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나는 중앙고속터미널 부근에서 공업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5월 18일 낮에 가족들과 함께 증심사에 놀러 갔다가 왔는데, 밤 7시쯤에 광주고속 앞에서 화물차 한 대가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다음날(5월 19일) 건물 공사를 맡은 곳이 서동이라 그곳에서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공원 입구의 다리를 보니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돌멩이를 던지고 있는 가운데 공수들 2명이 시위하는 사람들을 쫓아왔다. 순식간에 공수부대원 2명은 시위군중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중의 한 명은 운좋게 포위망을 빠져나갔으나 다른 한 명은 다급했던지 광주천 풀밭으로 뛰어내렸다. 부근의 시위군중들은 그에게 일제히 돌을 던져 거의 초죽음상태로 만들었다. 그 러자 지켜보고 있던 시위군중들이 함성을 올렸다.
5월 20일 상황이 긴박해지고 무서워지자 공업사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오전 10시경 친구와 함께 도청으로 갔다. 지하도 부근에서 공수부대와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가 가톨릭센터 앞까지 진출하였다. 군중들은 도로를 발디딜 틈도 없이 꽉 메운 상태였다. 나는 구전남매일 신문사 부근 골목에 있었는데 최루탄을 발사하면 잠시 피했다가 다시 모여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하였다. 얼마 동안을 그곳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주위 사람들과 시내에서 벌어지는 시위에 관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21일 저녁으로 기억되는데 택시기사들이 공장으로 와서 쇠파이프를 잘라갔다. 그들은 중앙고속 앞에서 여러 기사들에게 '우리 영업하지 말고 시위에 참여하자'고 말하며 시위를 벌였다.
5월 21일 그날도 다른 날과 같이 오전 10시경 도청 앞으로 갔다. 시내상황이 궁금해 매일 아침 도청으로 가보았던 것이다.
도청 앞 상무관에 안치된 시신들을 보았다. 자기 가족임을 확인한 유족들은 오열을 터뜨렸고 그 외의 시민들은 분향하고 있었다.
5월 23일, 공장에서 일하는 박영철이란 사람을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효죽동 임정이라는 곳에 오토바이로 데려다주기로 했다. 오후 2시경 효천 옥천사 앞 도로에 이르렀을 때다. 계엄군 7, 8명이 총을 들이대며 오토바이를 멈추고 손을 들라고 했다. 곧바로 대검으로 허벅지를 찔렀다. 완전한 위협이었다. 그러고는 우리의 두사람을 뒤로 마주보게 하여 손을 뒤로 묶고 마구잡이로 두들겨패는 것이었다. 하도 많이 얻어터져 나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쓰고 있던 안경이 없었다. 앞이 흐릿해 안경 좀 주워달라고 했더니 옆에 있던 대위가 안경을 찾아주었다. 안경을 쓰고 보니 처음에 있던 군인들은 없고 새로운 군인이었다. 그들이 우리들 몸을 수색했다. 나는 아무 걸릴 것이 없었는데 같이 간 박영철씨 몸에서는 탄피가 나왔다. 곧바로 박영철씨는 다른 데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나는 거의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지만 겨우 박영철씨 집에 가서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그가 잡힌 곳으로 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고 군인 한 명만 있었다. 군인에게 박영철씨 소식을 물었더니 군인이 헬기에 싣고 상무대로 갔다고 했다. 할수없이 나는 혼자 걸어서 개방대 앞 가게에서 음료수를 마시고 걸어오다 백운동 철길 부근에서 지나가는 차를 탔다. 유동에서 내려 집으로 전화를 한 후 겨우 걸어서 오후 5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면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요한병원에 가서 외부 상처만 소독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별다른 치료없이 2년 동안 병상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1984년에 김기창 내과에서 늑막염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다. 이때에 몸무게를 재어보니 평소 74킬로그램이던 것이 56킬로그램으로 줄어 깜짝 놀랐다. 그 후 계속된 통증을 찜질과 한약을 달여 먹으며 이겨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사주도 마다 하지 않고 먹었다.
현재까지도 전신 마사지를 하지 않으면 통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다. 이로 인해 가게 또한 기울어져 갔다. 당시에는 여러 일꾼을 부렸는데 지금은 겨우 아내와 함께 공장일을 하는 형편이다.
5·18은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오히려 국민에게 총구를 들이밀어 국민을 우롱함으로써 일어난 일이었다. 또한 5·18 광주민중항쟁은 현재 한국민주화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광주시민의 값진 희생과 의지가 있었기에 한국이 이 만큼이라도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