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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재공의 부(考) 묘갈명 탐구
1.贈領議政柳公誠吾 墓碣銘
(증영의정류공성오 묘갈명)
高麗氏初基文化柳大丞車達大顯自後凡以柳爲氏者皆本於大丞有諱寬本朝
(고려씨초기문화류대승차달대현자후범이류위씨자개본어대승유휘관본조)
右議政號夏亭公其八世孫也諱誠吾字近夫公寬裕朴素外若無能而內實辨近
(우의정호하정공기팔세손야휘성오자근부공관유박소외약무능이내실변근)
居家與官惟理之視事所後考縣監公諱洬妣洪氏情禮無闕所生考判官公諱浚
(거가여관유리지시사소후고현감공휘속비홍씨정례무궐소생고판관공휘준)
沒時公年已衰而持制不怠妣李氏前卒壯歲益可觀其受焉及其爲官惟奉法愛
(몰시공년이쇠이지제불태비이씨전졸장세익가관기수언급기위관유봉법애)
人是務民愛指如父母負訟者亦退無一言而厭於心故觀察使李公泰淵一以人
(인시무민애지여부모부송자역퇴무일언이염어심고관찰사이공태연일이인)
所難蔽者委之御史呂公聖齊衰以其政專在蠲役盡誠賑飢頌譽無異口而同春
(소난폐자위지어사여공성제쇠이기정전재견역진성진기송예무이구이동춘)
宋公浚吉至聞於筵席 上嘗賜品服以寵之德山時給倭縞鶴以後期當免民
(송공준길지문어연석 상상사품복이총지덕산시급왜호학이후기당면민)
老少男女畢出至齋沐禱神奔走畢羅竟得無事在燕岐飢民襁屬日以千數其
(노소남녀필출지재목도신분주필나경득무사재연기기민강속일이천수기)
疾疫者雖夜心問其死生以故無不感動時朝家以民之立碑多出於諛而禁之
(질역자수야심문기사생이고무불감동시조가이민지입비다출어유이금지)
燕民不敢遠則磨崖而紀公惠後聞公訃相聚其下三日哭奠焉公嘗惟曰庶人
(연민불감원칙마애이기공혜후문공부상취기하삼일곡전언공상유왈서인)
在官者古有常祿後世無是而欲其無邪私難矣故到官必爲之制其産而嚴禁
(재관자고유상록후세무시이욕기무사사난의고도관필위지제기산이엄금)
其舞弄要索民亦賴之公少績文中癸酉士旣屢擧不第則嘆曰白首場屋恥也
(기무롱요삭민역뢰지공소적문중계유사기루거불제칙탄왈백수장옥치야)
不復赴公車三爲寢郞一爲督郵而內資奉事典設別檢皆其所歷也公以賢能
(불복부공차삼위침랑일위독우이내자봉사전설별검개기소력야공이현능)
久困於詷遷朝廷嘗錄夏亭公淸白超陞公六品職在內爲翊衛司衛率形曺佐郞
(구곤어동천조정상록하정공청백초승공육품직재내위익위사위솔형조좌랑)
外則德山懷德和順也末爲燕岐則又不欲屈首吏役卽歸廣州之栗峴里公治績
(외칙덕산회덕화순야말위연기칙우부욕굴수이역즉귀광주지율현리공치적)
旣著朝庭將畀以大洲牧 崇禎甲寅五月十二日卒京第春秋六十七葬于
(기저조정장비이대주목 숭정갑인오월십이일졸경제춘추육십칠장우)
陽川東面坤坐艮向之原祖諱夢翼僉正曾祖諱用恭監察後以子尙運貴
(양천동면곤좌간향지원조휘몽익첨정증조휘용공감찰후이자상운귀)
贈公議政府左叅贊夫人朴氏封 贈視公命夫人考錦溪君東亮 宣廟朝名臣
(증공의정부좌참찬부인박씨봉 증시공명부인고금계군동량 선묘조명신)
夫人婦德克備三男長卽尙運今年平安道觀察使尙載文科翰林尙輿夭女適別坐
(부인부덕극비삼남장즉상운금년평안도관찰사상재문과한림상여요여적별좌)
申暹次李徵善觀察生鳳瑞鳳輝鳳逸鳳協鳳采翰林生鳳庭鳳齡申別坐男志華
(신섬차이징선관찰생봉서봉휘봉일봉협봉채한림생봉정봉령신별좌남지화)
處華夢華李徵善有系子德邵余懷德人懷實公之桐鄕而余偏受習池好今觀察奉
(처화몽화이징선유계자덕소여회덕인회실공지동향이여편수습지호금관찰봉)
玄石朴公世采狀以幣請銘余與邑人久碑於口不但以石而已奚敢辭公之善行
(선행봉현석박공세채상이폐청명여여읍인구비어구부단이석이이해감사공지)
不可勝記而有一羽觀鳳者公有駿馬隣人以善價鬻之纔數日而斃卽盡以其價還
(불가승기이유일우관봉자공유준마인인이선가죽지재수일이폐즉진이기가환)
之此古之或難者其所存心如此宣其無往而不善也銘曰 事修於家職得於官何
(지차고지혹난자기소존심여차선기무왕이불선야명왈 사수어가직득어관하)
必今人在古亦難而終下僚君子攸歎遂尙後人以佐興運是謂天定勉哉嗣訓
(필금인재고역난이종하료군자유탄수상후인이좌흥운시위천정면재사훈)
領中樞副使致仕奉朝賀宋時烈撰
영중추부사치사봉조하송시열찬
判敦寧府事李正英書
판돈령부사이정영서
고려의 처음 터를 닦을 때에 문화 류대승 차달이 크게 들어났다. 그 후로 모든 류로 성을 하는 이는 다 대승공에 근본한다. 휘 관이 계시어 본조에 우의정으로 호는 하정이니 공은 그의 8세손이다.
공의 휘는 성오요 자는 근부이다. 공이 관유(寬裕)하고 소박함으로 겉으로는 무능한 것 같으나 안으로는 실로 변근(辨近)함이 분명하므로 집에나 관에 있어서 범사(凡事)를 다 이의(異義)로 행하다.
양부인 현감공 휘 속과 비 홍씨를 섬길새 정과 예를 극진히 하여 빠짐이 없었으며 생부인 판관공 휘 준이 몰(沒)하니 그 때에 공의 나이 이미 쇠로(衰老)하였지만 예제(禮制)를 갖추어 게을리함이 없었던바 비(妣) 이씨는 앞서 공이 성장한 해에 졸(卒)하였으니 더욱 그 행실을 가히 볼지로다.
그 임관에 미쳐서는 오직 법을 받들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힘쓰니 백성이 또한 사랑하기를 부모같이 하였으며 패송(敗訟)한 자라도 또한 물러가서 일언도 없고 마음에 싫어함이 없었다. 이러므로 관찰사 이공(李公)봉연이 한결 같이 사람이 결단하기 어려운 것은 다 위탁하고 어사 여공(呂公)성제는 그의 정치가 오로지 복역을 감소하고 진기(賑飢)에 주력함에 있음으로 송성(頌聲)이 일구동사(一口同辭)로 적적(籍籍)함을 쇠양(衰揚)하고 동춘송공 준길은 경연석에서 상주(上奏)하니 상(上)이 품복(品服)을 하사하여 총애하시다.
덕산원으로 있을 때 왜(倭)에게 흰 학을 준 이후 면직을 당하게 되니 백성이 남녀노소가 출동하여 제계(齊戒) 목욕하고 무사하기를 신명께 기도(祈禱)하여 분주(奔走)함에 이르니 마침내 무사함을 얻었다.
연기원으로 있음에 기민(飢民)이 연이어 끊이지 않고 날로 천명씩이나 되는데 그 가운데 병든 사람은 비록 밤중이라도 반드시 그 사생(死生)을 물었다. 이러므로 감동치 않는 이 없었다.
당시에 국가에서 백성들이 비(碑)를 세우는 것이 많이 아첨한데서 나옴이 많다하여 금지를 하니 연기군민이 감히 어기지 못하고 단애(斷崖)를 갈아 공의 은혜를 기록했더니 후에 공의 부고(訃告)를 듣고 서로 그 단애하(斷崖下)에 모여 3일을 곡(哭)하고 제사를 지내었다.
공이 일찍 말하기를 서인(庶人)이 관직에 있는 이가 옛날에 상록(常祿)이 있었지만 후세에 없엔 것은 또한 그 사특함을 없애고자 함이니 사생활은 곤란하다. 그러므로 관에 이르면 반드시 후세를 위하여 그 산업을 제정하고 또 그 농간(弄奸)함이 토색(討索)함을 엄금하니 백성들이 또한 크게 힘 입었다.
공이 소년에 문업(文業)을 숭상하여 계유(1633)에 진사에 합격하고 그 여러번 문과에 응시하였으나 합격치 못하니 탄식하여 이르기를 『백수로 응시함이 수치(羞恥)이다』하고 다시는 과장에 나가지 않았다. 세번 참봉을 지내고 한번 찰방을 지내고 내자시참사(內資寺奉事)와 전설사별검(典設司別檢)을 지냈으니 다 그의 역임(歷任)한 바이다.
공이 현능(賢能)함으로서 오래 말직에 곤궁(困窮)하더니 조정에서 일찍이 하정공의 청백을 녹(錄)함으로 공을 6품직에 승진시키니 내(內)로는 익위사위솔(翊衛司衛率)과 형조좌랑이 되고 외(外)로는 덕산과 회덕과 화순에 원이 되고 끝으로 연기원이 되어서는 이역(吏役)에 굴하지 싫어서 곧 광주(廣州)의 율현리(栗峴里)로 돌아 왔다.
공의 치적이 이미 나타남에 조정이 장차 큰 고을 목사를 임명하려 했는데 숭정갑인(崇禎甲寅,1674년) 5월 12일 경제(京第)에서 졸(卒)하니 향년 67이라 양천 동면 곤좌간향(坤坐艮向)의 언덕에 안장하다.
祖의 휘는 몽익이니 첨정(僉正)이요 증조의 휘는 용공이니 감찰이다. 후에 아들 상운의 귀로 공에게 의정부좌참찬의 증직이 내리고 부인 박씨의 봉(封 )과 증(贈)은 공의 직에 의하다. 부인의 고(考)는 금계군 동량이니 선조조(宣祖朝)의 명신(名臣)이다. 부인은 부덕이 능히 구비하였다.
3남을 출생하니 장은 곧 상운이니 지금 평안도관찰사요 상재는 문과로 한림이요 상여는 일찍 죽고 여는 별좌 신섬과 이징선에게 출가하였다.
관찰이 봉서와 봉휘와 봉일과 봉협과 봉채를 생하였고 한림이 봉정과 봉령을 생하였고 신별좌의 남(男)은 지화와 처화와 몽화요 이징선은 계자(系子) 덕소가 있다.
나는 회덕 땅 사람이라 실로 공이 고을살이 한 곳인데 내가 유달리 습지(習池)의 좋음을 받었더니 이제 관찰이 현석 박공세채가 지은 행장을 받들고 폐백(幣帛)으로써 명(銘)을 청하니 내가 읍인(邑人)으로 더 불어 공의 덕의(德義)를 칭송한지 오래 되었지만 석비(石碑)로 못했을 따름이라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공의 선행을 가히 다 기록치 못하니 일우(一羽)로도 봉(鳳)을 알 수 있으니 공이 준마(駿馬)가 있었는데 이웃 사람에게 선가(善價)로 팔았더니 겨우 수일만에 폐사(斃死)하거늘 곧 그 가격을 다 돌려주니 이는 고인(古人)도 혹 어려운 것이라 그 마음가짐이 이 같으니 그 마땅히 가는 곳마다 선(善)치 않음이 없도다. 명(銘)에 이르노니
사행(事行)은 집에서 닦았고 직(職)은 관(官)에서 얻었도다.
어찌 꼭 지금 사람뿐이랴 엤적에도 또한 아렵도다.
하료(下僚)에서 그쳐 버리니 군자의 탄식한 바로다.
드디어 가상한 손 후인이 흥운(興運)을 도우니
이른바 하늘의 정함이니 이 훈계를 힘쓸지어다.
※자료 출처 : 문화류씨세보(무자보) 총목 666쪽
문화류씨하정공파보 1권 문현편 164쪽
2. 증영의정휘성오묘갈명 해설
① 廣州之栗峴里는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방죽마을 밤고개(栗峴:일명 방고개)로 현재 서울특별시 강남구 율현동에서 세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밤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밤고개(율현)라고 하였는데 음(音)이 변하여 반고개, 방고개가 되었습니다. 이 고개는 휘 성오선조가 낙향하였고 밤나무는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約齋 柳尙運이 심었다고 합니다.
※ 족보에 휘 성오 묘지는 양천군 장군소면 은행정리 곤자 쌍분으로 송시열이 묘갈문을 짓고 이정영이 글씨를 쓰고 박세채가 행장(行狀)를 짓고 1674년(甲寅) 돌아가시고 1968년 戊申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설매치로 이장합니다.(양천 동면에서 양평군 장군소면으로 이장한 기록은 찾을 수 없습니다)
상재(尙載,사간원대사관)의 5대손 휘 휘범(彙範,대승공 27세)께서 정조11년 이곳에서 태어 낳고 묘소는 광주군 대왕면 율현(현 서울 강남구 율현동) 선영 원주공(原州公, 휘 상재 아들 휘 봉령鳳齡)의 묘아래 산기슭(하록下麓)에 모셨는데 1968년 陽川郡 將軍所面 銀杏里(경기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설매치)로 이장했습니다.
② “숭정갑인(崇禎甲寅,1674년) 5월 12일 경제(京第)에서 졸(卒)하니 향년 67이라 양천 동면 곤좌간향(坤坐艮向)의 언덕에 안장하다”에서 1674년 서울집에서 돌아가시니 陽川郡東面은 太宗14年(1414年) 陽川縣이 衿川郡으로 1963年 서울市에 編入하였고 현재 시흥동 일대입니다.
③ 柳尙載(1644~1703, 휘 성오 2남, 약재공 동생)은 1661년(현종2) 현종2(1661)년 辛丑 9월 生親判官公(휘 준, 司憲府監察, 尙衣院判官 제수) 喪을 당하여 나주 모산촌에 머물었고 현종7년(1666) 진사급제하고 현종15년(1674,갑인) 의정공(하정파보 194쪽, 휘 성오)상을 당하여 1675년(乙卯,숙종1) 백씨(伯氏,맏형,휘상운)을 따라 모산(茅山) 옛집으로 와서 예제(禮制)이 따라 거상(居喪,상중에 있음)하였고(※17세과 31세에 모산에 계셨다는 것임) 병진(1676) 상복을 벗고 숙종9년(1683) 증광문과 급제하고 1684년 한원(翰院)에 선임되고 숙종12년(1686)년 예문관검열, 감찰, 예조병조좌랑, 1688년 사간원정언 경상도도사 역임, 숙종15년(1689)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세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 서인들이 반대를 하는 것을 빌미로 서인의 횡포를 억누르고자 서인을 실각시키는 한편, 남인들을 다시 중용하게 하는 왕권강화를 위한 還國 발생하자 형님 휘 상운과 함께 광주 율현촌(廣州栗峴村)으로 피신하여 형제가 한집에 거처하였고 숙종16년(1690) 해남현감에 제수되고 19년(1693) 관직을 그만두고 나주 모산촌에 돌아와 있었으며 1691년 정언 수찬 교리 필선 보덕 사간 집의 사성 제용감정 동학교수 역임, 1695년 응교 사인 동부승지 우부승지를 지낸후 부제학, 부평부사 병조참지 등 역임하십니다.
④ 송시열 : 사교당 휘 류준의 청풍원 묘갈명을 짓고(撰) 사교당 아들 준의 사위 송기태(宋基泰)가 송시열 아들입니다.
이정영(李正英)은 동지부사 이조판서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전서(篆書)와 주서(籒書 : 大篆)에 뛰어났으며 시호는 효간(孝簡)입니다.
3. 금계군박공싯장(錦溪君朴公諡狀,금계군박공시호를 청하는글)
금계군 시호를 청하는 諡狀을 이관명(영조조 좌의정.1661-1733년)이 지었으며 싯장중에 증영의정 관련 부분(반남박씨문중자료)
① 공의 처음 호(號)는 오창(梧窓)이고 노년에는 봉주(鳳洲)라고 하였다. 아내인 민 부인(閔夫人)은 좌승지(左承旨) 민선(閔善)의 딸로, 종당(宗黨)에서 여사(女士)라고 칭찬하였는데 공보다 일찍 죽었다. 네 아들을 기르니 장남 미(瀰)는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고 차남 의(漪)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냈으며 다음은 유(濰)이고, 그 다음은 자(澬)이다. 세 딸은 판서(判書) 이명한(李明漢), 첨정(僉正) 홍처심(洪處深), 현감(縣監) 류성오(柳誠吾)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의 아들 표(滮)는 참봉을 지냈다.
② 류성오의 두 아들은 영의정을 지낸 류상운(柳尙運)과 대사간을 지낸 류상재(柳尙載)이고, 두 사위는 별좌(別坐)를 지낸 신창(申㫤)과 이징선(李徵善)이다.
※ 족보를 연구하다 보면 구보와 신보의 글자(文字)의 다른 점입니다. 문화류씨족보에는 류성오 사위 신섬별좌(申暹別坐)이지만 반남박씨 족보에는 별좌신창(別坐申㫤)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징선은 같은 글자입니다.
③ 증영의정휘성오와 아들 휘 상운 휘 상재께서 살았던 서울 강남구 율현동과 영암군 신북면 모산에 옛집의 위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4. 약재공 출생지
① 좌랑 증영의정 성오(佐郎 贈領議政 誠吾)의 장자로 인조(仁祖) 14년 丙子 12월 22일에 제천 묵계촌(堤川 墨溪村)에서 태어났다(모강공파보 문헌편 51쪽,1992년 발행).
② 후금은 정묘호란(1627년)의 약속 위반을 명분으로 청이라 국호를 고친 후 인조 14년 병자년 1636년 음력 12월 2일, 청태종은 4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공하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킵니다. 12월 8일 압록강을 도하했고 청군은 단 4일 만에 개성에 도착했고 12월 13일 황주목에 도착했는데 청 선봉대들은 전투를 회피하고 서울로 급행했고 청군이 12월 23일 황주목에 도착하였고 12월 30일 양평에 도착했고 1637년 1월 2일 청군은 한성에 들이닥첬습니다. 단 8일 만에 한성을 내주었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으나 포위된지 45일 만에 인조는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에서 항복랍니다(연려실기술 제25권中).
③ 의정공 휘 성오는 청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도(모산)로 피란중에 휘 상운은 병자호란 때인 1636년 12월 22일 충북 재천 묵계촌 탄생하셨는데 한양마포나루에서 배로 충북 충주시 앙성면 묵계나루터(목계나루)로 가는 피난길에 증 영의정 휘 성오선조께서 묵계나루를 지나가셨는지? 알 수 없으나 제천시에 문의한 결과 충북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는 있으나 묵계는 없다고 합니다.
④ 제천 묵계촌에서 약재공을 출산하여 모산으로 오셨다는 것인데 하정공 후손들이 충주에 살고 있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고 모산 산정에 거주했다는 기록은 영팔정 현판에 있습니다.
⑤ 문화류씨 모강공파보 1권에 의한 출생지와 성장지
⑥ “상재(尙載,사간원대사관)의 5대손 휘 휘범(彙範,대승공 27세)께서 정조11년 이곳에서 태어 낳고 묘소는 광주군 대왕면 율현(현 서울 강남구 율현동) 선영 원주공(原州公, 휘 상재 아들 휘 봉령鳳齡)의 묘아래 산기슭(하록下麓)에 모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약재공 후손들이 상당기간 동안 서울 강남구 율현동에 살았다고 봅니다.
휘 휘범(彙範)께서 대승공 27대이시며 정미생(1787년,정조11)~무진졸(1868년,고종5)으로 일제 강점기를 거처 1968년 경기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설매치로 이장하였기에 1950년 6,25 전후까지 율현동에 거주한 것으로 봅니다.
첫댓글 류상운은 "경기금석대관"이라는 책에 그 묘갈명(墓碣銘)이 나온다. ("류상운묘갈") (묘갈은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돌비석을 말함; 내용에 류상운이 자신의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해서 묘갈에 글을 새긴다는 말이 있음) 그것을 보니 1712년 10월에 건립되었다고 나오고, 둘 다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과 최석정(崔錫鼎)이 글을 쓰고 글씨를 썼다고 나옵니다.
휘 희저 선조가 서울 숭례문(남대문) 남방에서 태어나셨기에 아버지(考) 고양공 휘 순행 선조가 남대문에 사셨고 남대문 밖 사제(집)은 차남 희정(영암공)이 사셨기에 아들인 손자 휘 용검(用儉)은 성종21년(1489) 남대문밖 사제에서 출생하신 곳으로 보이며 장남 휘 희저(부제학공)은 성남에 사셨기에 아들 휘 용공(모강공)께서 성남에서 출생합니다.
한편 하정공은 동대문밖 창신동에 사셨고 둘쩨아들 휘 중문과 넷째아들 휘 이문 후손들이 황해도 구월산 부근에 사셨고 특히 휘 이문(만호공) 후손들이 할아버지 휘 안택 묘소와 200보(약 1km)에 있는 대송공묘를 관리한 위토답 현황이 무자보 총목 51쪽에 있으니 한번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