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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백제의 건국과 마한의 멸망
1. 召西奴 女大王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百濟本紀)는 고구려 본기보다 더 심하게 문란하다. 백 몇십 년의 감축은 물론이고,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리다. 그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召西奴女大王)이니 하북(河北) 위례성(慰禮城) - 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그가 죽은 뒤에 비류(沸流)ㆍ온조(溫祚) 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彌鄒忽 : 지금의 仁川)에, 또 한 사람은 하남(河南) 위례홀(慰禮忽)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본기에는 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篇) 첫머리에 비류ㆍ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온조왕 13년에 하남 위례홀에서 하남 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 아니랴?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비류ㆍ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 남편인 부여사람 우태(優台)이므로, 비류ㆍ온조의 성도 부여요, 근개루왕(近蓋婁王)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본기에는 비류ㆍ온조를 추모(鄒牟)의 아들이라 하였음이 둘째 잘못이다.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서술한다.
소서노가 우태의 아내로 비류ㆍ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우령서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를 정궁(正宮)으로 대우하고, 비류ㆍ온조 두 아들을 자식같이 사랑하였는데, 유류(儒留)가 그 어머니 예씨(禮氏)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예씨가 원후(元后)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小后)가 되었으며,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ㆍ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자식 됨이 드러났다.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 의논하여,“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하고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많은 금ㆍ은ㆍ주보(珠寶)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ㆍ온조 두 아들과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8사람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
마한으로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 왕은 기준(箕準)의 자손이었다.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 리의 땅 미추홀 - 지금의 인천과 하북 위례홀 - 지금의 한양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을 일컫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그런데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濊族)과 손잡아 압박이 심하므로 소서노가 처음엔 낙랑국과 친하고 예족만 구축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핍박이 낙랑국이 시켜서 하는 것임을 깨닫고,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을 다했다.
백제 본기에 낙랑왕(樂浪王)이라 낙랑태수(樂浪太守)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백 몇십 년의 연대를 줄인 뒤에 그 줄인 연대를 가지고 지나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漢郡)이라 하여 낙랑태수라 쓴 것이며, 예(濊)라 쓰지 않고 말갈(靺鞨)이라 썼는데, 이것은 신라 말엽에 예를 말갈이라고 한 당(唐)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古記)의 예를 모두 말갈로 고친 것이다.
2. 召西奴가 죽은 뒤 두 아들의 分國과 그 흥망
소서노가 재위 13년에 죽으니,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 아니라,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ㆍ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聖德)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하고, 이에 형제가 오간ㆍ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負兒岳) - 지금 한양의 북악(北岳)에 올라가 서울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오간ㆍ마려 등이 비류에게 간하기를, “하남 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남은 기름진 평야를 안고, 동은 높은 산을 끼고, 서는 큰 바다를 둘러 천연의 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겠는데,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려고 하십니까?”라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형제가 땅과 인민을 둘로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온조는 하남 위례홀로 가니, 이에 백제가 나뉘어 동ㆍ서 두 백제가 되었다.
본기에 기록된 온조의 13년은 곧 소서노의 연조요, 그 이듬해 14년이 곧 온조의 원년이니, 13년으로 기록된 온조 천도의 조서는 비류와 충돌된 뒤에 온조 쪽의 인민에게 내린 조서이고, 14년 곧 온조 원년의,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分漢城民).”고 한 것은 비류ㆍ온조 형제가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각기 자기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미추홀은 ‘메주골’이요, 위례홀은 ‘오리골’(본래는 리골)이다. 지금의 습속에 어느 동네이든지 흔히 동쪽에 오리골이 있고 서쪽에 메주골이 있는데 그 뜻은 알 수 없으나, 그 유례 또한 오래다.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 많이 흩어져 달아났지마는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수토가 알맞고 오곡이 자 되어 인민이 편안히 살아가므로 비류는 부끄러워서 병들어 죽고 그 신하와 인민은 다 온조에게로 오니, 이에 동ㆍ서 두 백제가 도로 하나로 합쳐졌다.
3. 溫祚의 馬韓 襲滅
백제가 마한의 봉토(封土)를 얻어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공손히 산하의 예로써 마한을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대하여,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보내고 전쟁을 하여 얻은 포로를 마한에 보냈는데, 소서노가 죽은 뒤에 온조가 서북쪽의 예와 낙랑의 방어를 핑계하여, 북의 패하(浿河) - 지금의 대동강으로부터 남으로 웅천(熊川) - 지금의 공주(公州)까지 백제의 국토로 정하여달라고 해서 마침내 그 허락을 얻고 그 뒤에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왔을 때에 발디딜 땅이 없어 내가 서북 백 리 땅을 떼어주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인데,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니, 어찌 의리있는 짓이냐?”하고 꾸짖었다. 온조는 짐짓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이고 성책을 헐었으나, 좌우에게, “마한왕의 정치가 옳은 길을 잃어 나라의 형세가 자꾸 쇠약해지니, 이제 취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돌아갈 것이다.”하고 오래지 않아 사냥한다 핑계하고 마한을 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그 50여국을 다 토멸하고, 그 유민으로서 의병을 일으킨 주륵(周勒)의 온 집안을 다 목베어 죽이니, 온조의 잔학함이 또한 심하였다.
기준(箕準)이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韓氏)라 하여 자손에게 전해내려오다가 이에 이르러 망하니, 삼국지에, “기준의 후예가 끊어져 없어지고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箕準滅絶 馬韓人復自立爲王).”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인데, 온조를 마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지나인이 매양 백제를 마한이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儒留)ㆍ대주류(大朱留) 두 대왕과 같은 시대이니, 온조 대왕 이후에 낙랑의 침략을 기록한 것이 없음은 대주류왕이 이미 낙랑을 토멸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제 3장 漢武帝의 침략
漢나라 군이 고구려에 패한 사실
조선의 남북 여러 나라가 분립하는 판에 지나 한나라 무제(武帝)의 침략이 있었다. 이것은 다만 한때 정치상의 큰 사건일 뿐 아니라, 곧 조선 민족 문화의 소장(消長)에도 비상한 관계를 가진 큰 사건이었다. 고대 동아시아에 불완전한 글자이나마 이두문을 써서 역사의 기록과 정치의 제도를 가져 문화를 가졌다고 할 민족은 지나 이외에 오직 조선뿐이었는데, 당시에 조선이 강성하여 매양 지나를 침략하고 혹은 항거하였으며, 지나도 제(齊)ㆍ연(燕)ㆍ진(秦) 이래로 조선에 대하여 방어하고 혹은 침략해왔음은 제 2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잦았거니와, 진(秦)이 망하고 한(漢)이 일어나서는 북쪽 흉노의 침략에 시달림을 받아서 한나라 고조(高潮)가 흉노 모돈(冒頓)을 공격하다가 백등(白登 : 산서성 大同府부근)에서 크게 패하여 세폐(歲幣)를 바치고 황녀(皇女)를 모돈의 첩으로 바치는 등 굴욕적 조약을 맺고, 그 뒤에 그대로 시행하여 고조의 증손 무제(武帝)에 이르렀다.
무제는 야심이 만만한 제왕이라, 백 년 태평한 끝에 나라가 부강해지자 흉노를 쳐서 선대의 수치를 씻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도 또한 이름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민족적 혈전을 벌였다.그런데 무제가 침입한 조선이 둘이니,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 : 史記 平準書도 같음)에, “무제가 즉위하고 수 년만에 팽오(彭吳)가 예맥조선(濊貊朝鮮)을 쳐서 창해(滄海)라는 군(郡)을 설치하였으니, 곧 연(燕)과 제(齊) 지방이 크게 소란해졌다(武帝卽位數年 彭吳 穿濊貊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 騷然騷動).”고 한 예맥조선이 그 하나요, 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四郡)을 만들었다(樓船將軍楊僕……左將軍荀彘……遂定朝鮮爲四郡).”라고 한 조선이 또 하나이다. 뒤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으로 인하여 위씨(衛氏)의 조선인 것은 사람들이 다 알거니와, 앞의 조선은 식화지나 평준서에 이렇게 간단히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전기(傳記)에서는 다시 발견되지 아니하므로 종래의 사학가들이 이를 어떤 조선인지를 말한 이가 없다.
그러나 나는 전자의 조선은 곧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니, 한무제가 위우거(衛右渠)를 토멸하기 전에 동부여를 저희 군현(郡縣)이라 하여 고구려와 9년 동안 혈전하다가 패하여 물러난 일이 있은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으로 증거하는가? 후한서(後漢書), 예전(濊傳)에, “한나라 무제 원삭(元朔) 원년에 예의 남려왕(南閭王) 등이 모반하여, 우거가 28만 호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항복하여,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창해군(滄海君)으로 만들었다(漢武帝元朔元年 濊君南閭等叛 右渠率二十八萬口 詣遼東降漢 以其地爲滄海君).”고 하였고, 한서 본기(本紀)에, “원삭 3년 봄에 챙해군을 폐지하였다(元朔三年春罷滄海君).”고 하였으며, 사기 공손홍전(公孫弘傳)에는, “공손홍이 여러 번 간하여……창해군을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朔方)만 받들게 하기를 청하여……왕이 이를 허락하였다(弘數諫……願罷……滄海 而專奉朔方……上乃許之).”고 하였으니, 종래의 학자들이 위 세 가지 책과 앞에 말한 “식화지(食貨志)의 본문을 합쳐, 예맥조선은 예임금 남려의 나라로 지금의 강릉이니, 강릉이 당시 우거의 속국으로서 모반하고 한에 항복했으므로 한이 팽오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땅으로써 창해군을 삼았다가, 그 뒤에 땅이 너무나 멀고 비용이 많이 듦으로 그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라고 단정하였다. 그러나 이 단정이 잘못임이 다음과 같다.
1) 지나사에 매양 동부여를 예(濊)로 그릇 기록하였음과, 남ㆍ북 두 동부여가 하나는 지금의 혼춘이요, 또 하나는 함흥임은 이미 본편제2장에서 서술하였거니와, 동부여를 지금의 강릉이라 함은 신라가 그 동북계 1천여 리를 잃고 그 잃은 지방의 고적을 내지(內地)로 옮길 때에 동부여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겼음으로 하여 생긴 위설(僞說)이니, 예의 남려는 함흥의 동부여왕이요, 강릉의 임금이 아니며,
2) 식화지(食貨志)의 본문에 명백히, “무제가 즉위한 지 수년에 팽오(彭吳)가 예맥조선을 쳤다.”고 하였으니, 후한서에 기록된 창해군을 처음 설치한 해는 무제 즉위 13년인데, 13년을 수년이라 할 수 없을 뿐더러, 한서 주부언열전(主父偃列傳)의 원광(元光) 원년 엄안(嚴安)의 상소에, “지금 예주(濊州)를 공략하여 성읍(城邑)을 설치하고자 한다(今欲……略濊州 建治城邑).”고 하였는데, 예주를 공략한다는 것은 곧 예맥조선 침략을 가리킨 것이요, 성읍을 설치하는 것은 창해의 설치 경영을 가리킨 것이며, 원광 원년, 곧 원삭 원년의 6년 전에 엄안이 예에 대한 침략과 창해군 설치를 간하였으니, 남려의 항복과 팽오의 교통이 벌써 원광 원년의 일이요, 그 6년 후인 원삭 원년의 일이 아니고,
3) 원광 원년 창해군 설치의 해는 기원전 134년이요, 원삭 3년 창해군 폐지의 해는 기원전 126년이니, 그러면 한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려는 전쟁이 전후 9년 동안이나 걸쳤으니, 동부여가 만일 우거의 속국이라면 우거가 가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일 돌아와 구원하였다고 하면 사기 조선왕 만전(滿傳)에 우거의 한에 대한 관계, 진번진국(眞番辰國)의 옹알(壅閼), 요동 동부도위(東部都尉)의 공격이며 살해 따위를 다 기록하고서 어찌 이보다 더 중대한 9년 전쟁의 사실을 빼었으랴? 앞에서 말한 개정한 연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이니, 남려는 위씨(衛氏)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다.남려가 고구려의 속국이라면 왜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는가? 남려는 대개 남동부여, 후한서와 삼국지의 예전(濊傳)에 기록된 불내예왕(不耐濊王)에게 시집 보낸 갈사왕이니, 그러면 남려는 대주류왕의 처조(妻祖)요, 대주류왕은 남려왕의 손자 사위요, 호동은 남려왕의 진외증손(眞外曾孫)이니, 말하자면 붙이가 가까운 터이다.그러나 호동의 장인인 낙랑의 최이(崔理)도 토멸하는 판에 어찌 처조와 진외증조를 알아보랴.
고구려의 동부여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남려가 지난날 아버지와 형의 원수로든지, 당장의 압박의 고통으로든지, 어찌 고구려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이 없었으랴. 이에 같은 고구려에 대해 원한을 가진 낙랑의 여러 소국들과 연합해서 몰래 우거에게 내통하여 고구려를 배척하려 하였으나, 우거가 고구려보다 미약하여 고구려에 항거하지 못하므로, 남려는 우거를 버리고 한(漢)에 통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에 통하려면 부득이 위씨(衛氏)의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데, 우거는 동부여가 혹 위씨 나라의 비밀을 한에 누설하지나 않을까 하여 국경의 통과를 허락하지 아니했으므로, 사기 조선왕만전(朝鮮王滿傳)에는, “진번 옆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들어가 뵈려고 하였으나 우거가 또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眞番旁衆國 欲上書入見天子 右渠又壅閼不通).”고 하였다.진번 옆의 여러 나라란 곧 동남부여와 남낙랑 등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남려는 마침내 바닷길로 한에 통하여 사정을 고하니, 야욕으로 가득 찬 한무제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치랴. 드디어 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으로 예정하고, 팽오를 대장으로 삼아 연제(燕齊) - 지금의 직예(直匠)ㆍ산동(山東)의 군사와 양식을 총동원하여, 한이 여러 번 패하여 창해군을 폐지한다는 말을 핑계로 삼아 군사를 거두어 전쟁을 결말 지은 것이다.
이같은 9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 혈전이 있었으면 사마천이 어찌하여 사기 조선열전에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하였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중국을 위해 치욕을 숨기다(爲中國諱恥).’하는 것이, 공구(孔丘)의 춘추(春秋) 이래, 지나 역사가의 유일한 종지(宗旨)가 되었을 뿐 아니라, 삼국지 왕숙전(王肅傳)에 의하면,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景帝)와 무제(武帝)의 잘잘못을 바로 썼더니, 무제가 이것을 보고 크게 노했으므로 효경본기(孝景本紀)와 무제본기(武帝本紀)를 삭제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그 뒤에 사마천은 부형(腐刑 : 남자를 去勢하는 형벌. 宮刑)에 처해졌다.”고 하였으니, 만일 한의 패전을 바로 썼더라면 부형은 고사하고 목이 달아나는 참형까지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사실이 빠졌음이 고의일 것이며, 평준서에 겨우 그 사실을 비추었으니, ‘팽오가 예맥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하여 마치 조선을 토멸한 듯이 쓴 것도 또한 꺼려함을 피한 것일 것이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는 그 사실이 너무 바르지 못함을 싫어하여, 멸(滅)자를 천(穿)자로 고쳤으나, 그 전부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였음은 사마천과 마찬가지였다.그러면 한무제와 싸운 이는 대주류왕, 곧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일 것이다. 그러나 본기에는 연대를 줄였기 때문에 한무제와 같은 시대인 대주류왕이 한의 광무(光武)와 같은 시대가 되고, 지나사의 낙랑 기사와 맞추기 위해 대주류왕이 한에게 낙랑국을 빼앗겼다는 거짓 기록을 쓴 것이었다.
漢武帝의 衛氏 侵滅
한무제가 9년이라는 오랫동안의 혈전에 패해 물러가서 그 이후 17년 동안 조선의 여러 나라를 엿보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에야 어찌 동방 침략을 잊고 있었으랴. 이에 위씨(衛氏)는 비록 조선 여러 나라 중 하나이나 그 왕조(王朝)가 원래 지나족 종자요, 그 장수와 재상들도 대개 한의 망명자의 자손들이었으므로 이들을 꾀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잠식하는 앞잡이를 만들려고 하는 중에, 더욱 위씨에게 길을 빌어 동부여를 구원하고 고구려를 치는 편의를 얻으려고 하여, 기원전 109년에 한무제는 사신 섭하(涉河)를 보내서 먼저 한과 동부여를 왕래하는 사절이 위씨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여달라고 우거를 한의 국위(國威)로 위협하고, 금백(金帛)의 이익으로 꾀었으나 우거가 완강하게 좇지 않았다.
섭하가 한무제의 비밀 명령에 의하여 귀국하는 길에 두 나라의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우거가 보낸 전송하는 사자 우거의 부왕(副王)을 찔러 죽이고 달아나, 한으로 돌아가서 한무제에게 조선국 대장을 죽였다고 큰소리를 하니, 한무제는 실상 딴 흉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 공으로 섭하를 요동동부도위(東部都尉)에 임명하였다.
섭하가 임지(任地)에 이른지 오래지 아니하여, 우거가 전의 일(副王의 피살)을 분하게 여겨 군사를 일으켜서 섭하를 공격해 죽였다. 무제는 이것으로 구실을 삼아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보명 5만으로 요수(遼水)를 건너 패수로 향하고,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병선 군사 7천으로 발해를 건너 열수(列水)로 들어가서 우거의 서울 왕검성(王儉城 : 조선 고대 세 왕검성의 하나)을 좌우에서 협격(挾擊)하게 하였는데, 양복은 열구(列口)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크게 패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남은 군사를 거두어 자신을 보호하고, 순체는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으나 위씨의 군사가 항거해 지켜서 여의치 못하였다. 한무제는 두 장수가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신 위산(衛山)을 보내, 금백(金帛)을 뿌려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이간시켰다.
위씨의 나라는 원래가 조선과 지나의 도둑들의 집단이었으므로 그 신하들은 위씨에 대한 충성보다 황금에 대한 욕심이 매우 치열하였고, 그들은 전쟁을 주장하고 화평을 주장하는 두 파로 갈려 서로 다투었는데, 한의 금백이 비밀히 뿌려지자 화평을 주장하는 파가 갑자기 강해져서 우거로 하여금 그 태자를 한의 군중(軍中)에 보내서 한의 장수에게 사죄하고 군량과 말을 바치기로 하는 조약을 맺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우거는, “태자는 호위병만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가 한의 장수를 만나보게 하여라.”고 하였고, 한의 장수는, “태자가 1만의 군사로 패수를 건너오려면 무장을 갖추지 말고 오라.”고 하여 양편이 서로 버티어 교섭이 깨어졌다.그러나 그 돈과 비단이 효력을 나타내서 우거의 재상 노인(路人)ㆍ한음(韓陰)ㆍ삼(參)과 대장 왕겹(王唊)이 몰래 한에 내정을 알리고 전쟁에는 힘쓰지 아니하였으므로, 한의 장수 순체는 패수를 건너 왕검성의 서북쪽을 치고, 양복은 산에서 나와 왕검성의 동남쪽을 쳤다. 한무제는 교섭이 결렬되자 위산(衛山)을 죄주어 참형에 처하고,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로 사신을 삼아서 전권(全權)을 주어 두 장수를 감독하는 동시에, 더욱 많은 돈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매수하게 하였다.
이때에 순체와 양복이 항복하기를 다투어 서로 불화해지니, 공손수가 순체의 편을 들어 양복을 불러 순체의 군중에 가두고, 순체로 하여금 양복의 군사를 합쳐 싸우게 하고, 한무제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무제는, “돈과 비단만 낭비하고 위씨 군신(君臣)의 항복을 받지 못했다.”하고 크게 노하여 공손수를 처형하였다. 오래지 않아 한음ㆍ왕겹ㆍ노인 등의 뇌물받은 일이 탄로되어 노인은 참형을 당하고, 한은ㆍ왕겹 두 사람은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다. 이듬해 여름 삼(參)이 우거를 암살하고,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우거의 대신 성기(成己)가 삼을 치니, 우거의 왕자 장(長)이 삼에게 붙어 노인의 아들 최(最)와 힘을 합하여 성기를 죽이고 성문을 열어 항복해서 위씨가 이에 멸망하고 한무제는 그 땅을 나누어 진번ㆍ임둔ㆍ현도ㆍ낙랑의 네 군을 만들었다.이때의 사살은 오직 사기 조선열전에 의거할 뿐인데, 거기에는 한이 돈과 비단을 위씨의 여러 신하들에게 뇌물한 기록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는 사마천이 무제 본기(無帝本紀)의 화(禍 : 앞절에 보임)로 부형(腐刑)을 당하고 동부여에 대한 한의 패전을 기록하지 못한 일이 있어, 바로 쓰지 못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이 전쟁에 패하고 뇌물로 성공한 사실이 글 가운데 뚜렷이 보이니, 이를테면, “위만은 병위(兵威)와 재물로 그 이웃 작은 고을을 침노하여 항복받아서 나라를 얻었다(滿 得以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고 하여 위만이 병위와 재물 두 가지로 건국을 성취하였음을 기록한 것은 은근히 한무제가 위씨를 당당히 병력으로 멸하지 못하고 재물로 적을 매수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성취하였음을 비웃고 꼬집은 것이다.
‘위산을 보내 병위로써 우거를 타일렀다(遺衛山 因兵威 往論右渠).’고 하여 ‘병위’ 두 자만 쓰고 ‘재물’ 두 자는 빼었으나, 이때 순체와 양복은 이미 패전하고 후원병도 가지 아니하여서 병위가 도리어 우거의 군사보다 약한 때인데 무슨 병위가 있었으랴? 이는 곧 윗글의 ‘병위ㆍ재물’ 넉 자를 이어받아, 위산이 가져간 것이 병위가 아니라 재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위산과 공손수가 다 까닭없이 처형되었음을 기록한 것은 한무제가 재물만 쓰고 성공치 못함에 노했음을 표시한 것이고, 위씨가 멸망한 뒤에 순체와 양복이 하나는 침형당하고 하나는 파면되었는데, 봉후(封侯)의 상을 받은 자는 도리어 위씨의 반역신인 노인(路人)의 아들 최와 왕겹 등 네 사람뿐이었으니, 이는 곧 위씨의 멸망이 한의 병력에 있지 않고 한의 재물을 받고 나라를 판 간신에게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漢四郡의 위치와 고구려의 對漢 관계
위씨가 망하매 한이 그 땅을 나누어 진번ㆍ임둔ㆍ현도ㆍ낙랑 네 군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사군의 위치 문제는 삼한(三韓) 연혁의 쟁론에 못잖은 조선사상 큰 쟁론이 되어왔다. 만반한ㆍ패수ㆍ왕검성 등 위씨의 근거지가 지금의 만주 해성 개평 등지(이는 제2편 제2장에 자세히 설명했음)일 뿐 아니라, 당시에 지금의 개원(開原) 이북은 북부여국(北扶餘國)이고, 지금의 흥경(興京) 이동은 고구려이고,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국이고,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국이었으니, 이상 네 나라 이외에서 한의 사군을 찾아야 할 것이므로, 사군의 위치는 지금의 요동반도 안쪽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이설(異說)이 백출(百出)함은 대개 다음에 열거한 몇 가지 원인에 의한것이다.
첫째는 지명의 같고 다른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패수ㆍ낙랑 등은 다 ‘펴라’로 읽을 것으로서, 지금의 대동강은 당시의 ‘펴라’라는 강이고, 지금의 평양은 당시의 ‘펴라’라는 서울이니, 강과 서울을 다 같이 ‘펴라’라고 한 것은 마치 지금의 청주(淸州) ‘까치내’라는 물 옆에 ‘까치내’라는 마을이 있는 것처럼 ‘펴라’라는 강 위에 있는 서울이므로 또한 ‘펴라’라고 한 것이요, 패수(浿水)의패(浿)는 ‘펴라’의 ‘펴’의 음을 취하고, 수(水)는 ‘펴라’의 ‘라’의 임을 취하여 ‘펴라’로 읽은 것이다. 그 밖에 낙랑ㆍ평양ㆍ평나(平那)ㆍ백아강(百牙岡) 등도 다 ‘펴라’로 읽을 것이다.
그 해석은 여기서 생략하거니와, 한무제가 이미 위씨조선 곧 불조선을 토멸하여 요동군을 만들고는 가끔 신ㆍ말 두 조선의 지명을 가져다가 위씨조선의 옛 지명을 대신하였으니, 지금의 해성(海城) 헌우란의 본래 이름이 ‘알티’(혹은 安地 혹 安市라 한 것)인데, 이것을 고쳐 패수라 하였고, 사기의 작자 사마천은 그 고친 지명에 의하여 사군(四郡) 이전의 옛 일을 설하였으므로, “한이 일어나……물러나서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漢興……退以浿水爲界).”느니, “위만이……동으로 달아나 새외(塞外)로 나가서 패수를 건넜다(滿……東走出寒 漢浿水).”느니 하였으며, 진번(眞番)이 비록 신ㆍ불 두 조선을 합쳐 일컫는 것이지마는, 한은 이를 차지하여 고구려를 진번군으로 가정(假定 : 아래에 자세히 말함)하였다.
사기의, “처음에 전연(全燕) 때 일찍이 진번조선을 약취(略取)하여 예속시켰다(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고 하고, “위만은 잠시 진번조선을 복속시켰다(滿……稍役屬眞番朝鮮).”고 한 진번조선은 신ㆍ불 두 조선을 가리킨 것이지마는, “진번ㆍ임둔이 다 와서 복속하였다(眞番臨屯 皆來服屬).”고 하고,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였다(眞番旁衆國 欲上書見天子).”고 한 진번은 다 사군의 하나인 진번을 가리킨 것으로써, 또한 나중에 고친 지명에 의하여 고사(故事)를 설한 것이다. 마치 을지문덕 이후에 살수(薩水)의 명칭이 청천강(淸川江)이 되었으니, 을지문덕 당시에는 청천강이라는 이름이 없었지마는 우리가, “을지문덕이 청천강에서 수(隋)나라 군사를 깨뜨렸다.”고 하는 따위와 같은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를 모르고 사기의 패수와 진번 등을 사군 이전의 이름으로 아는 동시에, 헌우란 패수, 대동강 패수의 두 패수와 두 나라의 이름은 진번과 한 군(郡)의 이름인 진번의 두 진번을 혼동하여 설하였다.
둘째는 기록의 진위를 잘 분별하지 못한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서 본기(本紀) 무제(武帝) 원봉(元封)3년 진번ㆍ임둔의 주(註)에 ‘무릉서(茂陵書)에 진번의 군치(郡治) 삽현(霅縣)은 장안(長安)에서 7,640리…임둔의 군치 동이현(東Ɦ縣)은 장안에서 6,138리(茂陵書 眞番郡治 霅縣 去長安 七千六百四十里……臨屯郡治 東Ɦ縣 去長安 六千一百三千八里).’라 했는데, 무릉서는 무릉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저작이라 하나, 사기 사마상여전에, “상여가 죽고 5년에야 천자가 비로소 후토(后土)를 제사지냈다(相如旣卒五歲 天子始祭后土).”하고, 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원정(元鼎) 4년 비로소 후토를 세웠다(元鼎四年……始立后土).”고 하였는데, 원정 4년은 기원전 113년이요, 사마상여가 죽은 것은그 5년 전인 원수(元狩) 6년(기원전 117년)이니, 상여는 원봉(元封) 3년(기원전 08년) 진번ㆍ임둔군을 설치한 해보다 10년 전에 이미 죽었으니, 10년 전에 이미 죽은 상여가 어찌 10년 후의 두 군의 위치를 말할 수 있었으랴. 그러니 무릉서가 위서(僞書)인 동시에 그 글 가운데 진번ㆍ임둔 운운한 것은 위증(僞證)임이 의심없으며, 또한 한서지리지에 요동군 군현지(郡縣志) 이외에 따로 현도와 낙랑 두 군지(郡志)가 있으므로, 이를 일근 사람으로 하여금 요동반도 이외에서 현도ㆍ낙랑 두 군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지마는, 위략의 만반한이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의 문ㆍ번한임과 사기의 패수가 곧 요동군 번한현(番汗縣)의 패수(沛水)임이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지리지의 현도ㆍ낙랑 운운한 것은 후세 사람의 위증임이 의심없는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것을 모르고 매양 한서 본기의 진번, 임둔의 주나 지리지의 낙랑ㆍ현도 두 군지를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글로 그릇 믿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사군의 위치에 대한 고거(考據)가 비록 많으나, 하나도 그 정곡(正鵠)을 얻은 이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군은 원래 땅 위에 구획을 그은 것이 아니고 종이 위에 그린 일종의 가정(假定)이니, 말하자면 고구려를 토멸하면 진번군을 만들리라, 북동부여 - 북옥저를 토멸하면 현도군을 만들리라, 남동부여 - 남옥저를 토멸하면 임둔군을 만들리라, 낙랑국을 토멸하면 낙랑군을 만들리라 하는 가정인 것이고, 실현된 것이 아니다. 한무제가 그 가정을 실현하기 위해 위의 여러 곳에 대하여 침략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낙랑과 두 동부여는 앞에 말한 것과 같이 고구려에 대한 오래된 원한이 있으므로 한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배척하려고 했을 것이고, 고구려는 또 전번에 대주류왕이 승전한 기세로 한과 결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전쟁이 대개 지원전108년쯤, 곧 위씨가 멸망한 해에 비롯하여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한이 패하여 사군 실현의 희망이 아주 끊어졌으므로 진번ㆍ임둔 두 군은 그 명칭을 폐지하고, 현도ㆍ낙랑 두 군은 요동군 안에다 붙여서 설치함에 이르렀다. 한서 본기에는 진번군을 폐지했다고 하였을 뿐이고, 임둔군을 폐지했다는 말은 없으나, 후한서 예전(濊傳)에, “소제(昭帝)가 진번ㆍ임둔을 폐지하여 낙랑ㆍ현도에 합쳤다(昭帝罷眞番臨屯 以井樂浪玄菟).”고 하였음을 보면, 임둔군도 진번군과 한때에 폐지하였던 것이다.
후한서 예전에는 현도를 구려(句麗 : 한의 고구려현을 가리킨 것)로 옮겼다고 하였고, 삼국지 옥저전(沃沮傳)에는 처음에 옥저로현도성을 삼았다가 뒤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나 옥저전의 불내예왕(不耐濊王)은 북동부여와 남동부여의 왕을 가리킨 것이요, 예전의 불내예왕은 낙라왕을 가리킨 것이니, 두 동부여와 낙랑국은 다 당시에 독립된 왕국이다. 그렇다면 현도성이 옥저, 곧 북동부여에서 요동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다만 북동부여로 현도를 만들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비로소 요동 - 지금의 봉천성성(奉天省城)에 현도군을 붙이기로 설치한 것이고, 낙랑군도 또한 동시에 붙이기로 설치하였을 것인데 그 위치는 확언할 수 없으나, 대개 지금의 해성(海城) 등지일 것이다.
어찌하여 진번ㆍ임둔을 폐지하는 동시에 현도ㆍ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였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곧 앞서 말한 낙랑국과 남동부여국이 고구려를 몹시 원망하여 한이 패해 물러간 뒤에도 두 나라가, 오히려 한에 사자를 보내 몰래 통하고 상민(商民)이 왕래하여 물자를 서로 사고 팔았으므로 한이 요동에 현도ㆍ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여 두 나라에 대한 교섭을 맡게 하고, 혹은 고구려와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두 나라를 이용하였으니, 이것은 한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고, 고구려는 매양 두 나라의 한과 통하는 증적(證跡)을 알아내면 반드시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켰다. 이는 고구려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니, 수백 년 동안 두나라로 인하여, 고구려의 한에 대한 진취(進取)를 방해하였다. 이 책에서는 두 낙랑을 구별하기 위하여 낙랑국은 남낙랑(南樂浪)이라 하고 한의 요동 낙랑군을 북낙랑(北樂浪)이라 하거니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인 낙랑국은 다 남낙랑을 가리킨 것인데, 종래의 학자들이 매양 요동에 있는 북낙랑은 모르고 남낙랑을 낙랑군이라 주장하는 동시에 삼국사기의 낙랑국 낙랑왕은 곧 한군태수의 세력이 동방을 웅시(雄視)하여 그 형세가 한 나라 왕과 같으므로 나라 또는 왕이라 일컬었다고 단안(斷癌)하였으나, 고구려와 경제가 닿은 요동태수를 요동국왕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현도태수를 현도국왕이라 일컫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홀로 낙랑태수만 낙랑국 왕이라 일컬었으랴? 그것이 억설임이 의심없다.
이즘 일본인이 낙랑 고분에서 혹 한대(漢代) 연호를 새긴 그릇을 발견하고 지금의 대동강 남쪽 기슭을 위씨의 옛 서울 곧 뒤의낙랑의 군치(郡治)라고 주장하지마는 이러한 그릇은 혹 남낙랑이 한과 교통할 때에 수입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과의 싸움에 이겼을 때 노획한 것일 것이요, 이로써 지금의 대동강 연안이 낙랑 군치임을 단언하는 것을 옳지 못한 일이다.
제 4장 鷄立嶺 이남의 두 새 나라
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계립령은 지금의 조령(鳥嶺 : 새재)이다. 지금 문경읍(聞慶邑)의 북산(北山)을 계립령이라고 하지마는, 고대에는 조령의 이름이 ‘저릅재’이니, ‘저릅’은 삼(麻)의 옛 말이다. ‘저릅’을 이두자의 임으로는 ‘계립(鷄立)’이라 쓰고, 뜻으로는 ‘마목(痲木)’이라 쓰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령이 곧 계립령이다.
계립령 이남은 지금 경상남북도의 총칭인데, 계립령의 일대로 지금의 충청북도를 막으며, 태백산(太白山 : 奉化의 태백산)으로 지금의 강원도를 막고, 지리산으로 지금의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막으며, 동과 남으로 바다를 둘러 따로 한 판국이 되었으므로 조선 열국(列國)의 당시에 네 부여(고구려도 혹 卒本扶餘라 함)가 분립하낟, 고구려가 동부여를 정복한다, 또 낙랑을 정복한다,
위씨가 한에게 망하여 그 땅이 사군(四郡)이 된다, 백제가 마한을 토멸한다……하는 소란이 있었지만 영(嶺) 이남은 그런 풍진(風塵)의 소식이 들리지 않아, 진한ㆍ변한의 자치령 수립 나라가 그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에 의거하여 벼ㆍ보리ㆍ기장ㆍ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ㆍ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고 철을 채취하여 북쪽 여러 나라에 공급하고, 변진(弁辰)은 음악을 좋아하여 변한슬(弁韓瑟 : 불한고)이란 것을 창작하여 문화가 매양 발달하였으나, 일찍이 북방의 유민으로 마한의 봉지(奉地)를 받았으므로 마한의 절제(節制)를 받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절제를 받았다. 그러나 그 절제는 소극적으로 ① ‘신수두’의 건설과 ②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① 해마다의 조알(朝謁)과 ② 토산물의 진공(進貢)을 행할 뿐이었는데, 나중에 진한 자치부는 신라국(新羅國)이 되고, 변진 자치부는 여섯 가락(加羅) 연맹국이 되어, 차차 백제에 반항하기에 이르렀다.
加羅 여섯 나라의 건설
지금의 경상남도 등지에 변진의 12자치부가 설립되었음은 제3편에 제4장에 말하였거니와, 위의 각 자치부를 대개 ‘가라’라 일컬었다. ‘가라’란 큰 소[大沼]의 뜻이니, 각 부가 각각 제방을 쌓아서 냇물을 막아 큰 소를 만들고, 그 부근에 자치부를 설치하여 그 부의 이름을 ‘가라’라 일컬은 것이었다. ‘가라’를 이두문으로 ‘가라(加羅)’, ‘가락(駕洛)’, ‘가야(加耶)’, ‘구야(狗邪)’, ‘가야(伽倻)’ 등으로 썼으니, 야(耶)ㆍ야(邪)ㆍ야(倻) 등은 옛 음을 다 ‘라’로 읽은 것이고, ‘가라’를 혹 ‘관국(官國)’이라 썼으니, ‘관(官)’은 그 음의 초성ㆍ중성을 떼어 ‘가’로 읽고, ‘국(國)’은 그 뜻의 초성ㆍ중성을 떼어 ‘라’로 읽은 것이다. 기원 42년경에 각 가라의 자치부원(自治部員)ㆍ아도간(我刀干)ㆍ여도간(汝刀干)ㆍ피도간(彼刀干)ㆍ오도간(五刀干)ㆍ유수간(留水干)ㆍ유천간(留天干)ㆍ신천간(神天干)ㆍ신귀간(神鬼干)ㆍ오천간(五天干) 등이 지금의 김해읍(金海邑) 귀지봉(龜旨峰) 위에 모여 대계(大稧 : 稧는 당시 自治會의 이름)를 베풀고, 김수로(金水露) 6형제를 추대하여 여섯 ‘가라’의 임금을 삼았다.
김수로는 제1가라, 곧 김해를 맡아 ‘신가라’라 일컬었으니, ‘신’은 크다는 뜻이요, 첫째는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신가라’는 전사(前史)에 금관국(金官國)이라 쓴 것이 옳은데, 가락(駕洛) 혹은 구야(狗耶)라고 썼으니, 이 둘은 다 ‘가라’의 이두자이므로, 이로써 여섯 가라를 총칭하는 것은 옳으나, 다만 ‘신가라’를 가리켜 일컬음은 옳지 않다.
둘째는 ‘밈라가라’니, 지금 고령(高靈)의 앞내를 막아 가라[大沼]를 만들고, 이두자로 ‘미마나(彌摩那)’ 혹은 ‘임나(任那)’라 쓴 것으로서, 여섯 가라 중 그 후손이 강대하였으므로 전사에 대가라(大加羅) 혹은 대가야(大加耶)라 기록하였다.
셋째는 ‘안라가라’이니, 지금 함안(咸安)의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안라(安羅)’, ‘아니라(阿尼羅)’ 혹은 ‘아니량(阿尼良)’이라 기록한 것인데, 아니량이 나중에 와전하여 ‘아시라(阿尸羅)’가 되고아시라가 다시 와전하여 ‘아라(阿羅)’가 되었다.
넷째는 ‘고링가라’이니, 지금의 함창(咸昌 : 尙州郡)으로 또한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고령(古寧)이라 기록한 것인데, ‘고링가라’가 와전하여 ‘공갈’이 되었으니 지금의 ‘공갈못[恭儉池]’이 그 자리이다. 여섯 가라 고적 중 오직 이것 하나가 전해져 그 물에는 연꽃ㆍ연잎이 오히려 수천 년 전의 풍경을 말하는 듯하더니, 이조 광무(光武) 시절에 총신(寵臣) 이채연(李采淵)이 논을 만들려고, 그 둑을 헐어 아주 폐허가 되게 하였다.
다섯째는 ‘별뫼가라’이니, ‘별뫼가라’는 ‘별뫼’라는 산중에 만든 가라로서 지금의 성주(星州)다. 이두자로 ‘성산가라(星山加羅)’ 혹은 ‘벽진가라(碧珍加羅)’로 기록한 것이다.
여섯째는 ‘구지가라’니, 지금 고성(固城)의 중도(中島)이다. 역시 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라 ‘고자가라(古資加羅)’라 기록할 것인데, 여섯 나라 중 가장 작은 나라이므로 또한 ‘소가야(小加耶)’라 일컬었다.
여섯 가라국이 처음에는 형제의 연맹국이었으나 나중에 연대가 내려갈수록 촌수가 멀어져, 각각 독립국이 되어 각자의 행동을 취하였는데, 삼국사기에 이미 육가라(六加羅) 본기(本紀)를 빼고 오직 신라본기와 열전(列傳)에서 신라와 관계된 가라의 일만 기록한 가운데, ‘신가라’를 금관국이라 쓴 이외에는 그 밖의 다섯 가라를 거의 구별이 없이 모두 가야(加耶)라 써서 그 가야가 어느 가라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게 된 것이 많다. 이제 이 책에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구별하여 쓰고, 여섯 가라의 연대도 삭감당한 듯하므로 신라의 앞에 기술하였다.
新羅의 건국
종래의 학자들이 다, ‘신라사가 고구려ㆍ백데 두 국사보다 비교적 완전하다.’고 하였으나, 이는 아주 모르는 말이다. 고구려사와 백제사는 삭감이 많거니와, 신라사는 위찬(僞撰)이 많아서 사료로 근거 삼을 것이 매우 적으니, 이제 신라 건국사를 말함에 있어 이를 대강 논술하려 한다.
신라의 제도는 6부(部) 3성(姓)으로 조직되었는데, 신라 본기에 의거하면 6부는 처음에 알천양산(閼川楊山)ㆍ돌산고허(突山高墟)ㆍ무산대수(茂山大樹)ㆍ자산진지(觜山珍支)ㆍ금산가리(金山加利)ㆍ명활산고야(明活山高耶)의 여섯 마을이었는데, 신라 건국 후 제3세 유리왕 9년(기원 32년)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주었다. 곧 알천양산은 양부(梁部)라 하고 성을 이(李)로 하였으며, 돌산고허는 사량부(沙粱部)라 하고 성을 최(崔)로 하였으며, 무산대수는 점량부(漸粱部 : 一名 弁粱部)라 하고 성을 손(孫)으로 하였으며, 자산진지는 본피부(本彼部)라 하고 성을 정(鄭)으로 하였으며, 금산가라는 한기부(漢祗部)라 하고 성을 배(裵)로 하였으며, 금산가라는 한기부(習比部)라 하고 성을 설(薛)로 하였다고 한다.
3성은 박(朴)ㆍ석(石)ㆍ김(金) 세 집이니, 처음에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아래 나정(羅井) 곁에 말이 끓어앉아 우는 것을 바라보고 쫓아가보니, 말은 간 곳이 없고 큰 알 하나가 있으므로, 이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데려다가 기르고 성을 박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나온 큰 알이 박만하므로, ‘박’의 음을 딴 것이라 한다. 이름은 혁거세(赫居世)라고 하였는데, 혁거세는 그 읽는 법과 뜻이 다 전하지 않는다. 나이 13살에 영특하고 숙성하므로 백성이 그를 높여 거서간(居西干)을 삼았다.
거서간은 그때의 말로 귀인(貴人)의 칭호라고 한다. 이것이 신라 건국 원년(기원전 57년)이고, 이이가 박씨의 시조이다.
신라의 동쪽에 왜국(倭國)이 있고, 왜국의 동북쪽 1천 리에 다파나국(多婆那國)이 있는데, 그 국왕이 여국왕(女國王)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이를 밴 지 7년만에 큰 알을 낳으므로, 왕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내다 버리라고 하니, 여자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비단으로 싸고 금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그 금궤가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니, 금관국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가지지 아니하였는데, 진한의 아진포(阿珍浦) 포구에 이르니 바닷가의 한 노파가 이를 건져냈다. 열고 보니까,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어 이 노파는 데려다가 길렀다. 이때가 박혁거세 39년(기원전 19년)이었는데, 금궤에서 빠져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 하고 금궤가 와 닿을 때에 까치[鵲]가 따라오면서 울었으므로 작(鵲)자의 변을 따서 성을 석(昔)이라 하니, 석씨의 시조다.석탈해(昔脫解) 9년(기원 65년)에 금성(金城 : 신라의 서울, 곧 慶州)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므로 대보 호공(瓠公)을보내어 가보게 하였더니, 금빛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므로, 그 금궤를 가져다가 열어보니, 또 한 조그만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데려다가 기르면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 하니 이는 김씨의 시조라 하였다.
궤에서 나왔다, 알에서 깨어났다 하는 신화는 그때 사람이 그 시조의 출생을 신이(神異)하게 장식한 것이거니와, 다만 6부ㆍ3성의 사적이 고대사의 원본이 아니고 후세 사람의 보태고 줄임이 만음은 가석한 일이다. 이를테면 조선 고사의 모든 인명ㆍ지명이 처음엔 우리말로 짓고 이두자로 기록하였는데, 그 뒤 한문화(漢文化)가 성행하면서 한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원래는 ‘메주골’이라 하고, ‘미추홀(彌鄒忽)’ 혹은 ‘매초홀(買肖忽)’이라 쓰던 것을 나중엔 인천(仁川)이라 고친 따위인데, 이제 알천양산(閼川楊山)ㆍ돌산고허(突山高墟) 등 한자로 지은 여섯 마을의 이름이 6부의 본 이름이고, 양부(梁部)ㆍ사량부(沙粱部)……등 이두자로 지은6부의 이름이 여섯 마을의 나중 이름이라 함이 어찌 앞뒤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음이 그 하나다.
신라가 불경을 수입하기 전에는 모든 명사를 다만 이두자의 음이나 뜻을 맞추어 쓸 뿐이었는데, 불교가 성행한 뒤에 몇몇 괴벽한 중들이 비슷만 하면, 불경의 숙어에 맞추어 다른 이두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예를 들면 소지왕(炤智王)을 혹 비처왕(毘處王)이라 일컫는데, 소지나 비처가 다 ‘비치’로 읽은 것이지마는,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소지는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요, 유리왕(儒理王)을 혹 세리지왕(世利智王)이라 일컫는데, 유리나 세리나 다 ‘누리’로 읽은 것이지마는, 유리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세리는 또한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 탈해왕(脫解王)도 그 주에 일명 ‘토해(吐解)’라 하였는데, 탈해나 토해는 다 ‘타해’ 혹 ‘토해’로 읽을 것이고, 그 뜻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시의 속어로 된 명사임은 분명하니, 토해(吐解)는 본래 쓴 이두자이고, 탈해는 고쳐 만든 이두자로서, 불경에 해탈(解脫)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토해의 뜻을 탈(脫)로 고쳐 만든 것이다. 원래는 당시 속어의 음을 취한 것이고, 탈출(脫出) 혹은 해출(解出)의 뜻이 없인, 금궤에서 탈출하였으므로 탈해라 하였다고 함이 괴벽한 중들의 부회(附會)임을 단언할 수 있음이 그 둘이다.
3성의 시조가 다 큰 알에서 나왔으니, 그 큰 알은 다 ‘박’만 할 것인데, 어찌하여 3성의 시조가 다 같은 박씨가 되지 않고, 박씨 시조 이외에 두 시조는 석씨와 김씨가 되었는가? 석ㆍ김 두 성이 다 금궤에서 나왔는데 어찌하여 같은 김씨가 되지 아니하고, 하나는 석씨, 하나는 김씨가 되었는가? 석탈해(昔脫解)의 금궤에 까치가 따라와 울었으므로, 작(鵲)자의 변을 따서 석씨(昔氏)가 되었으며, 김알지(金閼智)가 올 때에 닭이 따라와 울었으니, 계(鷄)자변을 따서 해씨(采氏)가 되어야 옳겠는데 어찌하여 두 사람에게 다른 예를 써서 앞에서는 김씨가 되지 않고 석씨가 되었으며, 뒤에서는 해씨가 되지 않고 김씨가 되었는가? 신화라도 이같이 뒤섞여 조리가 없을뿐더러 게다가 한자 파자장(破字匠)의 수작이 섞여서 이두문 시대의 실례와 많이 틀림이 그 셋이다.
초년(初年)에 초창(草創)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느니, ‘동옥저가 좋은 말 200마리를 바쳤다.’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북명인(北溟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듯하다. 왜냐하면 북명(北溟)은 ‘북가시라’ - 북동부여의 별명으로 지금의 만주 훈춘 등지이고, 고구려 대주류왕의 시위장사(侍衛壯士) 괴유(怪由)를 장사 지낸 곳인데, 이제 훈춘의 농부가 밭 가운데서 예왕의 도장을 얻어 수천 리를 걸어 경주 한 구석의 조그만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함이 어찌 사실다운 말이랴? 이는 경덕왕(景德王)이 동부여 곧 북명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당한 말이니, 다른 것도 거의 믿을 가치가 적음이 그 넷이다.
신라가 여러 나라 중에서 문화가 가장 늦게 발달하여 역사의 편찬이 겨우 그 건국 6백 년 후에야 비로소 억지로 북쪽 여러 나라의신화를 모방하여 선대사(先代史)를 꾸몄는데, 그나마도 궁예(弓裔)ㆍ견훤(甄萱) 등의 병화(兵火)에 다 타버리고, 고려의 문사들이 남산ㆍ북산의 검불을 주워다가 만든 것이므로, 신라 본기의 기록의 진위를 가려냄이 고구려ㆍ백제 두 나라 역사나 마찬가지인데, 역사가들이 흔히 신라사가 비교적 완벽된 것인 줄로 알아 그대로 믿었다.
나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는 진한 6부의 총칭이 아니고, 6부 중의 하나인 사량부이다. 신라나 사량은 다 ‘새라’로 읽을 것이요, ‘새라’는 냇물 이름이니, ‘새라’의 위에 있으므로 ‘새라’라 일컬은 것이고, 사량은 사훼(沙喙 : 진흥왕 비문에 보임)라고도 기록하였으며, 사훼는 ‘새불’이니 또한 ‘새라’위에 있는 ‘불’ - 들판이기 때문에 일컬은 이름이다. 본기에 신라의 처음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으나, 서라벌은 ‘새라불’로 읽을 것이니, 또한 ‘새라’의 ‘불’이라는 뜻이다. 시조 혁거세는 곧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의 양자이고, 고허촌은 곧 사량부이니, 소벌공의 ‘소벌(蘇伐)’은 또한 사훼와 같이 ‘새불’로도 읽을 것이므로 지명이고, 공(公)은 존칭이니, 새불 자치회(自治會)의 회장이므로 ‘새불공’이라 한 것이다. 말하자면 소벌공은 곧 고허촌장이라는 뜻인데, 마치 사람의 이름같이 씀은 역사가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새라 부장(部長)의 양자인 박혁거세가 6부의 총왕(總王)이 되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새라’라 하고 이두자로 신라(新羅)ㆍ사로(斯盧)ㆍ사라(斯羅)ㆍ서라(徐羅) 등으로 쓴 것이다.
3성의 박씨뿐 아니라, 석씨ㆍ김씨도 다 사량부의 귀인의 성이니, 3성을 특별히 존숭하는 것은 또한 삼신설(三神說)에 의방(依倣)한 것이다. 본기 석탈해왕 9년(기원 65년)에 비로소 김씨 시조인 영아(嬰兒) 김알지를 주웠다고 하였으나, 파사왕(破娑王) 원년(기원 80년)에는 왕후 사성부인(史省夫人) 김씨는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 : 추존한 왕을 갈문왕이라 함)의 딸이라 하였으니, 그 나이를 따지면 허루(許婁)도 거의 알지의 아버지뻘되는 김씨인 것이니, 이로 미루어보면 박ㆍ석ㆍ김 3성이 처음부터 사량부 안에 서로 연혼(聯婚)하는 거족(巨族)이었는데, 같이 의논한 끝에 6부 전체를 가져 3성이 서로 임금 노릇하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에 진한 자치제의 판국이 변하여 세습 제왕의 나라가 됨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