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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돌이가 우리신학을 하게 된 내력(1) | ||||||
[우리신학 산책-박영대] -예비신자 교리반에서 샤르뎅 사상을 듣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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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이지만 어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는지, 전공 분야는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을 받는다. 몇 주 전에도 그랬다.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부탁으로 인권주일 특별강론을 위해 마산교구 ㅎ본당에 갔을 때, 청소년 미사 겸 토요 특전 미사 뒤 ㅂ 주임 사제께서 교리교사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그 자리에서 ㅂ신부는 청년 교사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전공이 뭐지요?’하고 물으셨다. “기계공학이요.” “그것 말고…….” “아, 예, 사목신학이요.” ㅂ신부는 당연히 내가 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을 것이라 생각해 무슨 신학을 전공한 것인지를 물으셨지만, 공과대학 기계공학이 최종 학력인 나로서는 그리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물으시니 내가 관심 갖고 스스로 공부한 분야를 이야기했지만. 지금부터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돌이가 어찌해서 우리신학을 하게 되었는지를 얘기하려고 한다. 굳이 떠벌이지 않는 것이 좋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신학 산책’에 글을 쓰기에 앞서 내가 생각하는 ‘우리신학’이 뭔지를 이야기하는 게 순서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세례를 받은 것은 1979년 10월 27일이었다. 날짜까지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세례 받은 날이 역사의 그날, 10․26 바로 다음날이기 때문이다. 1979년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에 갓 입학한 나는 외할머니 성화에 밀려 인천교구 송림동본당의 예비신자 교리반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나의 종교 경험은 고등학교 때 독서실에서 만난 친구를 따라 개신교 학생 예배에 한두 번 가 본 것이 전부였다. 남들은 성탄 때만 교회나 성당에 나가 선물을 받은 추억을 얘기하곤 하는데, 나는 그런 기억조차 없다.
다행히도 호 신부님은 그 딱딱한 교리서에 매이지 않고 다양한 방식과 주제로 교리반을 이끌어주셨다. 심지어 창세기를 배울 때 데이야르 드 샤르뎅 신부의 사상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샤르뎅 신부 책이 얇은 책 한두 권만 번역되어 있어서 아마 사제, 수도자 가운데도 샤르뎅 사상을 모르는 분이 대부분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교리반이 끝날 무렵에는 성경을 직접 읽으면서 풀이해주시기도 하셨다. 신앙의 원천은 교리가 아니라 성경이라는 점을 느끼고 성경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셨을 거라 짐작한다. 이처럼 충실한(?) 교리 탓에 스무 명이 넘게 시작한 예비신자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아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다섯 명이었다. 세례를 앞두고 이른바 찰고를 하셨는데, 호 신부님은 내게 성령에 대해 물으셨다. 그때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기도할 때여서 나는 성신과 성령이 같은 것인지도 몰라 대답하지 못했다. 공부해서 리포트를 내라고 하셔서 박도식 신부의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를 읽었다. 대화체로 쓴 쉬운 교리서를 읽으니 가톨릭 교리가 환하게 이해되었다. 그때 호 신부님께 ‘이제 나도 믿게 되었다.’고 말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교리서 딸랑 한 권을 읽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했으니, 호 신부님이 속으로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책 한 권 읽은 사람이라더니 그 말이 맞구나.’라고 생각하셨을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리 예비신자였다고 하더라도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안다는 것이 믿는다는 것과 다르고, 믿는다는 것이 그대로 산다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어쨌든 나는 호 신부님을 통해서 만난 인간 예수에 흠뻑 취했다. 어찌나 인간 예수가 좋았든지, 이 역시 유치한 생각일지 몰라도 예수의 걸음걸이도 닮고 싶어 예수는 어찌 걸으셨을까 궁금해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닥치면 ‘예수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셨을까’ 고민하였다. 나의 이 같은 고민을 푸는 데 가장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준 것은 호 신부님 강론이었다. 미사 강론을 통해 나는 예수와 복음에 대한 기본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호 신부님 강론은 정양모 신부님이 그토록 강조하시는 방법, 역사 비평을 전제로 하고 복음의 눈으로 우리 현실을 성찰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호 신부님은 신학교 공부를 통해 이 같은 복음 성찰 방법을 체득하시지 않은 듯했다. 백령도본당 주임으로 계실 때 내 고민에 겨워 찾아뵌 적이 있는데, 그때 그 분의 앉은뱅이책상에 꽂힌 자필 시집을 훔쳐 본 적이 있다. 시 가운데는 꿈에 누군가에게 야단을 맞고 깨어나 생각하니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님이셨다는 내용의 시가 있었다(호 신부님은 백령도에 계실 때 지은 시를 엮어 시집 <백령도>를 내셨는데, 내가 본 이 시는 실리지 않았다). 언젠가 호 신부님으로부터 사제가 된 뒤 여기저기 열심히 강연회를 쫓아다니며 스스로 공부하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아마도 안병무 선생님도 호 신부님께서 찾아다니며 배운 스승 가운데 한 분이라 짐작했다. 이처럼 내가 성경을 보는 눈은 호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다듬어졌다. 그래서인지 역사 비평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성경 묵상 글을 보면 도무지 공감할 수 없어서 지금도 그런 류의 책은 거의 보지 않는다. (계속) 박영대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