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가느다랗고 매끈한 손가락. 언제나 내 동경의 대상이었다. 손바닥이 두껍고 마디가 굵은 손을 물려준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염증이 손가락으로 왔다. 평생 나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손가락 마디가 염증으로 빨갛게 부어올라 구부리기도 힘들어지면 더욱 감추고 싶어진다. 때로 물에 불은 오뎅 모양이 된다. 모양은 물론이고 통증 때문에 물컵을 짚기도 컴퓨터 자판을 치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만성이 되다 보니 “또 아파? 진통제 먹고 견뎌. 당장 할 일들은 많은데 방법 있니?”라는 말을 듣기 싫어, 그냥 “이번엔 손가락이야.” 정도로 가볍게 이야기하고 만다. 말하는 것도 구차하고, 말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 이번엔 손가락이었으니 망정이지 고관절이나 무릎에 염증이 오면 꼴 보기 싫게 절뚝거리며 걸어 다니고 통증에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고통은 철저하게 일인칭이다. 또한 주관적이다.
일인칭 감각의 범위 안에서는 그게 설령 나 아닌 존재라 하더라도 고통이 느껴지고 공감되며 마음 쓰인다. 나는 몸 여기저기에서 느꼈던 통증 덕분에 노인 관절통이 얼마나 힘들까 공감한다. 살처분 돼지들을 보며 연민에 빠지듯 사람들은 포유류가 느낄 공포와 고통에 공감한다. 하지만, 모든 생물에 대해 그러할까? 모기의 고통을 이해하려 애쓸까? 오히려 그것들의 살처분에 쾌감을 느끼지 않을까?
인류는 이런 공감능력 덕에 생존에 유리했다고 유발 하라리의 저서 사피엔스는 설명하고 있다. 7만년 전부터 수렵 채집을 하던 30~50명의 소규모 집단의 호모 사피엔스들은 그 안에서 소통하고 공감하고 보듬으며 살았을 것이다. 마치 늑대 무리처럼 말이다. 늑대는 주행성으로 인간과는 먹는 것, 집단의 구조가 비슷했기에 3만년 전 인류 최초로 길들인 동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30~50명의 집단에 변형이 오는 경우는 어떨까? 내가 속한 집단이 아닌 다른 이질적인 집단과의 관계, 혹은 집단이 커져서 사람이 수백명으로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수만 년 동안 인류의 DNA에까지 박혀버린 30~50명이라는 공감의 울타리를 넘어가 버린다. 남들이 느끼는 고통에 대해서 공감하기 힘들 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 되어간다. 그렇게 타인에 대한 고통에 무감각해진 채 사람들은 점점 잔인해졌다. (단, 이 내용은 유신진화론 관점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얼마 전 고등학교에서 공정무역과 연계된 초콜릿 수업을 하며 기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꺼냈다. 초콜릿으로 유명한 벨기에는 어떻게 그런 초콜릿을 만들 수 있었던가? 19세기 초 네델란드로부터 독립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지금의 콩고 지역을 자신의 개인령으로 삼고 그곳을 착취하기 시작한다. 천연고무와 당구공으로 쓸 코끼리 상아, 그리고 돈이 되는 카카오를 재배하게 한다. 그곳의 원주민들을 노예 삼아 일일 할당량을 주고 그 양을 채우지 못하면 손목을 잘라버렸다. 거짓말을 해도 잘라버렸고, 반항해도 잘라버렸다. 한 손으로 할당량을 채울 수 없으니 결국 나머지 손목도 잘렸을 거고, 아무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양심의 거리낌 없이 또 죽였을 거다. 그렇게 19세기 동안 죽은 사람이 1,000만명이었다. 레오폴드 2세가 죽은 후에는 개인령이 아닌 벨기에 정부가 지배를 하게 되었는데 그 국민들은 레오폴드 2세를 비난 했지만 그들 또한 1950년대까지 인간 동물원에서 콩고 부족민을 전시했다고 한다. 나는 벨기에 초콜릿을 좋아할 수 없다.
노예, 전쟁 등 인간의 잔인함은 실로 끝이 없을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미세한 감각만큼이나 어떤 것이 타인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을지도 아는 것 같다. 그것을 알고 일부러 고통을 주지 않더라도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가 누리는 것들로 인해 누군가는 고통을 받고 있을 수 있다. 나와는 너무 먼 고통이기에 알 수 없을 뿐. 혹은 고통받는 사람들의 열등함을 이유로 나의 누림을 정당화한다. 또 하나의 잔인함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인간의 공감 능력의 한계와 끊임없는 자기합리화이다. 때로는 알면서도 외면하기도 한다.
무엇이 이런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가?
이미 우리는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있기에 문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누군가 위대한 사람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방법일 수 있을까? 그 위대한 사람이 정말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높아지는 만큼 고통의 현장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혁명을 통해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려 하였지만 근본적인 구원은 인간 스스로 얻을 수 없다.
그럼에도 고통받는 사람을 적게 하기 위한 역사의 진보는 지속되었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거슬러 더 나은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과 저항은 끊임없었다. 과거 영원할 것 같던 노예제는 폐지되었다. 지금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단연코 자본주의다. 그것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어딘가에서는 고통을 생산하고 있다. 몇백, 몇천 년을 얼마나 더 지속할지 모르나 언젠가는 이것도 폐할 것이다.
그 먼 미래가 아닌, 당장의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지식이 많고 뛰어나서가 아닐 게다. 사람이 잘나봤나 얼마나 잘나겠는가?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나와 먼 타인에게까지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리더가 되길 바란다. 하지만 대부분 지독한 경쟁에서 남을 밟고 올라선 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가? 그러니 더더욱 고통은 지속될 수 밖에 없다. 지금은 오히려 고통을 받는 자들은 스스로를 탓하며 숨는 시대이다. 자본주의라는 시대의 이데올로기(나는 이것이 공중의 권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에 속하지 않고, 보다 상위에서 조망하며 고통받는 자들이 그 속에서 구원받길 소망한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며 그 또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기에 사람이 답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사람을 통해 해결되길 바라는 모순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