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지
이탈리아 폼페이Pompeii는 기원후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멸망한 이탈리아 남부 도시다.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였다. 아무도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는 내다보지 못했다. 라틴어에 화산이라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로마 시민들은 화산의 위험성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폭음과 함께 화산이 폭발했고, 폼페이의 하늘은 어두워졌다. 그리고 18시간 동안 백억 톤에 달하는 화산재와 암석 파편이 뿜어지면서 집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죽어갔다. 폼페이를 죽음으로 몰고 간 베수비오 화산은 17세기와 1944년에도 폭발했다. 다행히 1944년 폭발시에는 나폴리 시민들이 미리 대피했기 때문에, 인명피해가 많지 않았다. 화산폭발이 끝나자 나폴리 시민들은 돌아와서 재건을 시작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폼페이 시는 선사시대의 용암이 흘러나온 자리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불규칙한 형태를 이루었다. 도시 전역에는 수많은 작은 주택들도 있으며, 그 가운데 많은 것이 상점이다. 이곳 민간 주택들이 독보적인 이유는 적어도 400년에 걸친 가정용 주택건축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이 오직 폼페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발굴자들은 고대생활의 모든 면을 가능한 한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 서민의 집들도 부유층의 집들만큼이나 귀중한 자료다. 폼페이는 지중해 전역으로 상품을 수출하던 활발한 항구도시였다. 상인들은 성문과 포럼 근처에서 음식과 숙소를 구했다. 상당히 멋진 식당과 여인숙들이 있었다.
화산폭발이 멈추었을 때 폼페이는 깊이 6~7m의 화산력과 화산재로 덮였다. 폼페이 발굴은 1549년 수로 공사 중에 유적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발굴 작업은 1748년에야 시작되었고, 1763년 그 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이 발견되었고, 광장, 목욕탕, 원형극장, 약국 유적지 등이 발견되었다. 이제 겨우 3분의 2가 발굴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발굴이 완료된다면 로마 미술의 최고걸작으로 평가받는 '큐피드 벽화'와 '춤추는 폰의 동상'등의 수준 높은 문화재들이 더욱 많이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폼페이는 광장과 주요 도로를 중심으로 한 고대 도시의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하수도와 목욕탕, 극장, 레스토랑, 공중화장실까지 갖춰진, 현대의 도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각종 시설이 완전히 구비되어 있다. 게다가 도로 역시 완전히 포장되어 있어 당시의 번영했던 도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돈 많은 상인인 베티의 집Casa dei Vetti은 상당히 부유한 집으로, 입구에 들어서면 풀장이 있고 양쪽으로 금고와 침실이 있다. 파우노의 집Casa di Fauno은 2개의 회랑식 안뜰과 식당이 있는 부자 상인의 집으로, 모자이크화가 걸린 거실도 있다.
폼페이 유적지는 입장하는 문이 여러 곳이다. 오늘은 전에 이곳 여행 때 입장했던 문이 아닌 다른 문으로 입장한다. 큰 소나무 숲을 지나 걸어간 곳에 입장 문이 있었다.
제일 먼저 본 곳은 검투사의 휴식처다. 파란 잔디 정원이 있고 주변은 열주 기둥과 붉은 벽돌 건물로 빙 둘러 있다. 검투사의 숙소였던 곳이다.
다음은 소극장에 갔다. 500명 입장이 가능했던 그 옛날 로마시대의 극장이다. 무대가 있고 반원으로 층층 계단의 객석이 있다. 일행 중 한 남자가 ‘돌아오라 소렌토로’ 가곡을 부르고 우리는 그 옛날 관객처럼 객석에 앉아 관람했다. 지붕도 있었던 훌륭한 극장이다.
소극장에서 나와 수로를 따라 걸었다. 돌길 위에는 징검다리도 있다. 고스란히 보존되어 처연하게도, 물은 말라 흐르지 않지만 돌덩이가 징검다리로 놓여 있다. 수로 가장자리에는 물이 흘러 나가도록 쇠창살로 하수시설도 해 놓았다. 그 옛날의 대단한 수로 시설이다.
수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서 프레스코 벽화를 보았다. 적색 바탕의 벽면에 구불구불 기다란 뱀을 그린 작품이다. 단순하지만 프레스코 벽화로 남은 소중한 유적이다.
다음은 홍등가로 갔다. 집 벽면에 18번지라는 뜻으로 아라비아 숫자 18을 붙여 놓았다. 2층 집이며 방에는 침대격의 시설도 있다.
홍등가 골목을 따라 가서 우물을 만났다. 사각으로 만든 인공 우물이다. 또 다른 우물은 수도관과 수도꼭지가 설치되어 있다. 부자 동네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계속 걸어가서 제우스신전 앞에 다다랐다. 드넓은 광장에는 파란 풀이 돋아 있고 앉아서 휴식하는 사람도 있다. 신전의 기둥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노예들이 물통을 운반하던 부조 조각상도 있다. 이렇게 한 시대를 작품으로 남겨 놓은 그날의 문화가 오늘날에 와서는 큰 빛을 발하고 있으니, 역사의 흔적은 참으로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대중목욕탕이었던 곳에 들어갔다. 둥근 목욕탕에는 지붕에 환기구를 뚫어 놓았다. 그 구멍으로 한줄기 빛이 들어와 역사를 증언한다. 저 빛은 그날에도 동일했을 텐데, 세월은 가고 사람도 가고 소슬한 유적만 덩그러니 남아 역사를 지킨다. 벽면에 세운 샤워시설 같은 석상들과 목욕침대까지 상당히 발달된 목욕 문화였음을 전해준다.
테이블 식의 빠Bar와 곁에 놓인 커다란 술 항아리, 길바닥에 개를 새긴 모자이크 작품, 우람한 쇠창살 대문의 귀족정원, 물 받던 곳, 어처구니없는 집도 보았다.
더욱 놀라운 광경은 이곳 화산 폭발로 매몰되었던 도자기 유물 전시장이다. 술항아리들과 맷돌, 호화로운 개수대가 놓인 부엌, 등등 풍요로웠던 폼페이 도시의 생활 유적이다. 가슴 시리게 하는 유적도 있다. 엎어져 죽은 남자의 시신 석상도 있고 임산부가 누워 있는 시신 석상도 있다. 참혹한 비극의 현장에 대한 재현이다. 쇠창살 문안의 전시장은 그날의 온갖 생활용품이 많이 있다. 곁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다.
제우스 신전의 넓은 광장에서 베수비오 화산과 제우스 신전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이 유적과 함께 명화로 뜬다. 죄스러운 베수비오 화산은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구름 속에 고개를 감추고 있다.
유적지 관람의 끝부분에서 바실리카 재판소에 들렀다. 상도를 어겼을 때 재판하던 곳이다. 입구에 하얀 기둥 문이 서 잇는데 그것은 대리석 기둥이 아니고 겉에만 석고 입힌 것이다. 속에는 벽돌의 작은 기둥이 들어 있다. 이것으로 폼페이 유적의 중요한 곳 일부를 보고 나왔다. 출구의 문은 전에 왔를 때 나온 바로 그 문이다. 몇 년 전에 왔던 추억으로 가슴 훈훈한 순간이다. 울창한 나무들이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객들을 배웅한다. 유적지 바깥 도로를 걸어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갈 때도 우람하게 솟구쳐 오른 나무들이 오랜 역사의 숨결로 줄 서 있다. 언제 슬픈 날이 있었느냐는 듯 아픔을 사르고, 참으로 평화로운 눈망울로 일어선 도시 폼페이를 가슴에 깊이 담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