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쿠스’ |
‘20세기 들어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한 17세기 초 화가. 예술의 본고장 이탈리아로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버금가는 인물로 재평가되는 인물. 매매시장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지만 유럽 곳곳에 미발굴 명화가 숨겨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가.’
1571년생의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Caravaggio)에 관한 수식어들이다. 한국인에게는 비교적 생소하지만 21세기 들어 전 세계 미술관으로부터 특별하게 취급되는 화가이다. 카라바조 작품 소장 여부가 세계 최고의 미술관이냐 아니냐를 결정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피카소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과는 격이 다르다. 르누아르나 고흐의 그림을 보기 위해 전 세계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드물다. 다빈치와 카라바조 그림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애 반드시 가야 할 (Must Go) 미술관’ 리스트에 오를 수 있다.
카라바조의 명성이 전 세계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2010년 이탈리아 로마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카라바조 사후(死後) 400주년을 기념해 5개월간 열렸다. 카라바조는 1610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로마 전시회에 선보인 작품은 전부 24점이다. 전부 유화다. 카라바조가 남긴 80여점의 그림 가운데 대표적 작품들만 엄선해서 전시했다.
당시 전시회는 이탈리아 대통령 관저(Palazzo del Quirinale) 바로 옆에 붙은 전시관인 스크데리에 델 퀴리날레(Scuderie del Quirinale)에서 열렸다. 전 세계 미술팬이 모인 것은 물론이다. 당시 필자가 찾았을 때 3주일 후까지 티켓이 100% 매진된 상태였다. 암표라도 사서 들어가려 했지만 가격이 정가의 10배까지 치솟아 있었다. 여행 일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라바조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잘 몰랐기에 관람을 포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후회된다.
워싱턴서도 재조명 강연
로마 전시회에서의 엄청난 열풍은 유럽 내 전문가나 미술 애호가 수준에 머물러 있던 카라바조의 그림에 대한 관심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된다. 카라바조 관련 비평서나 전기도 전시회를 전후해 속속 등장했다. 지난 5월 20일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카라바조 성과 속의 인생(A Life Sacred and Profane)’ 강연 역시 전 세계에 불고 있는 카라바조 열풍을 확인할 수 있는 본보기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기독교사를 전공한 예술평론가 앤드루 딕슨(Andrew G Dixon)이 강사였다. 그는 영국 BBC방송국에서 예술 분야를 담당하는 유럽 최고의 문화평론가이기도 하다. 2009년 런던에서 출간된 카라바조 책과 관련된 강연이다. 미술관 1층의 강의실은 사람들로 터졌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이 외국인의 책에 관한 강연을 마련하고 이어 책 사인회까지 준비한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40달러나 하는 책 판매장까지 특별히 마련해 줬다. 그 같은 ‘특권’을 미국 국립박물관에서 본 적이 없다. 영국인 문화평론가에 약한 미국의 ‘세심한 배려’라 볼 수도 있겠지만, 카라바조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가장 큰 이유이다.
카라바조가 전 세계 미술 무대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카라바조만이 창조해낼 수 있는 ‘영혼이 담긴 그림’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카라바조 그림은 한눈에 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빠져든다. 영혼이 살아있는 그림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최고의 본보기다. 영혼을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원인은 ‘키아로스큐로(Chiaroscuro)’라 불리는 화법(畵法)에서 찾을 수 있다. 키아로스큐로는 ‘빛과 어둠’이란 뜻의 이탈리아어이다.
카라바조는 빛의 화가이다. 흔히들 빛의 화가를 바로크미술의 대표주자인 렘브란트(Rembrandt)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와 같은 네덜란드 화가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잘못된 것이다. 원형은 카라바조에 있다.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는 카라바조를 모방한 화가들이다.
인위적인 빛 최초로 사용
종래 그림에서 빛은 이른바 하늘에서 비쳐지는 ‘성스러운 영감’으로만 해석됐다. 다빈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빛은 그냥 하늘이나 배경에서 만들어지는 수동적 의미로 그려진다. 자연의 빛이 아닌 인위적으로 빛을 만들어낸 뒤 명암을 극명하게 다루는 그림은 카라바조가 처음이다. 카라바조는 의도적으로 램프를 얼굴에 비춘 뒤 인간의 성과 속이 극명하게 나눠지는 순간을 포착했다. 간단한 듯 보이지만 종교가 지배하던 17세기 초 당시 기준으로 보자면 혁명적 발상이다. 놀라운 것은 빛의 방향을 한쪽으로 고정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각도에서 다발적으로 만들어낸다. 명암의 방향을 다변화한다는 말이다. 빛을 한쪽 방향으로만 모아서 강조하는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보다 훨씬 앞선 그림이다.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의 탄생연도는 각각 1606년과 1632년이다. 렘브란트는 카라바조가 숨지기 4년 전, 페르메이르는 카라바조가 숨지고 22년 뒤에 태어난 셈이다. 17세기 당시 유럽의 환경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다. 같은 거리일 경우 바다를 통한 이동이 육지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했다. 유럽 대륙 북쪽에 있는 네덜란드는 바다를 통해 이탈리아에 접해 있다.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을 통해 신교로 무장한 곳이다. 가톨릭이 지배하는 이탈리아와 달리 종교적 제약이 없는 자유분방한 나라였다. 이탈리아 문화가 네덜란드인에게 직수입된다. 인공적인 빛을 이용한 카라바조의 그림을 통해 신교도의 나라 네덜란드는 유럽 문화의 꽃으로 변신한다. 카라바조가 없었다면 렘브란트와 페르메이르도 탄생할 수 없었다.
카라바조 열풍의 배경으로, 그가 보여준 파란만장한 삶의 흔적도 빼놓을 수 없다. 카라바조는 살인자이다. 1606년 돈을 걸고 로마 테니스코트에서 경기를 하다가 말싸움 끝에 칼로 상대를 살해한다. 35살 때이다. 살인사건 후 곧바로 로마를 떠나 시칠리아 아래의 섬 말타(Malta)로 도망간다. 말타는 당시 이슬람 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기독교의 최전선이다. 한국의 휴전선 같은 곳으로 카라바조가 숨어지낼 수 있는 치외법권 구역이었다.
유럽 미술계 달군 살인사건
카라바조 살인사건은 유럽 미술계를 달구는 흥미로운 소재 중 하나이다. 왜 살인이 일어났는지, 어떤 배경하에서 벌어졌는지에 관한 ‘설(說)’이 무성하다. 이탈리아는 기록의 나라이다. 카라바조 살인사건과 관련된 각종 문서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되고 있다. 창녀이던 여자친구를 둘러싼 살인사건이라는 얘기와, 엄청난 돈을 건 테니스 경기 도중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이라는 설로 나눠진다.
살인사건 이후 궐석 재판에서 카라바조는 사형이 언도된다. 도망간 말타에서도 그림 솜씨를 발휘해 귀족과 권력자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듯 성화도 열심히 그린다. 그러나 타고난 잔인한 성격은 사라지지 않는다. 술을 마시다 시비가 붙어 칼로 상대를 찌른다. 또다시 쫓기는 신세가 된다. 말타를 탈출해 나폴리로 도망간다. 나폴리에서도 술을 마시고 싸움을 벌인다. 숨어서 기다리다가 칼로 찌른 뒤 시칠리아로 도망간다.
1년 뒤인 1610년 배를 타고 토스카나의 몬테 아르젠타리오 항구에 도착한다. 카라바조는 함께 온 제자를 통해 정성 들여 그린 성화를 교황에게 전달한다. 살인죄에 대한 교황의 사면권을 얻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제자는 로마 교황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교황은 그 어떤 대답도 주지 않았다. 기약 없이 기다리던 도중 열병에 걸려 숨진다. 39살이다.
카라바조는 성화 속 주인공들을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자신의 애인인 창녀로 채워 넣었다. 성모 마리아의 모습은 자신이 아끼던 창녀의 얼굴이다. 카라바조 열풍의 세 번째 이유이다.
역사적으로 카라바조 이전 성화는 특별한 모델이 없다. 성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인물을 상상으로 그려넣는 것이 기존의 성화 속 인물들이다. 참고하는 모델이 있기는 하지만 귀족집 처녀나 종교적으로 완벽한 인물을 몰래 끼워넣는 식이었다. 카라바조는 다르다. 아예 창녀를 모델로 해서 성화 속에 그려넣은 뒤 공공연히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당시 그림 발주자의 대부분은 종교지도자이거나 귀족들이다. 창녀의 얼굴이 마리아로 변신해 있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사악한 도발’이라 볼 수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종교재판에 끌려나가 화형에 처해질 행위였지만 카라바조는 대담하게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온 세상에 떠벌린다. 그림에 관한한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부자화가
카라바조는 밀라노 출신이다. 그림 공부를 한 뒤 21살 때인 1592년 로마로 거처를 옮긴다. 로마는 당시 교회와 귀족을 위한 건축붐에 들어서 있었다. 르네상스가 끝나고 바로크시대로 접어들던 시기이다. 바로크 문화는 종교개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마틴 루터는 95개에 달하는 신학적 논점들에 대한 답을 로마 가톨릭에 요구한다. 프로테스탄트라 불리는 신교도의 종교개혁이 시작된다. 가톨릭교회의 비리와 모순이 유럽 전체에 폭로된다.
바로크문화는 당시 가톨릭 세력이 주도한 문화운동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이성적·논리적 요구에 맞서 신학적·예술적 대응에 나선다. 성령을 느끼고 신의 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성화나 장식물이 유럽 전역에 보급된다. 당시 성지(聖地) 로마는 신교도를 압도하기 위해 엄청나게 큰 교회와 건축물 건설에 들어간다. 건물 내부를 채울 그림과 장식물에 대한 수요도 급증한다. 카라바조가 로마로 옮긴 이유는 바로 예술에 대한 ‘특수(特需)’를 정확히 읽었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을 기반으로 한 카라바조의 그림은 곧바로 로마 최고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 기존의 성화 양식인 이른바 ‘마니에리슴(Mannerism)’은 이미 식상해진 상태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사와 고통받는 죄인의 모습이 주류인 마니에리슴 성화는 구시대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빛과 어둠을 통한 순간 포착과,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된 성화는 로마 시민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고향을 떠나 로마에 오자마자 성공한다. 생전에 금전적으로 풍족했던 화가는, 과거는 물론 지금도 찾기 어렵다. 400여년 전 로마의 카라바조는 돈 때문에 고생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당대 최고의 부자화가이기도 했다. 로마에 온 지 8년 만인 1600년 마침내 로마 추기경으로부터 그림을 의뢰받는, 최고의 귄위를 가진 화가가 된다. 29살 때이다.
양성애자로 문란한 성생활
1600년대 초 로마는 신도시 건축붐과 함께 ‘세기말적 현상’이 지배했다. 바티칸 주변을 제외하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유곽(遊廓)지대’였다고 보면 된다. 성지 순례자, 신교도와 싸운 용병, 예술가, 가톨릭 원리주의자들로 도시 전체가 부산했다. 성과 속이 공존하는 도시, 로마의 밤은 유럽 전역에서 몰려온 창녀들로 들끓었다. 카라바조는 성(聖)으로서의 그림을 그린 뒤, 속(俗)으로서의 창녀들과의 욕망을 ‘마음껏’ 발산했다.
카라바조는 남녀 불문하고 성적 관계를 즐기는 양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거의 벌거벗은 몸에다 포도잎 모자를 쓴 명화 ‘병든 바커스’는 양성애자로서의 카라바조의 진면목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얼굴을 포도주에 취한 그림 속의 주인공으로 바꿔 놓는다. 추리소설의 제목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는 ‘테니스 코트장에서의 살인사건’은 성과 속이 교차하는 카라바조의 일상이 만들어낸 너무도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그림을 본능이나 첫인상만으로 판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림을 본 순간 머릿속에서 무지갯빛 폭죽이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식의 감탄사를 연발하고 미의식에 충만한 자신의 능력을 자랑한다. 첫눈에 미를 감지할 수 있는 ‘초능력’이 부럽기만 하다. 그러나 그 같은 초능력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초능력 자체를 믿기도 어렵지만, 첫인상에 기초한 작품의 맛과 가치가 1년 뒤나 5년 뒤, 아니 한 세대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명화는 미를 한순간에 알아보는 본능과 무관하다. 명화는 눈이 아니라 머리로 읽을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보면서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0.01%도 안 된다. 다빈치의 치열한 인생 스토리를 이해할 때에 비로소 ‘모나리자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신비로운 여인이다’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명화의 재발견
고흐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죽은 지 30년이 지난 1920년대부터이다. 독일 문화비평가 사이에서 고흐에 대한 관심이 일면서 갑자기 각광을 받는다.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관심 밖 그림이 된 고흐의 작품이 독일 철학가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의 사상으로 연결된다. 절규하는 고흐의 그림이 실존을 찾아 헤매는, 무신론의 선봉에 선 니체의 사상과 같다는 것이다.
전 세계가 카라바조 그림에 환호하는 이유는 300년 가까이 무시돼 왔던 명화의 재발견이란 점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살인자에다 창녀를 마리아로 둔갑시킨 양성애자 카라바조는 1610년 죽음과 함께 곧바로 잊혀진다. 예술적으로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예술 이전의 문제로 심판받기에 충분하다. 카라바조가 숨진 곳은 로마 가톨릭의 절대적 영향권에 있는 땅이다. 형법이 아니라 신학적·윤리적·도덕적 관점에서 카라바조를 입에 올린다는 것조차 금기시된다.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으로 발전하던 영국은 자신의 세계관을 인문학에 기초한 다빈치의 생각과 연결시킨다. 단순한 화가로서가 아니라 구시대를 타파하는 새로운 이념의 상징으로 다빈치가 등장한다. 다빈치는 영국의 문화 아이콘으로 받아들여진다. 전 세계로 연결된 영국 주도하의 신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메이드 인 잉글랜드판 다빈치’가 현재와 같은 절대적 위치에 오른다.
20세기 초 다시 무덤 밖으로
무덤 속의 카라바조가 세상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11년이다. 21살 대학생 논문을 통해서이다.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문화 문명 비평가로 유명한 로베르토 롱기(Roberto Longhi·1890~1970)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의미와 후세에 미친 영향을 찾아낸다. 이탈리아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국력의 전부를 통일 운동에 쏟은 나라이다. 19세기 말 산업화에 성공한 프랑스가 유럽문화의 중심지로 ‘갑자기’ 떠오르면서 문화대국 이탈리아의 빛이 사라진다. 인상주의 화가는 유럽 예술계에 뒤늦게 등장한 프랑스의 ‘유일한’ 보석에 해당한다.
카라바조 부활에 나선 롱기의 노력은 그 같은 배경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곧바로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이탈리아를 장악하면서 카라바조 부활도 중단된다. 적대국인 프랑스와 영국이 무시했기 때문이다. 살인 화가로서의 원죄와, 이탈리아가 겪은 격동사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21세기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주목받게 된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은 카라바조가 교황에게 전달하려던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거인 골리앗을 처단한 다윗의 승리를 내용으로 한다.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의 표정에서 승자의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다. 거꾸로 골리앗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한 ‘슬픔’이 드리워져 있다. 미술 전문가들은 두 눈을 부릅뜬 골리앗의 모습이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라고 한다. 사후(死後) 400여년 만에 가장 높게 평가되고 있는 그림이 자신의 잘려진 머리라는 사실. 카라바조 외에 그 어떤 인물도 만들 수 없는, 극(劇)적이고도 극(極)적인 39년 삶의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