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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나에게 늦은 소설쓰기란 추억을 꿰매는 초라한 출발에서 시작되었다. 거울을 통하여 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었고, 내면의 얼룩진 상처와 부서진 조각을 치유하며 극복하는 작업이었다. 첫 장편소설 『끝섬-사랑하기 전에 이미 그리움』이 꿈을 기억해야 하는 자조의 할큄이었다면, 『사랑, 장마로 오다』는 자각을 실현하고자 하는 치유의 거울이었다. 또한 상처가 다시 덧나도 좋고, 딱지가 떨어져 지혈되지 않아도 슬퍼하지 않겠다는 고집으로 나만이 볼 수 있는 굴절된 양심을 어루만지고 싶은 작업들이었다.
무릇 중년에 반추하는 유년의 추억은 아름다운 기억만이 착상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잊도록 진화된 인간의 뇌 어느 한구석에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무례하게 스스로의 거울을 비추어보며 오랜 세월 봉합시켜 놓았던 상처를 끄집어내는 작업에 집착했다. 기억은 점점 더 명료해졌고, 아픔은 점점 더 가까이에서 돋았다. 기억 속의 아픔은 타인의 아픔이기 이전에 나의 아픔이었고, 어쩌면 내가 치유해야 할 아픔이라고 보아야 옳았다. 상처는 더욱 깊어졌고, 누군가에게 울고 거듭나기를 소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울고 거듭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시간들, 감히 또 다른 치유를 구실로 긁적거리려니 내 추억들은 비로소 두려움으로 아우성이다. 아우성치는 미지의 두려움과 싸워야 하는 나는 참으로 나약하고, 심장의 깊이는 속절없이 야위어 있다. 더불어 담겨져 있는 그릇의 크기는 보잘것없고, 뜨거운 열정이나 모험도 턱없다. 필부의 가야 할 걸음에 보이지 않는 길은 멀고, 끝은 자욱한 이유이다.
그래서 오늘, 용기를 북돋는 두 번째 장편소설의 채찍에 더없이 작고 초라하게 움츠려진다. 민망함을 위장하려는 부끄러운 마음조차도 기둥 뒤로 빠끔히 숨는 것을 보면, 아마도 과분한 축복인가 싶다. 어디에 숨고, 어디로 도망하여 잠수라도 해야 하는가, 곰곰한 생각이 나를 또 불현듯 일으켜 세우기를 외람되게 갈망해본다. 그 끝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라도 가야 하고, 가서 행복한, 또 다른 담금질 같은 운명의 길이기에…….
두려움에 나약하고, 심장이 야위었고, 그릇이 보잘것없고, 열정이나 모험도 턱없는 나에게…… 늘 용기를 주는 분들, 세상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고마운 분들, 그리고 아내와 아들과 가족들에게, 여전히 졸필인 이 책을 바친다.
<1장 도입부>
사랑, 장마로 오다
“이 눔의 장마가 언제나 그치려나…….”
“그러게 말이여! 올해는 벼농사마저 신통찮을 거 같구먼유!”
“밭농사는 어쩐디여, 뿌리까지 다 물러터지게 생겼네 그려!”
이장집이라는 명분과 마을에 몇 안 되는 텔레비전을 보려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구실은 핑계에 불과했다. 어쩌면 끈적끈적한 습기와 스산한 분위기를 피해 수다를 떠는 것이 더 큰 목적처럼 보였다.
며칠째 쏟아붓는 장마는 지독히 폭력적이었다. 남한강 상류에서 차례로 뭉쳐진 물은 두물머리에 이르러 북한강물과 합류했다. 한꺼번에 밀어닥친 빗물은 한강에 도달하기도 전에 곳곳에서 범람했다. 물먹은 대지는 과식한 음식을 토하듯 흙탕물을 뱉어 내었다. 더구나 서해로 치미는 바닷물과 겹쳐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역류하기 시작했다. 강가에 도열해 있는 저지대는 모조리 침수되어 유린당했고, 역류한 물은 남한강을 거슬러 충주忠州에 이르기까지 속수무책으로 치밀었다.
“어무이, 아부지가 빨리 오래유. 방장골이 강물에 다 파묻혔대유!”
사내아이의 볼멘소리가 창호지를 뚫고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것은 그때였다. 문지방 앞에 웅크리고 앉아 수다를 떨던 작은어머니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아들에게 냅다 물음표를 던졌다.
“시방, 그게 무슨 소리여?”
“아랫방장골이 없어졌어유. 흙탕물이 엄청나유!”
밖에는 나의 열 살짜리 사촌동생 녀석이 우산도 없이 세찬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떨고 있었다. 추위에 잔뜩 오그라져 있는 꼴은 영락없이 물먹은 생쥐 모양새였다. 그러나 녀석의 목소리는 처음 겪는 진풍경에 신이 난 듯 다분히 들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자리를 정리하며 서둘러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싶어 어머니의 눈을 피해 작은어머니를 뒤따라 나섰다. 비에 흠뻑 젖은 사촌은 진흙탕을 지그재그로 첨벙거리며 앞서갔다. 녀석의 뛰어가는 뒷모습은 신기한 구경거리로 되레 들뜬, 제철만난 강아지 격이었다.
마을 끝자락 작은집 앞마당은 이미 홍수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거리고 있었다. 진즉부터 바다처럼 변해가는 논밭과 물속에 갇힌 방장골을 구경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달천평야 한가운데 융기된 농촌마을 아랫방장골은 바다에 떠 있는 섬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진풍경이었다.
나는 좀 더 신기한 구경을 하고 싶은 마음에 최대한 물 가까이로 갔다. 역류한 흙탕물은 마치 시가전을 펼치는 군인인 양 야금야금 마을 위로 치밀고 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발밑까지 도달한 점령군이 마침내 발끝을 핥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은근슬쩍 뒷걸음질을 쳤다.
“올해가 1972년이던가? 충주에 칠십 평생 살면서 이런 홍수는 처음이네 그려!”
“신립장군이 배수진을 친 탄금대彈琴臺 합수머리부터 역류하기 시작했다는구먼유!”
“이러다가 우리 마을두 침수되는 거 아녀? 살림이래두 옮겨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구먼!”
각자의 입에서 탄성과 함께 우려의 목소리가 뒤섞여 뒹굴었다. 그때까지도 흙탕물을 가르며 질주하는 경찰보트를 멋스럽게 구경하던 사람들이 불현듯 웅성거렸다. 구경꾼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뜨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바퀴벌레가 숨어버리듯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어둠이 가마니 거적처럼 마을을 덮기 시작했다. 어둠은 낮게 스멀거렸고, 농촌마을 봉계鳳溪는 금세 공포로 치달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작은집 앞마당까지 차오른 물이 발목을 적셨다. 작은집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물건을 나를 수만 있으면 어른아이 가릴 것 없이 우리 식구들까지 모두 동원되었다.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었다. 눈에 띄는 것부터 끌어내어 무작정 리어카에 실었다.
급한 나머지 지대가 높은 우리 집으로 작은집 물건이 옮겨졌다. 골목은 짐을 대피시키는 리어카들끼리 서로 엉키기 일쑤였다. 어린 사촌이 어설프게 올려 실은 짐짝은 뒤뚱거릴 때마다 균형을 잃고 흔들거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채 절반도 옮기지 못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호각을 연방 불어대며 출입을 통제하는 경찰의 저지선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토담으로 지탱하던 초가집들은 빠른 속도로 치밀고 올라오는 황톳물을 반갑게 포식했다. 담벼락은 조각으로 서서히 분해되기 시작했다. 역류한 물을 빨아들이며 배부른 포만감을 드러낸 흙담이 제멋대로 널브러졌다. 작은집부터 무너지고 동네 여기저기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물위로 둥실 떠오른 초가지붕들은 애당초 있었던 터를 버리고 패거리로 뭉쳐 떠다녔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떠오른 거무칙칙하게 변색된 덩어리도 물결을 따라 밀려다녔다. 떠돌던 덩어리는 벽이며 장독을 가리지 않고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대들보에 붙은 덩어리가 된장인지 화장실에서 떠오른 인분 덩어리인지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설마 하던 방심은 우리에게도 덮쳤다. 역류하던 물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우리 집까지 차올랐다. 짐은 다시 시내 고모네 집으로 옮겨야 했다. 작은집 큰집이 따로 없었고 네 것 내 것을 구분할 여유조차 없어졌다. 닥치는 대로 리어카와 지게에 가재도구를 실었다. 결국 물건은 절반도 건지지 못한 채 흙탕물에 잠겼다. 우리 집 물건은 능욕당하며 그대로 침수를 받아들여야 했고, 임시로 마루턱에 옮겨놓았던 작은집 물건만이 구제되었다.
나는 형과 함께 지쳐버린 어머니를 모시고 학교수용소로 갔다. 수재민들이 임시로 수용된 강당은 6·25 사진에서나 보았던 피난민수용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마치 장날의 시장바닥과도 같이 와글거렸다. 그나마 먼저 온 사람들이 구석진 모서리에 돗자리나 이불을 깔고 터를 잡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서로가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으려고 곤충들처럼 다툼까지 벌이더니 결국 목소리가 크고 막무가내인 사람이 괜찮은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화장실 옆 출입문가에 겨우 가져온 짐짝을 내려놓았다. 화장실의 지린내가 싸하니 콧구멍을 파고 침투했다.
나는 무엇보다 수해현장이 궁금해 마을로 내려왔다. 그동안 마을은 모두 침수되어 천지 분간이 없는 바다처럼 침수되었다. 더구나 전기까지 차단되어 하늘과 땅은 온통 어둠만 짙었다. 고작 경찰의 손전등 불빛만이 등댓불같이 굴절되고 반사되며 출렁이는 흙탕물 위를 굴러다녔다.
“경찰아저씨, 저기 사람이 있어유!”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무리 틈에서 터졌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방향으로 경찰의 손전등 불빛이 회전하며 뒹굴었다. 웅성거리며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손전등을 따라갔다. 둥둥 떠다니는 초가지붕 틈새로 불빛이 퍼져나가며 흔들거리는 각도마다 황홀한 색채를 반사시켰다. 어느 순간 정지된 불빛은 초가지붕에 매미처럼 붙어 허우적대면서 악다구니를 치는 사내에게 멈췄다. 사내의 목소리가 빗줄기를 뚫고 생생하게 허공을 갈랐다.
“어푸, 집이 떠내려가네! 어푸, 육시럴…….”
허우적대는 사내의 머리는 고래 지느러미처럼 물속으로 잠겼다가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토해내는 목소리 또한 물속으로 잠겼다가 튀어나왔다. 누군가의 입에서 안타까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보슈, 위험해유! 빨리 거기서 나오세유!”
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경찰조차 요란하게 호각을 불어대며 손전등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지붕은 벌써 저만치 떠내려가고, 사내가 버티고 있는 모서리가 비스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사내는 다시 잠기고 튀어 오르기를 되풀이했다.
그때였다. 어느 틈에 마을로 내려왔는지 학교 수용소에서 잠시 스쳤던 정라가 흙탕물로 뛰어들었다. 열여섯 살 중학생 소녀에게서 생겨난 용기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순간적이고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다. 너무나 돌발적인 행동이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만류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경찰의 손전등이 흙탕물을 가르며 헤엄치는 정라를 비추었다. 마침내 기적은 잉태되었다. 물속으로 사라졌던 그녀가 어느 틈에 사내를 틀어쥐고 헤엄쳐 나오기 시작했다. 가슴을 졸이며 발을 구르던 사람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로 응원을 보냈다. 정라의 용기는 무모함 이전에 영웅으로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조정라! 평범하지만 귀엽고 동그란 얼굴, 말하거나 웃을 때면 눈 꼬리가 아래로 처지는 여덟 팔八자의 검고 착한 눈썹, 우윳빛 살결은 시골사람 같지 않은 귀티까지 느껴지며, 마을에서 유일하게 일류여중을 합격한 수재, 나는 그녀에게 호감이 있어 늘 주시해오던 터였다. 단지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한 번도 같은 반으로 배정받은 적이 없어 가끔 의례적인 눈짓만이 오고 갈 뿐, 친분을 가질 만한 접촉은 그다지 없던 소녀였다. 그녀가 안간힘을 썼다.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안개처럼 뿜어지는 물방울이 손전등 불빛에 은빛으로 흩날렸다. 사내의 머리는 탈진한 듯 축 늘어진 채 반쯤 물속에 잠겼다. 더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질질 끌려나오는 무게의 느낌이 정라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인 상황으로 보였다.
나는 내처 흙탕물로 몸을 던졌다. 어디로부터 비롯된 행동인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흙물에 섞인 진흙냄새가 콧구멍을 타고 온몸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 내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비로소 실감하였다. 하지만 늘 개천에서 뛰어놀던 물방개였던 나에게 흙탕물 따위는 가소로운 일이었다. 내 깐에는 쏜살같이 접근하여 잠수한 다음 머리통으로 사내를 물위로 밀어 올렸다. 사내의 몸이 떠오르자 정라가 비로소 땅을 밟고 균형을 바로잡았다.
마침내 물 가까이 이르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뛰어들었다. 사내는 의식을 잃은 채 연체동물처럼 진흙탕에 널브러졌다. 생사를 알 길 없는 사내에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정라 할아버지였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죽은 짐승처럼 리어카에 실려 급히 시내병원으로 출발했다.
탈진한 정라가 중심을 잡으려 비틀거렸다. 하지만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다. 결국 몇 걸음을 내딛다가 내 앞에서 풀썩 무릎을 꿇었다. 나는 엉겁결에 등 뒤에서 양쪽 팔을 잡았다. 그러나 손바닥은 엉뚱하게도 겨드랑이가 아닌 가슴을 움켜쥐고 말았다. 단지 꼬꾸라진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을 뿐, 단언컨대 의도했던 일이 전혀 아니었다.
일순간, 머릿속은 온통 범벅이 되었다. 아무런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란 것은 더구나 할 수 없었다. 가슴으로부터 손을 뗄 수도 없었다. 그대로 있을 수도 없었다. 하물며 지친 그녀는 손바닥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온전히 가슴을 맡기고 있었다. 그녀가 거칠게 호흡을 내뱉었다. 뭉클한 가슴의 감촉이 리듬을 타고 손바닥으로 전이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전해지는 야릇한 떨림, 몸속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전율, 촉감은 실핏줄을 타고 온몸의 마디마디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모든 숨구멍마다 바늘이 튀어나오는 듯 소름이 돋았다.
정라가 거친 숨을 가다듬고 비로소 균형을 바로잡았다. 나는 주인에게 들켜버린 도둑놈처럼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마구 뛰었다.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가로수 잎이 비바람에 부딪혀 서걱거리며 울어댔다. 벼이삭들은 쓰러질 듯 엎어졌다가 일어서며 요란하게 울부짖었다. 빗속에 겨우 희미한 가로등 불빛은 지나칠 때마다 내 뺨을 갈겨댔다. 내 눈에는 가로등도 보이지 않았다. 서걱거리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캄캄했다. 암흑이었다. 아아, 이 일을 어찌해야 할지 참으로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마을은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만큼이나 처참하고 한심스러웠다. 농촌의 전형적인 흙집들은 거의 허물어졌거나 반파되어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고랑은 고랑대로 언덕은 언덕대로 질척이는 진흙 옷을 뒤집어썼고, 골목은 온통 흙탕물과 오물로 범벅이었다. 정라 할아버지가 매달렸던 초가지붕은 반쯤 남은 채 밭고랑에 비스듬히 걸쳐졌다. 둥둥 떠다니던 가재도구들도 서로 엉켜 둔덕을 이루었다. 대부분의 장독대는 깨지거나 뚜껑이 없어져서 된장인지 화장실의 인분 덩어리인지 모르는 찌꺼기가 듬성듬성 발에 밟혔다.
우리 집은 뼈대만 남았다. 지붕만 그대로 있을 뿐 비스듬히 기울고 벽 곳곳이 떨어져 사라져서 엉성했다. 방바닥은 뒤틀리고 갈라져 구들 사이로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큼 틈이 생겼다.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자 틈새마다 연기가 꼬리를 물고 피어올랐다. 방 안은 단박에 자욱하여 안팎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매캐한 연기를 피해 집을 나왔다.
나와서, 무엇보다 궁금한 정라의 집 근처로 향했다. 그녀의 집은 완전히 분해되어 흔적도 없이 휩쓸려가고 없었다. 지팡이를 아무렇게나 팽개쳐 놓은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인 정호가 넋을 잃고 가마니 위에 망연자실 앉아 있었다. 일제에 강제징용되어 한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는 울화를 삭히려는지 연신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쏘아보는 정호의 눈빛은 주변을 잔뜩 의식한 붉으락푸르락한 눈초리였다. 정라는 아직도 할아버지가 있는 병원이나 학교 수용소 어딘가에 있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한사코 술을 마시던 정라 아버지가 불현듯 자신의 지팡이를 미나리꽝으로 내던졌다. 표창처럼 날아간 지팡이는 바닥에 꽂히는 듯 하늘로 곤두섰다. 잠시 정지되었던 지팡이는 한 바퀴를 맴돌고는 결국 미나리 숲으로 쓰러졌다. 아버지의 돌발 행동에 가족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토록 한심한 상황에 솟구친 아버지의 울분을 가족들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일 터였다. 나는 먼발치에서 그런 정라의 가족을 훔쳐보기만 하고는 갑자기 무거워지는 발등이 부담스러워 걸음을 되돌렸다.
저녁부터 발이 퉁퉁 부어올라왔다. 오염된 흙탕물에 마냥 걸어 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듬성듬성 밟혔던 변색된 덩어리의 병균이 침투한 모양이었는데 유독 내 발만이 오염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튿날에는 발등이 점점 더 부풀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투박한 치료를 감행했다. 상처를 쨀 마땅한 도구가 없어서 제도용 칼로 환부를 찢었다. 고름을 쥐어짜내고 그 자리에 된장을 붙였다. 된장 덩어리가 마치 화장실에서 떠오른 인분 덩어리처럼 느껴져 꺼림칙했다. 환부에는 다시 몇 겹의 천이 대충 싸매어져 거의 초가지붕의 뒤웅박 크기처럼 커졌다. 나뭇가지로 대충 다듬어 만든 삐뚤삐뚤 굽은 지팡이가 손에 쥐어졌다.
나는 그런 창피가 정라의 눈에 뜨일까 노심초사했다. 더구나 가슴사건 이후로 동네 틈바구니마다 눈여겨보는 버릇까지 생겼다. 혹시라도 정라와 마주치기를 은근히 기다리는 행동, 그녀가 이동하는 동선을 추측하며 미리 골목 귀퉁이에 숨어서 엿보는 행동, 치졸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마주치지 않았다. 길은 늘 어긋나기만 했다. 마침내 조바심까지 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녀의 집 언저리를 기웃거리는 나를 자각하고 스스로 놀라기를 며칠째였다. 뙤약볕이 작열하던 여름방학의 끝, 임시 천막을 치고 기거하는 그녀의 집터언저리를 기웃거리다가 들켜버린 것은 채 반나절도 아니 되어서였다.
“야아, 전양우?”
등 뒤에서 정라의 목소리가 뒤통수에 꽂혔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박에 나를 뒤돌아 세웠다. 하지만 지팡이에 의지한 것도 잊은 채 뒤뚱대다가 그만 가슴을 먼저 보고 말았다. 다시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못된 짓을 하고 들켜버린 놈처럼 얼굴은 순식간에 홍당무가 되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흘깃 내려다보고는 암팡지게 쏘아붙였다.
“니, 앞으루 비밀 지키지 않으면 혼날 줄 알어!”
고작 동창으로서 오고 간 상투적인 말 외에는 교분이 없던 그녀였다. 하지만 말투가 왜 그토록 사락거리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오래된 오누이처럼 친근하기까지 한 이유를 설명할 길은 더욱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어 새치름한 표정을 던져놓고는 아예 천막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내 대답 따위는 관심이 없다는 뜻인지, 일방적인 통보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돌아들어간 추리닝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 추리닝 속에는 굴곡을 따라 도드라진 탱탱한 엉덩이가 몽롱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보았던 적이 없었던 뒤태, 굳이 추리닝 안을 연상해보았던 적 또한 없었던 뒤태, 동그란 엉덩이는 복숭아의 모양과 흡사하게 닮은 것은 또 뭐란 말인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길 곳이 필요했다.
행여 그녀에게 흑심이 들킬까 봐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팡이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도 잊은 채 절름거리며 진흙탕 위를 뛰었다. 흙탕물이 바짓가랑이 사이로 튀어 오르며 빠르게 젖어들었다.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어지러웠다. 현기증이 났다. 헝클어진 머릿속을 가득 넘실거리는 몰랑몰랑한 가슴, 복숭아 같은 동그란 엉덩이, 회오리처럼 되살아난 가슴의 촉감과 감춰진 엉덩이가 귓속을 맴돌며 매미처럼 울어댔다. 도대체가 혼란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내처 안방으로 숨어들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아직 장마의 습기가 남은 눅눅한 이불이 몸뚱이에 칙칙하게 엉겨 붙었다. 어머니가 불을 지피고 있는지 갈라진 구들장 틈새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매캐한 연기로 방 안은 금방 자욱해졌다. 콧구멍에서 토악질 같은 기침이 금세 치밀고 올라왔다. 몇 번씩 토악질을 했다. 자욱한 연기를 마시며 자욱한 눈물을 참았다. 눈을 감았다. 때마침 들어온 아버지의 동정 어린 목소리가 이불 위로 떨어져 뒹굴었다.
“녀석, 공부깨나 하다가 잠든 모양이군. 근데, 우찌 이런 방에서 잠이 오는 겨!”
어머니는 내가 공부하는 사랑채로 빈대떡을 한 접시 넣어주었다. 빈대떡을 한입 문 채 책을 펼쳤다. 헛수고였다. 어수선한 장마후유증으로 인한 공사 소음과 암묵적으로 감금당한 지루함 때문이 아니었다. 좀 더 정직하게 고백한다면 정라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슴과 엉덩이는 눈을 뜨면 눈앞에 열렸고, 눈을 감고 있으면 머릿속에 매달렸다.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책을 펼쳤지만 갈피 속에 잠자던 정라의 가슴과 엉덩이가 메뚜기처럼 튀어 올라와 번번이 헛수고였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내놓고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 더구나 정라에게 시시때때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하고 고백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부리나케 빈대떡을 해치우고 탈출을 꾀하려 안방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빈 접시를 놓는 척하며 은근슬쩍 어머니의 곁눈을 엿보았다. 여지없이 따가운 눈길이 달려왔다. 내친김에 피곤한 듯 하품을 하면서 커다랗게 기지개까지 켰다. 아버지의 동정을 유도하여 어머니의 압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심산이었다. 하품은 주요했다.
“양우가 공부가 힘든 모양이구먼. 조금씩 쉬었다 하는 게 어뗘!”
아버지의 응원에 어머니는 입술을 삐죽이 내밀며 실쭉하고 말았다. 그것은 묵인을 의미하는 표정이었으므로 목표를 달성시킨 셈이었다.
“보상비와 상관없이 집을 빨리 헐어야 할까벼!”
아버지는 어머니와 기울어진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반파라서 완파만큼 보상비두 지대루 못 받는다면서유?”
“보상비를 생각하구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인 거 같구려. 적당히 수리해서 사용할 수두 없을 판이니 하루라두 빨리 헐구 새루 집짓는 것이 낫겠구먼! 시방 시험을 앞둔 야가 젤루 걱정이여. 석우처럼 될까 싶어서…….”
“야는 달러유. 갸는 중핵교두 일류중핵교에 못 간 애 아녀유!”
가뜩이나 공부가 되지 않는데 부담까지 덧대어진 셈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험공부에 시달린 세대로서 치열하게 시험을 치르고 중학교에 들어갔고, 공교롭게 고등학교 시험도 마지막으로 치러야 하는 막둥이 세대가 되었다. 반면 석우는 1차 시험에서 서울 입성에 실패하고,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끝내 2차 시험도 포기했다.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충주에 있는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가 껄렁껄렁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만 하는 고 3이었다. 그런 석우를 특히 어머니는 영 못마땅해했다.
“그나저나, 정호 갸네는 어떻게 한대유?”
어머니의 말에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언제부터인가 정라 가족 이야기가 나에게 가장 큰 관심거리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천막에서 온 가족이 함께 사는가 벼. 집 지을 엄두조차 못하구 있는 것 같구먼. 할아부지는 보름째 깨어나지 못하구, 보상비는 턱없이 부족하구. 더구나 집터가 다른 사람 소유라서 집을 지으려면 터까지 사야 하는가 벼. 어쩌면 마을을 떠나 이사할지두 모르겠다는구려!”
정라가 마을을 떠나면, 연락이 끊어지고 만날 수 없다면,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일이었다. 갑자기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자리를 이탈해 정라네 천막을 또 기웃거렸다. 그녀를 훔쳐보는 것이 발각될까 내심 걱정하면서도 천막 안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천막 안에 정라가 있으면 있어서 걱정이고 또 없으면 없어서 걱정인 마음으로.
“야, 전양우! 니 여기서 뭐 하는 겨?”
결국 그녀에게 등 뒤에서 또 들켜버리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우스웠던지 그녀가 까르르 웃었다. 여전히 엉덩이에 착 달라붙는 추리닝 차림이었다.
“나, 니한테…… 할 말 있어…….”
나는 혀가 저절로 꼬여 말까지 더듬거려졌고, 얼굴은 언제나처럼 내리쬐는 햇볕보다 더욱 덥게 느껴졌다.
“무슨 말인데?”
“그냥 따라와 봐. 다른 데서 얘기혀!”
되도록 강하게 내뱉고는 곧바로 뒤돌아 뒤뚱대었다. 거절의 말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지척지척 슬리퍼 소리를 내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어색한 목발 소리와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제법 리듬을 탔다. 그녀가 등 뒤에 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절룩거리며 걷는 어색한 내 뒷모습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녀가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면 또 뒤태에 신경이 곤두서고 얼굴이 붉어질 판, 그것이 더 난감한 일일 터였다.
의도적으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끝내 당당한 척 슬리퍼 소리만 들으며 마을 끝에 도착했다. 마을 끝 공터가 있는 집은 정신이 온전히 나가 미쳐버린 아저씨가 혼자 사는 음습한 곳이었다. 장마에도 가장 피해를 덜 입은 유일한 집, 제법 큰 마당에는 늘 잡풀이 우거져 있고 조용하기까지 해서 항상 사람의 인기척을 느낄 수 없는 집이었다.
정라가 실쭉하며 불안해했다.
“왜 하필 여기여? 미친 아저씨가 안 무서워?”
“그냥, 난 여기가 편혀! 해치지는 않어. 가끔 소리는 지르지만.”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겨울이었다. 미쳐버린 아저씨가 방 안에 있는 줄도 모르고 언제나처럼 사방치기를 하며 아이들과 뛰어놀았다. 한창 재미있을 무렵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리며 고함소리가 튀어나왔다.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논바닥으로 도망친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아저씨가 방 안에 있는지 궁금하여 구멍 난 창호지 틈으로 흘깃 방 안을 훔쳐보고는 했었다.
이곳에는 또 다른 추억이 있었다. 굳이 추억이라고 하기보다는 내게는 신나는 사건이었다. 아래 학년부터 시행되는 추첨제 시험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재수를 한 신진수와 주봉기, 음영석, 소위 ‘무대뽀삼형제’라고 일컫는 녀석들이 일류중학교에 간 내가 질투가 났던지 이곳으로 끌고 왔던 적이 있었다. 된통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나는 진즉부터 겁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들이 공격할 준비가 되기도 전에 먼저 최대한 하늘 높이 뛰며 무작정 발길질을 해댔다. 날아간 발끝은 공교롭게도 신진수의 턱에 작렬했다. 녀석은 흙바닥에 나동그라졌고 단박에 코피가 인중을 타고 흘러내렸다. 녀석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친 곳은 역시 논바닥이었다. 제대로 싸움도 할 줄 모르는 내가 3대 1로 한꺼번에 해치운 셈이었다. 미친 아저씨가 있어 마을 사람들 모두가 꺼리는 장소였지만 3대 1의 역사가 있었던 추억의 장소, 내 깐에는 사람들 눈에 가장 덜 띄는 신나는 장소, 그녀에게 적당히 공포감을 느끼게 하려고 굳이 공터를 택했다.
“그래두 난 미친 아저씨가 무서워. 그런데 할 말이 뭔데?”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나는 지팡이 끝으로 돌멩이를 툭툭 때려 논바닥으로 날려 보내며 딴청을 피웠다. 지팡이에 얻어맞은 돌멩이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가 방귀소리를 내고는 포말을 일으켰다. 딴청을 피우는 모양새에 무언가를 의심한 듯 마침내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니 혹시, 그날 일 벌써 소문낸 거 아녀?”
정라는 엉뚱하게도 가슴사건을 상기시켰다. 나는 그녀를 좋아한다는 속내를 고백하고 싶었는데, 작심하고 용감하게 고백하려 했는데, 더구나 황홀한 가슴사건은 함께 간직해야 할 공동의 비밀, 그 아련한 비밀을 소문내다니, 도리질을 치며 강하게 어필하는 것이 먼저였다.
“아녀.”
“그럼, 뭐여?”
그래서 겨우겨우 얘기해버렸다.
“사실은…… 나…… 니, 좋아혀!”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곧바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가 또 까르르 웃었다. 도대체 그녀의 마음은 어떤지, 날 좋아하기는 하는지, 그것이 궁금해 미치겠는데도 내 마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녀의 엉뚱한 웃음에 줄지어 이동하는 개미의 숫자만을 맥없이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행군하는 군대처럼 도열하는 개미들의 행렬은 어디로 가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두, 니 좋아혀!”
일순 정라의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귓바퀴를 맴돌아 나갔다. 무슨 말이 들렸는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발그레하게 익은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심장이 다시 쿵쾅대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심장의 박동소리는 가슴이 아닌 온몸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벌렁거리는 울림은 순식간에 낯빛까지 붉게 밀어 올렸다. 아무 대꾸도 못하는 나를 바라보던 정라가 다짐을 받으려는 듯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렇지만 앞으루는, 그것두 비밀루 혀. 소문냈다가는 니 나한테 혼나는 수가 있어!”
입단속을 하려는 그녀의 의지는 암팡졌다. 그러나 암팡진 입술이 오히려 앙증스러워 이빨 사이로 비시시 웃음이 삐져나왔다. 나는 더더욱 호기를 부리며 능청스러워졌다. 어디서 비롯된 능청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건 내 맘이지! 어떻게 혼내줄 건데?”
내 끈적이고 능청스런 대담에 그녀는 정작 대꾸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처량한 천막생활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아니, 그녀가 이사를 갈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이쯤에서 그만두어야지, 적어도 원했던바 목적을 달성한 셈, 나는 대뜸 순종의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요즘은 공부가 잘 안 돼. 자꾸 두려워져! 시험에 떨어질까 봐서.”
“수해 때문에 어수선해서 그런 겨. 나두 마찬가지여. 요즘은 공부가 지대루 안 돼. 우리 악수나 혀. 서루 비밀 지키기루 약속하는 뜻으루. 자아!”
억지로라도 장마의 우울함을 털어내려는 듯 정라가 밝게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다. 나는 손바닥을 엉덩이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이어서 떨리는 손을 냉큼 마주잡았다. 포동한 손의 감촉! 그녀를 마을의 끝, 한적한 공포의 미친 아저씨 집 앞마당까지 끌고 내려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 떠올라 무겁던 발조차 마냥 가벼워졌다.
“발은 줌 어뗘? 낫기는 하는 겨?”
대답 대신 지팡이를 번쩍 들어 올려 하늘을 찔렀다. 그 무엇에 삿대질이라도 하듯 힘껏 휘두르며. 그런데, 공교롭게 꼬꾸라지고 말았다. 그것도 정라 앞에서 멋지게 나동그라지며 엉덩방아까지 찧었다. 더구나 엉덩이 꼬리뼈에 돌멩이가 박혀 짜릿한 통증이 등줄기로 치밀었다. 민망한 표정으로 동정의 눈빛을 보내는데 내 모양새를 보고 그녀가 까르르, 팔八자 눈썹을 실룩이며 앙증스럽게 웃었다. 그 웃음에 한없이 빨려 들어간 마음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내 것이 아닌 것이 어디 마음뿐이랴. 그녀에게 달음박질치고 달아난 심장은 또 어찌하랴. 운동회 날 날아오른 풍선처럼 허공으로 한없이 떠오르는 몸뚱이는 어찌하랴. 나의 사랑은 지독한 장마와 함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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