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버드나무
김홍은
봄밤이 깊어가던 어느 날 버들피리소리처럼 여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요요하게 들려왔다. 문의면 장자골에 사백년 된 버드나무가 죽어가고 있으니 살려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녀는 이런 저런 설명을 하고는 성명은 이미화라고 소개를 하였다. 우리는 사월 초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봄비가 내리던 날이다.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는 마을을 찾아갔을 때는, 꽃처럼 피어있는 연두색 속잎은 빗물에 촉촉이 젖고 있었다. 두 아름은 될성부른 네그루의 버드나무들이 나란히 자라고 있는 연륜 앞에서니 자신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졌다. 이중의 한 나무는 속이 텅 비인 채 썩어 들어가 간신히 수피에 의지하여 살아감이 안쓰럽기도 하였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사이에 잊혀져간 역사속의 알 수 없는 수많은 세월이 스쳐 지나간다.
버드나무 숲을 걷는 동안 우리는 서로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지난날의 사연들을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어주던 죽마고우처럼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선후배라는 점과, 나 또한 이 마을에 가까운 고향이 대청댐으로 인하여 수몰이 되었기에 지난세월이 떠올라 이 버드나무에 대하여 더 애착의 마음이 끌리어 갔다.
나무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 이순을 바라보는 그녀는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마을의 왕버드나무와 얽힌 사연들을 버들잎이 바람에 나풀대듯 들려주었다. 봄이 오면 가느다란 가지를 꺾어 호드기를 만들어 피리를 불기도 하였고, 단옷날에는 굵은 가지에다 동아줄로 그네를 만들어 매어 놓고 청춘남녀들이 그네를 뛰었단다. 여름이면 마을사람들은 이 숲거리에 모여 더위를 잊기도 하고, 밤이면 모깃불을 피워놓고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던 쉼터이었다고 하였다.
마을을 수호하여온 버드나무는 늠름한 풍치가 봄빛에 반사되어 수 백 년 세월의 아픔들을 연둣빛으로 쏟아내고 있는 듯 보여 졌다. 그런가하면 잎잎이 녹색으로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몸짓의 찬란한 풍광에 더없이 매료되어갔다. 이런 아름다움이 있기에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은 집 앞에다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놓고 스스로 오류(五柳)선생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나는 오늘 따라 나무를 통하여 이토록 풍류의 멋이 부럽게 느껴올 줄이라고는 몰랐다. 이 마을에서 사류(四柳)선생은 아니더라도 버드나무 사랑에 빠져 살다간 사람이라고 듣고 싶은 욕심까지 생겨났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이별하는 이에게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는 절양류(折楊柳)라는 풍속이 있었고, 사별을 하는 경우에는 버드나무수저를 만들어 죽은 사람의 입에다가 쌀을 퍼서 넣어주었다던 생각이 났다.
사람들은 어떤 연유에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버드나무를 이토록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 나무 역시 누군가와 이별의 아픔에 의해 심겨지게 되어 오늘에까지 살아오게 된 것은 아니었는지...
조선시대의 홍양호(洪良浩)라는 관리가 쓴 두만강식유기(豆滿江植柳記)를 보면, 130여 년 전 두만강 하구의 남쪽인 경흥(慶興) 땅에다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두만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대략 팔백여 보가 되는데, 성 인근의 장정 칠천 오백 명을 선발하여 한 사람당 버들가지 다섯 개씩 가지고 가서, 일보(一步)에 네그루를 심어 목책처럼 강가에 줄지어 심게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무슨 일로 나무를 심느냐고 묻자, 홍양호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저 변방이라는 새(塞)는 막는다는 색(塞)의 뜻이오. 안과 바깥을 격리시키는 곳이라는 말이요. 따라서 예전에는 느릅나무를 심은 유새(楡塞)니 버들을 심은 유성(柳城)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오. 지금 우리는 여진과 강 하나를 끼고 살아가고 있어 말을 타고 사냥하는 저들이 아침저녁 강 언덕 아래까지 이르고 있어, 어찌 우리가 하루라도 평안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이 있는 책임자는 늘 백성의 삶을 평안하게 하여 주려고 고심하며 노력하여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홍양호는 다시 이렇게 대답을 했다.
“이제 내가 버드나무를 심은 것은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소.
첫째는 우리 강역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요, 둘째는 말을 타고 돌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요, 셋째는 강둑이 물살에 파먹히는 것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요, 넷째는 땔감용 나무를 대기 위한 것이요, 다섯째는 바람을 막기 위한 것이요. 하나의 이로움을 생기게 하면 하나의 해로움을 제거하게 된다오. 이 때문에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키는 것이지 백성을 골병들게 하려는 것은 아니요. 한 번 일을 하여 다섯 가지 이익이 함께 이르게 되니 어찌 급하지 않다 하겠소? “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두만강식유기는 관리자로 변방의 백성을 보호하기위한 깊은 뜻이 담겨있음에 감동을 받게 한다.
나는 이 장자골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임학을 전공한자로 선인들이 심어 가꾼 나무가 이렇게 천대를 받으며 살아감이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선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나무를 수술을 해야겠고, 그 외로 다른 나무는 더 건강 하고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주위 환경을 보살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닥에도 담도 시멘트로 버드나무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음을 어이할지.
이 나무들을 보호수가 될 수 있게 도와준다면 건물을 사서라도 담을 철거하겠다는 이미화여사의 진지한 각오에 내 마음은 끌리어가고 말았다. 어떤 사연이 있기에 이리도 간절하단 말인가. 진실로 버드나무를 살려달라는 간곡했던 목소리가 다시금 내 정신까지 흔들고 있었다.
어쩌면 이 버드나무는 선조시대의 홍랑이 지었다는 시를 외우고 있는 것일까.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였던 고죽(孤竹) 최경창과 꽃 같은 기생 홍랑이 사랑을 하였다는 애절한 사연이 스쳐갔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이별을 하여야 했던, 육 개월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두고두고 세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고죽은 관직이 바뀌는 바람에 이듬해 봄,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홍랑은 고죽의 뒤를 따라 함관령 고개에서 마지막 작별을 할 때, 버드나무가지를 꺾어주며 눈물로 ‘묏버들’의 시를 읊었다.
버드나무 종류는 수 십 가지가 되지만 정작 묏버들이라는 나무는 없다. 일명, 버드나무를 가르치고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어느 나무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아마도 추측하건데 산에서 잘 자라는 호랑버들이 아니었을까 한다. 겨울눈(冬芽)을 얼지 않게 감싸고 있던 얇은 비늘조각(鱗片)이 이른 봄이면 빨개서 꽃 같이 보인다. 버들가지가 피었다 하면 붉은 인편과 노란 꽃술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에, 옛 풍습대로 이별의 안타까움의 정표로 고갯마루에서 자라던 호랑버들 가지를 꺾어주었을 듯싶다. .
버드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홍랑의 애절한 사연이 스쳐간다.
홍랑은 함관령에서 헤어진 지 일 년 후, 고죽이 서울에서 병을 앓고 누워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애를 태우며, 밤낮 칠일 동안 걸어서 한양에 도착하여 고죽을 간호하여 일어났으나, 이로 인하여 고죽은 파직이 되었고, 홍랑은 함경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별 후 고죽은 안타깝게도 마흔 다섯 살의 나이에 죽으니 홍랑은 삼년동안 고죽의 묘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사랑이야기가 오늘따라 장자골 왕버드나무를 통하여 생각나게 하고 있다.
이들 버드나무 중에 속이 텅 빈인 채 안타깝게 살아온 나무를 정성들여 수술하던 날은, 이미화 여사는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그 곁에서 아픔의 상처를 메운 자리를 매만지며 오랫동안 떠나지를 않았다. 이로 인한 감동은 이것으로 그치지가 않았다. 버드나무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땅 주인은 스스로 수 천 만원을 들여 석축을 만들어 주었고, 푸른솔문학회와 마을주민들은 모여 ‘제 1회 버드나무문화마을’ 축제까지 벌여 수신제(樹神祭)를 올리며 마을의 평화와 행복을 기원하는 즐거운 밤이 되었다.
이 나무들이 살아 남아있는 동안, 한 여인의 버드나무 사랑은 아마도 봄이 오면 하나의 전설처럼 버들피리소리로 은은히 오래오래 들려오겠지.
첫댓글 지난번 버드나무 축제 때 생각이 납니다. 교수님의 정성과 이미화여사님의 고향사랑이 왕버드나무를 살리셨지요
교수님 글을 대하니, 제 뜻이 전해진 까닭은 보이지 않는 전령사 역할을 했을뿐 정작 교수님을 애타게 기다렸던 것은 버드나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몫이야 크게 칭찬 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사무국장님께서 애써 주심과 문우님들 관심에 고개숙여 감사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더운 여름날 두분의 봉사 정신은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됐습니다. 건강하십시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함께 하지 못한 시간들이 아쉬움으로 남아 있네요.
힘겨운 길 가시는 교수님과 솔잎향님 건강과 행운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교수님의 버드나무에 관한 수필 쓰셨다더니 바로 이 수필이네요. 교수님과 이미화선생님 두 분 다 열정이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아님니다. 이 글은 버드나무 행사를 마치면서 쓴 글입니다. <문학미디어>에 나무를 연재하는데 이제서 책이 나왔기에 올렸습니다. 책에 발표되기전에 게재는 예의가 아님에서랍니다.
교수님! 나무사랑과 이미화 선생님의 고향사랑이 장자골 버드나무를 살리셨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게 되겠지요. 감상 잘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버드나무를 보고 이 수필을 대하니 훨씬 더 정감있게 느껴집니다. 교수님 좋은 수필 감상 잘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