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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Gyantse/江孜/장쯔) 가는 길 / 캄바라(Kambala)고개를 지나 갼체로 향가는 길. 일행이 타고 간 미니 버스. |
오늘은 갼체의 쿰붐사원과 드종요새를 둘러보고 시가체까지 가야한다. 갼체에서 마땅한 숙박처를 확보하기 못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아무튼 갼체를 지나 시가체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여정 5일째 날, 부처가 아버지라 아예 성이 없다는 티벳인들을 만나러 가는 여정은 계속된다.
갼체(江孜)와 시가체에서 일행들은 고산증에 시달려야 했다. 일부는 토하고나서 식사를 전혀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대가 높은데다가 오래 차를 타서 피곤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목에서 누룽지를 가져오신 60대 어르신들의 신세를 지는 젊은이들이 많았으니...
갼체(Gyantse/江孜)는 티벳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며 라싸에서 서남쪽으로 254km 거리에 있고 해발은 3950m이다. 연초하(年楚河)와 조상각산(祖常閣山) 사이에 위치하고, 육백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도시이다. 초기의 갼체(江孜)는 토지는 비옥하지만 편벽한 산촌에 불과 했었다. 토번왕조(吐蕃王朝)가 망하자, 티벳은 분열되기 시작 했는데, 이때 백활찬보(白闊贊普)가 갼체(江孜)에 궁을 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갼체(江孜)를 영웅성(英雄城)이라 부르는 이유는 과거 영국군이 이곳에 침입했을 때 갼체(江孜) 백성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탄환과 양식이 떨어질 때 까지 싸웠으나 싸움에 패배하자 절벽에서 뛰어 내려 순국(殉國)했는데, 이를 기념(紀念)하기 위해 영웅성(英雄城)이라 부른다. 현재의 갼체(江孜)는 이미 옛 모습을 회복했으며, 티벳 양탄자 생산지로서도 유명하다. 갼체(江孜)역시 교통요지인데, 라싸(拉薩) 및 시가체(日喀則)에서 야동(亞東)을 갈 때,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지금은 시가체에서 라싸로 바로갈 수 있는 길을 놓고 있는 중이었다) 갼체(江孜)현 내에는 쿰붐사원(백거사/白居寺)및 드종요새(종산포대/宗山砲臺)외에도 농민들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티벳의 다른 마을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다.
아래 글은 친구들 카페에 올라온, 내 친구 설촌 김성재씨의 티벳 관련 글입니다. 그는 전에 '북한에 소보내기 운동'에 참여하는 일로 관련 사진을 사진수첩에 소개한 적이 있는데, 좋은 내용의 글이어서 토만사 회원들이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여기에 옮겨싣습니다.
티벳족은 갑골시대(은나라시대) 강족(羌族)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강(羌)자는 양(羊)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 모습이다. 이들은 그 전부터 유목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그 사람들은 중국의 하-은(상)-주 삼대로부터 기록에 나오는데, 중국과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살았을 것이다. 이후 그들은 중국 세력에 밀려 고원지대까지 올라갔으리라. 이들은 갑골문에 은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나라제사의 희생으로 쓰였던 기록이 자주 나온다. '인신희생'인 것이다.
이들은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렸을 때 조직적으로 참가한다. 우리가 낚시꾼으로 잘 알고 있는 강태공이 바로 이 종족의 후손이다. 姜太公은 은나라를 쳐부순 공으로 주나라 때 제후로 봉하여져 산동의 제나라의 왕(제후)이 된다. 姜은 강족 출신의 성씨란 뜻이다. (과거에는 귀한 성에 女자가 들어갔다.) 산동의 제나라는 토착인은 동이계열이며, 나라를 만든 이는 강족, 이들이 중국민족과 화해하기 힘든 정서를 지니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이 역사에 다시 크게 등장한 것은 몽골 칭기스칸 이후다. 몽골은 유목민으로 라마교를 믿었다. 티벳인은 지배집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티벳의 퐁속은 유목계열의 풍속과 불교의 풍속, 이 둘이 근간을 이루고 있고. 지금 지배적인 풍속은 고급문화인 불교계열이다. 우리 문화에 무속-불교-유교가 혼효(混淆)되어 있으나, 그것을 구별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티벳의 문화를 그렇게 분석해 본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산동 지역은 우리 문화의 또 하나의 파이프라인이었고, 몽골지배 아래 원나라를 통해 티벳의 습속이 고려에 유입되었으므로 우리와 티벳의 관계는 먼 옛날부터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 하겠다. 원각사 13층 탑은 바로 티벳인과의 관계를 비석으로 증명해주는 예에 불과하다.
중국공산당이 장정기간(만리에 이르는 퇴각작전 기간) 중국공산당은 이들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인민을 사랑한다는 중공군은 이들이 피억압민들이므로 당연히 자기네를 지지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티벳인들은 중국인들의 모든 일에 반항하는 습속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중공당국은 장정기간 내내 이들을 포함한 소수민족에게 곤란을 당하였다. (소수민족으로서 중공당국에 협조한 조선족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중국은 이후 소수민족을 철저히 관리하기로 작정하였고, 티벳인의 불행은 그 후에 닥쳐온다.
물 한 모금, 양젖 한 사발만 있으면 모든 걱정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그들,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극히 다른 방식의 삶만으로도 그들은 주목받고 있다. (이상이 김성재씨의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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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백거사) / 시(市) 중심 지역에 위치하고, 15세기에 창건 되었으며, 그 이후로 꾸준히 증축되었다. 티벳의 각 교파(敎派) 에서 어느 정도 동안 모두 점용했었기 때문에 백거사(白居寺)의 건축 양식은 황(黃), 백(白), 홍교파(紅敎派)의 예술특색이 종합되었다. 사찰 내의 대전당(大殿堂)과 백거탑(白居塔)은 참관이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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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Gyantse) 쿰붐 사원 내부 / 대전당(大殿堂) 중앙에 석가모니 불상이 놓여져 있는데, 2만 8천근(斤)이 넘는 황동(黃銅)을 사용했으며 그 위에 다시 도금을 입혔는데, 매우 화려하다. 대전(大殿)내에는 그 밖에도 몇 칸의 작은 불전(佛殿)이 있는데,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과 라마의 좌상(坐像)등을 모두 나무로 만들어 모셔 놓았다. 대전당의 석가모니 불상은 입구에서 촬영비를 지불했음에도 쵤영을 못하게 했다. 대전 안이 좁아서 그 큰 불상을 바로 발밑에서 위로 쳐다보야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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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안 / 사원 주변 외벽을 따라 죽 마니차가 안치된 모습은 여러 다른 사찰에서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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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 입구에 있는 사천왕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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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안 / 좌우 사천왕상의 표정이(특히 눈이) 서로 다르다. 불상 중에서도 눈이 크거나 튀어나와 보이는 것은 인도의 영향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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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백거탑(白居塔) / 십만탑(十萬塔)이라고도 부르며, 1414년에 짓기 시작해서 10년 만에 완성되었는데, 탑이 곧 사찰이며, 티벳의 탑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탑은 총9층인데, 4층까지는 4면8각형이며, 5층부터 탑 정상까지는 원형이다. 면적 은 약 2200㎡이고, 층층이 모두 108개의 전당(殿堂)이 있으며, 전당(殿堂)내에는 벽화와 불상이 있는데, 모두 다 중국, 인도 및 네팔의 특색이 융합된 것이다. 한 전당 안에 모셔진 특이한 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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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백거탑(白居塔) / 전당(殿堂)내의 불상이 10만개가 넘는다고 해서 십만탑 (十萬塔)이라고 하는 것이다. 백거탑(白居塔)의 건축 양식은 다른 사찰과는 좀 다르다. 특히 탑 정상의 부처 눈은 거의 네팔 풍에 가깝지만 탑내의 불상 및 조각은 그렇지가 않다. 한 전당 내에 모셔진 머리와 팔의 갯수가 많은 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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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내 / 작은 방마다 하나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한 전당에 들렀다가 참배를 마치고 나오는 티벳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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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 대전당과 10만개의 불상이 있다는 백거탑. 이 탑(사원) 입구에서 오래 기다려야 했다. 식사라도 하고 오는지 늦게 나타난 젊은 라마승은 일행들에게 사진촬영요금을 일일이 챙겼다. 사진을 안 찍겠다는 사람은 카메라를 뺐다싶이해서 입구에 보관시켰다. 입구 계단을 막 올라서면 석가모니 대불이 모셔진 대전당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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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내 / 느긋한 표정의 두 참배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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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정문 / 문이 닫혀 있는 곳은 정문 뿐만 아니라 내부 각 사원의 입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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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처럼 목덜미에 갈기가 수북하게 나있는 개, 티벳탄 마스티프 / 한 때 천장대에서 지금 독수리가 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사납고 표독스러운 구석이 보이지 않아서 천장과 연관지어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 개는 코를 박은채 잠에 빠져있어서 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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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내 / 역시 입구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참배객 중 한 분. 티벳인들의 열굴에서는 따가운 햇빛에 익은 볼, 특히 광대뼈 부근이 붉게 탄 것을 볼 수 있다. 햇빛이 너무 강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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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내 / 느긋하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참배색 일행.우리도 전에 시골에서는 이런 표정을 만난 적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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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내 / "도대체 이 사람은 지금 뭘하고 있는 거야?" - 참배객을 따라온 한 어린이가 궁금한 표정으로 필름을 갈아끼우고 있는 일행 중의 한 사람(사진작가 이혜선씨)을 쳐다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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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내 / 이곳 역시 경내에 아크 기름 불꽃을 켜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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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내 / 스님들이 단체 수련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사원 내의 한 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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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쿰붐 사원 앞 주차장에서 / 뒤쪽 산능선을 따라 보이는 것이 드죵 요새의 뒷편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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갼체(江孜) 드종 요새 / 갼체(江孜)현 중심 산 상에 위치하며, 14세기 토번왕조(吐蕃王朝)때 이 지방의 왕이 종산(宗山)위에 천연 요새 인 갼체 종(宗)을 세웠다. 19세기에 신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이 쳐들어 왔을 때 갼체 시민들은 극렬하게 저항했지만 갼체(江孜)시민들의 무기는 영국군에 비해 너무 조잡했기 때문에 강약의 차이는 확연했었다. 결국 영국군에 포위되어 최후에는 대부분이 절벽으로 뛰어내려 순국했다. 종산(宗山)위에는 아직도 당시의 포대가 있으며, 성곽의 외관도 잘 보존되어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