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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주름상자에 수십 개의 버튼이 달린 반도네온은 탱고에서 빠질 수 없는 악기다. 얼핏 보기에는 아코디언과 비슷해 보이지만, 19세기 초 독일에서 교회 오르간 대용으로 만들어져 19세기 후반 아르헨티나에 전해진 뒤 탱고음악의 중심 악기로 자리를 잡으면서 ‘탱고의 영혼’으로 불리게 됐다.
포털사이트에서 ‘반도네온’을 검색하면 짝꿍처럼 ‘고상지’라는 이름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2011년 MBC 〈무한도전〉 ‘서해안고속도로 가요제’에서 정형돈, 정재형 팀 무대, 2012년 ‘김동률 전국 투어콘서트’ 인터미션 무대에 서면서 포털사이트 검색어에도 오르내렸던 반도네온 연주자다. 가수 정재형, 윤상, 하림 등의 콘서트에서 우리나라 팬들에게 얼굴을 알린 고상지씨는 첼리스트 송영훈 등 많은 뮤지션들의 무대에 협연자로 서는 한편, 고상지밴드를 구성해 다양한 무대에서 탱고를 알려나가고 있다.
과학고・카이스트에 진학한 ‘과학도’였던 그가 반도네온, 그리고 탱고에 빠져든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어릴 때부터 닌텐도 롤플레잉 게임에 푹 빠져 있었던 바람에 유년시절과 사춘기의 그를 사로잡았던 음악은 강렬한 전투음악, 던전음악이었다. 카이스트에 입학했더니 1년 위 선배들이 뮤지션 페퍼톤스였다. 과학적 재능뿐 아니라 음악적 재능도 뛰어난 사람이 많았던 학교 분위기에서 고상지 역시 음악 동아리에 들어가 일렉베이스와 기타를 배웠다.
“연주도 열심히 했지만 음악도 정말 많이 들었어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하다시피 했는데, 탱고가 정말 와 닿더라고요. 보통 탱고 하면 유혹적이고 여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뜨겁고 강렬합니다. 마침 아르헨티나에 사는 이모를 통해 반도네온을 구할 수 있었고, 독학으로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뭔가에 꽂히면 앞뒤 가리지 않고 지르는 성격. 영화 〈엽문〉에 나오는 배우 견자단에 반해 영춘권을 배우기도 했다. 반도네온을 손에 넣은 그는 혼자서 인터넷 동영상을 찾아보면서 음계를 외웠고, 마음을 휘어잡는 반도네온을 마음껏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에 카이스트에서의 학업을 중단하고 본격적인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했다.
“앞날을 길게 계획하기보다 순간순간의 삶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토목공학, 산업디자인 등을 배웠지만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아 2학년 때 그만두었습니다.”
카이스트와 충남대 사잇길에서 거리공연을 하던 그에게 뜻하지 않았던 운명이 다가왔다. 그의 연주를 우연히 들은 한 일본인이 일본의 최정상급 반도네온 연주자인 고마쓰 료타에게 “한국에서 반도네온을 연주하며 혼자 애쓰는 여학생이 있으니 ‘힘내라’는 메일을 보내주면 좋겠다”는 사연을 보낸 것. 놀랍게도 고마쓰 료타로부터 “열심히 하세요. 힘내세요”라는 메일을 받은 그는 고마쓰 료타에게 자신의 반도네온 연주 동영상을 보내면서 “레슨을 받고 싶다”고 요청했고, 3개월마다 일본을 찾아가 2주간씩 머무르면서 레슨을 받게 되었다.
“몰랐기 때문에 당돌하고 용감했던 것 같아요. 제가 연주를 웬만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에 가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선생님뿐 아니라 저보다 더 어린 친구들도 너무나 연주를 잘해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멋진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황홀했습니다.”
그렇게 3년을 보낸 뒤, 2009년 아르헨티나로 유학을 가기에 이르렀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에밀리오발카르세 오케스트라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1920~50년대 탱고 전성기의 원본 악보에 충실하게 연주하도록 가르친다. 당시 작곡가들은 악보를 정식으로 출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생존 연주자들이 보관해온 악보들을 수소문해가며 오리지널 탱고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곳. 그는 이 학교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접한 후 아르헨티나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한다.
“아르헨티나의 탱고음악 작곡자이자 반도네온 연주자인 아스토르 피아소야(피아졸라)는 반도네온을 ‘악마의 악기’라고 불렀다고 해요. 다루기가 어려워서죠. 양 옆에 붙은 단추형 건반을 눌러 소리를 내는데, 건반이 음계에 맞게 순차적으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불규칙적으로 배열돼 있어요. 같은 건반을 누르더라도 주름 통을 수축할 때와 이완할 때 나는 소리가 달라요. 다른 주름악기들이 세로와 가로 비율이 많이 늘어나지 않아 안정감이 있는 데 비해, 반도네온은 많이 늘어나기 때문에 주름을 안정감 있게 다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흔들리면 소리를 일정하게 낼 수 없고 리드미컬한 음을 표현하기 힘들어서 주름을 안정감 있게 다루는 걸 제일 처음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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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반도네온은 악기 소리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너무나 많다. 손만 쓰는 게 아니라 발도 쓰고 무릎, 허벅지도 써야 한다. 그는 지금도 무릎에 7kg 무게의 반도네온을 얹고 길게는 하루 7시간씩 연습을 한다. 그가 그리는 자신의 모습은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반도네온 연주자라기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취가 깃든 탱고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뮤지션들 사이에서 연습벌레라 불린다. 반도네온을 시작한 지 7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스케줄이 빡빡하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를 찾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매년 미션 곡이 있어요. 무대에서 실수하는 건 너무 싫죠. 카이스트를 그만둘 때는 큰 용기가 필요 없었는데, 무대에서는 정말 용기가 필요해요.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프레이즈를 성공하면 좋지만, 실패하면 끝이거든요. 어떤 곡을 연주할 때 자신 없이 평범한 연주를 할 수도 있고, 용기를 내어 도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도전하다 보면 멋진 연주가 될 수도 있고, 실수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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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래도 잘했어’라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연주의 횟수를 늘려가는 게 제 목표입니다.”
그가 음악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리듬감이다.
“제가 리듬감이 많이 부족해요. 리듬감을 익히기 위해 훈련을 계속하고 있어요. 합주를 녹음해서 얼마나 제가 헤매는지 인지하는 게 중요해요. 원래는 녹음을 하지 않았는데, 방송을 하면서 제가 그루브를 해치는 행동을 한다는 걸 알고 녹음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것, 리듬감을 망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저의 도전과제예요.”
그는 반도네온을 가지고 좋아하는 뮤지션들과 함께 연주할 수 있었던 경험, 탱고음악을 작곡하고 편곡할 때 행복하다고 한다. 꾸준히 작곡을 해온 그에게 음반 계획에 대해 물었다.
“누가 재촉해주면 될 것 같은데. 곡은 다 나와서 녹음만 하면 되는데, 자꾸 미뤄지네요. 틈이 나면 녹음해야 하는데 쉬니까요.(웃음)”
피아노에도 재능이 있는 그는 얼마 전 〈서커스 : 워치마이쇼〉라는 예술 프로젝트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엔딩 크레딧엔 그가 작곡하고 연주한 피아노곡이 실렸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항상 계획적으로 살았어요. ‘과학고를 가겠다’ ‘카이스트를 가겠다’ 같은 계획에다 다이어트 계획까지 세워놓고 치밀하게 실천했었죠. 물론 이루어진 것도 있지만 다 지킨 것은 아니에요. 음악으로 진로를 바꾼 후로는 계획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죠. 얼마만큼 좋은 곡을 쓰고 연주를 잘하느냐는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요. 탱고의 다양한 얼굴, 그리고 생생한 모습을 더 많이 보여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