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삼보둑 이라는 장소가 있다
마을에서 약 500 미터 정도 되는 거리에 있고
걸어서 약 10 분 걸린다.
삼보라고 불교에서 말하는 삼보가 아니고
물을 얻기 위해 만들어 놓은 봇도랑을 말한다.
그 장소는 고향 외현천 냇가 바로 방천 너머에 있다
경지 정리 하기 전에는 50평 정도 되는 이등변 삼각형 비슷한 웅덩이와
그 바로 10 미터 쯤 위에는 10평 정도 되는 둥근 또 다른 웅덩이가 있었다.
내가 어릴 때 가뭄이 들면 10평 정도 되는 웅덩이를 중심으로 해서
반경1-2 킬로 정도 다 말라도
그 웅덩이는 마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보닌 그 웅덩이 물은 여름에도 차가워서 물 속에 오래 있을 수 없구
반대로 겨울에는 뜻뜻한 물이 있으니
빨래터로도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보니 그곳에 닮긴 나의 많은 추억들이 있다.
10 평 쯤 되는 웅덩이에서는 가뭄에 대한 기억들이고
50 평 쯤 되는 웅덩이에서는 헤엄과 관련된 기억들이다.
먼저 작은 웅덩이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 곳에는 깊이는 2 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으나
맑은 물이 많이 솟아 오르기 때문에
예전에 그 웅덩이를 퍼서 고기를 잡으려면 뚜리 2 개를 설치해서
부지런히 푸야 바닥까지 다 펄 수 있다.
그러니 뚜리 2 대 할려면 장정 4 명이 필요하다
그렇다 보니 그 웅덩이 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적어도 장정 5 명이 필요하다
그러니 그 웅덩이 퍼서 고기 잡는 것을 거의 본기억이 없다.
가뭄에는 그 웅덩이에서 200 미터 떨어진 우리 작은 할아 버지 논으로
물 푸는 것 본 기억이 있다.
우리집에서 할아 버지와 아버지 형제
작은 할아버지 집에서 작은 할아버지와 아저씨들
하여튼 적어도 남자 4-5명에다가 밥해다 날으는 아주머니까지
5-6 명이서 약 800평 가까이 되는 논으로 물 푸서 모심던 기억이 납니다
아마 1960년이나 1961 년 쯤 되었을 것이다.
또 1960년 대 초 까지는 작은 웅덩이 중간을 가로 지른 크다란
물가에 자라는 아름들이 능수버들 고목이 이 있었다
우리 3-4년 선배들이 살금 살금 능수 버들 타고 올라가서
웅텅이로 "풍덩" 하고 다이빙 하는 것은 너무 보기 좋았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즉 국민학교 1-2 학년 때는 헤엄을 못해서
그저 바라만 볼 따름 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헤엄을 배운 후 즉 4-학년인가 후에는
그 고목나무 나이에 못이기고 넘어졌다.
그 고목 나무 쓰러져 중간에 썩어진 부분에
겨울에 시겟도(스케이트의 일본식 발음인가?) 타다가
양말 젓으면 말리다 꿉어 먹은 기억도 난다.
그리고 큰 웅덩이는 우리 동네 애들의 요즈음으로 표현하자면
물놀이 동산 이다.
여름철에는 학교 갔다가 오자 마자
책보 웃묵에 집어 던지고
소 몰고 그 곳으로 가서
더 울 때는 소도 그 웅덩이에 억지로 끌고 가서 한 번 헤엄 시킨후
둑 너머 냇가 방천 기슭으로 보내면 약 1000-1500 평 쯤 되는 길죽한
잔디 밭으로 가서 올라가며 내려 가며 풀을 뜯어 먹는다.
그 동안에 우리들을 그 웅덩이에서
물속으로 다니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물놀이 하다가
냇가로 가서 고 운 모래 밭에서
씨름도하고
작은 도랑 따라 내려 오는 물에서 고기도 잡고
그렇게 즐겁게 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1970년대 부터 새마을 운동이 시작 되더니
농업용 관개수 개발한다고
중장비도 없이
형 나이 되는 사람들과 아저씨들 수 십명이
수굼푸들고 냇가 방천을 쪼게서 냇가 밑에
지름 약 100센티
길이 약 100 미터의 관정을 개발해서
가뭄에도 끄덕 없이 사용 하여 왔다.
그러니 처음에는 작은 웅덩이 없어지고
나중에 경지 정리 하고 큰 웅덩이도 사라졌다
농사 짓기는 좋아졌지만
나의 정이 덤뿍 담긴 웅덩이들은 다 없어 지고
관정만든 끝의 50 센티 정도 큰크리트 물 위에서
그 나마 잊혀진 과거를 회상하면 자주 몸을 씻어러 간다.
할아버지, 아버지, 선후배와 동무들 다 없어져 버린 곳이된
삼보둑 관정이여
내가 이땅에서 없어질 때까지 나의 영원한 추억이 되겟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