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나폴레옹 시대(5)
나폴레옹의 몰락
교황령의 점령과 병합은 나폴레옹의 큰 실책이었다. 각국의 가톨릭교도들이 상상 외의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가톨릭교와 특별한 관계를 가진 스페인 국민이 받은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스페인 국민은 나폴레옹이 안겨준 새 헌법보다 가톨릭 신앙과 자기 나라 왕실을 더 사랑하였다. 1808년 5월 마드리드에서 시민과 농민이 스페인 군인과 함께 프랑스군에게 무서운 피의 반란을 일으켰다.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는 스페인만이 아니라 나폴레옹 지배하에 있던 여러 민족이 독립 전쟁을 일으키는 발화점이 되었다. 반불 봉기는 스페인 전역으로 번졌다. 7월에는 바일렌에서 뒤퐁 장군 휘하의 프랑스군 2만 명이 스페인 반란군에 항복하였다. 이것은 스페인의 민족적 역량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얼마 후 동북부의 사라고사의 시민은 그 지방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쫓아냈다. 스페인 민중의 게릴라식 독립전쟁은 1814년 나폴레옹에게서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 줄기차게 계속된다.
그 독립 전쟁의 성격은 나폴레옹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이베리아 반도는 중세기에 이슬람교도에게 지배되어 있었다. 가톨릭교 왕국들이 이들 세력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흘렀고 많은 피를 흘렸다. 그 독립운동은 이슬람교에 대한 가톨릭교의 십자군 전쟁이었다. 그러기에 스페인 국민에게는 애국심과 가톨릭 신앙과 왕실에 대한 충성은 셋이 아니라 하나였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배교자이고 패륜아로밖에 보이지 않는 코르시카 섬의 망난이가 자신들의 왕을 몰아내고 그 형을 왕으로 앉혔으니 말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애국심이란 철학도 논리도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신비로운 감정이다. 이제 그 감정이 스페인의 소박한 국민들 가슴 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영국군이 재빠릴 포르투갈에 상륙하였다. 포르투갈에서도 쥐노 장군이 민중의 봉기 앞에 항복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상승 장군 나폴레옹에게 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베리아 반도가 무너지면 나폴레옹 제국 전체가 조만간 무너지리라는 것을 나폴레옹이 몰랐을 까닭이 없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베리아 반도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본래 나폴레옹이 스페인 점령을 계획했을 때 계산한 소요 병력은 2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앞으로 투입할 병력은 25만에 이르게 된다. 이 병력은 그의 제국 동쪽에서 빼내야 했다. 그렇게 하려면 동쪽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더욱 다져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동쪽의 세 동맹국은 스페인 사태를 예의주시하면서 나폴레옹의 굴레에서 벗어날 날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은 몸소 스페인 원정에 떠나기에 앞서 프로이센과 동맹 관계를 거듭 다짐하였다. 그리고 9월 27일에서 10월 14일 사이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와 에르푸르트에서 회견하여 틸지트 조약을 러시아에 다소 유리하게 고치고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였다. 동쪽에 훗날의 염려를 제거한 후 11월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를 포위하였다. 그는 시 교외에서 칙령을 발표하여 봉건제도와 국내관세 및 종교재판의 폐지 등 나폴레옹 법전의 시행을 약속하면서 시민의 무장해제를 명하였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프랑스군은 북쪽의 사라고사도 포위했으나 시민 전체가 군인과 함께 무기를 들고 항전하였다.
프랑스가 사라고사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두 달동안이나 이곳을 포위하고 시민 전체와 치열한 시가전을 벌이면서 5만여 명을 살육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라고사의 항전은 세계를 깊이 감동시켰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애국심을 분발시켰다. 나폴레옹 제국은 대륙 민족들의 애국심에 의해 금이 가고, 금이 커지면 결국 깨질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완전 정복을 보지 못하고 부장들에게 뒤를 맡기고 총총히 파리로 돌아가야 했다. 스페인 문제보다 더 다급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스페인 해방전쟁이 나폴레옹 권력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파리에서 나폴레옹 폐위의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이 소식이 나폴레옹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동시에 오스트리아에서도 주전파가 득세하여 반나폴레옹 전쟁 준비에 나섰다는 전갈이 전해졌다.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음모의 주모자 탈레랑을 파면하고 황급히 오스트리아로 향하였다. 나폴레옹은 4월 19일과 23일 사이 세 차례 전투에서 이겼다. 오스트리아군을 바바리아에서 몰아 낸 후 5월 8일에는 빈에 입성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5만 명 이상을 잃었고 후퇴했지만 아직 건재하였다. 두 번째 전투가 5월 21일과 22일에 다뉴브 강가의 마을 아스페른과 에슬링에서 벌어졌다. 쌍방 모두 5만 명의 손실을 보았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 후 한 달 반이 지나 7월 5일과 6일에 세 번째 큰 싸움에서 나폴레옹이 이겼다. 이것이 바그람 전투의 승리이다.
10월 14일 오스트리아는 항복 문서에 조인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인구 340만과 넓은 영토를 바바리아와 바르샤바 대공국에 할양하였다. 그 밖에 오스트리아는 배상금 8,500만 프랑을 지불하고, 영국과의 관계를 끊고 대륙봉쇄에 협력할 것을 약정하고, 그 군대를 15만으로 제한하게 되었다.
이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이틀 전에 오스트리아의 열여덟 살 소년이 나폴레옹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다. 나폴레옹은 소년에게 물었다.
“자네는 왜 나를 죽이려고 하였는가?
“당신이 우리나라를 불행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네를 시켜서 이 범죄를 저지르게 하였는가?”
“아무도 안 시켰습니다. 암살하면 조국과 유럽에 최대의 봉사가 된다는 신념이 시켰을 뿐입니다.”
“만일 용서해 준다면 고맙다고 생각하겠느냐?”
“역시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
애국심이란 정복자에게 가장 무서운 것이다. 이 애국심이 서쪽 끝 스페인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더니 이제 동쪽에까지 그 불똥이 튀기 시작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사적 지배와 그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애국심,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아침 해처럼 상승이로의 나폴레옹에게 1809년은 어려운 고비의 해였다. 스페인에서의 예기치 않았던 역경과 포르투갈에서의 좌절, 그리고 제위를 무너뜨리려는 측근의 음모, 오스트리아의 반항과 그것을 뒷바침하는 독일 민족주의의 앙양 등 1809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가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나폴레옹 제국에는 금이 생기고 있었다. 그 제국을 지탱하고 있는 대륙봉쇄의 기본적 모순들이 서서히 현실화되고, 나폴레옹 군대는 해방군이 아니라 정복군으로 변해 있었다. 나폴레옹은 자기의 권력과 제국이 혁명에 뿌리 박고 있음을 망각하고 제왕(帝王) 사상의 망상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이것을 명백히 드러내 보인 것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의 딸 마리 루이즈(Marie-Louise)와의 재혼이었다. 1809년 12월 12일 나폴레옹은 조세핀과의 이혼을 정식 선언하였다. 조세핀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제위를 계승할 태자가 필요하였다 .그가 18세의 오스트리아 황녀를 새 황비로 고른 것은 반혁명 왕가와의 결합을 뜻하였다. 보나파르티슴의 반동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삼색기를 앞세우고 유럽 곳곳에 씨 뿌린 나폴레옹 법전의 씨가 자라서 이제 바야흐로 유럽의 민중이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에 각성하기 시작한 때에, 보나파르티슴이 그 반혁명성의 속살을 만 천하에 공개한 것은 실로 역사의 역설이었다.
1810년 4월 2일 나폴레옹 황제와 마리 루이즈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듬해 3월 황비는 아들을 낳았다. 보나파르트 왕가의 무궁한 앞날을 알리는 것이라고 환영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까? 탈레랑같이 역사의 흐름에 예민한 자들은 벌써 아무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이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나폴레옹 제국은 족벌 제국이었다. 황제의 형제들과 친척 및 부장(部將)들을 위성국가의 통치자로 봉하였다. 그러한 그가 1810년에는 가장 사랑하는 막내 동생 루이를 네덜란드 왕위에서 몰아내고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합병하였다. 루이가 네덜란드의 밀무역을 철저히 단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륙봉쇄의 성패가 나폴레옹의 운명을 좌우하고 나폴레옹 제국의 모든 정책은 대륙봉쇄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엇다. 가장 중요한 해안 지역들을 프랑스에 합병하게 된 이유도 거기 있었고, 심지어 교황령이나 일리리아 지방까지도 무리하게 합병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러나 영국해에 접해 있는 가장 중요한 네덜란드에서 밀무역을 막지 못한다면 대륙봉쇄의 운명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그러나 대륙봉쇄 자체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 모순들은 나폴레옹의 강권 통치에 의하여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원래 유럽 대륙은 영국 식민지 산물의 4분의 3을 수입하고 영국 공업제품의 3분의 1을 수입하고 있었다. 대륙과 영국의 경제적 관계가 그만큼 뿌리 깊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륙 봉쇄가 영국 경제를 멍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륙 국가들도 영국 못지않게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은 수출품 시장을 새로 신대륙 특히 중남미에 개척하여 타격을 경감시킬 수 있었으나, 유럽 대륙의 나라들 특히 러시아 같은 나라는 농산물의 수출 시장을 찾지 못하여 고통이 매우 컸다. 더구나 농지개혁과 농노해방이 되지 않은 이런 나라에서 토지의 소유주는 귀족 계층이었는데, 귀족계층은 동시에 정치적 지배층이었다. 대륙봉쇄의 피해자가 지배층이 아니라 피지배 민중이었더라면 지배층은 혹 대륙봉쇄를 지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피해자가 지배층 자신들일 경우 그들에게서 대륙봉쇄의 지지를 구할 길은 요원했다. 아직 근대적 농업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지배층이 대륙봉쇄를 적대시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고 또 영국의 경우, 대륙봉쇄에서 오는 경제적 고통을 견디는 것은 외적의 침략을 막고 나라를 지키는 애국적 행위와 일치하였다. 그러나 대륙 여러 나라의 경우, 대륙봉쇄의 고통을 견디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애국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나폴레옹이라는 외국인의 지배를 돕고 나라의 독립을 막는 반역적 행위와 일치했던 것이다. 대륙의 여러 나라의 국민이 민족적 독립과 해방을 하루라도 속히 회복하려면 대륙봉쇄에서 오는 고통을 참고 견딜 것이 아니라 밀무역을 통하여 대륙봉쇄를 좌절케 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애국적 행위였다. 이렇게 대륙봉쇄의 모순은 경제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내지 도덕적 차원으로까지 심화되고 있었다.
밀무역은 경제적 곤궁을 벗어나는 길일 뿐만 아니라 애국적 행위였다. 밀무역 항로가 점차 확립되어 갔다. 그것이 바로 애국적 행위였다. 이렇게 대륙봉쇄의 모순은 경제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내지 도덕적 차원으로까지 심화되고 있었다.
밀무역은 경제적 곤궁을 벗어나는 길일 뿐만 아니라 애국적 행위였다. 밀무역 항로가 점차 확립되어 갔다. 북해와 발트 해의 거점은 헬골란트 섬이었다. 그 섬을 거점으로 밀무역품이 강줄기를 따라 내륙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오스트리아에는 프리에스트 항에서 들어가고 러시아에는 흑해를 통해 들어갔다. 지중해에는 거점이 도처에 있었다. 나폴레옹은 온갖 방법으로 밀무역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심지어는 엘베 강의 감시원으로는 스페인 사람을 배치하고 스페인의 감시원으로는 독일 사람을 배치하는 등 별의별 방법을 다 섰다. 밀수품을 가두에서 태워버리거나 집 안을 수색하는 일쯤은 예사였다.
대륙봉쇄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프랑스 산업을 짧은 시일 안에 크게 성장시켯다. 그러나 1810년 후반에 이르면 대륙봉쇄의 악영향이 프랑스의 호황에도 그림자를 갑자기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영국식민지에서 수입해 오던 커피, 코코아, 향료 값이 다섯 배 내지 열두 배, 원면과 인디고 염료 값이 다섯 배 내지 열 배 폭등하였다. 폭등한 차액은 영국 상인과 밀무역자의 이익으로 돌아갔다. 원료값의 폭등으로 공업이 침체되었다. 더구나 계속되는 전쟁으로 일반 민중의 구매력이 감소하여 프랑스 공업제품의 시장이 축소되었다. 공업의 침체는 상업과 금융에 영향을 미쳤다. 불황은 프랑스 이외의 독일과 네덜란드 등 대륙봉쇄 아래에 있는 여러 나라에도 번져갔다.
나폴레옹 제국은 거인이었지만 외양과는 달리 불안정하였다. 나폴레옹의 뜻대로 만족스럽게 되는 일이란 별로 없었다. 그 불안정의 첫 징후가 스페인에서 발생했는데, 이제 결정적인 사건이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틸지트 조약은 러시아에 불리한 조약이었다. 그래서 에르푸르트 회견에서 러시아에 다소 유리하게 고쳐지기는 했으나 러불 동맹은 러시아에 유리할 것이 없었다. 나폴레옹의 힘이 절정에 달했을 대는 부득이 그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지고 있었다. 대륙봉쇄로 가장 큰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 러시아의 지주계급이었다. 이들은 1807년 이래 줄곧 황제에게 영국과 통상 관계를 단절할 것을 항의하고 있었다. 영국은 러시아의 밀, 목재, 대마, 수지의 가장 큰 시장이었다. 그 큰 시장이 대륙봉쇄로 막혔으니 러시아는 산업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여간 어렵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러시아에게 대륙봉쇄를 더 철저히 시행하여, 중립국 선박의 기항도 금지하고 그 화물을 몰수하라고 요구하였다. 이유는 중립국 선박이 영국 화물을 싣고 오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이에 불응하였다. 그는 1810년 12월 31일 칙령을 발포하여, 중립국 선박의 러시아 항구 입항을 환영하는 동시에 견직물과 포도주 및 브랜디의 수입관세를 높여서 프랑스의 주요한 수출입품을 배척하였다.
러시아는 이제 대륙봉쇄의 그물을 찢고 그 그물에서 나온 것이다. 나폴레옹 제국이 대륙봉쇄에 의하여 지탱되고 대륙봉쇄가 나폴레옹의 군사력에 의하여 유지된다면, 대륙봉쇄이 중요한 한 부분이 찢어졌을 때 나폴레옹 제국을 붕괴에서 보호하려면 군사력으로 찢어진 부분을 다시 기워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나폴레옹과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쌍방은 다 전쟁 준비에 몰두하였다. 문제는 어느 쪽이 먼저 공격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1812년 2월 24일 프로이센은 프랑스가 러시아와 개전하여 나폴레옹에게 2만의 병력을 제공하겠다는 조약에 조인하였다. 3월 14일에는 오스트리아가 역시 3만의 병력 제공을 약속하는 조약에 조인하였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웨덴과 터키의 후원을 얻지 못하였다. 이 두 나라는 오히려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일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 및 터키와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그의 병력을 오로지 나폴레옹과의 싸움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812년 5월 9일 나폴레옹은 생클루 궁을 출발하였다. 16일에 드레스덴에 이르러 오스트리아 황제, 프로이센 왕, 라인 연뱡의 통치자들과 회합하여 그들의 충성을 다짐받았다. 러시아 황제는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에서 철수하기만 하면 협상에 응할 용의가 있다는 최후통첩을 나폴레옹에게 보냈다. 이 통첩에 대한 나폴레옹의 응답은 비스툴라강까지의 진격 명령이었다. 그는 드레스덴에서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까지 진출하여 (5월 31일) 자신의 대군에게 리투아니아로 진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의 대군은 6월 23일 러시아의 국경 네만 강에 이르렀다. 그런 뒤 코브노에서 강을 건너 러시아로 침입하였다. 러시아군은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후퇴만 거듭하였다.
이때 나폴레옹의 대군은 60만이었는데, 그 중 20만 명이 후비군으로 독일에 남고 40만 명이 네만 강을 건넜다. 대군의 중핵을 구성한 프랑스군은 20만도 못 되고 나머지는 전부 나폴레옹 지배하의 다른 나라 군인들이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및 라인 연방의 독일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 크로아티아인, 폴란드인 등 가히 유럽인의 인종전람회와 같았다. 일찍이 이런 대군이 편성된 일은 없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전람회는 결코 없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군은 3군으로 편성되었다. 나폴레옹 자신이 지휘하는 제1군 25만, 이탈리아 왕국의 부황 외젠 드 보아르네(Eugene Rose de Beauharnais) 휘하의 제2군 8만 명, 베스트팔렌 왕 제롬 휘하의 제3군 8만 명이었다.
러시아군은 바클라이 드 톨리(Mikhail Bogdanovich Barclay de Tolly) 장군이 이끄는 13만 병사와 바그라티온(Pyotr Ivanovich Knyaz Bagration) 장군이 이끄는 4만 3,000명의 병사가 프랑스군이 전진하면 그에 따라 후퇴하는 작전을 썼다. 우선 병력에서 러시아는 압도적으로 열세였다. 러시아군은 후퇴를 거듭하다가 8월 17일 스몰렌스크에서 처음 사웠으나 결국엔 스몰렌스크에 불을 지르고 후퇴하였다. 8월 하순 러시아군 총 사령관 쿠투조프(Mikhail Illarionovich Kutusov)가 바클라이를 대신하였다. 알렉산드르 황제는 쿠투조프에게 나폴레옹군의 모스크바 진격의 저지를 명하였다. 양군의 회전이 드디어 9월 7일과 8일 보로디노에서 전개되었다. 쿠투조프는 약 7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그러나 보로디노 회전은 결전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은 초조해졌다. 단번에 승부를 결정하여 조속히 알렉산드르의 휴전 제의를 받으려던 당초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의 계획과 달리 전쟁은 장기화의 기미가 분명해졌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9월 16일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 시는 그 전날부터 붙기 시작한 불길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한 부관은 “우리는 불의 대지 위, 불의 하늘 아래, 불의 두 벽 사이를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불은 사흘간 계속 붙었다. 모스크바는 잿더미로 변하였다. 이 잿더미의 모스크바에서 나폴레옹인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러시아 황제에게 평화교섭을 제의하였으나 황제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북극의 겨울은 코르시카 출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이 다가왔다. 모스크바에는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없었다. 군대는 겨울 옷이 없었다. 추위와 허기에 지친 군인들이 먹을 것을 찾아 모스크바 교외에 나타나면 잠복하고 있던 러시아군이 습격하였다.
10월 18일 나폴레옹은 전군의 퇴각을 명하였다. 다음 날부터 시작된 후퇴는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가장 유명한 퇴각이었다. 이 절호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쿠투조프는 맹렬한 추격전을 벌였다. 코자크 기병의 유격전과 러시아 농민군 게릴라는 패주하는 나폴레옹군을 도처에서 무찔렀다. 러시아의 동장군은 나폴레옹군의 도망 속도보다 더 빨랐다. 추위와 굶주림과 절망이 전군을 엄습하였다. 모스크바를 출발할 때 10만이었던 나폴레옹군은 스몰렌스크에 도착했을 때는 반으로 줄었다. 뿐만 아니라 스몰렌스크에 남겨두었던 군대도 이미 전멸되고 없었다. 그의 처참한 후퇴 작전의 클라이맥스는 11월 말 베레지나 강 도하작전이었다. 그의 군대 절반이 이 강에 빠져 죽었다. 네만 강의 코브노에 당도했을 때 해골 같은 나폴레옹군은 약 2만밖에 안 되었다. 독일에 후비군으로 남겨둔 병력까지 합하여 이제 남아 있는 나폴레옹 대군은 기껏해야 전부 10만에 불과했다. 60만 명 중 25만이 전사하고 10만 명이 포로가 되고, 15만 명이 부상 또는 실종되었다. 12월 5일 나폴레옹은 지휘권을 뮈라에게 맡기고 그 자신은 파리로 향하였다. 12월 18일에 파리에 돌아온 나폴레옹은 새 징병에 착수하는 동시에 자신이 부재하거나 사망할 때에는 재위를 어린 아들에게 물려주고 황비 마리 루이즈에게 섭정을 맡긴다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한편 러시아 황제는 프로이센에 접근하여 1813년 3월 1일 드디어 칼리슈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 동맹에 근거하여 프로이센은 3월 17일 프랑스에 선전하였다. 3월 2일에는 영국과 스웨덴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어 스웨덴은 독일 전선에 3만을 파병하기로 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Nepomuk Lothar von Metternich)는 사태의 추이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그의 외교적 민완을 발휘하여 이른바 ‘무장 중재(armed mediation)’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으나, 결국 6월 27일 러시아 및 프로이센과 함께 라이헨바흐 비밀조약을 맺고 8월 11일 프랑스에 선전하였다.
한편 포르투갈에 상륙해 있었던 영국의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은 스페인으로 침투하여 30만의 프랑스군과 조세프 보나파르트 왕을 공격하였다. 1813년 6월 수도 마드리드가 함락되고, 도망가던 조세프가 영국군에게 투항했다. 6월 21일 비토리아의 전투에서 영국이 대승하였다. 이 승리가 바로 메테르니히에게 ‘무장 중재’의 가면을 벗고 라인헨바흐 조약을 체결하게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제 반불 동맹군과 나폴레옹군과의 마지막 결전 준비는 완료되었다. 동맹 쪽은 병력 85만, 나폴레옹은 55만을 준비하였다. 1813년 8월 양군은 드레스덴에서 맞섰다. 이 싸움은 어느쪽에도 승리를 주지 않았다. 결전은 10월 16일 라이프치히에서 벌어졌다. 그 유명한 라이프치히 해방전쟁이었다. 4일간의 격전에서 나폴레옹은 6만 5,000, 동맹군은 6만 명을 잃었다. 18일 나폴레옹 휘하의 작센 부대가 동맹군 쪽으로 전향하자 전세는 순식간에 나폴레옹에게 불리해졌다. 나폴레옹은 전면 후퇴를 명하였다. 라인 강 쪽으로 후퇴하던 나폴레옹군은 하나우에서 또다시 바바리아군의 요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동맹군은 도망가는 적군을 프랑스 영토 안에까지 쫓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평화회의를 열려고 하였다. 1801년의 뤼네빌 조약 당시의 국경으로 돌아가는 조건으로 평화회의를 열자는 제의가 나폴레옹에게 전달되었다. 나폴레옹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동맹군은 1814년 1월 23만의 병력으로 라인 강을 건넜다. 나폴레옹은 겨우 4만 7,000의 군대를 이끌고 파리의 서남 150킬로미터 지점에서 동맹군의 전진을 막았다. 동맹군은 사방에서 파리로 진격하였다. 동맹 측은 다시 센 강가의 샤티옹에서 평화를 제의하였다. 이번의 조건은 1792년의 국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거절하였다. 그는 작은 전투에서 더러 승리하였으나 대세를 바꾸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에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네 동맹국들은 3월 9일 쇼몽 조약을 맺었다. 네 나라는 나폴레옹이 항복할 때까지 힘을 합하여 싸우고, 어느 나라도 단독으로 나폴레옹과 평화 조약을 맺지 않고, 또 평화조약 체결 이후라도 동맹국의 어느 하나가 프랑스의 공격을 받을 경우에는 각각 6만의 병력을 공동 출병한다는 것 등을 협약하였다. 조약의 유효 기간은 20년이었다.
동맹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3월 30일 드디어 동맹군이 파리를 점령하였다. 이튿날 알렉산드르 1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파리에 입성하였다. 나폴레옹이 이 소식을 들은 것은 파리에서 15마일 떨어진 진지에서였다. 그는 퐁텐블로로 후퇴하여 4만의 병력으로 파리의 탈환을 계획했으나, 그의 부장 가운데 이제 움직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지배는 끝났다. 파리 시민은 사태의 변화를 무감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가장 활발히 움직인 사람은 탈레랑이었다. 그는 연합국 원수들과 밀접히 접촉하면서 프랑스의 이익을 조금이라도 더 지케는 길을 찾고 있었다. 4월 6일 원로원은 연합국의 합의에 따라 나폴레옹의 폐위와 루이 18세의 즉위를 결의하였다.
나폴레옹은 11일 무조건 퇴위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퐁텐블로 조약에 의하여 그의 황제의 칭호를 보유하고 그 영토가 엘바 섬에 한정되고, 연금 200만 프랑을 프랑스정부로 부터 지급받게 되었다. 20일 그는 퐁텐블로의 근위병에게 마지막 고별의 연설을 하고 유배지 엘바 섬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