 2중으로 환상 열석과 말발굽 모양의 열석이 둘러쳐 있고, 그 바깥쪽의 환상 열석은
지름이 30m 로 30개의 열석 이 늘어서 있으니 그 위에 순석(楯石) 을 난간 처럼
걸쳐 놓아 둥글게 원 을 이루고 있었으나 지금은 입석 일부가 뽑혀 끊어진 상태 라고 합니다!
다시 안쪽에는 두개의 입석 위에 횡석(橫石) 을 놓은 5쌍의 삼석탑이 중앙의 제단석 (祭壇石)
으로 불리는 네모난 돌을 에워싸듯 놓여 있으며 이 석조 구축물의 주축이라고 할
동북부에는 바깔 도랑이 잘리어 4각형의 광장 이 부설되었고 그 중간에 힐스톤
이라고 불리는 1개의 돌이 서 있는데 하지 때 햇살이 지나는 중심을 뜻한다고 여겨 집니다!
바깥 도랑과 제방 그리고 힐스톤은 BC 1848년에 건조 되었고, 입석류는 BC 1700∼BC
1600년, 중앙의 석조물은 BC 1500∼BC 1400년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는데
스톤헨지가 고대의 태양신앙과 결부되고, 하지(夏至)의 태양이 힐스톤 위에서
떠올라 중앙제단을 비추었던 시기가 천문학적으로 BC 1840년 이라고 계산 된다네요?
솔즈베리 평원에 스톤헨지 가 달랑 이것 하나 뿐인 것은 아니고.... 여기서 북쪽으로 10분 거리에 도넛
모양의 우드헨지가 있다고 합니다. 또 거대한 무덤인 실버리 힐 및 28km 북쪽에 3겹 거석이 서있는
에이브버리가 있으며 더 북쪽에 늘어선 석조건물을 지나면 목가적인 농촌지대 코츠월즈 라고 합니다.
이후 대륙에서 건너온 켈트족이 민족을 구성하며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켜나갔으니 브리튼 섬에는
브리튼인이, 아일랜드에는 게일인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많은 부족국가를 세웠는데 이들은
남자들이 치마를 입었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에 비해 바지를 입었으며 전투는 전차를 사용했습니다.
켈트족(Celts)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일파로 갈리아의 라틴어 켈타이(Celtae) 에서 유래
한 명칭인데 켈트 미술과 같은 문화적 특성이 고고학적 증거로서 발견되는 지역
의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도 포함하는 개념이니.... 붉거나 금발에 땋은 머리를 했습니다.
흉노나 스키타이인처럼 바지를 입었고 군인들은 날개달린 투구를 썼으며 로마인들이 포도주를
먹을때 이들은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켈트족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으니 르네 고시니의 만화 “아스테릭스” 는 로마군에 맞서 싸우는 켈트족의 이야기 입니다.
켈트족은 프랑스, 독일, 스위스, 알프스 산맥 주변에서 출현한 인도유럽인들의 일파로
도나우 지방에서 이동해 온 켈트족이 기원전 7세기경에 현재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에 씨족사회(氏族社會)를 형성하였으며 스키타이인이 모라바를 침입
하여 약화되자 켈트족은 동쪽으로 이동해 체히, 모라바, 실롱스크 일대를 점령합니다.
켈트족의 "위대한 팽창" 이 시작되는데 이 사건은 이탈리아에서 격렬한 봉기를 야기시켰으니 기원전
390년에 북이탈리아에 거주하던 켈트족은 로마를 공략해 함락시킨후 약탈했으며 또 소아시아를
뒤흔들고 영구 거주지를 만들었는데 이들이 파울로스가 서간을 써 보냈던 갈라티아인이 되었습니다.
로마가 확장되면서 켈트족들도 로마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175년경 영국에 기독교가
상륙하면서 형성된 아일랜드와 그레이트브리튼 섬의 켈트 기독교 또는 켈트 교회의
발전은 400년에서 1200년 사이에 켈트 미술의 초기 중세의 문예부흥을
이끌었는데 노스 요크셔의 휘트비는 켈트기독교와 로마기독교의 흐름이 마주친 곳입니다.
자연과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을 경험하는 켈틱 영성이라는 기독교 전통을 만들어냈으며 17세기
부터 비롯된 골동품적 흥미는 “켈트”라는 용어가 확대하게 하였고 한창 떠오르던
국민주의는 19세기에 켈트어파 언어를 여전히 사용하던 지역에 켈트족을 재등장시키게 됩니다.
기원전에 켈트족은 프랑스 알프스 주변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인접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등
으로 이주하였으며 프랑크족으로 통합되는데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는 순수 켈트족이
많이 거주하는데 웨일스의 켈트족은 자체 문화를 거의 대부분 잃어버리고 잉글랜드에 동화
되었으며 순수 켈트족일부는 앵글족과 색슨족 침입시 프랑스 북부 브르타뉴 반도로 이주했습니다.
BC 600년경 부터 프랑스 지방 의 "켈트인" 들이 조금씩 브리타니아로 이주해 오는데 그런 중에
켈트족의 한 갈래인 프랑스 북부지방에 거주하던 벨가이인들이 이주하여 동양의 흉노인
이나 흑해의 스키타이인들 처럼 "남자도 바지" 를 입고 전투시에는 전차 를 몰면서 싸웁니다!
켈트족인 저 벨가이인들은 드루이드교 를 숭배하며 부족 단위로 할거하며 서로 반목하였다
고 하는데.... 당시 중국의 한나라는 물론이고 이집트, 그리스 및 로마의 남자들은 모두
치마를 입었으니 치마를 입은 남자들은 문명국이었고 게르만족등 바지를 입은
남자들은 야만인이었다고 볼수도 있겠는데... 켈트인들은 중간 정도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갈리아 트란살피나의 로마 총독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프랑스를 침입한 헬베티족을 쳐부수고 로마군
의 세력 확대에 저항한 북부 갈리아인(켈트족) 들을 BC 57년에 사비스전투에서 쳐부수고는....
브리튼인들이 갈리아인들과 연합할것에 대비하고 약탈도 할겸 로마군을 이끌고 영국에 침략합니다.
이때 게르만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 두 부족이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프랑스)에 침입
하니 카이사르는 이들을 쳐부수고 라인강에 다리를 건설한후 강을 건너 게르만족을
추격했는데....... 이런 와중에 BC 55년에 도버 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를 침공한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 침공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지만 섬에 상륙만 해놓고 주민의 성향이나 지형 및 기항지등
갈리안인조차 모르는 사실을 조사하는데는 도우이 될것으로 판단했다” 상인들 조차도 칸티움(켄트)
지방 밖에 몰랐고 그밖에 섬의 크기나 지형 인구수와 전술이며 항구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카이사르는 볼루세누스를 정찰대로 브리타니아에 보낸후 프랑스 북쪽 모니리족 땅으로 진군했는데 도버
해협으로 배를 모으기 시작하니 이 소식을 들은 브리타니아인들이 사절을 보내왔으니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인질을 바치겠다는 것이라 수락하고 사절이 돌아가는 편에 갈리아인 콤미두스를 딸려 보냅니다.
모리타니족의 협조를 얻어 준비한 원정군은 제7군단과 제10군단에 기병대와 80척의 수송선,
바람 때문에 12킬로미터 떨어진 항구에 들어간 기병을 수송한 18척에 몇척 군선이
더해졌는데 영국을 정복할 생까은 아니었으니 나머지 6개 군단은 갈리아에 남겨두었습니다.
모리니족의 항구 도버해협의 이티우스(불로뉴 쉬르 메르) 에서 밤중에 출항한 카이사르는
다음날 10시에 브리타니아 해안에 도착했는데 윈스턴 처칠이 대역젝구의 역사는 이때
시작되었다고 말한 BC 55년 8월 26일로 조류에 밀려 북쪽으로 멀리 떠밀려갔는데 좁은
해안에는 깍아지른 벼랑이 솟아있고 위에는 무장한 브리타니아인 병사들이 맞이했습니다.
그들이 던지는 창과 화살이 해안에 상륙한 로마군을 맞힐 정도라 상륙지점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오후 3시까지 후속선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서는 도착한
선단과 함께 10킬로미터 쯤 떨어진 곳에 평원과 이어진 해안을 발견하고는 닻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상륙한 로마군을 향해 브리타니아인들의 기병과 전차부대가 공격을 해 왔는데....
수송선은 밑바닥이 깊어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해상에 정박할수 박에 없고 지형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으며 칼과 방패등 무거운 무길르 든채 병사들이 바닷물
속으로 뛰어 들어야 했고 브리타니아군은 해안에서 바닷물쪽으로 적극 공격해 옵니다!
옴쭉달싹하지 못하는 상호아에서 카이사르는 노롤 젓는 가벼운 전투선을 해안까지 몰아
가서는 이 갤리선에 투석기와 석궁기를 싣고는 해안과 평행되게 일렬로 늘어선
다음 폭격을 하니 난생 처음 보는 무기에 놀란 브리타니아군은 혼겁해서 후퇴를 합니다.
그때 제10군단 기수는 뱃머리에 우뚝서서 기도한 다음 독수리 깃발을 들고 바닷물속으로 뛰어
들어 군단기를 높이들고 헤엄쳐 나아가자 다른 병사들도 모두 바닷물속으로 뛰어 내리니
이후 해안에서는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여울이 얕고 깊은 곳을 모르는지라 고전합니다.
이에 카이사르는 병기를 실었던 갤리선에 병사를 싣고는 노를 저어 해안 가까이 배를
대서 병사들을 상륙시키니 진형이 갖추어 지고 본격적인 로마군 대형으로 공격
하자 브리타니아인들이 패주했지만 기병대가 상륙하지 못한지라 추격하지는 못합니다.
그러자 브리타니아인들은 억류해둔 콤마우스와 함께 사절을 보내며 인질을 바치고
복종하겠다고 하자 카이사르는 수용한느데 기병대를 실은 배 16척이 폭풍을 만나
거나 조류에 떠밀려 멀리 남서쪽으로 내려간 끝에 대륙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군은 기병대가 없는데다가 대륙으로 돌아갈 배도 부족하고 수리앟 공구는 바다에 빠졌으며
군량도 부족한 상호아을 안 브리타니아군은 항복 대신에 다시 공격적으로 나오자 로마군은 현지
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한편 대륙에서 공구가 도착하자 배를 수리해 80척 가운데 68척을 살렸습니다.
식량을 조달(약탈)하러 간 7군단을 브리타니아군이 포위하자 카이사르는 10군단 4개 대대
를 이끌고 출진하니 브리타니아군은 전찰르 타고 도주하는데 이후 브리타니아군이
공격해 오자 로마군은 반격해 적을 격파하니...... 강화를 제의해 온느지라 인질을
두배로 받고는 철군 명분을 얻은 후에는 바람과 조류를 맞추느라 자정이 넘어 철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