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1장에서 ‘악인과 의인을 모두 치겠다.’는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인데
왜 악인과 의인을 함께 치시는가?
먼저 생각할 것은
그 비극을 만들어내는 주체가 하나님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과 폭력, 탐욕과 죄악을 선택하고
그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공동체 전체를 덮칠 때는
악인만 골라 피해가지 않는다.
의인도 고통받고 때로는 함께 죽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것을 막지 않으시는가?
그 이유를 모두 알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은 때로 어떤 뜻과 목적 안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비극을 즉시 막지 않으시고,
그 결과를 그대로 통과하게 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은 아니다.
같은 재난을 겪고 같은 죽음을 맞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판단하셨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공정하심을 믿는다.
지금 이 땅에서 뒤섞여 버린 것처럼 보이는
의인과 악인의 삶과 그 결과를
하나님께서는 결국 정확하게 구별하시고
각각에 합당하게 조처하실 것이다.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이다.
하나님은 때로 그것을 막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인 결론은 아니다.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과 조처가
마지막에 남아 있다.
2.
22장에서는
제사장들의 죄악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본래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백성에게 그 차이를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정반대의 일을 했다.
자신들이 거룩과 속됨을 구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백성들까지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잘못된 것을 행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을 수 있다.
잘못된 것을 옳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거룩을 말하는 종교 지도자라면
그 영향은 훨씬 크다.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룩하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를 생각하면
이 말씀을 오래된 이스라엘의 이야기로만
읽기 어렵다.
신앙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두려워해야 할 책임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를 비판하기 전에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할 경계일 것이다.
3.
24장에서는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장면을 만난다.
에스겔의 아내가 죽자
하나님은 그에게 통상적인 애도의 표현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앞으로 성전과 예루살렘을 잃게 될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표징으로 사용하신다.
마음이 불편했다.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가장 깊은 상실을
다른 사람을 위한 표징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본문은 말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내를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에스겔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모르는 부분을
내 상상으로 채워 넣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니 무조건 옳다.
내가 불편한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고
서둘러 질문을 덮어버리고 싶지도 않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채로 남겨둘 수 있다.
본문이 말하지 않은 것을 만들어 내지 않고,
답을 알게 될 때까지 질문을 품고
하나님 앞에 머무는 것이다.
질문은 멀리 가도 된다.
다만 결론이 증거보다 멀리 가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