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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왜 ‘인구담론’에 매달리나
우석훈
‘제로성장’과 인구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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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표준적인 경제학의 ‘경제성장론’은 솔로우의 ‘균형성장 모델’이라 할 수 있는데, 인구와 경제성장 사이의 균형관계가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균형적으로 해결된 이후에 경제성장률은 인구증가율과 같아진다는 것이 그의 결론인데, 이 결론으로 20년이 지난 1987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일반적인 말로 해석하자면, 언젠가 더 이상 많은 부의 축적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이 오고, 이 순간에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부(富)를 부여하기 위해 그만큼의 경제성장이 필요하게 된다는 말이다.
가장 공식적이 경제성장론 내에서 인구가 줄거나 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지에 대한 이론은 없다. 다만 장기 균형상태에서 경제성장률은 인구증가율로 수렴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역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구증가율이 높아지면 경제성장률이 높아지게 되는가, 혹은 인구가 감소하면 경제성장이 둔화되는가? 경제학의 ‘공식 모델’에 이런 이론은 없다. 인구가 감소하면 성장잠재력이 줄어들게 되는가? 이건 경우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경제학’이라는 이름을 빌려 “나라에 큰일이 났다”고 그야말로 호들갑이 보통이 아니다.
돈 쥬앙 시대의 패권주의와 한국의 경제패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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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서 인구와 관련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을 생각해본다면, (......) 마지막 부분에서 돈 쥬앙은 “인도에도 진출해야 하고 아프리카에도 가야 하는 이 시대에 이렇게 많은 아이를 낳게 된 자신이야말로 ‘훌륭한 애국자’일 것이라고 독백한다. 기욤 아폴리네르가 돈 쥬앙에서 비친 ‘패권주의’는 어쩌면 그 시대의 ‘상식’에 해당하는, 특기할 필요가 없는 생각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국주의를 꿈꾸던 시절에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던 시민의식은 군사적 팽창과 경제적 팽창과 함께 ‘인구의 팽창’을 상식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인구가 증가하면 지구적으로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인류가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1세기가 더 지난 다음이다.
우리나라도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들면서 모든 문화와 사회의식, 그리고 시민들의 기본적인 상식도 함께 패권주의로 전환되는 경향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홍익인간’보다는 ‘대~한민국’이 구호로서 전면에 등장하고, 자연스럽게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문학이나 문화 전반에서 등장한 여러 주장들이 함께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사회적 문제로 맨 앞에 떠오른 ‘인구감소’에 관한 우려는 한국의 경제패권주의와 일종의 쌍으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다. 노무현 정부의 ‘2만불 경제’에 대한 국정운영 기조 이후로, 우리나라에서는 경제패권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인구가 감소한다? 인구 두 명이 결혼해서 한명의 아이가 태어난다? 이건 정말 큰일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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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구와 관련된 여하한 진단은 인구변화에 따른 상대적 조건변화에 의한 약간의 ‘조정’을 제외하면 경제학적으로는 전혀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새빨간 거짓말’들이다. 월드컵을 외치며 “4천만이 승리를 기원한다”는 쇼비니즘 마케팅보다 더 무서운 민족주의의 광기가 숨어있는 사이비 과학담론이 바로 인구통계에 의한 소란떨기라고 할 수 있다. 통계에 의한 사이비 담론 중에서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사회적 소동은 1990년대 초반, 초등학교 교사 가운데 남성 교사와 여성 교사의 성비에 의한 통계에 근거해서 “아이들이 여성화된다”고 한바탕 사회적으로 소동을 일으킨 사례를 들 수 있다. 물론 그 후에 여성 교사에게 배운 남자 아이들이 ‘여성화’되었다는 어떠한 통계적 결과도 목격된 바가 없으며, 사회 전체가 큰일난다고 했던 그 소란은 어느새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의 소동은 그때와 같은 단순한 코미디로 끝날 것 같지 않다. 더구나 지금의 소란은 ‘무서운 상상’을 동반하는, 그리고 ‘나쁜 의도’를 담고 있는 ‘무서운 호들갑’에 가깝다.
순(純)민족출산율 ㅡ 조정과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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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민족’ 성원의 수가, 가깝게는 간도와 만주에도 진출하고, 멀리는 전세계로 퍼져서 패권을 장악하는 데 모자라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국내경제가 인구감소로 인해 극적인 파탄을 맞을 것이라고 하는 말은 맞지 않다.
젊은 노동자가 줄어들어서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경제 노후화’에 의한 ‘성장잠재력 약화’설도 새빨간 거짓말이다. 제조업에서의 노동력 노후화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진행된 일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인구감소로 인해 생겨난 현상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거대작업장 위주의 대량생산 구조의 조정에 의해서 발생하게 된 또다른 문제이지, “아이를 더 많이 낳읍시다”라는 캠페인으로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문제는 아니다.
그렇게 우파들이 좋아하는 ‘시장에 의한 조정’이라는 관점에서 현재의 변화를 보자면, 장기적으로는, 방글라데시를 제외하면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의 인구밀도에 의한 ‘삶의 비용’의 증가에 대한 자연스러운 조정과정일 것이고, 단기적으로는 소수의 화이트칼라와 전문직을 제외하면 모두가 도시빈민이 될 것이 뻔한 상황에서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국민들의 자연적 조정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인구가 줄면 몇 가지 문제가 생기기는 한다. 그런데 경제적인 수치로 평가해 보자면 마찬가지의 문제가 인구가 늘어날 때에도 생긴다. 그리고 평균수명의 증가에 의한 평균연령의 상승은 출산율과는 별로 상관없는 수치이다. “아이를 더 많이 낳아야 한다”는 노무현 정부의 평가는, 그러므로 너무나도 단순해 보인다.
인구감소로 인해 발생하는 가장 직접적인 문제로 세대간에 연동되는 사회보장제도의 문제를 들고 있다. 다음 세대의 인구수가 줄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일리가 있긴 하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사회보장제도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인구감소 때문에 생기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출산율이 지금보다 획기적으로 늘고, 또 이렇게 증가한 인구가 사회적 보장에 ‘적극적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모두에게 ‘좋은 직장’이 보장된다면, 인구정책으로써 사회 안전망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보장 문제를 해결하자고 인구정책을 가동시키는 것은, 정책의 ‘시간 격차’ 문제 때문에 효과가 불투명하다. 무엇보다도 사회보장의 잘못된 디자인은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할 문제이지, 사회보장제도 때문에 인구가 더 필요하다는 현재의 주장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 예의’와 관련된 무서운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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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지방자치단체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10-20% 정도의 인구증가를 ‘비전 2010’과 같은 기본계획에서 설정하고 있으며, 여기에 맞추어서 모든 공공 건설계획이 공격적으로 잡혀 있다. 지자체에서 내세우는 미래의 수치들을 전부 더한다면 우리나라 인구는 ‘폭발’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최근의 인구증가율 변화가 만들어낸 가장 드라마틱한 법정 기본계획의 변화를 볼 수 있는 것은 서울시의 ‘비전 2010’이다. 인구증가의 감소 추세를 반영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서울시는 ‘주간 상주인구’와 ‘1인당 주거면적’이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동원하게 되었다.(......) 서울시뿐만 아니라 다른 지자체에서도, 각종 개발사업들이 기획예산처의 타당성 평가나 감사원의 감사를 통과하기 어려우므로, 인구가 줄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뭔가 적극적인 조작이 필요하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인구의 상대비율의 변화에 의한 ‘조정’의 일이지만, 지자체의 개발형 토호들과 건설사들은 좀더 적극적인 ‘조작’이 시급하게 필요하게 된다. 만약 현재와 같은 출산율 수준이 몇 년간 유지된다면, 당연히 과도하게 계산된 도로와 개발지에 대한 기본 계획과 예산에 대한 사회적 질문이 시작될 것인데, 이래서는 큰일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지자체 인구가 감소하게 될 것이라는 객관적 수치가 발생해서는 안되는 건설자본과 그 대변자들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래의 예측대로 인구 수백만의 지자체로 커질 것이라는 ‘추세’가 필요하게 된다.
인구가 줄어들면 장기적으로 사회적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일부 건설자본과 그 수혜자들에게는 지금 당장 큰일이 벌어지게 된다. 만약 이들이 정상적으로 수요예측을 통해 민간시장에서의 수익률에 따라 공사를 벌이고 아파트를 건설하는 등, 정말 상식적인 기업이라면 사실 출산인구가 다소 감소한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불행히도 지자체와 연계되어 국민의 세금으로 공사대금을 받아가는 건설업자들과 이들을 비호하는 세력에게는 출산율 감소라는 상황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 지출되었어야 할 당연한 지자체의 복지와 육아 예산을 실질적으로 가로채고 있던 건설족들이, 이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이들의 출산율 저하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열심히 외쳐대는 우스운 일이 지금 벌어지게 된 셈이다.
지금의 출산율 저하를 나서서 걱정하는 주도적인 세력들을 곰곰이 살펴보라. 민족 패권주의에 기대어 자신의 정치력을 확보하려는 중앙의 정치인들과 공공의 세금으로 자신의 업체를 끌어나가는 건설업자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이 이 무시무시한 ‘민족출산율 감소’라는 음험한 외침을 만들어내는 근원지이다. 이 두 가지 부류에 해당하지 않으면서도 민족의 감소를 걱정하는 사람들, 그들은 ‘착한 백성’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 패권주의를 무기로 신자유주의를 적극 옹호하는 자들, 그리고 골프장에서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건설산업의 방패막이들과 그 수혜자들이 지금 착한 백성들에게 “아이를 더 많이 낳으라”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 지금 이 소동의 실체 아닌가. ‘조정’과 ‘조작’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이 거대한 사기판에서 정작 아이들과 어머니들에 대한 배려는 손톱만치도 없다. 게다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마저 상실하고, 국민들을 아이 낳고 세금 내기 위해 존재하는 기계 혹은 노예로 간주하고 있다. 인구문제를 둘러싼 지금의 한바탕 소동은 이러한 파렴치한 이데올로기의 만개에 불과하다.
출산율이 낮아지면 국가경쟁력이 즐어든다? 경제학에 그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이론은 없다.
담론의 ‘자가발전’과 문제의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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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담론과 관련된 현재의 호들갑은 노무현 정부 내에서 일종의 ‘자가발전’과 같은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전혀 상관이 없는 두 분야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경쟁관계에 서 있던 것이 ‘고령화 대책’과 ‘환경정책’이었다.(......) 인구담론은 고령화 문제에서 자가발전되어 급격히 다른 방향으로 질문이 전환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구문제로부터 부문별 조정에 관한 심각한 질문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령화 문제도 명백하게 존재하는 대책이 필요한 문제이고, 비슷한 수준에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인구문제, 그리고 저소득층의 육아로 교육에 관한 문제들은 우리 사회가 지금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고령화에 대한 대책이 저출산 문제로 급격하게 전환하게 된 데에는 다분히 정책집단에서의 자가발전의 경향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정부의 민족패권주의 이데올로기가 만나면서 2006년에 갑자기 폭발하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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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게 왜곡되면서 사회적으로 딱해진 것은 1차적으로는 가임여성들이다. 축구 규칙도 잘 모르다가 갑자기 태극기를 사랑하라고 해서 열심히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게 된 이 여성들에게 ‘꼰대’들은 “우리나라가 중심국가가 못되면 바로 너희들 때문이야”라고 야멸차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또한 사회 중심부의 해체에 의하여 소수를 제외하면 결국은 도시빈민과 비정규직의 경계선을 타면서 어려운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다음 세대’의 고통을 어머니들에게 전가하는 담론이 진행되는 중이다. 사실 ‘국민출산율’이라는 수치는 한 국가 내의 계층과 직업, 그리고 지역별로 존재하는 많은 문제점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다. 전국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전라북도의 현재 문제가 출산율 때문이란 말인가? 평균수명이 늘어남에 맞추어 정비되지 못한 사회안전망의 문제에서 비롯된 고령화 사회의 문제가 출산을 기피하는 가임여성의 ‘사회적 의무방기’ 때문이란 말인가?
몇 가지 통계를 들이밀고 그것에 근거하여 ‘경제학’을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 예의도 갖추지 않은 출산담론은 19세기 제국주의 시절의 패권주의자들의 주장 혹은 1990년대 이후 유럽에 전면화된 극우파들의 주장과 글자 하나도 다르지 않고 일치한다. ‘한민족’의 인구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극우파적인 ‘순혈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예의 상실 위에, 교묘하게 건설자본의 대변인들의 호들갑이 겹쳐지면서 “출산율 저하로 나라 망한다”는 극우파적인 소동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은 파렴치한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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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란 학문은 원래 양(量)에 관한 학문이고, 모든 것을 크기와 숫자로 생각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학문이기는 하다. 그러나 최소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으려는 경구(警句)가 경제학 내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가장 표준적인 경제성장론에서도 인구를 변수로 사용하지 않고 상수로 사용한다. 인구는 주어진 것으로 놓고, 인구증가율에 결국 경제성장률이 균형을 이루게 된다는 솔로우의 결론은 우리나라에서는 완전히 전도되어 있다.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서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정부와 언론의 호들갑과 같은 피도 눈물도 없는 결론을 공식적인 경제학은 내린 적이 없다. 그럴 정도로 경제학이 몰염치하거나 파렴치한 학문은 아니다.
왜 출산율이 줄어들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나 알 수 있다. 에밀 뒤르케임이 1세기 전에 《자살론》에서 이미 분석했던 프랑스 산업사회의 폐해에 대한 지적은, 꼭 유명한 학자가 아니라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논리일 것이다. 그런데 패권주의적 민족주의와 토목공화국의 건설담론에 길들여진 한국의 경제 엘리트들의 눈에는 그런 게 안 보이는 것 같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아이들’, 바로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의 아이들’을 ‘노동력’으로, 그것도 비정규직으로 기꺼이 노동을 제공할 그러한 노동력으로밖에 보지 않는 천박한 시대철학이다. 아니 민족주의라도 제대로 한다면 이제 민족의 일원이 될 ‘새로운 성원에 대한 자긍심’이라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민족주의도 아니고, 경제주의도 아니고, 다만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도 상실한 경제패권주의의 전도된 단말마적 비명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인구담론, 노무현 시대의 인구담론 아닌가?
인간은 높은 교육비용을 지출해 ‘사교육’과 ‘영어도시’를 먹여살리고, 기꺼이 도시빈민의 삶을 받아들이고 비정규직으로 순종하면서 아낌없이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엘리트와 청와대의 정치 엘리트들이 무시무시한 입을 벌리고, 태어나자마자 찬란한 착취의 길을 준비해놓은 채 아이를 더 낳으라고 하고 있다. 누군들 이런 땅에서 걱정과 두려움 없이 행복한 마음만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겠는가. 낮은 출산율을 걱정하기 전에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부터 회복하고, ‘사회적 부모’로서 최소한의 염치를 갖출 때, 아이들의 영혼이 ‘한민족’으로 태어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생각해볼 것 같다. 롤스의 《사회정의론》에 등장하는, ‘영혼들이 머물고 있는 태초의 왕국’에서 이 사회를 지켜보고 있을 아이들의 영혼의 입장에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자. 정의롭지도,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이 땅 ‘대한민국’에서 지금 권력 엘리트들이 만들어내고 확대시키고 있는 인구담론, 여기에는 과학도 없을 뿐더러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태주의를 논하기 전에, 부모의 입장이 되기 전에, 우리는 최소한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만들어낸 숱한 반생태적 담론 중에서 가장 파렴치한 반생태 담론이며 반(反)인간적인 담론이 바로 인구담론이다.
인구변화에 따라서 경제활동이 ‘조정’되어야지, 이 조정이 불편하다고 인간을 조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괴한 것이다.
(** <녹색평론> 89호(2006년 7-8월)에 실린 우석훈 씨의 글을 읽고, 간추려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