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초순 한국의 북한전문가들이 8박9일 동안 압록강 서쪽 끝 단동(丹東)에서 두만강 동쪽 끝 방천(防川)까지 북·중 국경 1376.5㎞, 3000리가 넘는 거리를 답사하면서 강 건너 북한 땅의 사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답사는 북한 전문가들이 그 동안 문헌자료와 현장경험을 통해서 축적해온 지식과 눈앞의 현실을 대조하고 검증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답사단의 분석과 평가는 정보와 자료로서 가치가 적지 않습니다. <프레시안>은 답사단의 일원이었던 황재옥 박사가 이번 현장답사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들을 정리한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둘째날-오전]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과 수풍발전소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과 소련 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사실(史實)
둘째 날 아침 우리는 단둥(丹東)을 떠나 허커우(河口)에서 압록강의 두 번째 단교와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을 보고 수풍댐까지 갔다. 이 지역은 옌볜에 비해 기후조건이 좋아 사과와 복숭아 등의 과일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단둥을 떠나 수풍댐 가는 길옆에는 과수원들이 펼쳐져 있었고, 재배한 과일들을 내다 파는 좌판들이 도로변 여러 군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 쪽 기후조건이 이렇다면, 강 건너 반대편인 북한의 평안북도 의주와 창성, 그리고 자강도 쪽도 살기에 그리 나쁘지 않은 기후조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국전쟁 때 끊어진 압록강 위의 두 번째 단교가 허커우(河口)라는 곳에 있다. 허커우 단교도 단둥의 단교처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졌다. 1950년 10월 이후 중국인민지원군 부대들이 북한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단둥, 허커우, 지안(集安)이었다고 한다. 허커우 다리가 끊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허커우 단교 위에는 한국전쟁 참전 지원군 지휘관들의 흉상이 도열해 있었다. 허커우 단교를 둘러보고 나서 우리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 ⓒ황재옥
마오안잉의 동상은 단둥 항미원조기념관에 있는 펑더화이(彭德懷) 동상만큼 잘 조성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오안잉 동상도 북중관계와 관련해 의미 있는 동상임에 틀림없었다. 이 동상은 2010년 참전 60주년을 기념해 세워졌다고 한다. 중국의 향후 동북아 전략과 관련해 중국이 북한을 어떻게 활용하려는 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정치적 상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상의 하단 뒷면에는 마오안잉(1922~1950)의 스토리가 적혀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공산당 중앙과 마오쩌둥 주석이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 차원에서 북한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이 맨 먼저 중국인민지원군에 등록을 했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인민지원군 제1호가 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는 설명도 함께 있었다. 마오안잉은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 지원군 사령부에서 러시아 통역을 맡으면서 사령관(펑더화이)의 비서로 일하다가, 참전한 지 약 한 달 만인 1950년 11월 25일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전사했다. 마오안잉은 아버지인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북한 땅에 묻혔다.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묘에 마오안잉은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묻혀 있다.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차원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28세의 젊은 나이로 마오안잉은 전사했다. 일행 중 한 분이, 마오쩌둥은 며느리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마오안잉을 북한 땅에 묻으라고 명령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나는 마오쩌둥이 왜 그랬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결국 마오쩌둥의 심모원려(深謀遠慮)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즉 마오쩌둥이 깊이 궁리를 하고 멀리까지 내다 보았다는 것이다. 중국 최고지도자의 장남이 위기에 처한 북한을 도우러 왔다가 전사했다. 그리고 북한 땅에 묻혀있다. 북한은 중국에 크게 빚을 진 거다. 중국 사람들은 그 일로 북한에 생색을 낼 수도 있고, 목숨 받쳐 희생적으로 북한을 도왔으니, 북중관계는 특별하다고. 중국의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하다.
미국 대통령 아들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한국 땅에 묻혀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이 미국을 대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우방끼리도 도리는 있는 법이다. 중국이 조중우의를 강조하는 배경에 이런 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마오안잉 동상을 직접 보고 더욱 실감하였다.
▲ 마오안잉의 동상에 쓰인 약력. ⓒ황재옥
한국전쟁은 북한이 소련의 후원을 보장받고 시작한 전쟁이라는 것은 소련의 당시 외교문서를 통해서 이미 오래 전에 확인되었다. 그러나 필자는 2010년 중국 당국이 세운 마오안잉의 동상에서 소련 공군의 한국전쟁 참전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행 중 한 분이 한국전쟁 초기 소련의 공군력 지원문제를 둘러싼 중국과 소련사이의 막후 외교협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개시 후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돌파하여(이날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 북진하기 시작하였다. 이 날 바로 중국은 내부적으로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했다. 한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미군이 동북3성까지 위협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일, 밤을 새워가며 격론 끝에 10월 2일 '중국인민지원군'의 이름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은 참전 결정 사실을 스탈린에게 통보했다. 그리고 10월 8일 마오쩌둥은 '중국인민지원군 편성에 관한 명령'을 내렸다. 같은 날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스탈린에게 공군 지원을 간청하기 위해 그루지아의 휴양지 아브하지아로 떠났다.
그런데 10월 19일까지 중국은 행동을 개시하지 못했다. 참전에 필요한 인원 차출이나 병참 준비관계로 행동개시가 늦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미군의 막강한 공군력을 견제해줄 만한 화력이 중국에는 없는 반면, 소련이 지원 약속을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센터가 공개한 저우언라이문고(周恩來文稿)에 따르면, 저우언라이가 10월 14일에도 스탈린에게 소련 폭격기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때까지 소련은 중국의 속을 태우면서 답을 안 주었다. 그러다가 어렵사리 스탈린으로부터 공군 지원 승낙이 떨어지자 10월 19일 비로소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펑더화이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널 때까지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북한에 한국전쟁 참전 소련 공군 묘역이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중국 당국이 마오안잉 동상에다 마오안잉이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폭사했다고 새겨 놓았으니 이것보다 더 확실한 소련 공군의 한국전쟁 직접 참전 증거가 어디 있을까?
경위야 어찌 되었건, 단둥의 펑더화이 동상과 허커우의 마오안잉 동상이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1~2년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졌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중국이 G3, G2 국가로 급부상하는 가운데 북중간 경제협력이 재개되는 때에 만들어졌다. 이것은 항미원조-조중혈맹을 강조하면서 중국이 북중관계를 주도적으로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풍댐 주변 풍광과 강 남북의 사는 모습의 차이
허커우 단교와 마오안잉 동상을 보고난 뒤 우리는 선착장으로 가서 수풍댐 근처까지 운행하는 배를 탔다. 그런데 오늘도 날씨가 흐리고 압록강 물위로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어 북한 쪽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을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선착장 매표소 근처 안내판에 뱃길 주변 중국과 북한 지역의 약도가 있었다. 허커우 단교와 마오안잉 동상이 서있는 곳은 칭수이(淸水)라는 곳이고, 건너편 북한 지명은 청성군(淸城郡)이다. 중국 쪽도 북한 쪽도 모두 맑을 청(淸)자를 넣어 지명을 지었다. 이걸 보면 옛날부터 이곳의 풍광이 좋았던 모양이다. 약도에는 선착장 건너편으로 김일성 고거(金日成 故居) 표시가 있었다. 아마도 그 곳에 한 때 김일성 별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만큼 풍광이 수려한 관광지여서 그런지 중국인 관광객들이 상당히 많았다. 수풍발전소 근처까지 가는 관광유람선도 여러 대 있었다. 우리는 유람선으로 이동하면서, 버스는 수풍댐 바로 밑 동네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배를 타고 수풍댐을 향해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얼마나 물이 많았으면 옛날부터 수풍(水豊)이라고 했을까? 물이 많은 곳이어서 그런지 물안개 속에서도 강물의 색은 초록빛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압록강(鴨綠江)의 이름은 청둥오리(鴨)의 초록(綠) 깃털처럼 물색이 아름답다 해서 당나라 때부터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강 중류라서 강폭은 제법 넓었다. 압록강에서 조정 연습을 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아련하게 들어 왔다.
물안개 속을 뚫고 한참을 가니 드디어 북한 마을이 나타났다. 텃밭과 집, 공장 등 일상적인 주민들의 생활환경이었다. 공장으로 보이는 건물의 지붕은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 노후하였고, 건물 벽이 얼마나 낡았던지 비가 오면 물이 샐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우리를 보고 오른 손을 머리위로 높이 들어 올리는 북한식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산비탈에 방목한 염소를 감독하면서 양산을 쓴 여성도 보였다. 협동농장의 염소들이라고 한다. '피부보호를 위해 빛을 가리는' 양산을 쓴 여성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약간 놀랐다. 북한의 사는 형편에 비해서 예상 밖의 여유와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점은 1998년 8월, 내 눈에 비쳤던 북한주민들에 비해 이번에 본 북한 주민들은 먼발치에서나마 활기차다는 것이었다. 체격도 극히 마른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냥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강가를 바라보는 북한주민들이 많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놀이하거나 고기를 잡는 사람들은 있어도, 그냥 멍하게 앉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위 '고난의 행군' 끝자락이었던 1998년 8월에 국경지역에서 봤던 같은 북한 사람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가슴 찡하기도 했었는데, 이번 답사 기간에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 압록강에서 본 북한 주민. ⓒ황재옥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중국과 북한의 산하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접경지역 북한의 산에는 나무가 없는 대신 뙈기밭이 많았다. 뙈기밭은 일부 경작되거나 아예 방치된 곳도 있었다. 식량사정이 좋아진 것인지 아니면 접경지역에서만이라도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뙈기밭이 많이 경작되고 있던 이전의 방문 때와는 좀 달랐다. 그리고 수풍댐 주변에 설치된 북한과 중국의 송전탑도 모습에서 차이가 났다. 중국 쪽 송전탑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에펠탑같이 늘씬한 철탑인데 반해, 북한 쪽 송전탑은 T자 모양으로 키가 작고 아담한 모습이었다.
이번 답사에서 가장 특별한 '신풍경'은 자전거를 탄 북한주민이 많이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3~4대가 지나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탄 여성의 모습도 보였다. 자전거도 그리 낡아 보이지 않았다. 북한주민의 생활 형편상 자전거 구입 가격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였지만, 일행 중에 그것까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철로 공사를 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도 보였다.
수풍댐이 가까워지면서 북한 쪽 산야에 세워진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 만세"라는 구호가 눈에 들어 왔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은 동지 만세"라는 구호도 눈에 띄었다. 나는 '은'이라는 글자를 망원경으로 뚫어지게 살펴보았다. 혹시 김정일의 '일'자를 지우고 그 위에 '은'자를 새로 쓴 것은 아닌지 궁금하였다. 북한의 김일성 일가에는 이름 가운데 '정'자가 많이 들어간다. 김정숙, 김정일, 김정은. 이들 이름 가운데 '정'자가 잘 쓰이는 것은 혹시 북한 주민들이 익숙하게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항렬처럼 쓴 것은 아닐까하고 추측을 해 보았다.
▲ 북한 쪽 산야에 세워진 문구들. ⓒ황재옥
유람선을 타고 40분 정도 올라가니 드디어 수풍댐이 나타났다. 압록강에 가장 먼저 세워진 수풍발전소는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배후기지로서 조선을 공업화하면서 1937~41년에 걸쳐 건설되었다. 수풍댐 근처는 일제 때 일본의 병참 지역이었다고 한다. 압록강 수계의 발전소 중 최대 규모이고 시설 용량 70만kw로 당시에는 동양 최대였다. 댐 색깔 때문인지 노후해 보이기는 했으나 당당함은 그 옛날 동양 최대임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였다. 날씨가 흐려서 더 당당한 수풍댐의 위용을 사진에 담아 올 수는 없었으나, 초등학교 때 사회생활 시간에 말로만 들었던 수풍댐을 지척에서 바라보니 감개무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