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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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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 한씨가 묻힌 경릉(敬陵) 봉분 및 석물 | |
지위 | |
세자빈 | |
재위 | 1455년 ~ 1457년 |
전임자 | 빈궁 권씨(현덕왕후, 현덕빈) |
후임자 | 빈궁 한씨(장순왕후, 장순빈) |
왕비 | |
재위 | 1470년 ~ 1475년(진봉)(인수왕비) |
왕대비 | |
재위 | 1475년 ~ 1494년 |
전임자 | 정희왕후(자성왕대비) |
후임자 | 정현왕후(자순왕대비) |
대왕대비 | |
재위 | 1494년 ~ 1504년 |
전임자 | 정희왕후(자성대왕대비) |
후임자 | 문정왕후(성렬대왕대비) |
이름 | |
별호 | 정빈 한씨, 수빈 한씨, 인수왕비, 인수왕대비, 인수대왕대비, 자숙대왕대비 |
존호 | 인수자숙(仁粹慈淑) |
휘호 | 휘숙명의(徽肅明懿) |
시호 | 소혜(昭惠) |
신상정보 | |
출생일 | 세종 19년(1437) 9월 8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연산군 10년(1504) 4월 27일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경춘전 |
능묘 | 경릉 |
부친 | 서원부원군 한확 |
모친 | 남양부부인 남양 홍씨 |
배우자 | 추존왕 덕종(의경세자) |
자녀 | 월산대군 (1454년 출생), 명숙공주 (1455년 출생), 성성종종 (1457년 출생) |
종교 | 불교 |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 1437년 10월 7일(음력 9월 8일) ~ 1504년 5월 11일(음력 4월 27일)는 조선 초기의 세자빈이자 덕종(德宗, 추존왕)의 왕비이며 시호는 인수자숙휘숙명의소혜왕후(仁粹慈淑徽肅明懿昭惠王后)이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수양대군의 큰아들인 도원군(의경세자, 덕종)과 혼인하여 군부인에 봉작되었으며, 1455년(세조 즉위년)에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왕위로 즉위하여 자신은 맏며느리로서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갔으나, 1457년1469년에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등극하고, 자신도 궁궐에 다시 들어가 곧 왕비로 진봉되었다가 1475년(성종 6년) 왕대비에 올라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의정부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양절공 한확(西城府院君 襄節公 韓確)과 남양부부인 홍씨(南陽府夫人 洪氏) 여섯째 딸로, 본관은 청주내훈불교 옹호론자로 불교 억압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이 때문에 당시 조정의 신하들과 4차례의 격한 논쟁을 벌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금승법(禁僧法)[1] 과 그녀가 추진한 봉선사
그녀는 연산군의 할머니로도 유명한데,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생모가 되는 윤씨[2] 1504년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위치한 경릉
한씨의 아버지 한확은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내면서 명나라
또한 한씨의 큰 고모는 명나라 제 3대 황제 영락제 성조의 후궁이었던 강혜장숙여비(康惠莊淑麗妃)였으며, 작은 고모 역시 명나라 제 5대 황제 선덕제 선종
한편 세조실록의 의경세자 행장에 나오는 숙덕(淑德)이라는 이름이 그녀의 본명인지, 다른 별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450년, 문종이 병약하고 어린 세자사이에서 김종서와 대립하고 있었던 수양대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해서 큰아들인 도원군과 세도가 한확평원대군
한씨의 나이 14살에 수양대군의 큰아들 도원군과 혼인(1450)하여 도원군부인(桃源君夫人)가 되었다. 남편 도원군이 당시 대군(大君)의 적장자로 아직 승습(承襲)하지 않았고, 종친부에는 정의대부(正義大夫)로 기록된 점으로 보아 한씨의 품계는 정2품(正二品) 군부인(郡夫人)임을 알 수 있으나 작호는 조선왕조실록[3]
1455년,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하고 아들인 도원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자신도 왕세자빈[4] 그해 동궁(東宮)에서 두 번째 자녀인 태안군주를 낳고, 익익년(翌翌年) 1457년에는 세 번째 자녀인 자산군
왕세자빈 한씨는 젊어서부터 빈틈이 없고, 시부모(세조와 정희왕후
시동생이 되는 해양대군(예종)이 남편의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면서 시아버지 세조로부터 정빈(貞嬪)의 작호를 받아 정빈 한씨(貞嬪 韓氏)가 되었으나, 을유년인 1465년에 세조가 교지를 통해 원경왕후[5]
한씨는 왕세자빈
세조가 맏며느리 한씨에게 특별히 궁궐에서 살아도 좋다고 하였음에도 이를 사양하고 두 아들과 궁궐을 떠나려하자 이를 가엽게 여긴 세조는 그녀를 위해 특별히 집을 지어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덕수궁선조가 임진왜란
1467년[6] 그리고 병조(兵曹)에 명하여, 군사 10명을 보내어 수빈이 요양하고 있는 계양군부인 집을 지키고 호위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 달 뒤에는 정희왕후와 동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엄청난 양의 곡물과 땅을 하사하였다.[7][8][9]
남편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중전의 꿈을 접어야만 했지만 정치적 야심이 대단했던 그녀는 당대의 권신 한명회의 넷째 딸 한씨
또한 신숙주 등과도 긴밀하게 교류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예종이 승하한 후에 한명회의 강력한 추천과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지지에 힘입어 당시 원자였던 예종과 안순왕후의 아들 제안대군
수빈 한씨의 시아버지 세조가 한씨에게는 시동생이 되는 해양대군(예종)에게 양위하고 곧 승하하였다. 왕의 맏며느리에서, 왕의 형수로 처지가 바뀌었지만 영향력과 위세는 여전히 대단했다.
예종[10] 엽관운동(獵官運動), 즉 분경(奔競)이 심했었던 1469년[11]
또한 수빈의 동생 한치의(韓致義)는 그녀의 아우라는 이유만으로 당상관(堂上官)이 되어 공신의 호를 받고 청성군(淸城君)에 올랐으며, 현재의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12]
이 시기에 그녀가 정치적인 행보를 이어나간 것은 시어머니가 되는 대비 윤씨와 함께 숭은전(崇恩殿)에 나아갔을 때였다.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 은천군(銀川君) 이찬(李穳), 사산군(蛇山君) 이호(李灝), 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 강양군(江陽君) 이융(李瀜), 곡성군(鵠城君) 이금손(李金孫), 모양 도정(牟陽都正) 이직(李稙), 청송군(靑松君) 심회(沈澮), 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윤사흔(尹士昕), 우찬성(右贊成) 노사신(盧思愼), 호조 참판(戶曹參判) 한치인(韓致仁), 병조 참판(兵曹參判) 한의(韓嶬) 등의 수많은 공신들과 종친, 외척들이 그녀와 대비를 호위하였다.[13] 이것은 당시 그녀의 위세와 영향력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이다.
시 동생 예종이 재위 기간 14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죽자 조정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논의가 있었다. 마땅히 예종의 맏아들이 되는 원자[14]
수빈 한씨의 아들 자산군이 성종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그녀는 아들의 인사를 받지 못하였다. 임금의 어머니(모후)가 되므로 마땅히 인사를 받아야 했지만, 성종은 생부인 의경세자가 아닌 작은아버지가 되는 예종의 아들로 입적하여 왕위(王位)의 대통(大統)을 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수빈 한씨가 성종의 어머니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
다만 국왕의 생모가 되므로, 궁궐에 들어와 살았는데 그녀의 호(呼)를 붙여 수빈궁(粹嬪宮)이라 했다.[15] 이전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저(덕수궁
수빈 한씨가 성종의 어머니임에도 인사를 받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지자 조정에서 이 일이 논의 중에 있었다. 문제는 그녀를 왕비로 추숭하느냐, 왕대비로 추숭하느냐였다.
이 문제는 그녀의 남편인 의경세자를 왕(王)으로 추숭하느냐, 왕(王)과 더불어 종(宗)으로 추숭하느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의경세자를 단순히 왕(王)으로 추숭하면 한씨는 왕비가 되는 것이었고, 의경세자를 왕(王)과 더불어 종(宗)으로 추숭하면 한씨는 왕대비가 되는 것이었다.[16]
한씨를 왕비(王妃)로 추숭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신들은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신숙주,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구치관(具致寬),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 등으로 전부 영의정과 부원군의 작위를 갖고 있었던 영향력 있는 공신들이었고[16]
한씨를 왕대비로 추숭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신들은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 양성군(陽城君) 이승소(李承召) 등이었다.[16]
힘있는 권신들의 생각이 모두 "수빈 한씨를 왕비로 추숭해야 한다."로 쏠렸으므로 신숙주[16]
결국 조정의 논의 끝에 수빈 한씨가 인수 왕비(仁粹王妃)가 되어 아들 성종의 인사를 받을 수 있었으나 그녀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왕비라 함은 왕(王)의 부인을 일컫는 것인데, 한씨는 왕(王)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그녀의 입장에서는 왕대비가 되어야 마땅했다. 바로 인혜 왕 대비(仁惠王大妃)와의 서열 문제가 화두가 되었다. 왕실에는 성종의 할머니가 되는 자성 대왕 대비 윤씨(정희왕후), 법적 어머니이자 숙모가 되는 인혜 왕 대비 한씨(안순왕후), 그리고 친어머니이지만 법적으로는 큰어머니가 되는 인수 왕비 한씨 이렇게 3명의 윗전이 있었다. 왕실 서열 1위는 할머니가 되는 자성 대왕 대비 윤씨(慈聖大王大妃 尹氏)로 문제가 없었으나 왕실 서열 2위가 인혜 왕 대비냐 인수 왕비냐를 놓고 조정에서 논의가 있었다.
당시 사관(史官)이 성종에게 아뢰길 "예종 비였던 인혜 왕 대비는 당시 왕비[17]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는 대왕대비 또한 예조[18]
인수왕비 한씨가 왕실 서열 2위로 올라섰지만, 그녀에게는 왕대비1474년[19]
왕실에 세 윗전 자성대왕대비, 인수왕대비, 인혜왕대비를 모시기 위해 창경궁
1494년, 성종이 승하하고 왕세자 융이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조선의 제10대 임금 연산군대왕대비[20]
왕세자 시절 자신이 정현왕후의 아들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연산군은 즉위 이후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게 되고 급기야는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사(賜死)시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철퇴로 내리쳐 죽인 뒤, 그 시체를 찢어 젓갈로 만들어 야산에 뿌리도록 했고 그 뒤에도 귀인 정씨의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21]
인수대왕대비는 이미 죽기 서너 달 전인 1504년 1월경에 노환으로 목숨이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 때문에 당시 연산군은 의정부의 삼정승(三政丞)과 육조의 판서들을 불러 미리 상제(喪制)를 의논하고 있던 시기였다.[23][24] 그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병석에 누워있던 할머니에게 고함을 치며 행패를 부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조선은 유교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였고, 그 중 임금에게 적용되는 가장 큰 덕목은 효(孝)이므로, 이와 같은 연산군의 행동은 패륜으로 훗날 박원종이 중심이 되는 중종반정
인수대왕대비가 죽어서도 할머니에 대한 연산군의 격하는 그치지 않았다. 화두에 오른 것이 장례 문제였는데, 연산군은 할머니의 제사를 왕이나 왕비의 격식이 아닌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왕세자 왕세자빈의 격식에 합당하지 않느냐며 조정 대신들에게 하문하였는데, 연산군은 그 이유로 덕종(의경세자 : 인수대왕대비의 남편이자 연산군의 할아버지)의 장례가 왕세자의 장례로 치루어 졌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영의정 유순대제학[22]
그러자 연산군은 타협안으로 덕종(의경세자)보다는 조금 높게 하고, 예종비 안순왕후보다는 조금 낮게 하라고 명하였으나 이것 또한 영의정 유순, 대제학 김감등의 대신들이 예문에 근거가 없기에 의논하기에 어렵다고 주장하여 마찬가지로 무산되었다.[22] 결국 인수대왕대비의 장례는 안순왕후와 같은 상제에 의한 왕후(王后)의 격식으로 치러졌고 연산군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상제를 단축하여 시행하라는 어명을 내렸다.[22]
이에 자순대비 윤씨(정현왕후)가 연산군에게 "예문에 근거가 없으니 나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하였으나 연산군이 화를 몹시 내며 "여자는 남편을 잃으면 아들의 뜻에 따라야 한다(삼종의 예)."라고 하니 자순대비가 "내가 인수대왕대비에게 죄를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라고 한탄하였다.[25] 그러나 중종실록에 기록된 이 내용은 연산군 폐위 이후에 작성된 것이라 거짓일 가능성이 높고, 실제 성종때 승하한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상제역시 한달로 단축시킨 예가 있는 만큼, 조선시대 왕실의 상제는 연산군 시대가 아니더라도 수없이 단축해왔다. 이것은 상제기간 동안 왕이 국사를 돌볼 수가 없으므로 조정의 국사를 위해서 단축시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승하한 왕이 친아버지인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왕실의 장례는 단축해왔던 예가 수도 없다.
꼭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증오하여 상제를 단축했다는 것은 모함일 가능성이 높다. 인수대비의 상례는 앞서 승하한 안순왕후의 상례에 따른 것이었다. 안순왕후는 13일만에 상복을 벗었으나 당시 그 누구도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또한 연산군은 안순왕후의 13일보다 27일까지 상복을 입었으니 일반적인 상례보다 더 성의를 보인 것이다.
인수대비는 죽기전 남긴 유언으로 "자신이 죽은 후 3일 이내에 왕이 고기를 들도록 하라"고 했다. 죽어가면서까지 인수대비는 연산군을 걱정했는데 연산군이 이런 인수대비를 머리를 받쳐 죽게 만들었다는 것은 낭설에 가깝다.
소혜왕후는 생전에 독실한 유교 인텔리임과 동시에 불교신자였으며 불경에 조예가 깊어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 한어(漢語), 국어(國語) 3자체(三字體)로 서술한 불경과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하여 편찬한 《내훈
성종은 즉위 직후 성리학적 왕도정치에 입각하여 길재, 김숙자, 김종직불교, 도교불교 억압 정책세종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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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의 성격은 강직했던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성종의 정비(正妃)인 공혜왕후의 승하 이후 계비로 책봉된 중전 윤씨연산군의 왕위 계승에도 부정적이었으며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의 소생 진성대군
소혜왕후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위치한 경릉[출처 필요], 경릉은 부인인 소혜왕후가 상좌인 우측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승하할 당시의 신분 차이 때문인데, 덕종의 경우는 승하할 때 세자의 신분이었지만, 소혜왕후의 경우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서 승하했기 때문에 군신 관계에 따라 위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남편 덕종의 무덤에는 석물도 문인석만 서 있다. 무인석은 왕권의 상징이라 왕이 되지 못한 세자, 세자빈 이하의 무덤에는 세울 수 없다. 소혜왕후 능상의 석물은 무인석까지 갖추고 있다. 신분상으로 조성된 능으로는 서오릉의 경릉과 동구릉의 문조와 신정왕후의 수릉이 있다.
전임 정희왕후 |
조선 역대 왕후 (추존) |
후임 안순왕후 (장순왕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