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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화엄경 입법계품 제44강(枝末法會, 善住比丘)
3. 謙己推勝
善男子야 我唯知此普眼法門이어니와 如諸菩薩摩訶薩은 深入一切菩薩行海니 隨其願力하야 而修行故며 入大願海니 於無量劫에 住世間故며 入一切衆生海니 隨其心樂하야 廣利益故며 入一切衆生心海니 出生十力無 智光故며 入一切衆生根海니 應時敎化하야 悉令調伏故며 入一切刹海니 成滿本願하야 嚴淨佛刹故며 入一切佛海니 願常供養諸如來故며 入一切法海니 能以智慧로 咸悟入故며 入一切功德海니 一一修行하야 令具足故며 入一切衆生言辭海니 於一切刹에 轉正法輪故니 而我云何能知能說彼功德行이리오
겸기추승(謙己推勝)이라, 자기 자신은 겸손해 하고 자기보다 나은 선지식을 추천하는 거지요. 그게 추승(推勝)인거지요, 수승한 선지식을 추천하다.
선남자(善男子)야 아유지차보안법문(我唯知此普眼法門)이어니와, 나는 오직 이 보안법문만을 알겠노라.
여제보살마하살(如諸菩薩摩訶薩)은, 저 여러 보살마하살들은
심입일체보살행해(深入一切菩薩行海)니, 일체 보살행에 깊이 들어갔으니
수기원력(隨其願力)하야 이수행고(而修行故)며, 그 원력을 따라서 수행하는 까닭이며.
수기원력(隨其願力)하야 이수행고(而修行故), 원(願)을 따라 수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은 원(願)이 있어야 하는데 이 원력(願力)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그 사람의 생명력입니다. 남에게는 하찮아 보여도 자기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면 그것은 소중한 거예요. 가치가 있는 겁니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뭔가 빛이 되고 힘이 되고, 소득이 있고, 많은 사람들의 행복에 보탬이 되는 그런 원력(願力)이라면 더욱 좋지요.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은 꿈, 희망, 기대감 이걸 가지고 삽니다. 다른 것 없어요. 이것이 있어야 됩니다. 바람직한 것이지요. 자기발전을 위해서이든지 아니면 자기가 사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그것을 위해서 열심히 돈을 번다든지 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좋은 꿈입니다.
자기가 또 예능 쪽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서툰 솜씨지만 열심히 갈고 닦으면서 노력한다든지, 아니면 보살행을 하고 싶어서 사람들을 위하는 그런 쪽으로 마음을 자꾸 키워간다든지 이런 것을 늘려야지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뭔가 빛이 납니다. 사는 것이 활기가 있고 움직이는 동작 자체가 생기가 있는 것이지요.
원력은 바로 생명력입니다.
같은 초목이라도 성장하려고 하는 그런 풀은 보기에도 싱싱해 보이지요. 그런데 어느 정도 자라나서 더 이상 크게 자랄 의지가 없는 풀은 시들시들해 보입니다. 그렇게 차이가 난다고요.
우리 사람도 가장 현명하게 사는 방법은 어떤 원력, 꿈, 기대감, 생명력을 가지고 환경과 조건에 좌절하지 않고 아주 힘차게 사는 것이지요. 뭔가 기대감에 불타서 활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 그게 제일 보기가 좋아요. 제일 아름다워요.
자기에게 충실한 사람이 제일 아름답게 보이고 멋있게 보여요. 그렇습니다. 그게 중요해요.
여기에서 그 원력을 따라서 수행하는 까닭이다,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가 잘 외는 천수경에 보면 원력이 많이 나와요. 천수경 뒤쪽에는 또 사홍서원(四弘誓願)이 나오지요.
십원육향(十願六向)이라 해서 원아광도제중생(願我廣度諸衆生) 원아불퇴보리심(願我不退菩提心) 원아결정생안양(願我決定生安養) 등 별별 원(願)자가 많이 들어가 있지요.
그 외에도 사이사이에 원(願)이 그렇게 많습니다. 사분의 일은 거의 원(願)에 관한 이야기예요. 천수경 자체가.
그럼 짧은 경전 속에 왜 그렇게 원이 많겠습니까? 천수경을 외워야 앞으로 불사를 할 것 아닙니까. 불공을 드리든지 천도를 하든지 하여튼 불교의 어떤 행사를 하기 전에 외우는 경이 천수경이라 앞으로 할 일이 꽉 남은 거예요.
앞으로 해야 할 그 일에 대한 꿈, 기대감, 희망 이런 것이 말하자면 천수경에서 원에 의해 그것을 받쳐주는 거지요. 뒷받침 해주는 겁니다.
사람이 사는 것이 어찌 보면 캄캄하고 암담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모를 것 같지만 사실은 또 어떻게 보면 간단한 것입니다. 어떤 꿈, 기대감 이거예요. 그걸 가지고 사람은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원(願)이라는 말이 제일 많이 쓰이지요. 화엄경에도 원(願)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입대원해(入大願海)니, 큰 원의 바다에 들어가니
어무량겁(於無量劫)에 주세간고(住世間故)며, 한량없는 세월 동안에 세간에 머무는 연고니라.
입일체중생해(入一切衆生海)니, 일체 중생의 바다에 들어가니
수기심락(隨其心樂)하야, 그 마음에 즐겨 하는 바를 따라서,
사람 사람이 즐겨하는 것이 다 다르지요. 좋아하는 바를 전부 따라서
광이익고(廣利益故)며, 널리 이익하게 하는 까닭이다.
이 사람이 이것을 좋아하면 ‘그래, 좋아하는 그것을 네가 해라’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을 좋아하더라도 그렇게 해주는 거지요. 각자 좋아하는 것을 따라 널리 이익하게 해준다는 겁니다.
입일체중생심해(入一切衆生心海)니, 일체중생의 마음바다에 들어가노니, 왜냐?
출생십력무(出生十力無) 지광고(智光故)며, 열 가지 힘은 지난 번에 인쇄해서 드린 적이 있지요? 걸림 없는 지혜광명을 출생하는 연고이다.
입일체중생근해(入一切衆生根海)니, 일체중생의 근기, 혹은 일체 중생의 육근(六根)으로 전부 들어가니
응시교화(應時敎化)하야, 또 맞추어서 교화를 하여
실영조복고(悉令調伏故)며, 다 하여금 조복하게 하는 연고이다.
응시교화(應時敎化)라는 말이 참 중요한 말이에요.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살아가면서 빼 놓을 수가 없는데 우리 중생들은 그 시절을 무시한다고요.
예를 들어서 가을이면 당연히 단풍이 들지요. 그런 것은 그런대로 경험을 해서 안다고요. 그런 것은 경험을 해서 아는데 자기가 하는 일은 없는 뭐가 공덕이 안 된다고, 표현이 안 된다고 안달을 하거든요. 그것도 또 때를 기다려야 돼요.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돼야 해요.
꼭 하나 외워 놓으세요. 시절인연(時節因緣). 뭐든 시절인연이 있습니다.
횡적인 사람의 관계, 물건의 관계만 인연이라 생각하지요. 시간을 인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그러나 불교는 일찍이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을 잘 씁니다. 시간도 하나의 인연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서 2시에 강의를 하는데 1시에 와서 왜 강의를 안 하냐고 해도 안 된다고요, 소용이 없어요. 시절인연이 2시가 되어야 강의가 시작됩니다. 시절인연이 2시가 딱 되면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해야 돼요.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고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깜빡 깜빡 놓치는 것이 시절인연을 놓칩니다.
다른 조건 다 갖췄는데 왜 안 되느냐고요. 시절인연이 안 돼서 안 되는, 그것을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자연이 그렇듯이 사람이 하는 일도 시절인연이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응시교화(應時敎化)하다, 때에 맞춰, 시절인연에 맞추어 교화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 가족을 부처님 앞에 예배하도록 해야 되겠다 생각했으면 가만히 때를 기다려야 해요. 덮어놓고 마음 내킨다고 얼른 갑시다, 해서는 절하기 싫은 사람을 절을 막 시키고 하면 그 때는 시절인연이 더 멀어진다고요.
그냥 내버려두면 딱 때가 와요. 때가 오는 것을 관찰할 줄을 알아야 되고 때가 오는 걸 놓치지 말아야 해요.
아, 이때는 좋은 때이다 싶을 때는 아무리 외고집인 사람도 그 때는 절에 한 번 가겠다, 법당에 한 번 들어가겠다, 이럴 때는 스님을 친견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다 싶은 그런 시절인연이 살다보면 돌아온다고요. 그럼 그때 교화를 해야 해요.
응시교화(應時敎化), 때에 맞춰서 교화를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급한 맘에 나부댄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지혜롭지 못한 일이지요. 응시교화(應時敎化)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아, 때가 아니구나. 언젠가는 때가 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 게 좋지요.
어떤 사람들은 아주 현명하게 교화를 합니다. 불교의 아주 어려운 책 말고 법정스님의 수필집 같은 책을 이용합니다. 쉽다는 뜻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잘 통하고, 불교의 교리 같은 것은 없으면서 불교의 분위기만 풍기는 그런 책을 읽다가 짐짓 흘려 놓는 겁니다.
모른 채 하고 실수한 척 하고 흘려놓으면 사람이 눈이 있는 한 보게 됩니다. 보면 좋은 말이 있으니까 “아, 이거 내가 잠깐 가져가서 보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교화 방법이라.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요. 그렇게 나올 때는요.
예를 들어서 교화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그런 방편도 좋은 거라는 겁니다.
응시교화(應時敎化) 참 좋은 말이에요. 때에 따라서 교화해서
실영조복고(悉令調伏故)니라, 시절인연만 잘 타면 조복 받지 못할 사람이 없어요, 교화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 조복하게 하는 연고라고 했잖아요.
입일체중생근해(入一切衆生根海)니, 일체중생들은 근기가 다 같지를 않아.
근기의 바다에 들어간다는 말은 중생들의 근기를 다 환히 안다는 거지요.
‘아, 이 중생은 언제쯤 되겠다, 저 중생은 어떻게 해야 되겠다, 저 중생은 언제쯤 되겠다, 저 중생은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것을 환히 안다는 거지요. 근기 속으로 들어가는 거니까요.
우리가 상대를 잘 알 때는 그러지요. “내가 니 뱃속에 다 들어가 있다.” 이런 소리를 하잖아요.
그겁니다. 입일체중생근해(入一切衆生根海), 중생의 근기의 바다속에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응시교화(應時敎化) 실영조복고(悉令調伏故)라, 때에 맞춰서 교화를 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조복하는 연고니라.
입일체찰해(入一切刹海)니, 일체 세계의 바다에 들어갔으니, 찰(刹)자는 세계라는 말입니다.
성만본원(成滿本願)하야, 여기에 원이 또 나오지요. 본래의 원, 보살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원(願)을 본원(本願)이라고 해요. 본래 가지고 있는 원이지요.
본원사(本願寺)라고 일본에 가면 유명한 절이 있지요. 동(東)본원사, 서(西)본원사 해가지고 왕족들이 세운 사찰이지요. 대대로 왕족과 관계되는 사람들이 주지를 살았다고 해요.
귀신같이 돈을 잘 버는 일본사람들도 다른 데는 가면 매표(賣票)를 해요, 그런데 거기는 매표를 안 해요. 동본원사 서본원사는 출입이 자유자재입니다. 그 큰절에 볼 것이 많은 데도 매표를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네의 말사에서 거둬들이는 분담금만 가지고도 충분히 포교를 하고 운영을 잘 하고 있지요.
교토에 있는 동본원사 앞에 가면 대형 불교서점이 꽉 차있고 불교용품들이 엄청나게 많지요. 한 구역이 전부 불교용품만 파는 상가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집집마다 불단 모시기를 좋아하잖아요.
불단은 부처님을 모시는 조그마한 벽장 같은 곳이지요. 조그마한 불단이 내 눈에 띄고 마음에 들기에 얼마냐고 물어봤더니 무려 2억엔이라는 겁니다.
불단 하나에 2억엔 하는 것을 봤어요.
그렇다고 해서 벽 하나를 다 차지하는 것도 아닌 조그만 벽장 하나이지요. 그 불단은 전통공예 조각가가 만든 작품이지요. 그러니까 예술품으로 가치가 있으니까 그렇게 비싸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어요.
동본원사 절에 갔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일본에 가 보니까 불교천국이거든요. 서양사람들이 동양에 오면 전통 문화부터 보지 않습니까? 자기들은 역사가 얼마 안 되지만 이쪽은 역사가 몇 천 년씩 되니까 제일 놀라운 게 수백 년 수천 년씩 된 문화이거든요. 일본에서 문화 분야의 공부를 하다가 보니까 전부 불교문화뿐인 겁니다. 그리고 보니까 스님들이 일본사회에서는 상당하거든요. 그래서 물었대요. 스님들의 일본사회에서의 위치가 어느 정도이냐?
대학교를 운영하는 곳만 해도 보통 수십 개가 되니 학교 운영하는 그런 것은 기본이지요. 그런 것 말고 지위를 물었더니, 글쎄 딱 집어서 말을 할 수는 없다면서 그 당시 동본원사의 주지가 천황의 사위라 하더군요. 그러니까 그것 가지고 이해를 하면 될 거라고 해요.
옛날부터 왕의 사위나 동서 그런 정도의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동본원사의 주지를 못했다고 해요.
그렇게 설명을 했다고 하는 말을 내가 그때 들었어요.
본원(本願)이란 말이 많이 발전을 해서 일본까지 갔는데 본원이라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어야 할 근본적인 원을 본원이라고 그럽니다. 그게 있어야 되는 거지요.
성만본원(成滿本願)이라, 본래의 원을 성만한다는 뜻이지요.
내가 늘 식물을 이야기 합니다만, 식물을 보십시오. 아무리 자라서도 또 자라고 또 자라고 있지요. 살아있다고 하는 의미는 뭐냐? 자기 발전이라는 거지요. 자기 발전은 어떤 꿈이고 생명력이고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본래의 원력(願力)이지요.
성만본원(成滿本願)해서
엄정불찰고(嚴淨佛刹故)며, 부처님의 세계를 아주 깨끗하게 장엄하는 연고며
입일체불해(入一切佛海)니, 모든 부처님의 바다 속에 다 들어감이니
원상공양제여래고(願常供養諸如來故)며, 항상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를 원하는 연고라. 깨달은 사람에게 늘 공양 올리고자 하는 그러한 원력, 얼마나 좋은 원력입니까?
입일체법해(入一切法海)니, 일체 법의 바다에 들어가니, 저 위에는 일체 불의 바다였지요.
능이지혜(能以智慧)로 함오입고(咸悟入故)며, 지혜로서 다 깨달아서 들어가는 연고니라.
지혜가 있어야 불법은 이해가 되요. 법이 이해가 된다고요. 또 법을 공부하는 것은 지혜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지혜와 불법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은 같은 거예요. 상부상조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 지혜가 늘고 지혜가 는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그런 길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일체법의 바다에 들어가면 일체 지혜로서 다 깨달아 들어가는 연고니라.
입일체공덕해(入一切功德海)니 일일수행(一一修行)하야, 일체 공덕의 바다에 들어가니, 공덕의 바다에 또 들어갑니다. 그 공덕을 낱낱이 수행해서
영구족고(令具足故)며, 하여금 구족하게 하는 연고이며
입일체중생언사해(入一切衆生言辭海)니, 일체 중생의 말의 바다 속에 들어가니, 중생들이 말이 많잖아요, 특히 인도 같은 나라는 말이 많지요. 공용어만도 12가지가 된다든가 그래요. 사투리를 전부 합하면 수백 가지가 된다고 하는 정도예요.
다른 말을 사용하는 나라에 들어가서 포교를 하려면 그 나라 말을 알아야지요.
일체 중생의 말의 바다 속에 들어감은
어일체찰(於一切刹)에 전정법륜고(轉正法輪故)니, 일체 세계에 가서 바른 법륜을 굴리기 위한 연고이다.
미국 가서 포교하려면 영어를 해야지요. 일본 가서 포교하려면 일본어를 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서 그 세계 세계마다 부처님의 법을 전하려면
일체중생언사해(入一切衆生言辭海) 일체중생의 말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어야 된다.
이아운하능지능설피공덕행(而我云何能知能說彼功德行)이리오, 저 보살은 이렇게 하는데, 내가 어떻게 저 다른 보살들의 공덕의 행을 능히 알고 능히 말할 수 있겠는가,
자기 자신을 겸양하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겸양의 말 속에 자기의 능력도 포함되어 있고 앞으로 추천할 분의 법력도 그 속에 소개가 되고 그렇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그대로 법문으로 받아들여야 할 그런 내용입니다.
아까 그랬지요? 화엄경은 일체 세계를 끝없이 찬탄하는 일이고, 모든 사람을 끝없이 찬탄하는 일이고, 모든 존재와 삼라만상을 끝없이 찬탄하는 노래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화엄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모든 존재 모든 세상을 노래로서 끝없이 찬탄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라고 했지요.
4. 指示後友
善男子야 從此南行六十由旬하야 楞伽道邊에 有一聚落하니 名爲海岸이요 彼有比丘하니 名曰善住니 汝詣彼問호대 菩薩이 云何淨菩薩行이리잇고하라 時에 善財童子가 禮海雲足하며 右遶瞻仰하고 辭退而去하니라
그 다음 지시후우(指示後友)입니다.
선남자(善男子)야 종차남행육십유순(從此南行六十由旬)하야, 선남자야, 이로부터 남쪽으로 육십유순을 가서
일 유순이 약 14Km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먼 거리이지요. 그렇게 가면은
릉가도변(楞伽道邊)에 유일취락(有一聚落)하니, 릉가라는 길가에 한 마을이 있으니
명위해안(名爲海岸)이요, 바닷가 해안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피유비구(彼有比丘)하니 명왈선주(名曰善住)니, 한 비구가 있으니 이름이 선주비구라는 말입니다. 착할 선(善)자 머물 주(住)자이지요.
여예피문(汝詣彼問)호대, 그대는 저기에 나아가서 묻되
보살(菩薩)이 운하정보살행(云何淨菩薩行)이리잇고 하라, 보살이 어떻게 하면 보살행을 청정히 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청정한 보살행을 완성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물어라.
시(時)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예해운족(禮海雲足)하며, 이때 선재동자가 해운비구의 발에다 예배하며
우요첨앙(右遶瞻仰)하고 사퇴이거(辭退而去)하니라, 오른쪽으로 돌면서 우러러보고 물러나서 가느니라.
다른 선지식을 소개하니까 거기서는 또 물러나서 가야지요.
四. 善住比丘 --- 第三 修行住善知識
1. 依敎趣求
爾時에 善財童子가 專念善知識敎하며 專念普眼法門하며 專念佛神力하며 專持法句雲하며 專入法海門하며 專思法差別하며 深入法漩澓하며 普入法虛空하며 淨持法碍障하며 觀察法寶處하고 漸次南行하야 至楞伽道邊海岸聚落하야 觀察十方하고 求覓善住하니라
네 번째는 선주비구(善住比丘)인데 수행주선지식(修行住善知識)이라고 되어 있어요.
의교취구(依敎趣求)라, 해운비구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나아가서 선주비구를 찾는 것이지요.
이시(爾時)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전념선지식교(專念善知識敎)하며, 오로지 선지식의 가르침을 생각을 해서, 여기서 선지식은 누구지요? 해운비구이지요.
해운선지식의 가르침을 오로지 생각하며
전념보안법문(專念普眼法門)하며, 보안법문을 오로지 생각하며
전념불신력(專念佛神力)하며, 부처님의 신통력을 오로지 생각하며
전지법구운(專持法句雲)하며, 법구의 가르침이 엄청나게 많으니까 구름 운(雲)자를 붙였어요. 법구의 구름처럼 많은 구절들을 오로지 가지며
전입법해문(專入法海門)하며, 법의 바다의 문에 오로지 들어가며 전사법차별(專思法差別)하며, 법의 차별, 법은 차별입니다.
이 세상의 차별을 우리가 이해하면 끝이에요.
법의 차별을 오로지 생각하며
심입법선복(深入法漩澓)하며, 법의 소용돌이에 깊이 들어가며, 선복(漩澓)은 소용돌이를 말하지요. 물이 소용돌이 돌 때 이런 글자를 써요.
보입법허공(普入法虛空)하며, 법의 허공에, 법이 텅 빈 데에 들어가며
정지법애장(淨持法碍障)하며, 법의 가리고 장애되는 것을 청정하게 가지며
관찰법보처(觀察法寶處)하고, 법의 보배 곳을 관찰하고
점차남행(漸次南行)하야, 점차 남쪽으로 남쪽으로 걸어가서
지릉가도변해안취락(至楞伽道邊海岸聚落)하야, 해안이라고 하는 마을에 이르러서
관찰시방(觀察十方)하고 구멱선주(求覓善住)하니라, 시방을 이렇게 두루 살피고 선주비구를 찾았다.
선주비구가 어디에 있는가 하고 찾았다는 말입니다.
2. 見敬諮問
(1) 諸天의 恭敬
見此比丘가 於虛空中來往經行에 無數諸天이 恭敬圍遶하야 散諸天華하며 作天妓樂하며 幡幢繒綺가 悉各無數하야 邊滿虛空하야 以爲供養하며 諸大龍王이 於虛空中에 興不思議沈水香雲하야 震雷激電하야 以爲供養하며 緊那羅王이 奏衆樂音하야 如法讚美하야 以爲供養하며 摩睺羅伽王이 以不思議極微細衣로 於虛空中에 周廻布設하야 心生歡喜하야 以爲供養하며 阿修羅王이 興不思議摩尼寶雲하야 無量光明의 種種莊嚴으로 邊滿虛空하야 以爲供養하며 迦樓羅王이 作童子形하야 無量采女之所圍遶으로 究竟成就無殺害心하야 於虛空中에 合掌供養하며 不思議數諸羅刹王이 無量羅刹之所圍遶로 其形長大하야 甚可怖畏나 見善住比丘하고 慈心自在하야 曲躬合掌하고 瞻仰供養하며 不思議數諸夜叉王이 各各悉有自衆圍遶하야 四面周帀하야 恭敬守護하며 不思議數諸梵天王이 於虛空中에 曲躬合掌하야 以人間法으로 稱揚讚歎하며 不思議數諸淨居天이 於虛空中에 與宮殿俱하야 恭敬合掌하야 發弘誓願하니라
그 다음, 견경자문(見敬諮問)이라, 뵙고 공경하고 묻다 라는 뜻입니다.
제천(諸天)의 공경(恭敬)이라, 모든 하늘들이 공경하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지요.
견차비구(見此比丘)가, 보니 선주비구가
어허공중래왕경행(於虛空中來往經行)에, 허공 가운데서 내왕경행이라, 허공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허공에는 하늘이 있을 테고 천신들이 있겠지요.
무수제천(無數諸天)이 공경위요(恭敬圍遶)하야, 무수한 제천들이 공경하고 에워싸서 산제천화(散諸天華)하며, 온갖 하늘꽃을 뿌리며 작천기악(作天妓樂)하며, 하늘의 기악을 지으며
번당증기(幡幢繒綺)가, 번과 당은 깃발 같은 것이지요. 증기(繒綺), 온갖 비단에다가 부처님명호를 쓰고 보살의 명호를 쓰지요. 말하자면 오방번(五方幡), 시방번(十方幡)해서 그런 것들을 내다 걸지요.
실명무수(悉各無數) 변만허공(邊滿虛空)하야, 그런 것들이 모두들 다 무수해서 허공에 가득차서
이위공양(以爲供養)하며, 말하자면 당과 번으로 장엄을 한 것인데 장엄은 사람들을 위한 공양이지요. 예를 들어서 여기서 무슨 큰 행사를 할 때도 뭘 전부 늘어놓고 분위기를 돋우잖아요. 그게 곧 오는 사람들께 올리는 공양이에요. 뭔가 꾸며져 있고 장엄이 되어 있어야 분위기에 젖어 드니까요.
제대용왕(諸大龍王)이 어허공중(於虛空中)에, 모든 용왕들이 허공가운데서
흥부사의침수향운(興不思議沈水香雲)하야, 침수향은 향 중에도 아주 고급향이라고 하지요. 불가사의한 침수향을 일으켜서,
진뢰격전(震雷激電)하야, 큰 향운이 소용돌이치는데 뇌성벽력이 치고 진동을 하고 번갯불도 번쩍이는 그런 모습을 보이고
이위공양(以爲供養)하며, 그것으로서 공양을 올리며
또 긴나라왕(緊那羅王)이 주중악음(奏衆樂音)하야, 여러 가지 음악을 연주하여
여법찬미(如法讚美)하야, 법과 같이 여법하게 찬미해서
이위공양(以爲供養)하며, 그것으로서 공양을 삼지요. 대왕마다 다르지요? 마후라가왕은 그럼 어떻게 하느냐?
마후라가왕(摩睺羅伽王)이 이부사의극미세의(以不思議極微細衣)로, 아주 보드라운 천으로 만든 그런 옷으로서
어허공중(於虛空中)에 주회포설(周廻布設)하야, 허공 가운데서 고급스런 천으로 만든 옷을 두루두루 펼쳐놓았다는 거지요.
심생환희(心生歡喜)하야 이위공양(以爲供養)하며, 마음으로부터 환희심을 내게 해 그것으로 공양을 삼으며
아수라왕(阿修羅王)이 흥부사의마니보운(興不思議摩尼寶雲)하야, 아수라왕이 불가사의한 마니의 보배구름을 일으켜,
아수라왕 같으면 보통 싸움만 좋아하는 아주 나쁜 귀신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렇지만 화엄경의 안목은 아수라는 아수라대로 마후라는 마후라대로 나찰은 나찰대로 구반다는 구반다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돌은 돌대로, 불은 불대로 물은 물대로 서로 상극이지만 완전무결한 그 하나하나의 존재가 자기의 값을 하고 있고 자기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을 그대로 찬탄하고 노래 부르고 찬미하는 것이 바로 화엄경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화엄경이 당장에 사람을 바꾸는 것은 아니겠지만 화엄경을 자꾸 공부하는 것은 이 세상을 찬탄하는 노래를 우리가 부르고 있는 것이니까 결국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긍정적으로 보는 그런 길을 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아수라왕이 불가사의한 마니의 보배구름을 일으켜서
무량광명(無量光明)의 종종장엄(種種莊嚴)으로 변만허공(邊滿虛空)하야 이위공양(以爲供養)하며, 무량광명의 종종 장엄으로서 허공에 가득 채워 그것으로서 공양하며
가루라왕(迦樓羅王)이 작동자형(作童子形)하야, 가루라왕이 동자의 모습이 되어 가지고 무량채녀지소위요(無量采女之所圍遶)으로, 한량없는 아름다운 처녀들이 동자를 에워싸고 있으며
구경성취무살해심(究竟成就無殺害心)하야, 살해할 마음이 없는 그런 것을 결국은 성취하게 되었다,
가루라왕은 말하자면 살해하는 것이 전문인데 아예 살해함이 없다는 거지요.
그로서 어허공중(於虛空中)에 합장공양(合掌供養)하며, 허공 가운데서 합장 공양하며
부사의수제나찰왕(不思議數諸羅刹王)이, 불가사의 수의 제나찰왕, 나찰도 귀신이거든요.
무량나찰지소위요(無量羅刹之所圍遶)로, 한량없는 나찰들이 에워싸서 기형장대(其形長大)하야 심가포외(甚可怖畏)나, 그 형을 길고 크게 만들어서 아주 두렵게 보이지만은
견선주비구(見善住比丘)하고, 선주비구를 보고 자심자재(慈心自在)하야, 자비한 마음이 자재로워서 곡궁합장(曲躬合掌)하고, 선주비구를 떡 보고는 그 나쁜 나찰, 가루라, 마후라가, 긴나라들이 그만 곡궁합장(曲躬合掌), 허리를 숙이면서 합장을 하여 절을 하고
첨앙공양(瞻仰供養)하며, 우러러 보면서 공양한다는 거지요.
부사의수제야차왕(不思議數諸夜叉王)이 또 부사의 수의 야차왕이 각각실유자중위요(各各悉有自衆圍遶)하야, 자기의 무리들에 에워싸여 있어서
사면주잡(四面周帀)하야, 사면으로 두루두루 에워싸서 공경수호(恭敬守護)하며
부사의수제범천왕(不思議數諸梵天王)이 어허공중(於虛空中)에 곡궁합장(曲躬合掌)하야, 또 불가사의 수의 여러 범천왕이 허공 가운데서 몸을 숙이고 합장해서
이인간법(以人間法)으로 칭양찬탄(稱揚讚歎)하며, 이 인간의 법으로서 칭양찬탄하며,
사람의 세계에 와서는 사람의 법, 사람의 말로서 칭양찬탄하고, 이 말이지요.
여기서도 칭양찬탄이 있듯이 화엄경에서는 모든 존재를 칭양찬탄하고 노래하는 일이다, 라고 그랬어요.
부사의수제정거천(不思議數諸淨居天)이, 정거천도 하늘의 일종이지요. 여러 수의 정거천들이 어허공중(於虛空中)에 여궁전구(與宮殿俱)하야, 궁전과 더불어, 자기들이 거처하는 궁전 그대로 와서 더불어 공경합장(恭敬合掌)하야 발홍서원(發弘誓願)하니라, 공경합장하고 발 홍서원하니라, 큰 서원을 발하더라.
다른 데도 물론 있습니다만 이 대목에서는 원(願)이라는 말이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특히 발홍서원(發弘誓願), 발사홍서원(發四弘誓願)이라 했듯이 원이라는 말을 주로 하고 있고 또 여기 열 종류의 대중들이,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 야차, 범왕들이 선주비구를 찬탄하는 걸로 그렇게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해운비구 이야기의 한 대목과 선주비구의 앞부분을 이렇게 시작을 해 놓고 이게 이렇게 계속 이어집니다.
한 선지식이 꼭 끝나야 되는 게 아니고 연결된다고 생각하시고 오늘 공부는 발홍서원(發弘誓願), 홍서원을 발한다, 여기 까지 하겠습니다.
날씨 덥다고 비실비실 할 것이 아니라 자기 발전을 위해서 원을 가져 보세요. 아주 힘찬 원력이 있고, 꿈과 희망과 기대감이 있는 사람은 어쩌면 더위도 충분히 이겨냅니다. 더위 그 까짓거 문제가 없다고요.
그러니까 원은 살아가는 데 있어 팔팔한 어떤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이고, 이것이 이제 부처님 공부를 하는 큰 보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무비스님 화엄경 입법계품 제45강 (枝末法會, 善住比丘)]
화엄경 78쪽부터인데 내용이 네 번째 선지식인 선주비구(善住比丘) 선지식에 관한 법문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77쪽의 선주비구부터 오늘 설명할 데까지 쭉 읽을 테니까 속으로 따라 읽으세요. 눈으로 따라 읽고 또 마음으로 따라 읽으십시오. 한문경전 공부를 이만치 했으니 이제 읽으면 충분히 뜻이 돌아가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복습도 하고 예습도 하고 또 테이프도 가져가서 다시 한 번 더 듣기도 하고, 거기다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서 한문 경전을 읽고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면 뭔가 마음에 뿌듯하고 재미도 더 있을 거예요. 공부를 그런 입장으로도 좀 생각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 삶에 있어서 어떤 교훈을 건지는가 하는 이런 관심도 좋지요.
좋은 말씀에서 우리 마음을 한번 되돌아보는 그런 기회도 물론 좋습니다만, 곁들여서 한문 경전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실력도 갖춰진다고 하면 그보다 더 좋은 소득은 없지요.
네 번째 선지식인 선주비구는 지위로는 제3수행주(修行住)선지식이라고 되어 있어요.
依敎趣求
爾時에 善財童子가 專念善知識敎하며 專念普眼法門하며 專念佛神力하며 專持法句雲하며 專入法海門하며 專思法差別하며 深入法漩澓하며 普入法虛空하며 淨持法碍障하며 觀察法寶處하고 漸次南行하야 至楞伽道邊海岸聚落하야 觀察十方하고 求覓善住하니라
見此比丘가 於虛空中來往經行에 無數諸天이 恭敬圍遶하야 散諸天華하며 作天妓樂하며 幡幢繒綺가 悉各無數하야 邊滿虛空하야 以爲供養하며 諸大龍王이 於虛空中에 興不思議沈水香雲하야 震雷激電하야 以爲供養하며 緊那羅王이 奏衆樂音하야 如法讚美하야 以爲供養하며 摩睺羅伽王이 以不思議極微細衣로 於虛空中에 周廻布設하야 心生歡喜하야 以爲供養하며 阿修羅王이 興不思議摩尼寶雲하야 無量光明의 種種莊嚴으로 邊滿虛空하야 以爲供養하며 迦樓羅王이 作童子形하야 無量采女之所圍遶으로 究竟成就無殺害心하야 於虛空中에 合掌供養하며 不思議數諸羅刹王이 無量羅刹之所圍遶로 其形長大하야 甚可怖畏나 見善住比丘하고 慈心自在하야 曲躬合掌하고 瞻仰供養하며 不思議數諸夜叉王이 各各悉有自衆圍遶하야 四面周帀하야 恭敬守護하며 不思議數諸梵天王이 於虛空中에 曲躬合掌하야 以人間法으로 稱揚讚歎하며 不思議數諸淨居天이 於虛空中에 與宮殿俱하야 恭敬合掌하야 發弘誓願하니라
그 다음부터 해석 들어갈 차례이지요.
선주비구를 만나서 모든 하늘들, 무량제천, 제대용왕, 긴나라, 마후라가, 아수라 또 가루라, 나찰왕, 야차왕 별별 천신들이 선주비구를 에워싸고 공양을 올리는 그런 광경을 설명했습니다.
(2) 諮問菩薩
時에 善財童子가 見是事已하고 心生歡喜하야 合掌敬禮하고 作如是言호대 聖者여 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호니 而未知菩薩이 云何修行佛法이며 云何積集佛法이며 云何備具佛法이며 云何熏習佛法이며 云何增長佛法이며 云何總攝佛法이며 云何究竟佛法이며 云何淨治佛法이며 云何深淨佛法이며 云何通達佛法이리잇고 我聞聖者는 善能誘誨라하니 唯願慈哀하사 爲我宣說하소서 菩薩이 云何不捨見佛하야 常於其所에 精勤修習이며 菩薩이 云何不捨菩薩하야 與諸菩薩로 同一善根이며 菩薩이 云何不捨佛法하야 悉以智慧로 而得明證이며 菩薩이 云何不捨大願하야 能普利益一切衆生이며 菩薩이 云何不捨衆生行하야 住一切劫호대 心無疲厭이며 菩薩이 云何不捨佛刹하야 普能嚴淨一切世界며 菩薩이 云何不捨佛力하야 悉能知見如來自在며 菩薩이 云何不捨有爲호대 亦復不住하야 普於一切諸有趣中에 猶如變化하야 示受生死하야 修菩薩行이며 菩薩이 云何不捨聞法하야 悉能領受諸佛正敎며 菩薩이 云何不捨智光하야 普入三世智所行處니잇고
그 다음, 자문보살(諮問菩薩)이라, 보살행에 대해 묻는 것이지요. 물을 자(諮), 물을 문(問)자입니다.
시(時)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그때에 선재동자가
견시사이(見是事已)하고, 이러한 일들을 보아 마치고,
이러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한량없는 천신들이 선주비구를 에워싸고 공양하고 있는 그러한 일들을 다 살펴보고 나서
심생환희(心生歡喜)하야, 마음에 환희심을 내어
합장경례(合掌敬禮)하고, 합장해서 공경히 예배를 올리고
작여시언(作如是言)호대, 이와 같은 말을 짓되
이제 선주비구에게 하는 것입니다.
성자(聖者)여, 아이선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我已先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호니, 성자시여, 나는 이미 먼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했다, 그러한 마음을 내었다. 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거지요. 그 모르는 것이란 것은
이미지보살(而未知菩薩)이 운하수행불법(云何修行佛法)이며, 보살로서 어떻게 불법을 수행하며
운하적집불법(云何積集佛法)이며, 또 어떻게 불법을 쌓아가며, 적집(積集)이란 말은 쌓는다는 말이지요.
불법은 쌓아가는 거예요. 불법은 우리가 하루 이틀 한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쌓아 가는 것입니다.
염불도 해서 쌓아가고, 참선도 해서 쌓아가고, 경전공부도 해서 쌓아가고 사경도 해서 쌓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경과함에 따라서 불법(佛法)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는 만큼 쌓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루 하루 불법과 인연을 맺으면서 또 공덕을 닦으면서 공부를 하는 그 노력이 불법을 적집(積集)하는 일입니다.
운하비구불법(云何備具佛法)이며, 불법은 또 여러 가지를 갖춰줍니다.
불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난 이것만 할란다, 관세음보살만 할란다. 다른 경전 공부도 필요 없고 천도하는 것 등 다른 거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지요. 불법 속에서는 세속생활에서 누리었던 그런 것들을 많이 가르쳐 주니까 그런 것들을 자꾸 갖춰 나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구비(具備)한다 그러지요, 여기에서는 비구(備具)한다고 했어요.
운하훈습불법(云何熏習佛法)이며, 불법을 쌓아나가고 불법을 구비해 나가면서 몸에 익숙하게 하는 거지요. 경전 공부도 처음에는 뭐가 뭔지 잘 모르지요. 어색하고 못 알아보는 부분도 많고요, 한문은 더 캄캄하고 그렇지만 자꾸 익혀요. 한 번 두 번 익히다 보면 나중에는 익숙해져요. 그게 훈습입니다. 그처럼 훈습이 중요해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는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묶었던 새끼에서는 비린내가 풍긴다’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거든요. 그게 훈습이 원인이라.
부처님은 길을 가시다가 종이를 한 장 발견하고는 제자에게 주워오라고 하지요. 그 종이가 어떠냐고 묻자 향기가 난다고 해요. 그러자 부처님이 종이를 확인하지요.
또 한참 가다가 새끼를 발견하고는 이번에는 새끼를 주워오라고 하는데 새끼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있어요.
그러자 제자가 “아, 부처님이시여, 이것은 생선을 묶었던 새끼 같습니다. 지금까지 비린내가 풍기는 걸로 봐서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 새끼와 종이를 받아 가지고 가시다가 나무그늘에 제자들을 불러 앉히고는 그런 말씀을 하시잖아요.
“보라, 이 종이는 본래 향기가 없었지만 향을 가까이 한 관계로 향내가 난다. 새끼에는 비린내가 본래 없었지만 생선을 가까이 한 관계로 새끼에서 비린내가 풍긴다.
이와 같이 본래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 훈습하느냐에 따라서 향기가 날 수도 있고 비린내가 풍길 수도 있다. 우리 인생도 그와 같아서 어떤 환경과 어떤 조건과 인연을 자꾸 맺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이 향기로울 수도 있고 비린내를 풍길 수도 있다”는 그런 아주 유명한 대화를 하셨어요. 훈습이란 게 그겁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어디 있습니까? 자꾸 하다보면 되는 거지요. 어릴 때는 훈습이 잘 되지요? 왜지요? 쌓여있는 정보가 없고 다른 세속적인 때가 안 묻었으니까요. 나이가 들어 새삼 하려면 그동안 세속적인 다른 습관들이 많이 축적이 되어 있어서 힘이 들지요. 그런 것을 감내하고 새로운 불법의 세계에 빠져들려고 하면 그만치 힘이 든다고요. 힘이 들지만 그것도 오래 하다보면 금방 또 훈습이 되요. 그래서 훈습불법(熏習佛法)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운하증장불법(云何增長佛法)이며, 훈습을 했으면 그것을 자꾸 키워야지요. 증장(增長)이라는 말은 키워가는 일을 말하지요. 자꾸 발전해 나가는 일을 증장이라 합니다.
그 다음 운하총섭불법(云何總攝佛法)이며, 불법 세계의 모든 좋은 가르침을 하나도 안 놓치고 전부다 거둬들인다는 거지요. 내 것으로 만든다는 거지요.
운하구경불법(云何究竟佛法)이며, 그런 불법을 완성할 수 있겠는가? 구경이란 것은 완성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불법을 다 완성할 수 있겠는가.
운하정치불법(云何淨治佛法)이며, 이것은 이제 불법을 갖다가 청정하게 다스리는 거예요. 이것 저것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물론 좋지요. 다 가지는 것도 좋고, 완성하는 것도 좋은데 이것이 말하자면 정갈하게 정리가 착착 되고 쓸모 있는 자리에 딱딱 쓰여지고, 있을 자리에 딱딱 있는, 이게 정치(淨治)입니다.
참선을 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밀어붙일 일이 아니라 참선을 할 자리에는 정확하게 참선을 하고, 기도드릴 자리에는 정확하게 기도를 하고 어떤 장소에 갖다 놓더라도 정말 불법으로 몸이 제대로 다듬어진 사람은 어떤 일도 자기 일같이 척척 해내는 거지요.
운하심정불법(云何深淨佛法)이며, 청정하게 다스리는 것이 더욱더 깊어지는 경지이지요. 심정불법(深淨佛法)이라는 말은 더욱 깊어지는 것을 말하지요. 어떻게 하면 불법이 더욱 더 깊고 그리고 청정하게 할 수 있으며
운하통달불법(云何通達佛法)이리잇고, 어떻게 하면 불법을 완전히 통달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제 완전히 성취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열 가지 질문을 만드느라고 뜻으로는 사실 중복되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하나의 낱말이 조금씩은 차이가 있다면 있지요.
이걸 갖다가 이제 질문한 것입니다.
나는 발심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러 이러한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들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그런 뜻이지요.
아문성자(我聞聖者)는, 내가 듣기에 성자께서는
선능유회(善能誘誨)라 하니, 잘 능히 유회(誘誨), 가르쳐 준다는 뜻이지요. 회(誨)자는 그냥 단순히 가르친다는 뜻이고 유(誘)자는 꼬일 유, 달랠 유,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배우고 싶도록 하는 것, 여러 가지 분위기로, 또 어떤 가치를 이야기 한다든지 해서 배우고 싶은 그런 마음이 나도록 가르치는 것, 그것이 참 어렵지요.
덮어 놓고 공덕이 된다, 좋다 해서는 배우고자 하는 그 마음이 오래 가지를 않아요. 뭔가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유태인들이 자녀 교육에는 아주 무서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요. 그 사람들이 교육에 대해 얼마나 깊이 생각을 하는지 우리나라 교육이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냥 무턱대고 열 개, 스무 개 다 가르치려고 하고, 학교에 가면 무조건 공부해야 된다는, 그런 식으로 하는데 그 사람들은 공부가 재미있도록 유도를 해요. 동기유발이라고 해서 공부가 재미있도록 하는 거예요.
학교 처음 들어가는 날은 초코렛이나 과자를 만들어서 아이들한테 나누어 주는데 그 과자가 알파벳으로 만들어져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도 요즘은 그런 게 나오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천년 전에 벌써 그런 교육방법을 가르쳤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희들 이 과자 달콤하지? 그리고 이건 글자야. 글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과자 맛처럼 달콤한 것이야.” 하고 가르친다는 겁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간 첫날 첫 시간에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쳐주니 얼마나 인상적이겠어요. 평생 그 것이 심어지는 거예요. “과자가 몸에 이롭고 영양을 보충하듯이 학교 공부라고 하는 것도 이렇게 달콤하고 너희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야.
학교에 오면 이런 공부를 하게 되고, 공부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평소에 잊지 말아라”, 하고 이렇게 아이들을 유혹한다는 거예요.
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방편입니까. 이런 방법을 써야 되는데 우리 어릴 때는 무턱대고 우격다짐으로, 주먹을 써서 공부하라고 하고, 안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밀어붙였으니 그 효과가 별로 있습니까? 힘만 더 들었지요.
유태인들은 그런 식으로 공부를 가르쳤으니까 하지 말라고 해도 아이들이 공부를 하는 거예요. 자꾸 하는 거예요. 재미있고 맛있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유도를 해요.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에게 학교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한다고 이렇게 꼭 당부를 하거든요.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습니다. 부모 말씀 잘 듣는 애들이 착하고 효녀이지요.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아이들이 착하고 좋은 아이이고 그렇지요. 유태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때, “선생님에게 질문 많이 해” 이런다고 합니다. 질문 많이 하라고 가르치지 선생님 말씀 잘 들으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교육에 대한 그런 방법을 사실은 근본적으로 잘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 많은 세월을 겪으면서도 그게 제대로 안되어 있지요. 뭡니까? 유태인들은 나라를 찾은 지가 아직 얼마 안 되지요.
그 사람들은 이천 년 동안 피난생활을 했으면서도 그 민족이 그대로 지켜져 내려온 겁니다. 그래서 나라를 되찾았잖아요. 우리 민족 같으면 민족이 벌써 없어져 버렸을 거예요. 이천년을 유랑생활을 하다가 자기 나라를 찾은 거예요. 그 많은 피를 흘려가면서요.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삼분의 일이 유태인 출신입니다. 놀랄 일이지요. 미국의 어느 유명한 대학의 교수 중 삼분의 일이 또 유태인 출신이라고 해요. 미국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의 거의가 또 유태인 출신이에요. 그런 정도입니다.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교육에 있어 아주 깊이 연구를 해서 자녀들 교육을 잘 시켰기 때문에 오늘날 그런 나라가 됐다는 것은 천하가 다 잘 아는 일이지요.
참 이런 말을 들으니,
선능유회(善能誘誨)라, 성자께서는 우격다짐으로 나에게 그냥 해라 하고 가르치는 그런 식이 아니고 유회(誘誨)라, 잘 달래고, 아이들 귀에 달콤하도록 가르치는 그게 유회(誘誨)이지요. 달랠 유(誘)자 가르칠 회(誨)자, 달래서 가르치는 거지요.
선주비구는 그러한 분이다 하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듣기 싫도록 우격다짐으로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는 거지요.
저절로 배우고 싶은 마음이 나도록 가르쳐 달라는 것이지요. 선능유회(善能誘誨)란 게 그런 뜻이지요.
그런데 제자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선주비구 당신은 그런 분이라고 이미 소문이 나 있다 이거지요. 교육을 잘 시키는 분이라고 하니
유원자애(唯願慈哀)하사, 오직 원하옵나니 자비한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그러한 마음을 내어 가지고서
위아선설(爲我宣說)하소서, 나를 위해서 좀 잘 설명해 주십시오.
다른 데 하고는 달리 여기서는 또 반복해서 묻습니다. 앞에 그렇게 열 가지를 열거했고, 여기서 또 다른 방향으로 묻습니다. 질문이 하나씩 하나씩 이어져 나가요.
보살(菩薩)이, 보살도를 닦는 보살로서,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는
운하불사견불(云何不捨見佛)하야, 어떻게 하면 부처님을 친견하는 일, 그것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불사견불(不捨見佛), 부처님을 친견하는 일을 버리지 아니 해서
상어기소(常於其所)에, 항상 부처님의 처소에서
정근수습(精勤修習)이며, 우리가 부처님 앞에서 부지런히 기도드리는 것을 정근(精勤)한다고 그러지요. 정진(精進)이란 말도 있고, 부지런할 근(勤)자를 써서 정근한다, 라고도 하고 그래요.
부처님께 절을 한다든지 염불을 왼다든지, 부처님 앞에서 하는 온갖 수행법을 정근이라고 하지요. 정근을 수습하며,
또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보살(云何不捨菩薩)하야, 어떻게 하면 보살로서 보살을 버리지 아니하고
여제보살(與諸菩薩)로, 다른 보살로 더불어
동일선근(同一善根)이며, 선근을 동일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함께 하는 것이지요. 보살은 보살과 더불어 함께 수행하는 것, 이게 중요하지요. 그래서 보살이 어떻게 하면 보살을 버리지 아니 하고 다른 보살로 더불어 좋은 일, 착한 일 그런 것을 동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불법(云何不捨佛法)하야, 보살이 불법을 버리지 아니해서, 늘 지닌다는 말이지요. 항상 불법 속에 있어서
실이지혜(悉以智慧)로, 모두가 지혜로서
이득명증(而得明證)이며, 명증(明證), 밝게 깨달음을 얻을 것이며,
명증이라는 것은 밝게 깨닫는 것입니다. 불법이라는 것은 결국은 우리 삶에 대한 밝은 깨달음, 이게 목표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성불(成佛)이니 견성(見性)이니 여러 가지 표현이 있겠습니다만 삶에 대한 투철한 깨달음을 명증(明證)이라 말할 수 있어요.
사람 사는 일은 무엇인가? 불법을 통해서 우리가 인생을 깊게 투철하게 깨닫는 거, 이게 중요합니다.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대원(云何不捨大願)하야, 보살로서 어떻게 하면 불사대원(不捨大願), 큰 원을 버리지 아니하고,
능보리이익일체중생(能普利益一切衆生)이며, 능히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할 수 있느냐.
보현행원품이란 게 뒤에 나오지만은 불교는 결국은 이 대원(大願), 큰 원력이 중요합니다, 큰 원력이란 무엇이지요?
물론 자기 발전을 위한 원(願)도 원입니다. 부족한 것을 배우고, 예를 들어서 글씨를 쓰고 싶다면 글씨를 배우고, 자기의 인생 문제에 대해서, 가정 문제에 대해서, 또는 자녀 문제에 대해서 이런 문제를 잘 풀어나가겠다고 하는 것도 원(願)은 원이에요.
그러나 보다 더 큰 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행복과 이익이 되도록 하는 것, 여기는 보면 이익일체중생(利益一切衆生) 이렇게 되어 있잖아요. 많은 사람들을 이익하게 하는 그것이 원(願)이 되어야 사실은 보살의 원이라 할 수 있어요.
그 원은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그런 소박한 소원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그런 큰 원을 버리지 아니해서 능히 널리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할 것이며
또 보살(菩薩)이 운하불사중생행(云何不捨衆生行)하야, 어떻게 하면 중생의 행을 버리지 아니해서
주일체겁(住一切劫)호대, 일체 겁에 머물되
심무피렴(心無疲厭)이며, 마음에 피로함이나 싫증냄이 없으며,
이것은 참 좋은 말이에요. 보살들은 저 못난 중생들의 어떤 삶을 그대로 같이 더불어 살 줄 아는 그 자세,
중생의 행을 버리지 않는다, 어떻게 얼른 생각하면 보살은 보살의 행을 해야지 왜 중생의 행을 버리지 않느냐 싶지만, 보살은 우정 중생과 같이 더불어 동상(同牀)하는 것이지요. 일을 같이 하는 것이지요. 중생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그들을 거두어들이고 제도한다는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보살이 어떻게 하면 중생의 행을 버리지 아니해서, 아주 어려운 말이지요.
아이들 하고 같이 놀아주려면 아이들하고 같이 행동해야지요. 아이들의 행동을 버리지 아니해야 되는 거지요. 아이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자면 같이 ‘가위 바위 보’를 해야지요. 아이들의 행이지요. 중생을 건지려면 마찬가지로 중생행을 버리지 아니해야 된다고요. ‘아, 이건 중생들이 하는 거야, 보살이 하는 것이 아니야’, 이렇게 해 버리면 그건 보살이 아니지요.
중생에게 가서는 중생행(衆生行)을 같이 하는 것, 그래서 불사중생행(不捨衆生行)하야 주일체겁(住一切劫)호대, 그것도 한 두 번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기 자식에게 끝없이 끝없이 마음을 베풀듯이 그래도 싫증을 내거나 피곤해 하지 않듯이 언제까지나 중생과 더불어 살되
심무피렴(心無疲厭)이라, 마음이 피로해 하거나 싫증내지 아니하며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불찰(云何不捨佛刹)하야, 어떻게 하면 이 부처님의 세계를 버리지 아니해서
보능엄정일체세계(普能嚴淨一切世界)며, 일체세계를 널리 장엄하고 청정하게 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의 세계를 늘 마음에 그리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모든 세계를 부처님의 세계처럼 장엄하고 청정하게 하며,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불력(云何不捨佛力)하야, 또 보살이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힘을 버리지 아니해서
실능지견여래자재(悉能知見如來自在)며, 여래의 자재함을, 여래께서 자유자재한 그 속을 능히 잘 알고 볼 수 있을 것이며,
보살(菩薩)이 운하불사유위(云何不捨有爲)호대 역부부주(亦復不住)하야 보어일체제유취중(普於一切諸有趣中)에 유여변화(猶如變化)하야 시수생사(示受生死)하야 수보살행(修菩薩行)이며,
이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대개 불교를 좀 공부하고 수행한다 하면은 세속의 허망한 것은 우리가 등한히 하기가 일쑤예요. 그런데 진정 제대로 된 보살은 허망한 세상사를 버리지 않는 거예요.
어떤 세속적인 것은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세속적인 격식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그런 경향이 많은데, 여기 보면 불사유위(不捨有爲)라, 유위라고 하는 것은 함이 있는 것, 허망한 세간사를 말해요. 허망한 세간사를 버리지 않는다 이거에요.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앉아 머물러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역부부주(亦復不住)야, 버리지도 아니 하면서 거기에 눌러 앉아 있지도 않아요. 머물지도 않는다 이 말입니다.
세속적인 그런 일에 충실하다고 해서 꼭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할 것은 충실히 하는 것, 이게 이제 제대로 소견이 드러난 사람의 삶이예요. 보살의 삶이지요.
그래서 불사유위(云何不捨有爲)호대, 유위를 버리지 아니하되
역부부주(亦復不住), 또한 다시 머물러 있지도 아니 해서, 이 허망한 세상사에 머물러 있지도 아니해서,
보어일체제유취중(普於一切諸有趣中)에, 유취(有趣)중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갈래의 삶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고, 김씨는 김씨대로, 박씨는 박씨대로, 앞집은 앞집대로 뒷집은 뒷집대로 모든 사람들이 각자 살아가고 있는 그 모습이에요.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에 수백만 가호, 수천만 가호가 있다손 치더라도 집집마다 사는 형편이 다 다르지요. 참 기가 막히지요. 같은 형제, 같은 마을, 같은 말을 하고,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지역에 살고, 거의 비슷한 환경 속에서 있으니 집집마다 사는 것이 거의 같을 것 같지요. 들여다보면 전혀 달라요, 판이하게 달라요.
음식맛도 판이하고 생활습관도 판이하고 가치기준도 판이합니다. 다른 것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너무 다르다고요.
다른 것을 우리가 또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지요.
일체제유취중(普於一切諸有趣)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사람 사람이 각각 사는 길, 그 사는 다른 길 가운데서
유여변화(猶如變化)하야, 마치 변화하는 것, 말하자면 허망한 것. 그게 고정되어 있는 건 아니니까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살다가 저렇게 살다가 그러지요. 경제가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살고,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살지요. 또 사람이라는 게 묘해 가지고 어떤 상황에 처해도 처한 대로 또 다 살 줄 알아요.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각각 같지 않을 수 있는 거지요. 변화가 그 점이지요.
마치 변화와 같아서
시수생사(示受生死)하야, 생사 받음을 보인다, 생사 받는 것을 보인다, 생사는 허망한 것이고, 유위이고, 일체 삶의 모습이고, 태어나고 죽는 그러한 길인데 그런 것을 보살이 다 보여요. 그리고 자기가 또 그런 삶을 경험을 해요.
수생사(示受生死)라고 하는 말은 생사를 받는다는 거지요. 생사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가 경험한다는 말입니다. 생사를 경험하는 것을 보여서 수보살행(修菩薩行)이며, 보살행을 닦으며
보살(菩薩)이 운하불사문법(云何不捨聞法)하야, 보살이 또 법문 듣는 것을 버리지 아니하며, 이게 중요한 거지요.
법문 듣는 것을 수월히 생각하면 견문이 짧아져서 말이나 모든 게 꼭 필요한 자리에 제대로 쓰여 지질 않아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릴지라도 들어놓으면 언젠가는 그것이 되살아 날 때가 있다는 거지요. 묘해요, 그게 참. 꼭 되살아 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리는 것 같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 제8아뢰야식, 장식(藏識)속에 갈무리가 다 되어 있어요. 갈무리가 되어 있다가 그게 문득 생각날 때가 있다고요. 이런 데서 들을 때는 모른척하고 그렇게 다 까먹은 듯이 듣지마는 나중에 살다보면 문득 자기도 모르게 한 마디씩 툭툭 튀어 나올 때가 있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래요.
친구들 사이에서나 어떤 경우에 그런 상황이 생기는 거지요. 그게 제8아뢰야식, 우리의 정신세계이지요. 정신세계의 본체를 불교에서는 아뢰야식, 장식(藏識), 제8식 이렇게 교리적으로 말하는데 거기에 갈무리 되어 있어요. 정신세계의 어떤 본고장이지요. 그래서 문득 불사문법(云何不捨聞法)하야, 법 듣는 것을 버리지 아니하여
실능령수제불정교(悉能領受諸佛正敎)며, 영수(領受)는 받아들이는 거지요. 영수한다, 영수증이라고 하듯이 여기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영수한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영수(領受)입니다. 영(領)자는 안다는 뜻이지요. 이해하고 그것을 내 마음 속에 받아들인다. 이것 하나는 우리에게 해당 되네요.
운하불사문법(云何不捨聞法)해서 실능령수제불정교(悉能領受諸佛正敎), 법문 듣는 것을 버리지 아니 해서, 늘 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다 능히 제불의 바른 가르침을 영수하며
보살(菩薩)이 운하불사지광(云何不捨智光)하야, 보살이 또 어떻게 하면 지혜광명을 버리지 아니하며,
불법 공부하는 것도 결국은 지혜의 광명이 빛나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모색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불사지광하야, 지혜 광명을 버리지 아니해서
보입삼세지소행처(普入三世智所行處)니잇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지혜로서 행할 바의 곳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불교공부는 할 때만 한 번 쓰이고 마는 게 아니고 과거에도 쓰이고 현재에도 쓰이고 미래에도 쓰이고 그래야 되는 거지요. 일회적으로 쓰이고 마는 것 같으면 공부할 필요가 없지요. 어떻게든 한 번 때우면 되니까요.
그러나 불교공부를 해 놓으면 세세생생 쓰이는 거예요. 그래서 보입삼세지소행처(普入三世智所行處), 과거 현재 미래 삼세의 지혜로서 행할 바의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지혜의 삶, 과거 현재 미래의 지혜의 삶에 말하자면 어떤 영향을 끼칠 수가 있겠습니까? 보입(普入), 들어갔다는 말은 들어갔으니 영향을 끼치는 거지요. 영향을 행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한 집안을 차고앉으면 그게 입(入)이지요. 한 집안을 차고앉으면 어차피 그 나름대로 행세를 해요. 며느리로서 들어가면 며느리로서 행세하고 일군으로 들어가면 일군으로서 행세하고 그 나름대로 다 행세를 하는 거지요.
말하자면 지혜광명을 버리지 아니 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우리 삶의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널리 들어가서 어떤 지혜로써 행세를 한다 이거에요.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제 물었어요.
이번에는 물음이 아주 장황했지요?
앞에 열 단락, 뒤에 또 긴 이야기로서 열 단락, 이렇게 이제 선재동자가 선주비구에게 장황한 질문을 했습니다.
첫댓글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 !!!!!!!!! 매번 편한하게 맛나고 정성드려 차려주는 공양 받고만 있어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덕분에 화염경 맛나게 공양 받고 있읍니다. 항상 행복 하소서..................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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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