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전주행
상현은 전윤경을 따라 전주에 내려왔다. 바람도 쏘일 겸 함께 가자고
권하기도 했었지만 더 이상 서울서 견딜 수 없었던 상현은 하동이나
전주에는 가기가 싫었고, 한편 전주에 봉순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일이 혹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도 있어 전윤경과 동행을 한 것이다.
전주는 첫길이 아니었으나 생소하기론 처음 왔을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평지에 가지런한 기와집들은 깔끔한 느낌이며 왠지 모르게 나그네를,
자신을 거부하고 있는 것만 같다.
"상현이."
"응."
"어때, 기분 전환이 되냐?"
금테 안경 속의 갸름한 눈이 얕잡는 것 같은 미소를 뛴다.
"사치스런 소리 하지말어."
"음, 그런 소리 한 줄 알았지."
"알면서 왜 물었누."
"그게 내 취미이거든."
갈색과 흰색이 얽섞인 홈스펀 코트의 깃을 세우며 윤경은 오래 간만에
찾아오는 고향을 아무런 감회 없이 바라본다.
"열등감이 빚은 취미지."
상현이 씹어뱉듯 말했다.
"그건, 이상현 특유의 오해야."
"말재간을 농하는 것도 전윤경의 취미 중 하나라."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매도 자꾸 맞아 버릇하면 덜 아프고 실연도 여러 번 하면 덜 괴롭고
좋은 일도 마찬가지지. 재미가 덜하는 법이야. 자네 그 사치스럽다는
자의식이라는 것도 여러 번 조롱을 당하면은, 그러니까 자네가 말하는 내
취미는 열등감에서 빚어진 게 아니라 박애주의에서 비롯된 거다 그
얘기야."
"동문서답 같은 내용이군."
시시한 소리 별로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상현은 걸으면서 시선을 멀리
던졌다. 전윤경도 상현의 시선 쪽을 바라보며,
"해가 지는군."
"..."
"일찍 들어가도 멋쩍고, 어때? 술 하러 가겠나?"
"그거 좋지."
상현의 음성에 생기가 솟는다.
"흥, 술이 아니라 바로 생면수구먼. 술 좀 안 먹이려고 끌고왔더니
우거지상을 차마 볼 수가 있어야지."
윤경은 자신이 제안해놓고, 화가 난 듯 혀를 찬다.
전라도의 갑부 아들 전윤경은 상현이 일본 유학 당시 사귄 친구다.
상현보다 두 살 위니까 서른하나, 진작부터 동경으로 건너가서 별로
신통치 못한 전문학교를 전전하다가 마지막 중퇴하기론 일본 대학이다.
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특히 영국의 오스카 와일드에게 경도된 때도
있었다. 그러나 글을 쓸 생각은 없는 듯 그러나 상현에겐 문학을 해보라고
자주 권유를 했었다. 서울서 임명빈과 상현이 동인지 비슷한 얄팍한
잡지를 서너 호 냈을 적에 물심 양면 도와준 사람은 전윤경이었다. 그는
다분히 자유 분방하였고 소위 댄디스트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여자도
많이 사귀는 편이지만 무절제하진 않았으며 향리에 있는 가족에겐
관례대로의 아들, 남편,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했다. 이번 3.1운동
때도 참가는 했으되 다른 또래처럼 열광적이진 않았고 또 그는 책상을
치며 일본제국주의를 규탄하고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토론이 벌어질 때
늘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친일파라 지목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으슥한 골목에 들어섰다. 박모의 어스름이 아직 감도는데
기생집 처마밑에는 전등이 켜져 있었다.
"아이구매! 나으리, 워쩐 일이시오? 자아, 싸게 오르시시오."
버선발로 뛰어내리며 중년 기생이 호들갑을 떤다. 전윤경은 마루로
올라서며,
"그간 잘 있었나, 초월이?"
"그럭저럭, 안 죽으니께 나으리를 다시 보는디 참말로 반갑구만이라우.
얘들아, 뭣들 하는 거여! 싸게 나으리 뫼시랑께."
젊은 기생들이 달려나오며 가는 허리를 흔들어대며 인사를 한다.
안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 초월이 새삼스럽게 머리를 매만지며
들어온다.
"가뭄에 단비 만난 것 같지 않는가?"
"예?"
"그간 장사 안 했을 텐데?"
"말심 마시쇼. 손님도 적었지만 우리도 장사 안 혔인께로. 온 나라가
야단인디 기생만 먹고 살겄다고 장사헐 것이요?"
"하기야 기생들도 만세를 많이 불렀지."
"이 나라 백성인께."
"참, 인사하게나. 장차 이모씨보다 유명한 소설을 쓸 사람이야. 게다가
미남이고."
"이모씨가 누구다요?"
"무식하군. 시골 기생은 할 수 없어."
"들은 풍월이 없인께로, 손님, 초월이라 허는디 앞으로 고벡 보아
주시쇼."
젊은 기생 둘이 차례로,
"죽희라 하옵니다."
"매원입니다."
"인사가 끝났으면 술부터 가져오게. 나는 술 마시러 왔지 낯짝 보러 온
게 아니야."
따분하게 앉아 있던 상현이 뇌까린다.
"오매, 섭섭혀서 이를 워쩔거나?"
초월이 상현을 쳐다본다. 목소리는 촌스러웠지만 무르익은 자태, 오뚝한
코와 풍정 있는 입모습, 아름다운 얼굴이다.
"하라는 대로 하는 게야. 나같이 정이 뚝뚝 떨어지는 사내로 알았다간
큰코 다쳐. 넘어져서 뒤통수 깬다니까."
"예, 예, 알아뫼셨어라. 호호호..."
초월이는 나가고 술상은 이내 들어왔다. 몇 순배 술이 돌았다.
짜증스럽고 성깔이 날 듯 위태해 보이던 상현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술을 제한하려면은 방법이 하나 있지. 여자를 좋아하는 거다. 상대가
누구든 연애가 되면 좋지. 그냥 외입질은 안 돼. 절주보다 폭음하기
십상이지."
"흥! 술보다 여자가 덜 독하다 그 말이야?"
"덜 독한 여잘 택하면은, 허허헛..."
"나도 그러길 바래. 허허헛..."
맥빠진 웃음 소리를 낸다.
"어때? 초월이 괜찮은 여자야."
"다 늙어빠진걸."
"늙기는요."
매원이 뾰로통해서 입을 내민다.
"나일 말할 것 같으면 자네보담이야 두서넛 윌 거야. 그러니까 누님같이
포근할 거다. 그거 괜찮은 거라구."
"자네 퇴물을 왜 내가 하누."
"결벽한 이상현, 기생과는 연애 안 된단 얘긴데 그러면 안성맞춤이 있긴
있지. 명희아가씬?"
"취중에도 할 얘기가 따로 있어."
"이거 거룩하게 나오는데? 아무래도 술이 아직 모자라는 모양이야. 어,
그는 그렇고 야, 너희들 좀 나가다오. 눈치도 없이 왜 그 모양이야.
너희들은 나가서 책방 도련님이나 울궈먹구 초월이 들여보내."
"어머나, 저희들은 기생 축에 들지도 않나 부지요. 이애 죽희야,
나가자꾸나."
"응."
그들이 나가자 이내 초월이 들어왔다.
"나으리, 워째 우리 애들을 그리 울린다요? 박정헌 양반이 아니신디,"
하며 웃는다.
"이 친구 비위 맞추노라 그랬네. 이래저래 나야 마음씨 고운 사내
아니냐?"
초월이 깔깔 웃는다.
"웃지만 말구 술 한잔 붓게."
상현이 술잔을 내민다.
"예."
뽀얀 두 손으로 술을 붓는다.
"아까 하다 만 얘긴데, 취중에도 할 얘기가 따로 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책방 도련님같이 왜 이리 보채지?"
"그거 좋은 거야. 책방 도련님 심정이 되어보는 것 말이야. 명빈형이
들으면 날 타살하려 덤빌 테지만 임명희하고 연애해라."
"하하하핫... 이건 또 전윤경 특유의 오해시군. 자아, 술 부어. 고개는
왜 갸웃갸웃이야."
초월에게 술잔을 내민다.
"워째 이야글 들은께로 지는 물 위의 기름겉이 되야뿌맀나비여."
술을 따르며 슬쩍 상현을 쳐다본다.
"허허, 저것 보게? 마음이 급하기로, 옛정이 있는데 그렇게 염치가 없어
쓰겠나?"
"말심 마시시오. 전주 안의 기생치고 전참봉댁 나으리 소실 될 아이는
없을 것이요."
"그건 또 왜?"
상현이 묻는다.
"그건 전참봉댁 나으리께 물어보시시오."
"허허어, 전참봉은 무슨 놈의 전참봉이야? 이 친구 앞에서 사람
기죽이지 말라구. 돈냥 주고 벼슬 하나 샀기로 나하곤 관계없어."
두 사람은 거나하게 술이 취했는데 윤경은 또 명희 얘기를 꺼내어
물고늘어진다.
"아아니, 윤경이 자네, 생각이 달라 이러는 거 아니야? 공연한 생각
말어. 그 여자는 독신주의자야. 지금 나이 몇인지 아나? 스물다섯, 공연히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그따위 말은 그만두는게 좋지."
"매한가지지. 오십 보 백 보, 임역관이 돌아가셔서 좀 안됐네만
명빈형이야 항일 투사의 띠 하나 두르고 나올 건데 뭐. 그게, 돈냥 주고
산 참봉 벼슬보담은 좋은 거라구. 하하핫... 그나저나 한심스럽게 됐다.
시국을 관망하는 공론자로 이미 지탄을 받은 바이지만 이번 일의 의의,
그렇지, 솔직히 말해서 아무런 성과는 없었고 다만 의의가 있었을 뿐, 안
그런가 상현이."
"그런 말은 왜 끄내는 게야. 술맛 떨어지게."
눈살을 찌푸린다.
"자네 마음속에는 시국을 관망하는 공론자에 대한 경고, 그것에 대한
공포가 가득 차 있으니까, 안 그런가?"
"듣기 싫어!"
"듣기 싫게 안 되어야만 자네 주량도 줄 것일세."
"흠, 그럼 나도 애국자에 속하는군."
"각별한 애국자론 볼 수 없지. 어쩌면 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러댄
장날의 장꾼보다 순수하진 못할 게야. 나 역시 그렇지만, 자네하고 나하고
다른 점이라면 자네의 그 공포심은 선비 의식에서 왔다, 흔히들 문사와
선비를 혼동들 하고 있는데, 아주 이질이라 할 순 없으나 같다고도 할 수
없는 건데, 자넨 그 선비 의식에서 탈필해야 해. 독립투사가 되든 서
푼짜리 문사가 되든 말이야. 나 자네한테 설교하는 거 아니야. 설교할
자격이 있어야 말이지. 또 선비 의식 자체가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자네에게 있어 선비 의식이란 체면 같은 그거야. 세상이 불편하지.
어느것을 하든 체면의 노예가 되면 불편한 거야. 자칫 잘못하면 어릿광대
혹은 속물이 되는 게야. 자네 약점을 찔러 미안하이. 자네같은 성품에는
반갑잖은 유산이다, 또 열등감에서 빚은 얘기라 하겠나?'
"..."
"명빈형을 생각할 것도 없고 그놈의 돈키호테 같은 서의돈, 그 위인
생각할 것도 없네. 나하고 서의돈 그 위인과는 앙숙이다마는 하여간 그
사람들 우둔한 대로 혹은 조야한 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 크게 의심 않고서
행동하는 것은 부러워. 감옥에 갇히든 상해로 뛰든 말이야."
"무슨 이야그가, 참말이제 지헌티는 어렵네요잉. 바로 가나 모로 가나
독립이나 되얐이면 쓰겄는디 이래서야 다 틀린 것 아니겠으라우?"
초월이는 시무룩해서 말했다.
"아득하지."
"왜놈 군대만 자꾸 온다는디 조선 사람 잡아죽이려는 거 아니랑가?"
"죽기 싫거든 친일해."
"친일을 워떠크럼 한다요? 진주 논개는 못 될지라도... 사람들이 숱해
죽었는디. 이분에도 동학당이 주동이 됐다는디."
"너도 동학이냐?"
"아니어라우. 허지만 우리 엄니헌티 이약은 많이 들었지라우."
"무슨 얘기."
"우리 엄니도 요상한 사람이요잉. 금매 엄니 소싯적에 전주감영에서
효수된 동학당 장수헌티 반혔인께 요상타 말씨."
"그 장수가 누군데?"
"김개주여라."
"호오?"
"사내 중의 사내, 그런 사내 씨 하나 받았으면 여한이 없겠노라, 우리
엄니 인물 좋았지라."
"짝사랑이었구먼."
"죽고 난 뒤 이야그, 그런께로 감영에서 효수당헌 것을 보았는개비여."
"그렇담, 어째 으시으시한 얘기로군."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상현이, "초월이."
새삼스럽게 부른다.
"예. 말씀하시시오."
"김개주의 아들을 내가 아는데 어미가 못 푼 소원 초월이가
풀으려느냐?"
"예? 오매! 그거 무슨 말씀이라요?"
"김개주의 아들!"
"오오매 김개주의 아들이 있었어라?"
"그럼."
"워찌 아신다요?"
"그건 물을 것 없고 대신 내 청 하나 들어주겠나?"
"말씀하시시오."
"기화하는 기생이 전주에 와 있지?"
"기화, 예, 알지라우."
의아의 빛이 돈다.
"어디 있는지 아나?"
"금매, 우리집 애들 중에 아는 애가 있을 것이요. 헌디 워떤
사이랑가요?"
"어떤 사이? 남남이지. 신세 좀 질까 싶어 찾는 게야."
"거 여기선 명창이라 허는디, 그러고 본께로 나으리 눈이 높소잉."
"생활이 엉망 아닌가?"
"글씨 그건... 지금은 별수없지만 혼자라니 더욱 좋고, 그럼 기화 있는
곳을 아는 애를 불러주게."
"산호주야!"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부르다가 대답이 없자 밖으로 나간다.
"기화라니 누군데?"
"기생이지 누구긴."
"기생이란 것은 이미 아는 일이고."
"좁쌀 양식 싸다니나? 왜 그리 잘아? 얘길 하자면 기니까 관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산호주 이름과는 딴판의 얼굴이 나타난다. 안색이 검고 깡마르고
성깔깨나 있어 뵌다는 것 이외 별다른 데가 없는 스물서넛쯤의 기생이다.
"산호주라 합니다."
태도도 고분고분하지 않다.
"음, 네가 기화 있는 곳을 아느냐?"
"예. 하온데 기화언닐 무슨 일로 만나시렵니까?"
"네가 알 일은 아니야. 그러면," 상현을 일어선다.
"아니, 어딜 가는 게야?"
"자넨 놀다 가게."
"가게?"
"응, 나는 기화 집에 가면 재워줄 거다."
"이 미친 사람 보게나?"
"미치나 걸치나 내겐 그곳이 편할 것 같다. 자아, 산호주? 거 이름 한번
좋군. 가자."
산호주의 손목을 잡는다.
"지금 당장에 말씀입니까?"
"그럼."
"야! 상현이, 자네 날 무시하기야!"
전윤경이 좀체 내는 일이 없는 화를 낸다.
"기화는 다르다구. 애인도 정인도 아니지만 말이야. 기화를 말할 것
같으면 자네하고의 인연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비틀거리며, 그러나 산호주의 손목을 강인하게 끌며 나가버린다. 골목을
빠져나오자, 산호주는, "나으리, 이 손 놓으셔요."
"응." 하며 손목을 놔준다. 그러나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는 바람에
이번엔 산호주 쪽에서 팔을 잡아준다. 밤바람은 차다. 초겨울이건만
폐부를 찌르듯 차갑다. 조각달이 멋쩍게 하늘 한가운데 걸려 있다. 바람
소리 또 바람 소리, 실제보다 상현은 그 바람 소리를 크게 듣는다.
"최서희! 이 계집! 네가 잘났음 얼마나 잘났기, 으음..."
"나으리, 최서희가 누구셔요?"
"뭐? 최서희? 네가 어찌 아느냐? 봉순이가 그러더냐?"
"봉순인 또 누구셔요?"
"으음,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어서 가자!"
"나으리, 기화언닐 좋아하셔요?"
"아암, 좋아하구말구."
"그런데 어째,"
"딴 사내하고 살았느냐 그 말이렷다."
"예."
"우린 친구야. 어, 한테 어디까지 가는 게야?"
"다 와가요."
"산호주야."
"예."
"너도 만세 불렀느냐."
"부르고말굽쇼. 기화언니랑 울면서 따라다녔어요. 집에 와서도 언닌
많이 울었지요."
"어째서? 독립이 될 거라구 울었나?"
"저희들이야 뭐 아나요? 언니가 하도 섧게 울어서,"
"수원서는 향화라는 기생이 잡혀가서 곤욕을 겪은 모양인데 여기선
잡혀간 기생은 없었느냐?"
"여기선 세 차례나 시위가 있었지만 모두 학생들이 주동이 돼서 한
일이니까요. 여학생들이 많이 잡혀가서 단식을 하곤 했지요."
상현은 싹싹하고 착한 듯 선생님처럼 얘기를 하다가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아, 오래간만에 기분 좋다"
"다 왔습니다, 나으리."
"다 온 건 좋은데 그 나으리라는 말 그만둘 수 없겠느냐?"
"그럼 뭐라 하지요?"
"손님, 손님이라 하면 되겠군."
손님, 손님 하고 입속으로 뇌어보다가, "어멈! 어멈!"
"예 나간당께."
아낙이 대문을 열어준다. 아주 작은 기와집이다.
"언니 계시지?"
"기신다요. 손님이랑가?" 미처 뭐라기도 전에, "기화! 나야!" 하며 밤중
이웃 생각도 않고 상현은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여자들을 좌우로 젖히며
대문을 들어선다.
"봉순아,"
이번에는 나직한 음성으로 아주 정답게 부른다. 봉순이 방문을 열고
마루끝까지 걸어나온다.
"산호주야, 고마워. 너 어서 가아." 하며 손짓을 하고 나서 상현을
바라본다. 생소한 표정이다.
나라니까, 봉순이, 아니 기화."
"알아요, 이부사댁 서방님, 오르셔요."
희미하게 웃는다. 상현은 기화의 표정 따위는 살피려 하지 않고 마치
바다에서 뭍으로 기어오르는 사람처럼 허둥지둥 방안으로 들어간다.
자리에 들었던가 방에는 이부자리가 펴져 있었다. 상현은 이부자리 속에
발을 디밀고 앉는다.
"아아 좋구나. 살 것 같다."
"서방님."
"응."
"애기씨 생각이 나서 오셨수?"
"뭐이라구?"
"서희아씨 말입니다."
"미친 소리, 나 기화한테 신세 좀 지려고 왔다."
기화는 마주보고 앉는다.
"형사한테 쫓겨오셨나요?"
"야, 그 위대한 소리 말어. 이상현이 뭐 그리 큰 고기라고 형사나리께서
쫓아오겄냐. 직장도 잃고 밥먹을 곳이 없어 왔으니까 한 달만 먹여주어."
"참, 서방님도, 한 달 계시는 건 상관없지만 신상에 해로우면
어떡하지요?"
"나이 삼십이 다 돼가는데, 네가 내 생활을 몰라 그러는구나.
둘째가라면 서러운 주정뱅이의신상을 생각하게 생겼냐?"
"참말 아닌게아니라 변하셨수. 그럼 술상 차려올릴까요?"
"아니다. 실컷 마시고 왔어. 오늘밤은 너하고 밤이 새도록 얘기하구
싶어."
"그렇게 하세요."
"전주까지 내려올 때는 막연했는데 언제 내가 여길 왔지? 참 이상하지
않느냐?"
"서울서 예까지 오는 게 뭐가 그리 이상하지요? 연해주에서도
오셨는데."
"하긴 어디서 어딘가를 떠나왔을 적엔 언제든지 그렇더군. 올 때 바람
소리가 몹시 심하더구나."
"별로 그렇지도 않았는데요? 맘 탓이 아닐까요?"
"그럴까..."
"저는 가끔 파란 보리밭에 앉은 까마귀들 생각이 나군 한답니다. 열여덟
땐지... 처음 하동읍의 소리꾼 집을 찾아갔을 때예요. 그때 평사리서
읍내로 가는데 파란 보리밭에 까마귀들이 무리 지어서 앉아 있었어요.
평소엔 무심히 보았는데... 서방님의 바람 소리도 연해주 바람 소릴
거예요."
상현은 기화를 우두커니 쳐다본다. 살빛이 곱던 얼굴에 기미가 조금씩
돋아나 있다.
"왜 우리들이 이런 생각을 해서 안 되는지 모르겠다."
"네?"
"밤낮 독립, 항일, 남아의 갈 길, 결사대..."
상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킨다.
"기화."
"네."
"의돈형님 상해로 갔다.'
"그랬어요?"
기화의 음성은 무심상하다. 서의돈에 대해선 늘 수동적이던 기화였으나
단념은 서의돈 쪽에서 먼저 했다. 깨끗하게, 그렇게 말끔할 수가 없이.
헤어진 뒤 기화는 비로소 서의돈을 무서운 사내로 알았고 사내의 이기심을
절감했던 것이다. 역시 서의돈도 관례대로 기생 사회에서 외도를 했을
뿐이었다.
"독립운동하러 가셨군요."
"아아 내가, 그만두자, 그런 얘기는. 그보다 내 얘기 들어주는 거다.
누가 날더러 연애를 해야 절주할 거란 말을 하더군. 그런데 나는 연애말고
소설을 서볼까 싶어. 기화, 소설이 뭔지 아나?"
"날마다 신문에서 나오는 얘기 말이지요."
"응, 그래."
"연추에 계시는 나으리께서 꾸중하실 텐데요."
"허허어, 너도 내게 냉수를 끼얹는군. 글쓰는 걸 잡기같이 생각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아. 해볼 만한 일인데, 하하핫... 실은 나도, 아니 그
얘기도 관두자. 역시 술이구나."
기화는 밖에 나가 아낙에게 술상을 차리라고 이르는 모양이다. 그러고도
마루 끝에 한참을 서 있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상현은 이불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내리깐 눈 아래 그늘은 이 세상 끝에 홀로 선 한
사나이의 짙은 외로움 같다. 시선을 느낀 상현이 얼굴을 든다. 역시
외로운 여자가 외롭지 않은 얼굴을 하고 서 있다. 다시 눈을 내리깐
상현은, "기화는 생활이 되나?"
"네, 그렇저럭 돼요."
"서울 갈 생각은 없고,"
"아무 생각도 안 해봤어요."
두 사람은 새벽녘까지 술을 함께 마시었다. 그리고 상현은 기화 집에
눌러앉았는데 전윤경은 정말 화가 났는지 찾아오지 않았다. 찾아오지 않아
다행이라 상현은 생각했다.
세상일을 듣지도 보지도 않고 상현은 열흘을 보냈다. 술도 반주정도,
대신 그는 기화가 술자리에 불려나가 없을 땐 원고지를 말아대는 게
일과였다. 열흘이 지난 밤에 상현은 안방에서 새나온 신음소리를 들었다.
아니, 소리를 죽이며 우는 소리였다. 가만히 귀를 귀울이며 상현은 울게
내버려둘 작정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상현은 이상한 흥분을 느낀다. 울음
소리, 여자의 울음 소리. 봉순이도 기화도 아닌 그냥 한 여자의 울음
소리가 오관의 피를 급하게 회전시킨다. 상현은 어금니를 깨문다. 그간
여자 관계도 절제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과음한 탓인지
잠자고 있었던 욕구, 욕구가 별안간 아우성치듯 전신에 몰려든다.
상현은 기척을 죽이며 일어선다. 방문을 열고 나간다. 울음 소리가 뚝
끊어진다. 마루 복판에서 상현은 그 뚝 끊어지는 울음 소리와 함께 성욕이
멎는 것을 느낀다. 그의 입에서 한숨이 새나온다.
"기화."
"예."
코먹은 소리다.
"왜 그래?"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무슨 일인데."
"가다가 그런 일이 더러 있어요."
상현은 방문을 열고 들어간다. 기화는 엎드린 채다. 옥색 저고리에
자줏빛 감댕기가 눈에 아픈 것 같다. 부드러운 어깨, 가녀린 허리, 저고리
도련이 올라가서 하얀 치마허리가 보인다.
"욕을 들었구나."
"욕만이면요, 뺨을 맞았어요. 취하지도 않고서,"
엎드린 채 대답한다. 상현은 기화를 안아 일으킨다.
"기생 처지 그러려니 생각할 것을, 오늘밤은 유난히 서럽네요."
서럽네요, 그 말에서 멎었던 울음이 다시 이어진다. 서럽게 흐느낀다.
따스한 몸의 흔들림이 상현에게 전해온다. 울음 소리, 봉순이도 기화도
아닌 그냥 여자의 울음 소리, 상현의 몸속에선 다시 피가 급하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왜 우는 거야! 밤중에 계집 울음은 재수가 없어!"
상현은 더럭 소리를 지른다. 그 말에 기화는 더 운다.
"기화!"
상현은 기화를 쓰러뜨리고 전등을 끈다. 전등 꺼지는 소리에 기화는
벌떡 일어나 앉는다.
"바보같이, 바보같이, 이 바보야!"
상현은 기화의 가슴을 짓누른다. 여태껏 어느 여자에게서도 체험한 일이
없는 환희에 상현은 전신을 떤다.
"바보같이 바보,"
헛소리를 지르듯
다음 카페의 ie10 이하 브라우저 지원이 종료됩니다. 원활한 카페 이용을 위해 사용 중인 브라우저를 업데이트 해주세요.
다시보지않기
Daum
|
카페
|
테이블
|
메일
|
즐겨찾는 카페
로그인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마음을 채우는 쉼터
브론즈 (공개)
카페지기
부재중
회원수
985
방문수
4
카페앱수
3
카페 전체 메뉴
▲
검색
카페 게시글
목록
이전글
다음글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
[박경리]의토지
[박경리] 토지(3부/1권/1편) 2장 전주행
黎明 김형수
추천 0
조회 58
13.03.15 22:29
댓글
0
북마크
번역하기
공유하기
기능 더보기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댓글
0
추천해요
0
스크랩
0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
선택됨
옵션 더 보기
댓글내용
댓글 작성자
검색하기
연관검색어
환
율
환
자
환
기
재로딩
최신목록
글쓰기
답글
수정
삭제
스팸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