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듣다
김동원 시인
집단적이고 서사적인 원시 종합 예술에서,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시가(詩歌)로 분리 발전된 것이 고대 가요라면, 향가는 그 원형을 신라인의 정서로 고스란히 흡수한 놀라운 문학적 사건이다.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의 문화 융성에 획기적 전환점이 된다. 불교의 유입으로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로 표기한 이두법의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 향가는 경덕왕(신라 35대 임금, 재위 기간 742년~765년) 때 향찰(鄕札)로 기록한 노래이다. 민요적ㆍ불교적인 내용으로, 작가층은 승려ㆍ귀족ㆍ평민에 걸쳐 다양하다. 4구체, 8구체, 10구체의 세 가지 형식이 있다. 현재 『삼국유사』에 14수,『균여전』에 11수로 모두 25수가 전한다. 이번 수운 김정숙의《신라를 듣다》서전書殿은, 향가 14수(김완진『향가해독법연구』본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를 한글 고체로 휘필한 경이로운 작품이다. “신라사람들이 향가를 숭상한 지 오래 되었다”는『삼국유사』의 기록에서도 보듯이, 향가는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 그 시대인의 예술적 감성의 묘처이다.
월명사의〈제망매가祭亡妹歌〉를 읊조리고 있으면, 죽은 누이가 바람에 불려올 것만 같다. 정제되고 세련된 놀라운 시적 기교는, 뛰어난 비유를 통해 종교적 법열로 승화된다. 이런 슬픔에 먹을 찍어 수운은, 천천히 흘림의 첫 획을 밀어 넣었다. 붓끝이 종이 위에 닿을 때, 그 순간 마치 생과 사의 경계서 숨을 내쉬는 것처럼 보인다. 한지에 먹이 스민 자리마다 누이의 영혼이 피어오르고 있다. 필세의 결마다 남은 자형(字形)의 숨결은 생동한다. 시가 그렇듯, 필획 속에서는 살아 있는 흐름을 품었다. 이어진 듯 끊어진 듯, 그 무상 속의 연기緣起가 그대로 먹선에 나타난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생의 획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격조를 띤다. 그러하다. “생사生死의 길”은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가을 이른 바람에 /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어디로 흩어질지 아득하다. 서법의 고졸함을 지닌〈제망매가祭亡妹歌〉는, ‘글의 향가’이자 ‘먹의 향가’이다. 그 향기는 슬픔이 아니라 끝내 비움의 향기, 불성의 향기다. 먹이마른 자리마다 이승의 이별도 한 가닥 인연(因緣)임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 향가의 숨은 불성(佛性)이 붓끝에서 피어난다면, 그것은 말 없는 시요, 향으로 남는 철학이다. 향가 14수를 서예의 고체로 쓴다는 것은, 단순히 글씨를 옮기는 행위가 아니라, 시와 서예, 그리고 불교의 화엄의 세계다. 그때 피어난 예술은 묵향만리墨香萬里다. 천지간 소리는 먹의 흐름이 되고, 운율은 붓끝의 떨림이 된다. 향가는 본래 노래의 시이자, 울림의 격조다. 선線의 굴곡, 점點의 농담, 획의 여백이 불교 사상과 천년 신라를 만나 시각화된다. 향가의 정신은 자비, 해탈, 무상에 닿아 있다. 한글 고체 서예는 기교를 넘은 무심의 필획을 추구한다. 먹향은 공空의 향기로 번지고, 붓은 중생의 마음을 쓰고, 필획은 한지에 길을 낸다. 고체는 무기교의 기교이다. 절제의 미학이 사랑의 언어를 품는 순간, 서법은 장엄하다. 수운 김정숙의《신라를 듣다 – 향가 14수》서전書殿은, 한글 고체古體의 먹향이 미학을 품었다.대담한 필선은 기존 서법을 한 단계 더 깊이 치고 들어간 미학이다. 그녀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행서(行書), 해서(楷書)의 필획을 관통하여, 한글서예의 뛰어난 조형미와 농묵의 묵중함을 얻었다. 먹의 농담을 대담하게 쓴 절묘는, 필筆의 느낌은 살리되 시의 맑음을 버리지 않는 경계의 운필이다.
기품과 정서의 조화를 이룬 시〈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는, 고체로 피어난 ‘향기로운 충(忠)의 미학이다. 첫 붓놀림은 장중하고 단정하게 시작된다. 기파랑의 인품에 대한 찬양과 충담사(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의 추모의 정이 먹향 가득 숭고미로 적셔온다. 자긍과 절제의 기운이 깃든 굳센 획은, 서예가 수운의 서여기인書如其人을 보여준다. 칼로 새긴 듯 먹선엔 충성과 결기가 중봉의 심필로 묵중하다. 붓은 마음의 검이며, 먹은 충의 향기다. 하여, 첫 획은 인간의 바름을 새긴다. 한글 고체의 절묘는 느린 호흡과 중용의 정신에서 비롯한다. 획과 획 사이의 간격은 예를 갖춰야 깊다. 절도는 숨소리까지 흡수한다.〈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를 통해 그어나간 수운의 붓의 수행은, 기파랑의 내면적 덕을 찬탄하기에 충분하다. 고체의 붓끝은 화려하지 않아야 하며, 힘을 거두되 조용히 여백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 먹은 그 서예인의 정신의 색체다. 글씨는 끝나도 먹향은 작품 밖에서 이어져야 신품이라 부른다.
고체는 훈민정음 해례본체(訓民正音 解例本體)에 바탕을 두면서도, 대범한 직선과 이응의 곡선 미학은 조화미의 극치를 이룬다. 마치 한지(韓紙) 위에 붓칼로 글자를 새긴 듯한 먹색의 묵중함은 압권이다. 이런 치열한 작가 정신은 수운 김정숙의《신라를 듣다》서전書殿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예술은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不狂不及)’ 죽기 살기로 쓰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붓이 알고 종이가 알고, 마침내 몸이 안다”고 하였다. 운필은 멈출 때 멈추고, 감을 때 감고, 힘을 줄 때 주고, 마침내 중봉에서 매듭이 나온다. 예측 불가능의 필획은 장법과 한지에 막힘없이 써내려간 고졸미는 독창적 선(線)의 미학을 녹여내었다. 가는 획과 굵은 획, 긴 획과 짧은 획, 강한 획과 약한 획, 둥근 획과 각진 획들은, 대범하고 섬세하고 아름답다. 하여, 서예술(書藝術)은 쓰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나아가는 법이다. 고체의 절묘는 법고法古을 바탕한 흑백의 여백미에 있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대작인〈처용가處容歌〉는 스펙터클하다. 아내를 범한 역신을 쫓는 이 노래는, 체념과 분노, 영탄과 관용의 정신이 먹향에 스며야 한다. 이런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적묵의 깊이가 한지에 새겨져야 한다. 옛법을 따르되 고정되어 있지 않고, 문자 예술의 틀을 깨되 그것에 함몰되지 않는다. 이런 곡선과 직선의 미학은 형태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낳았다. 작품의 조형미와 표현의 가능태를 변화무쌍하게 변주할 수 있음을, 수운 김정숙은 잘 증거한다. 그 밖에도 남몰래 정을 통한 선화공주와 백제 무왕의 이야기인〈薯童謠〉, 암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지어 부른〈헌화가獻花歌〉, 용천사가 지어 혜성을 없앤 노래〈혜성가彗星歌〉, 왕과 신하와 신의를 읊은〈원가怨歌〉, 승려 광덕의 서방정토를 기원한〈願往生歌〉, 화랑 죽지랑의 죽음을 애도한 노래〈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백성의 아끼고 사랑하기 위해 임금에게 바친 충간(忠諫) 노래〈안민가安民歌〉등은 실로 멋진 서예 작품이다. 궁극으로 수운(水雲) 김정숙의《신라를 듣다》서전書殿은, 서(書)와 시(詩), 가歌가 다르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먹색의 오채가 정신의 무늬라면, 붓은 서예가의 신령스러운 기운의 요체이다. 서(書)가 붓과 종이의 접(接)의 예술이라면, 시는 사물의 기미와 기척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수운에게 천지창조는 그 자체가 ‘서법書法이자, 시법詩法’이다. 하여, 신품을 만나려는 자는 고행만이 길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명필을 만나면 명필을 죽이고, 신필(神筆)을 만나면 신필을 죽여야, 천하에 하나뿐이 서도書道가 된다.
첫댓글 신라 향가라면 으뜸 월명사의 도솔가이거나 제망매가가 아닐까요? 향가의 노래중 월명의 시처럼 곡진하되 선적인 시가 없습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