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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감으로 쓰인 우리지역 땅이름
2009.9.19(토) / 가락문예관
주 오 돈
<주> 이 글은 최근 1년 6개월간 저가 써 나가는 생활 속의 글 가운데 우리지역 땅이름과 관련 있는 부분만 가려 뽑아보았습니다. 학문적 연구라기보다 글쓰기의 글감으로 땅이름을 풀어 보았습니다. 저의 식견이 아직 많이 부족하기에 일부 내용은 고증과 어원 풀이에 미흡한 부분이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어느 땅이름이나 얽힌 사연은 있게 마련이다. 분명한 고증은 문헌자료에 나온 사실대로다. 그 다음은 현지 주민들에게 탐문하는 방법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한자어를 유추해서 풀어볼 수 있다. 마지막 방법은 궁여지책이라 권장할만한 것이 못 된다. 그래도 나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가끔 땅이름을 풀 때 이 방법을 쓰고 있다. 식민시대 엉뚱한 한자로 옮겨 헷갈리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내 생각으론 굴현(屈峴)이나 굴현(崛峴)으로 쓰지 싶다. 한자로 쓰면 구부러진 고개나 우뚝 솟은 고개라는 뜻으로 보인다. 천주산에서 흘러내린 지세가 주남저수지 방향으로 휘감아 돌아 백월산으로 바위 봉우리에서 맺혔다. 우뚝 솟은 천주산 산허리에 있는 고개라는 이름으로 풀어도 될 것이다. 이 때 현(峴)은 고개를 가리키는 한자다. 재나 고개는 순우리말이지만 영(嶺)과 치(峙)는 한자다. 09.05.04 <두벌두릅>
고개를 이른 순우리말로 말로 재가 있다. 옛글에 “재 너머 성권농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 아해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 왔다 하여라.” 조선 중기 정치인이고 학자였던 정철은 어지간히 친구를 좋아하고 술을 즐겼나 보다. 친구네 집에 술이 익어간다는 애길 들은 모양이다. 소를 타고 고개도 마다 않고 넘어가려고 하인을 부르는 내용이었다.
고개를 이르는 한자어로는 영(嶺)으로 대관령이 있고 추풍령이 있다. 고개는 치(峙)라고도 해서 대치동(大峙洞)이나 정령치(鄭嶺峙)에 쓰였다. 또 고개를 현(峴)이라 해서 아현동(阿峴洞)과 남성현(南省峴)이라는 곳도 있다. 우리 지방 굴현(崛峴)은 창원 동헌에서 봐 우뚝 솟은 고개라서 이름 붙여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천주산에서 휘어져 내려와 구부러져 굴현(屈峴)이라 하는지 모를 일이다. 09.08.13 <능선 너머>
진해 사람들은 양어장이라는 곳으로 군항제 기간만 시민에게 개방했다고 한다. 그 밖의 기간은 연구 활동에 지장이 있다 해서 일반인은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었다. 최근 진해시가 시민에게 다가가는 행정으로 생태공원을 만들어 개방하고 있다. 지난해 람사르 총회를 앞두고 공원 일부가 준공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와 자유롭게 드나든다. 나는 사람들이 복작대지 않은 때 연구소를 찾아갔다.
진해역에서 여좌천변 따라 걸었다. 친환경으로 바꾼 여좌천은 드라마 로망스촬영지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다. 지난가을 개울바닥 심어둔 유채는 겨우내 얼지 않고 파릇파릇 자라고 있었다. 여좌동 지명내력이 궁금했는데 친절히 소개해 두었다. 예전 여명리와 좌천리가 합쳐지면서 머리글자를 따서 여좌동이라 했다. 영남지방을 경주와 상주가 있는 고을이라 해서 경상도라고 부르는 이치와 같았다. 09.01.20 <일급수를 찾아서>
유등 배수장을 지나 강둑 마른 풀에 퍼질러 앉아 싸간 점심을 비웠다. 행정구역 경계가 창원에서 김해로 바뀌는 경계지점이었다. 한림면 가동과 시산마을이 나왔다. 본래 한림면은 이북면이었다. 일제시대 행정개편 때 김해부 북쪽의 상북면과 하북면을 통합하여 이북면(二北面)으로 이름 붙여 해방 후까지 줄곧 불러왔다. 남북대치의 냉전 이데올로기가 이북면 행정지명 변경을 가져왔다는 일화가 있다.
경전선철로에 한림정역이 있다. 한림정은 조선 초 한림학사와 한성부윤을 지낸 퇴은 김계희에서 유래한다. 그는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자 낙향해서 화포천변에 정자를 짓고 소일했다고 한다. 정자 이름이 퇴은정이었는데 지역에선 그의 벼슬을 따서 한림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림정은 이미 오래전 임진왜란 때 불타고 없어졌지만 지명은 길게 이어져 오늘의 기찻길 열차역 이름으로까지 전한다. 09.01.06 <겨울 일광욕>
창원과 진해를 경계 짓는 산 능선에 안민고개가 있고, 그 아랫마을이 안민동이다. 우리 고장의 지명 어원에 천착하지 못하면서 주제넘게 떠올려 본 생각이 있다. 어째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마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혼자 상상해 보길 산자락 고개가 바닷바람을 막아 주어 편안한 동네였을까? 아니면 진해 갯가에 왜구 노략질이 심할 때 고개 너머는 피해가 없었다는 동네였을까? 08.03.11<재 너머 갯가에는>
한참 더 걸어 어느 모롱이를 지날 때였다. 처음으로 태공이 고기 한 마리를 낚아 올렸다. 주둥이가 학처럼 생긴 고기였다. 투명한 바다 속에 몇 마리 학꽁치들이 유유히 헤엄쳤다. 그 곁에 세워 놓은 삼귀애향비를 읽어보니 창원에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고기잡이하고 농사짓던 사람들이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그 마을 이름이 귀현, 귀곡, 귀산이었다. 지금은 맨 안쪽 귀산만 남았고 그 끝에 작은 석교마을이 있었다. 08.09.08 <석교 가는 길>
상다리가 개다리처럼 생긴 작은 밥상을 개다리소반이라 한다. 이름이야 천박하게 들릴지 모른다만 양반가 전통생활 용품 가운데 한 품목이다. 규방이나 사랑채에서 문갑과 함께 사랑받던 목가구가 개다리소반이다. 예전 소목장이들은 상다리에 한껏 기교를 부리고 옻칠로 마감했을 것이다. 개다리소반은 서민에게도 익숙한 생활도구다. 여기서 반(盤)은 밥상을 의미하면서 다과상 기능도 함께 한다.
무릇 지명에는 유래가 있다. 한실은 큰 골짜기고 신촌은 새마을이다. 내가 사는 동네가 반림동이고 곁에는 반송동이고 반지동이 있다. 여기 쓰인 반이 소반 반(盤)이다. 지형이 소반처럼 생겨서가 아니라 예전부터 반송(盤松)이 많이 자라던 곳이다. 키가 작고 가지가 옆으로 퍼진 소나무를 반송이라 한다. 잔가지가 많아 다보록한 왜송과 같은 소나무로 정원수로 많이 가꾼다. 미끈하게 높이 자란 소나무가 아니다. 08.09.22 <반송>
옛날 지방고을을 다스리는 관아를 동헌이라 했다. 군과 현은 물론 부와 목에도 동헌이 있기 마련이다. 이 동헌을 기준으로 북쪽이면 군북면이나 부북면이다. 창원에선 동헌이 있던 자리를 기준으로 동쪽은 동읍이고 북쪽은 북면이다. 동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향교가 있어 통치이념을 제공했다. 근대화 이후 동헌은 사라져도 향교는 맥을 이어 대성전에서 춘추 제향을 올리고 있다.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이라고도 한다.
나는 동헌은 없어져도 향교가 있는 동네를 벗어나 북쪽으로 갔다. 창원역에서 달천계곡으로 들어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창원시에서는 유원지 주차난 해소와 에너지 절약을 위해 도청 뒤 용추계곡 입구와 안민고개에도 마을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이 녹색버스는 일요일에만 운행하는데 홍보가 덜 되어서인지 달천계곡 입구까지 승객은 나 혼자였다. 앞서 언급한데로 창원 동헌에서 북쪽이기에 북면이라 부르는 곳이다. 08.10.20 <산허리로 난 길에서>
불모산에서 진해 쪽으로 뻗은 능선에 우뚝 솟은 시루봉이 있다. 바위가 떡시루 모양으로 생겼다. 이 시루봉을 진해 사람들은 곰메바위라고 한다. 한자로 쓰자면 웅암이다. 시루봉 아래 흐르는 개울이 웅천이고 동쪽은 웅동이다. 지금은 행정구역 이름으로도 웅천이고 웅동이지 싶다. 창원에는 웅남면이 웅남동으로 되었지 싶다. 창곡 월림 완암 공단지역과 신촌 양곡 아파트와 귀산 귀현 귀곡 해안이 웅남이다.
창원 원주민들에겐 성주사는 곰절이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성주사가 곰절로 불리는 데는 중창불사 때 곰 토템이즘이 결합되어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다. 창원에서 부처님 오신 날 거리행진에는 대형 모형 코끼리가 나오고 곰이 나온다. 코끼리야 불교 발생지 남방을 상징한 동물일 테고, 곰은 바로 성주사 창건 때 곰이 목재를 날라 주었다는 설화에 유래한 것이다. 설화는 화석이 아니고 생활 속에 있다.
창원은 삭막한 기계공업단지만이 아니다. 삼국유사에 백월산에서 수도하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성불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불모산 지명에서 성불한 일곱 왕자의 어머니인 허황옥을 떠올림이 무리가 아니라 본다. 그가 도래한 곳이 용원 앞바다고, 그의 능이 김해 구산동에 있고, 그의 오라비 부도가 장유사에 있다. 불모산을 수로왕비산이라 해도 되지 싶다. 불모산 정상에 올라 혼자 해 본 생각이다. 08.11.26 <곰절>
함안 경계지점에서 다시 천주산 길과 청룡산 길로 갈라졌다. 나는 산으로 오르질 않고 임도 따라 계속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십 리 넘게 한참 내려가니 칠원 산정마을이 나왔다. 마을회관과 함께 쓰는 경로당은 적막했다. 나는 아랫담 길가에서 장작 패는 어르신 한 분을 만나 몇 마디 여쭈었다. 먼저 산정마을의 ‘정’자가 한자로 무슨 글자인지 궁금했다. 정수리 정(頂)도 아니고 우물 정(井)도 아니었다.
뜻밖에도 정자 정(亭)자를 쓴다고 했다. 산중 깊숙한 곳이라 절이 있었고 풍광 좋은 자리 정자가 있었다고 했다. 근래 마을 앞에 저수지가 만들어졌다. 길 아래 산정분교 터가 있었다. 슬레이트지붕의 낡은 건물이 흉가처럼 보였다. 본관이 진주인 강씨 노인은 객지로 떠난 이들은 다 성공했다고 했다. 조금 전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간 사람은 현대계열사 부사장이라 했고 박사도 여러 명 있다고 했다. 08.12.25 <옛길 따라>
새해 들어 두 번째 맞는 토요일이었다. 방학이 아니라도 휴무일로 학교 나가지 않은 날일 것이다. 가까이 지내는 대학동기가 운전한 차로 두 집 내외는 아침나절 창원 교외를 빠져나갔다. 차 안에서 두 집 다 전방에서 군복무중인 아들 녀석부터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남저수지 들판을 지나 수산다리 건너 밀양으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표충사가 가까운 삼거(三去)에서 정승골 방향으로 진입했다.
삼거 마을 지명에는 가슴 찡한 사연이 있다. 옛날 한양에서 밀양 산골로 귀양 온 정승 있었단다. 그 정승이 유배 와 머문 골짜기가 지금의 단장면 정승골이다. 어느 날 한양에서 서찰을 가지고 집안 안부 전하려고 사람이 왔다. 아마 자식이나 노복 정도지 싶다. 유배지서 아비와 자식 간이든 상전과 하인 간이든 눈물의 상봉이었을 것이다. 서로는 헤어지기 아쉬워 세 번이나 오고갔다한 곳이 삼거란다. 09.01.11<가지산자락>
생태공원 곁에 눈길을 끄는 빗돌이 세워져 있었다. 해정(海亭)마을 옛터 비였다. 용지봉과 불모산에서 흘러온 남천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해정마을은 마산만이 가까워 해수와 육수가 만나는 곳으로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진 와우산 아래로 봉암 갯벌이 멀지 않았다. 이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농사짓던 삼십여 세대가 신도시개발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고향이 생각나 그곳에 비를 새워두었다.
창원이 신도시로 개발된 지 삼십여 년 흐른다. 한 세대가 교체되는 데 걸리는 기간이 삼십년이라고 한다. 젊은 도시 창원도 이제 장년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오십여 만 명에 이르는 창원인구 가운데 조상을 창원에 뿌리 둔 원주민은 그렇게 많지 않은 숫자일 것이다. 신도시가 형성되던 초창기에 창원에 들어와 살았던 세대는 이제 그들의 장성한 자녀가 결혼하여 분가해 나갈 즈음이다. 09.01.21 <원주민 터>
너럭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면서 낙동강 건너 금정산 백양산 승학산을 짚어보았다. 칠백 리 강물은 하구언에서 바다와 경계를 이루었다. 을숙도 모래톱을 에워싼 다대포 몰운대와 형제섬이 보였다. 산등선에 오르자 진해 용원과 가덕도 신항만 공사현장까지 훤히 드러났다. 거제 쪽으로는 점점 떠 있는 섬들로 다도해를 실감했다. 김해공항 활주로에선 여객기가 간간이 이착륙을 반복했다.
나는 처음 올라본 굴암산 능선에서 부산을 건너다보았다. 그리고 좌우로 김해와 진해를 굽어보았다. 산에 올라와서 왜 산 이름이 굴암(屈巖)인지를 알았다. 불모산에서 화산을 거쳐 내려온 낙남정맥이었다. 군데군데 드러난 암반 능선이 휘어져 있기에 굴암산이었다. 나는 장유신도시로도 진해 웅동으로도 내려가질 않았다. 굴암산에서 공군레이더 기지가 있는 화산으로 올라갔다. 09.02.17 <산등선에 서서>
학군단 건물 곁에 떠났던 상촌마을 원주민이 이태 전 세운 비가 있었다. 창원이 계획도시로 개발 될 때 뿔뿔이 흩어졌다. 대학부지에 편입된 땅이 무려 십만 평이나 된다고 했다. 대학이 자리한 마을은 상촌, 상림, 두랑곡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은 다시 찾아와 빗돌에다 당시의 산과 들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 수리덤, 잿곡, 넉바잇등, 삼밭골, 죽도가리, 참새미, 매바구, 너들강….
상촌마을은 사백 년 전 김해김씨 집성촌으로 시작하여 타성이 들어오게 되었다고 했다. 이 빗돌에 새겨진 오십여 세대 원주민 명부가 특이했다. 바깥양반 성씨와 이름이 아니라 안주인 택호를 하나하나 새겨두었다. 그러니까 호주의 성명이 아니라 부인을 지칭한 이름이었다. 택호는 대개 여자가 시집오기 전 친정동네 이름에서 따왔다. 남촌댁, 진동댁, 고산댁, 진영댁, 원동댁, 등등. 09.02.19 <빗속에 나선 산책>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묶어 삼도 또는 삼남이라 했다. 통영은 지명 연원으로 보면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인 말이다. 임진왜란 후 남녘에서 왜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파견한 삼도수군통제사가 근무한 본영이 삼도수군통제영으로 현재의 통영이다. 나폴리 시드니와 함께 세계 삼대미항으로 꼽히는 항구다. 통영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예술인들을 배출한 예향이기도하다. 09.02,21 <예향 통영>
마산의 주산은 무학산이다. 정상에 서면 사야가 탁 트여 다도해와 마산 창원 시가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무학산만큼 높진 않지만 팔용산도 마산시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산이다. 사실 팔룡산(八龍山)이라 이름 해야 하는데 정상에 팔용산으로 음각한 빗돌이 세워져 있다. 마산 창원의 경계지점이라 창원 사람도 더러 찾는 산이다. 마산과 창원은 인접도시라 행정구역 의경계는 큰 의미가 없다.
나는 봄방학 때 틈을 내어 팔용산에 올라보았다. 팔용산은 하늘에서 여덟 마리 용이 소반 위에 내려앉았다는 반룡상(盤龍山)에서 유래했다. 같은 지명이 다른 지방에도 더러 있는 것으로 안다. 신도시 장유에도 반룡산이 있다. 마산지역 사람들은 반룡산을 여덟 마리 용과 관련 지어 팔용산으로 부르고 있다. 두 입술이 만나 떨어지면서 나는 예사소리 ㅂ이 거센소리 ㅍ으로 바뀌었다. 09.02.26 <용, 산에 올라>
원동역광장 안내도에 궁금한 내용이 하나 있었다. 강변에 있다는 가야진사(伽倻津祀)라는 사당이었다. 나는 이 건물이 용도가 무엇인지 해설을 유심히 살펴 읽었다. 경상남도 민속자료 7호인 가야진용신제를 지내는 사당이라고 했다. 그곳에는 신라대부터 국가의식으로 전해오던 제의가 전해온다고 했다. 여러 지방에서 지냈던 용신제가 오늘날 가야진에서만 유일하게 맥을 이었다.
가야나루라는 지명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양산은 엄밀히 따지자면 신라의 변방으로 옛 금관가야 땅이라고 볼 수 없다. 굳이 연관 짓자면 가락국 꼭뒤에 해당한다. 다만 삼국유사에 전하는 돌너덜 이야기와 관련 있다. 당시 가락국과 신라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경계가 갈렸다. 수로왕이 부처님께 빌어 정성이 닿았다는 설화의 현장이 강 건너 신라 땅 삼랑진 만어사와 원동 신흥사다. 09.03.15 <가야진사>
내가 사는 창원에 천마산이 있다. 앞서 언급한 천마총 천마도와 같은 이름의 산이다. 북면 온천장에서 가까운 산이다. 북면 온천은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오는 온천이다. 예부터 피부병에 좋아 해녀의 잠수병 치료에 효험 있는 온천으로 알려졌다. 온천장 뒤로 마금산과 천마산이 봉긋하게 솟아 있다. 가까이 백월산 아래는 마산리가 있다. 말 마(馬)자가 붙은 지명이 세 곳이나 인접했다.
나는 왜 마금산이고 마산리인지 궁금했다. 그런데 낙동강 가로 뻗어나간 천마산 이름 유래는 어디선가 들었다. 창원 북면에서 북쪽 끝 마을이 상천이다.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시내로 옮겨 살았다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이 사람은 내가 사는 동네 아파트 상가 주점 아낙이다. 여인이 어릴 적 어른들로부터 듣기로 마을에서 본 천마산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말의 형상이란다. 09.04.19 <천마산 오른 날>
나는 공단지역 사정은 잘 모른다. 그런데 개천절에 등산복 차림으로 진해선 철길 따라 창곡지구 공단 배후도로를 걸었다. 월림이라 불리기도 하고 공단 조성 전에는 완암마을이었다. 원주민들은 떠나면서 완암유허비를 세워놓았다. 완암유허비에서 조금 더 돌아가면 저수지가 나온다. 장복산 북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을 가둔 저수지다만 농업용수 기능은 상실했다. 찾을 때마다 느끼지만 물이 그림같이 맑은 저수지다. 08.10.03 <살어리랏다>
용연(龍淵) 용호(龍湖) 용지(龍池) 용당(龍塘) 용추(龍湫) 용담(龍潭) 용천(龍泉) 용정(龍井). 열거한 낱말의 공통점은 용이 서식하는 연못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여러 곳에 전해오는 장자못 전설의 못도 용연이다. 인색한 부자가 탁발 나온 도승을 해코지해서 대궐 같은 기와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못이 된 이야기다. 천둥이 쳐도 뒤돌아보지 말라는 계율을 어긴 착한 며느리는 안타깝게도 석상이 되고 말았다. 08.10.27 <용, 언제쯤 돌아오려나>
우리가 목표한 만어산에 닿으니 오후 세시 반이었다. 산길을 무려 여섯 시간 넘게 걸었다. 이동통신사에서 세운 송신탑 옆 정상에서 땀을 식혔다. 나는 신령스럽게 생긴 바위에 올라 저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는 산자락이 살짝 가리긴 해도 삼랑진(三浪津)은 세 갈래 물길이었다. 이미 흘러온 낙동강 본류에다 샛강 밀양강이 합류해 Y자로 만났다. 세 갈래 물길 나루터 부근에 예전 내가 근무했던 학교가 있었다.
우리는 정상에서 오솔길 따라 내려서서 미륵불을 먼저 만났다. 조계종 산하 사찰에선 좀체 보기 드문 미륵전이 있다. 삼국유사 어산불영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후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도 나온다. 강 건너 감해 가락국 수로왕과 부처님 공덕을 설화로 보기엔 만 마리 물고기 돌이 너무 신비로웠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이 멀어 일행은 하산 길을 바삐 걸어야 했다. 산길 따라 걸어 청학동 닿으니 어둑했다. 08.11.09 <미륵불을 만나러>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이 압록강이다. 강의 하구에 수풍이라는 지명이 있고 해방 전부터 댐이 있어 큰 수력발전소가 있다고 어린 시절 배웠다. 수풍(水豊)은 말 그대로 물이 넉넉한 곳이라는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인 낙동강의 하류지점이 물금이다. 물금(勿禁)은 수금(水禁)과 통하는 말이다. 우리말과 한자어가 결합된 지명이 더러 있다. 물이 넘쳐나 지겹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08.12.01 <강가에서>
노인은 마산과 함안 경계 신당고개에서 내리고 나는 산인면사무소 앞 수동마을에서 내렸다. 정류소에는 내가 내리자 베트남인으로 헤아려지는 여성이 오르려고 했다. 나는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 문암초등학교 정문에서 학교 안을 살펴보았다. 수목이 울창했고 교정이 꽤 넓어 보였다. 나는 고려동유적지 장내(墻內)마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우리말로 풀면 담안마을이다. 울타리 안이 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어귀에 작은 꽃밭에 나지막한 키의 돌비석이 눈길을 끌었다. 음각으로 새긴 ‘고려동학(高麗洞壑)’ 글씨를 쓰다듬어 보았다. 고려마을 골짜기라는 뜻이렷다. 언제 새긴지는 몰라도 돌에 낀 이끼로 미루어 보아 수백 년은 되었지 싶었다. 개성에서 함안까지 길이 어디인데. 이오는 임진강을 건너고 한강도 건넜다. 새재도 넘고 달구벌도 지나 반도의 남단에 닿았다. 거느린 식솔이 처자에다 따르는 노복은 있었는지. 08.12.14 <왕대밭>
아침햇살을 받고 있던 본포나루 찻집 ‘알 수 없는 세상’은 고요 속에 괴기스러웠다. 나는 본포에서 낙동강 다리를 건너 학포로 갔다. 털모자를 눌러쓰고 목도리를 둘러도 찬바람에 귀가 시려왔다. 낙동강엔 구포, 호포, 본포, 학포, 개포 등 여러 물가 마을이 있다. 삼랑진, 임해진, 송진 박진, 정암진 등 여러 나루도 있다. 땅이름으로 포(浦)나 진(津)이 붙은 마을은 예부터 모두 나루가 있던 내륙수운의 요지였다.
나는 학포에서 낙동강 강변길을 걸어 올라갔다. 건너편 마금산 온천이 바라보이는 곳 강 한복판에 모래섬이 생겨 있었다. 학포 노리에서 청암 임해진까지 오 리 길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근년에 향토사단 야전공병대의 지원과 새마을사업으로 두 마을을 연결한 도로가 개설되었다. 벼랑 끝에 세워둔 청학로 개설 기념비에 보니 오래 전 짝을 찾아 벼랑타고 다니던 견공들이 오솔길을 먼저 냈다고 했다. 08.12.31 <긴 그림자>
경남대학 앞 오거리를 댓거리라 한다. 단순히 대학 앞이라는 거리가 아니고, 최치원이 갯가에서 물에 비친 달을 바라봤던 월영대가 근처에 있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근처는 달과 관련 있는 동네 월영동 완월동 반월동이 있다. 지금은 바다가 매립되어 옛날의 원형은 찾을 길 없다. 천 백 년 전 최치원이 물에 비친 달을 감상했던 바닷가는 메워져 상가가 들어서 사람들이 복작대는 저잣거리다.
나는 마산역에서 구복 가는 61번 버스를 기다리며 댓거리를 떠올렸다. 언젠가 경남대학 앞 육교를 돌아 월영대 비각에 가 본 적 있다. 비각은 현재 바닷가와 상당한 거리로 통영으로 넘나드는 길가 주택 골목에 있었다. 최치원은 가야산에 들어 신선이 되었다지만 중년엔 구름처럼 외롭게 떠다녔다. 그래서 호가 고운(孤雲)이고 해운(海雲)이다. 역 광장에 서성이며 최치원을 생각할 때 버스는 출발했다. 09.01.16 <바다로 내려온 산>
몰운대는 예전엔 섬이었다가 낙동강에서 떠내려 온 모래로 다대포와 이어져 뭍이 되었다 다쀀책길 꼭대기 회원관(懷遠館)이라는 현판이 걸린 다대포객사가 있었다. 본래 다대초등학교 교정에 있던 조선후기 팔작지붕 건축물을 몰운대로 옮겨 놓았다. 객사는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망배 드리고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했더랬다. 부사가 있던 동래성 밖의 요충이 부산포요, 다대포였다.
다대포는 난류와 한류가 만나면서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지형적 특성이 있었다. 그러니 안개가 자주 끼는 해안이라 몰운대(沒雲臺)라는 이름을 얻었다. 해돋이도 그렇지만 해넘이 명소였다. 안개와 구름에 뒤엉킨 저녁놀이 연출하는 낙조는 장관이었다. 몰운대 솔숲을 거닐다 다대포해수욕장으로 나오니 가덕도 남단 하늘과 수평선이 붉게 물들었다. 사진작가는 시간차 두고 꼭지를 계속 눌러댔다. 09.01.19 <겨울 다대포>
코롱아파트 뒤로 난 등산길을 올랐다. 인근 주민들이 아침저녁 자주 이용하는 산책길이다. 곳곳에 운동기구들이 마련되어 있다. 예전에 내가 명서동 살 적 더러 찾았던 산이었다. 산 속에 들면 올망졸망 갈래 길에 여럿 나온다. 약수터가 세 곳이나 있어 주민들이 자주 이용했다. 전에는 예사로 여겼는데 산 이름이 태복산(太福山)이었다. 야트막한 산이라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 산이다.
뚜벅뚜벅 걸으면서 내가 오르는 산 이름을 음미해 보았다. 클 태(太)자에 복 복(福)자라. 크게 복을 받는 산이라는 풀이였다. 이 산에 오르는 사람이나, 이 산 아래 사는 사람 모두 복을 크게 받고 많이 받았으면 했다. 나라 안팎에서 아이엠에프보다 더 어려워질 경제전망이 나오고 있다. 청년취업난은 심각하고 실질성장률이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고 한다. 국민의 주름이 주금이나마 펴지길 바랐다. 09.01.24 <미리 밟은 지산>
집안 선대가 고향 마을에 터를 잡은 지 사백년이 지난다. 사천 지역에 살았던 11대 할아버지께서 임진년 피란길 올라 남강을 건너 의령 산골 터 잡으셨다. 이후 주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다 갑을과 월촌으로 분가한 집안이 생겼다. 나의 11대조께서 고향에 정착한 것은 의병장 곽재우가 왜구로부터 의령(宜寧)지역을 수호했기 때문이라 헤아려진다. 땅이름만큼 마땅히 편안한 고을이었다.
조선후기 나라가 혼란하고 외세가 밀려올 때였다. 우직하게 주자를 따랐던 선대는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던 때에 사당을 새로이 세웠다. 동쪽으로 건너온 도를 섬긴다는 도동사(道東祠)가 마을 한복판에 있다. 주자의 영정을 모셔두고 봄가을 근동의 유림들이 모여들어 제향을 올렸다. 향교와 서원의 절충형인 운곡강당을 운영했다. 주자의 제향공간과 유학의 교육공간이 공존했다. 09.01.26 <뿌리 이야기>
가락국 창세기 때 수로왕은 구지봉에서 알을 깨고 나와 임금이 되었다. 신하가 총각임금의 배필을 염려하자 신하에 일러 용원 앞바다로 나가보라고 했다. 그때 붉은 깃발을 펄럭이며 포구로 들어온 배에 허황옥 일행이 타고 있었다. 저 멀리 아유타인지 보주인지 몰라도 하여튼 남방에서 온 신행길이었다. 구산동 수로왕비 능에는 그 때 풍랑을 이겨내려고 배 안에 담아온 돌로 쌓은 탑이 있다.
망산도는 개발에 밀리고 쓰레기에 치여서 황량하고 씁쓸했다. 나는 용원어시장을 둘러보았다. 금어기라 대구는 많지 않았고 물메기와 숭어가 제철이었다. 활어 경매는 새벽에 끝났고 연안 양식으로 걷어온 파래와 김이 경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타워크레인이 세워지는 신항만 매립지 뒤안길을 돌아 안골포왜성에 올랐다. 조선 수군이 방어적 진지를 쌓은 자리 왜구가 다시 쌓은 성이었다. 09.01.29 <설화 속으로>
농촌공사에서는 마암면과 동해면을 가로지른 마동담수호를 건설하고 있었다. 당항포는 이미 해방 후 열악한 경제여건에서도 간척사업으로 농경지를 넓힌 바 있었다. 그곳에는 아예 고유명사로 간사지라는 마을까지 생겨났다. 지금은 간척사업보다 생태보전이 우선순위일지라도 오륙십 년 전 상황은 달랐다. 나는 더러는 길이 나고, 더러는 길이 없는 당항포 갯가를 헤쳐 지명을 확인해 갔다.
배둔 쪽에 ‘잡은개’가 있었다. 간사지에서 만난 횟집 주인은 ‘잡으란개’라고 했다. 왜구를 잡은 갯가라는 이름이었다. 갯물을 막은 둑 가까이 간사지 마을이 생겼다. 간사지 앞을 ‘속싯개’ 또는 ‘쏙싯개’라 했다. 수남리 앞쪽으로 뱃길이 연결되었다고 왜구를 속여 먹은 바다였다. 죽은 왜구 머리가 떠돈 ‘머릿개’는 두호마을이었다. ‘핏골’과 ‘도망개’도 있다던데 많이 걸어 지쳤고 해가 저물었다. 09.02.28 <독 안에 든 쥐>
우리는 산성 안의 해은사(海恩寺)로 갔다. 수로왕비가 야유타국을 떠나 뱃길을 무사히 오게 되어 바다의 은혜에 감사해 세운 절이라고 했다. 대왕전의 수로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곁에 둔 봉돌의 유래도 소개했다. 머나먼 항해 끝에 처음 닿은 진해 용원 앞 망산도에서 가져온 돌이라고 했다. 저 아래 왕비무덤 앞에는 파도를 진정시키려고 배안에 담아온 돌로 쌓은 탑이 있다고 했다. 09.05.17 <숲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