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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만 한다는 가야산
정견모주 여신이 하늘신인 이비가지와 함께 해서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과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을 낳았다. 합천. 고령지방이 대가야 땅이어서 가야산이란 것과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의 붓다가야 근처의 가야성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설이 있다.
더욱이 허황옥 공주가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은 인도에서만 나는 것이므로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사람이란 것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 한다.
허황옥(許黃玉,32년~189년)은금관가야의 시조인수로왕의 왕후로,허황후또는보주태후라고도 하며스리라트나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1] [2] [3]《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아요디아의 공주로,48년에 오빠장유화상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가락국에 와서 왕후가 되었다.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았다.
생애[원본 편집]
허황후(許皇后)라고도 하며,김해 김씨와김해 허씨의 시조모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허황옥은 본래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부왕(父王)과 왕후가 꿈에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공주를 가락국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를 거느리고김해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이에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신귀간(神鬼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으며, 황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황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았으며,188년에 죽으니 나이 157세였다고 한다. 구지봉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의 고분이 허황후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허황옥이 먼 바다를 건너 남방(南方)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별로 없으나, 인도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이야기가 덧붙여졌다고 보아 본래의 시조설화가 윤색되었다는 견해가 많다. 이러한 설화는동남아시아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시호는보주태후(普州太后)이다.
-출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벗어나서 말레이반도와 인도네시아의 섬들 그리고 뭍으로 드러났던 부분을 포함하는 순다랜드에 도달한 시기는 대략 6만 년 전에서 4만 5천 년 전 사이라고 하고 호주대륙으로 진출하였다고 하니, BC 1세기 전후에는 이미 로마제국과 아랍인, 동아시아인 등이 비단길을 이동하고 지중해와 인도양 교역이 진행되던 세계사적 시대에 문화의 동방이동이 있었다는 것은 자연스런 이야기이기도 하겠으며 그리 먼 길도 아니다.
그리고도 내 생각인데 이런 역사적 기원에 그 무슨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의 대부분은 검은머리의 외쿡인이거나 다른 비민족적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허부인은 10남 2녀를 낳았는데 첫째는 가야국왕이 되고 2째 3째는 허씨의 기원이 되고 나머지 일곱아들이 부처가 되어서 가야산 7불봉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야산 상왕봉은 우두봉이라고도 하는데 넓은 너럭바위였다. 내가 간 5월 19일날은 그 상왕봉 구역에는 꽤나 센 바람이 불어서 몸을 지탱하기에 불편한 지경이었다.
바람이 심하여 여유가 없다보니 그 좋은 산하를 널리 바라보지도 못하였다.
구름과 대화하는 용천대에서 보는 산하가 꽤나 넉넉하다. 이 가야지역은 느낌에 사람살 곳이란 생각이 많이 드는 곳이기도 하다. 땅이 비옥하여 소출이 많았다는 택리지 기록이 있다고 알고 있다.
오를 때 중턱 좀 올라왔을 때인가 잠시 쉬면서 서 있는데 박새놈이 산대나무숲사이에서 이리 뛰고 저리 튀면서 잠시 짱을 보는 듯 하더니 내 앞에서 솜이불보숭이처럼 생긴 것들이 늘어져 있는 곳에서 몸을 뒤집고 하면서 아마도 집공사 재료를 다듬는 듯 하였다. 짜식이 아마도 기척을 느끼고 공사 중인 현장에서 잠시 숨었다가 내가 오르는 꼴을 보니 저 정도는 위협이 될 놈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박새가 우리 강원도에서도 집근처에 살면서 때로는 가까워진 사람들 손에서도 콩등을 받아가는 일도 있고 집안에 신발장에서 새끼를 까고 기르기도 하는 놈들이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기분이 느슨하여 좋았다.
그러면서 아마도 십년도 더 지난 어느 겨울이야기가 생각났다.
강원도 오색에 누나집이 있어서 뭐 김치도 얻거나 그래도 신세를 지는 입장이니 가끔 가야하는데 그해에 눈이 많이 내려서 설악산 등산로에 아마도 1미터는 쌓여있던 중인데 나는 뭐 무슨 생각에선지 대청봉 가자고 혼자서 입산하였다. 뭐 무슨 생각이 있긴 하였을 텐데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냥 오랜만에 산에 가고 눈도 오고 며칠 지나서 길은 다져지고 하였을 것이고 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 대청산장에서 하루 잘 생각도 났었다.
중간에 오색폭포가 있고 급경사가 있는 곳을 올라가서 쉼터인 작은바위에 걸터앉아서 잠시 쉬면서 사과 한 개를 껍질째 먹고 있었다. 그래서 입에 갖다 대는 그 순간에 이런! 깜짝이야. 어디 그 눈 속에서 박새 한 마리가 로캐트처럼 내가 입에 문 사과를 정통으로 찍고는 날아간 것이다.
짜식이 눈밭에서 아마도 며칠 굶었나 보다.
짜식이 신기하기도 하였고 저런 작은 짐승도 먹고살기 위해서 단 한방에 목숨을 거는구나!
생각하니 기약없이 유랑하는 내 자신에 대해 뒤돌아보게 되기도 하였다.
나도 먹어야 하니 몇 번 더 베어먹고는 그래도 반은 더 남은 사과덩어리를 박새놈이 날아왔던 눈밭에 던져주고는 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눈은 많았으나 날씨는 좋아서 나는 그 산행이 무척이나 푸근하고 여유로운 산행이 되었으며 산장에서도 여유롭게 하루를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 모든 생명은 사는 이유가 있고 존중받아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만년 전에 인간과 그 부속된 동물들이 지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에서 1%의 양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대는 인간과 사육되는 것들이 97% 이상을 차지하는 현실이기도 하며 가장 많이 멸종시키는 원인이 인간이다. 라는 생물학자등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면서 인류사를 되돌아 보게 된다.
최근에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있는데 이런 건들에 잘 정리한 저술이다. 인문학적 증진에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인류는 짐승을 사육하더니 곧이어 노예인간을 사육하기도 하고 이제는 기계에 의한 인간의 사육문제가 미래에 정면으로 도전받고 있지는 않은가? 돈을 버는 것이 기계라고 생각하고 인간은 그 기계를 조정하는 부품일 뿐이며 고급기계 한 대의 값보다 인생 한 개의 목숨이 더 싼 것이 현실 아닌가?
기본이 뒤바뀐 현실 세상에서 그 어떤 법률을 갖다 붙힌다 하더라도 커다란 전환은 있을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륙을 지나고 대양을 지났듯이 전쟁과 반전쟁의 부침에서도 인간 본연의 인간성을 찾으며 인간적 본성을 회복하는 길에서 멀리서부터 전진해 온 것은 엄연한 역사이다. 그러니 계속 고고!
그러면서도 이제 늙어가면서 약해져서인지 그 어떤 사상과 이념일지라도 전쟁을 예비하고 전쟁의 불구름을 안고 오는 것은 바람직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일들을 꾸미는 인종주의 파시스트, 계급주의 아주 나쁜 놈들은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물리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놈들의 연합체가 늘 내세우는 것이 정의와 자유이며 돼지처럼 법망을 뚫고 지나가고 거미처럼 거미줄에 힘없는 사람을 걸어놓고 농락하는 것이 대개의 사회현실이다. 국가란 사실 무형의 상상적 공동체이면서 기원이라는 것이 잉여물을 관리하자고 생겨난 관리자들이 철제칼을 가지고 무장하면서 관리비인 세금을 받으면서 형성되는 계급적 기반체에 그 근거를 가지고 있는것이니 그 본질상 폭력적이며 프로파간다적 신화를 함께 하는 것이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적 생명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 보장을 향한 본연의 심성인 연대성 있는 참여는 할 수 있는 만큼부터라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꼴은 되어서는 안되지 싶다!
상왕봉에서 칠불봉 갔다가 내려오는 봉우리 옆면에는 바람이 불지 않고 고요하여서 비로서 물도 먹고 과자도 먹었다. 전라도 사람 둘이 지나가면서 ‘여긴 바람이 불지 않네요!’ 하길래 ‘그래서 쉽니다’ 하였다. 이날 산에서 5인을 만났다. 그래도 이런 산에서는 사람들이 뭔지 모르게 경건해져서인지 사람을 귀하게 만나선지 인사는 서로들 지나치면서라도 하게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어디든가 다니다 보면 바람도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즉시 응대 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부처도 알고하는 죄업보다는 모르고 하는 죄업이 더욱 무겁다고 하였다. 인식하고 행동하면 아무래도 엉뚱한 문제로부터 조금은 멀리할 수 있는것이지 싶다.
내려오면서 보니 곰이 나타나기도 하는 곳이며 멧돼지가 자주 나타난다는 경고가 가끔 붙어있었는데 곰이나 돼지같은 맹수가 나타날 때에 대한 갑작스런 만남이 있을 때의 요령 등을 안내 하였는데 한겨레신문의 보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 산에서 반달곰을 만난다면?
최근 지리산 반달곰이 김천 수도산으로 두 차례나 이동했다가 포획돼 관심을 끌었다. 지리산과 주변 산에서 곰과 마주칠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2014년엔 지리산 벽소령 대피소에서 탐방객들이 실제로 반달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곰은 100m를 7~8초에 주파할 정도로 민첩하다고 한다. 곰과 마주칠 경우 행동요령은 이렇다. 멀리서 곰이 다가올 경우엔 호각을 불거나 큰 소리를 내 인간 존재를 알린 뒤, 재빨리 그곳을 벗어난다. 갑자기 곰과 마주쳤을 땐 시선을 피하지 말고 천천히 곰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행동을 크게 하거나 도망치면 곰의 공격을 유발할 수 있다. 가까이에서 공격해올 경우엔 큰 물건이나 도구를 사용해 적극 저항해야 한다. 이미 저항이 어려운 상태라면 머리 등 급소를 보호하는 자세로 엎드려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미리 곰과 마주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지정된 탐방로를 이용하고, 2인 이상 동행하되 방울 등을 달아 인기척을 내도록 한다. 지정된 장소 이외에서의 비박·야영·취사는 매우 위험하다.
이병학 선임기자leebh99@hani.co.kr
아무래도 혼자하는 산행이다 보니 내심 두려움이 따라 다니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전에 쓰던 픽켈 등은 가지고 다녀야 하나 생각도 하였다, 그러면서 인터넷으로 보았던 러시아 여자꼬마가 곰에게 물리면서 엄마에게 보냈던 통화와 편지 내용이 생각나면서 어휴!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이게 뭔지 안전문제에 부족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고 생각하였다.
물론 산악구조대가 있고 출동 대기하는 관계부문 일꾼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이지역 같은 지방에서는 어떻게 운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하는 경우에 생각하자면 미국 등은 자신들의 방어수단인 총을 가지고 간다던지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러하지 못하고 실지로 멧돼지 등의 피해가 있으므로 관심지역 등에 입산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전 등록하고 최소한 짐승을 몰아낼 수 있는 커다란 호루라기, 또는 강한 폭죽 등을 대여하고 반납하는 시스템을 갖는 것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제 우리도 선진국이 되었으니 선진국 하는 것들을 따라 배우거나 그 옛날 고래적에 꼭 누구누구가 뒤지고 자빠지고 해야 몇일 북새통 떨다가 꼬리 짜르고 흐지부지 되는 일들은 그만 하였으면 좋을 듯 하다. 이게 사실은 산에 다니고 어디 길거리 지나다니고 그 무슨 아파트 현장에서 돌에 깔려서 죽는 사람들이 그저 선머슴에 지나지 않는 하층민이기에 개선이 더디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괜히 누구 곰에 물려서 팔다리 뜯기고 하기 전에 ‘중대재해처벌법’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적용여부도 확인하고 미리미리 사고 예방 체계를 구축하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물론 내가 7시에 입산할 때에 국립공원관리소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그들은 9시에 출근한다고 하였으나 그런데 그러려면 야근자도 필요하고 인력충원도 하고 각종 장비등 마련해야할 텐데 그 무슨 예산이 어쩌고 하면서 어영비영 할 수도 있겠다. 이런 건은 우리과에서 국가개선점을 요약정리하여 관할청 및 부서에 제안하는 일들을 해 보는 것도 졸업하는 기수마다 모두들 합심해서 하는 것도 괜찮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슨 기계화다 경영이다 하면서 사람을 줄이는 것이 마치 잘살게 되는 공장경영이니 뭐니 하는 가치가 세상을 지배하다 보니 아직은 꼭 사람이 필요하거나 안전상 있어야 할 지점에 허점이 보이고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이 더욱 많은 시대적 가치로 되고 있다.
‘너나 잘해라’ ‘나만 아니면 돼’ 이런 말들이 유행하는 현실이 개인주의의 극한으로 가면서 오히려 사회적 생산성을 훼손하는 현상이 아쉽기만 하다. 사람은 유기적으로 공동체적으로 신뢰성에 기반한 사회적 자본이 있어야 잘 살 수 있다고 배웠다.
그러면서 해인사에 도착하면서 거기에 사무장으로 있다는 그 전에 직장 동료이며 은행 지점장 출신인 조 선생을 찾았다. 산대나무 숲을 지나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하였지만 사무장 친구를 만나면 혹시나 팔만대장경을 지키는 경비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으면 어떡해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호사도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좀 쉬고 있으니 가을쯤 뭐 하면 어떨지 대답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기도 하면서 그러면서도 절이란 곳이 속이고 파벌서열이 혼란한 경험도 있어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고승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사무장이 그런 제안을 한다고해도 아주 눈꼽 만큼의 기분 좋은 표식을 내지는 말자고 내심 다짐하였다.
절에 왔더니 조 선생은 몇 개월 전에 떠났다고 하였다. 나의 가긍한 꿈은 그 상왕봉 밑에서 구름과 논다는 용천대의 구름 속으로 흩어지고 내가 마주했던 센바람에 떠밀려 가야산 저 너머로 던져졌던 것이었다. (끝)
22.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