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를 대표한다는 ABC 3국(아르헨티나.브라질.칠레). 그 중에서도 칠레는 분명 남미의 돌연변이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직접 비교해볼 요량으로 브라질에서 칠레행 비행기를 탔다. 산티아고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역시 다르구나"하는 느낌이 확 들기 시작했다. 입국수속을 마친 뒤 택시정거장에 서기까지 10분도 채 안 걸렸다. 공항 승객수는 비슷한데도 상파울루 공항에선 1시간 가까이 걸렸었다. 호텔로 가는 길에 택시 기사에게 공항 서비스가 좋다고 했더니 "민영화의 결과"라 했다. 가로변에는 브라질 대도시마다 사방에 널려있던 파벨라(빈민촌)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산티아고에는 소득계층에 따라 주거지가 다르기는 해도 파벨라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런 칠레를 두고 주변국가들은 ''남미의 독일''이라고 부른다. 19세기 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당시 프러시아 제도를 모방해 국가 체계를 갖추었으며, 독일계 이민이 많기 때문이다. 스페인어가 국어지만, 지식층에서는 독일어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단다. LG의 박남기 칠레 법인장은 "독일계 이민 후손인 의사에게 독일말을 했더니 갑자기 친절해지더라"고 전했다.
칠레는 이 같은 독일식 국가제도에 미국식 시장경제체제를 덧입혔다.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소위 시카고학파 미국 경제학자들을 대거 기용해 개방정책을 폈다. 그간 실패니 성공이니 하며 우여곡절이 많기도 했지만 어쨌든 칠레는 경제정책에 관한 한 개방이라는 한우물을 파온 셈이다.
칠레 경제인연합회 페드로 뮤노스 국제부장은 "국민이 포퓰리스트 정권을 선택하지 않은 점이 다른 주변국들과 다른 점"이라고 잘라 말했다. 또 군사정권이 추진했던 정책이라도 바람직한 것은 뒤를 이은 정부들이 일관성 있게 추진했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독재자 피노체트가 폈던 시장주의 경제정책을 민주화 이후 당선된 아일윈 대통령도 이어받았으며, 좌파 연합으로 당선된 현 라고스 대통령도 일관성 있게 밀고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칠레가 일관성을 가지고 추진한 경제정책의 기본 방향은 시장경제에 입각한 민영화 전략과 개방정책이다. 시장 개방으로 따지자면 칠레가 세계 1등이다. 칠레는 현재 한국을 비롯해 미국.EU 등 전세계 34개국, GDP 기준으로 세계경제의 약 70% 지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중국과도 FTA 체결을 논의할 참이다. 제조업이 없으면 나라가 망할 것으로 생각하는 게 보통이지만 이 나라는 눈 딱 감고 반대정책을 펴고 있다.
"경쟁력이 없는 산업은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 낫다.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춘 산업에 주력하고 나머지는 전세계의 물건을 싼값에 수입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칠레대학 경제학과 페트리시오 리베로스 교수는 자신있게 말한다.
그래서인지, 칠레에는 대규모 공업지대가 없다. 주요 공산품은 대부분 수입해 쓴다. 대신 포도 등 과일 농업과 임업.광업에 주력한다. 쇼핑몰에 가면 TV 등 가전제품 코너에는 삼성.LG.소니.필립스 등 세계 각국의 상품이 모두 모여 있고, 의류 코너에는 브라질.중국 등 온갖 나라 제품이 진열대를 메우고 있었다. 국내에서 10만원 가까이 하는 미국 유명 브랜드 셔츠가 5만원 정도의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관세가 없어 명품 브랜드가 다른 나라보다 싸다는 것이다.
칠레의 민영화 정책도 주목받는 사례다. 공항을 비롯해 수도.전기.통신 및 사회보장제도까지 민영화했다. 이에 따라 의료보험도 사보험이며, 연금까지 민간이 운영한다. 칠레에는 8개의 민간연금 운영 회사가 있으며, 각 개인은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연금을 납부한다.
칠레를 주변 남미국가와 차별화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부정부패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뇌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라"라고 구자경 KOTRA 산티아고 관장은 말했다. 이와 함께 세금 징수도 철저해 "영수증은 일련번호를 인쇄한 것에 일일이 세무서 도장을 받아와야 한다. 개인도 소득세를 내기 위해 이런 영수증을 인쇄해 세무서 도장을 받아 두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장기적으로 칠레 정부가 가장 치중하는 것은 교육이다. 신장범 주 칠레 대사는 "칠레는 2010년까지 전 국민을 스페인어와 영어 두 가지를 쓸 수 있도록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전했다.
"교육의 가장 큰 성과는 빈곤층 감소다. 1980년 50%에 달했던 빈곤층은 2000년 20%로 줄었다"고 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 르네 아귈라 기자는 주장했다. 이 같은 빈곤층 감소는 도시의 치안에서 잘 나타난다.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와는 달리 산티아고 도심 대부분은 밤에 걸어다녀도 괜찮다. 교육의 효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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