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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담에 <<내 친 걸음>>, <<들여디딘 발>>이라는 말이 있다. 이왕에 일이 시작된 길 혹은 이미 일에 관여했다는 뜻이다. 흔히 민간에서는 <<내 친 걸음에 서울 간다>>, <<들여디딘 발인데 구들에 올라가 앉은들 뭐라 하랴>>고들 표현하고 있다.
지난 달 친일파 이범익을 이야기하면서 간도조선인특설부대의 출신으로 한국 5.16쿠데타의 주역 몇을 나열한 바 있다. 그 중에서 원용덕, 김일환을 빼고는 모두가 만주국 신경육군군관학교 졸업생들이다. 박정희, 이한림은 동창생으로 제2기, 이주일은 제1기, 정일권은 제5기, 김석범은 신경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할빈 제4교도대에 입대하였다가 다시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에 간도조선인특설부대 중대장으로 되었고 또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하니 학력으로 앞의 사람들 보다 월등하다고 본다.
이들의 출신으로 보아 5.16쿠데타의 주역과 한국 군계와 정계의 주역들은 또한 만주국 신경육군군관학교 졸업생들이라는 결론을 내려도 별 무리가 아닐 듯 싶다. 이들 외에도 육군군관학교 출신들이 적지 않다. 굵직굵직한 인물들만 추려서 줄느런히 줄을 세워 보기로 하자.
김동하(金東河): 제1기, 광복 후 해병대 사령관, 중장 예편, 헌법심의위원회 위원 등.
김용국(金龍國): 신경군관학교 전신인 봉천군관학교 졸업(1940년), 광복 후 해병대 부사령관, 소장 예편. 국민회의 대의원.
김윤근(金潤根): 제6기, 광복 후 수도방위 사령관, 5.16쿠테타 주역으로 국가재건 최고회의 교통체신 위원장 등.
박림항(朴林恒): 제1기, 광복 후 5.16쿠데타 군사혁명위원, 최고회의 최고위원, 건설 장관.
방원철(方圓哲): 제1기, 5.16쿠데타 직후 혁명군과 미8군과의 불화조정, 노산훈련소 참모부장 등.
백선엽(白善燁): 제9기,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연합참모총장, 대장 예편, 교통부 장관 등
송석하(宋錫夏 호 懷堂): 1937년 졸업, 광복 후 20사단장, 국방대학원장 등
신현준(申鉉俊): 1937년 졸업, 광복 후 해병대 사령관, 국방부 차관보, 해병 중장 예편, 세계반공연합회 사무총장. 예관수(芮琯壽): 제4기, 육군사관학교 용진가(勇進歌) 작사.
윤태일(尹泰日): 제1기, 광복 후 36사단장, 서울시장, 5.16장학회 이사, 제9대 국회의원.
이기건(李奇建 호 夏峯): 제1기, 광복 후 26사단장, 한국 반공연맹 이사 등.
최주종(崔周種): 제3기, 5.16쿠데타 군사혁명위원, 국가재건 최고회의 최고위원, 8사단장, 군수기지 사령관 등.
최창언(崔昌彦 히라야마 다케이 原山武意): 제1기, 광복 후 수도사단장, 국방대학원장, 충비 부사장 등.
최창윤(崔昌崙): 제1기, 광복 후 군단장.
최치환(崔致煥 호 錦嚴): 제6기,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 공보실장, 제6,7대 국회의원, 국회건설위원회 위원장, 경향신문 사장 등.
박정희: 제1기 광복후 한국 대통령 지냄. 주재덕선생의 회억에 의하면 그는 특설부대 출신으로 직접 군관학교에 추천된 사람이라고 하다.
특설부대는 1939년 7월 1일 제1기병 가운데서 70명의 <<우수분자>>를 선발하여 명월구 특설부대본부에 군사후보생(하사관 교육대) 훈련반을 설립하고 반년동안의 훈련교육을 실시, 그 중 50명이 졸업하여 부대내에서 반장직무를 맡기도 하고 간도성 각 현에 배치되어 협화회 청년훈련소 조교로 배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군관을 배양하기 위하여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사관 급 중에서 16명을 선발하여 각 유형의 만군군관학교에 보냈는데 그들은 졸업 후 소위로 되었고 절대 대부분은 특설부대에 돌아와 소대장이상에 복역하였는데 부대내의 가장 믿음스럽고 유력한 지휘 골간이 되었다고 한다.
주재덕선생은 박정희를 특설부대에서 선발하여 만군군관학교로 보낸 사관 중의 한 사람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지금까지 박정희가 신경육군군관학교로 간 경로에 대해 구구한 설이 떠돌고 있다. 한국 백과사전에서는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교편을 잡았고 1942년에 만주로 가서 만주군관학교,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사전에 올리고 있다. 그리고 또 당시 사관학교을 함께 다닌 동창 중 서수동(徐樹棟 한족 원 장춘시 34중학교 교원)의 회억에는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오기 전에 일본에서 와세다대학을 2년을 다녔다고 한다. 아마 그것은 박정희가 2년제 대구사범을 다닌 사실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각기 설법이 다르고 주재덕선생 외에 모두들 한국을 떠나 만주에 온 박정희가 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 활동에 대해서 생략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의 <<세계인명대사전>>에서는 박정희가 만주로 온 시기를 1942년으로 적고 있다. 그런데 박정희는 신경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생이다. 제2기생은 1940년 4월 초 예과에 입학을 하여 1942년 3월 23일에 졸업하였고 본과는 1942년 6월 1일에 입학하여 1944년 5월 1일에 졸업하였다. 대체로 한국에서 보는 박정희의 약력은 시간적으로 오차를 보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이 외에도 신경군관학교 졸업생들로 학계에 종사한 사람들도 있지만 여기에서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필자가 밝히려는 것은 이상 사람들의 행적이 아니다. 바로 그들이 졸업한 신경육군군관학교란 어떠한 곳이며 그들이 받은 교육은 어떠한 것인가를 말하려 할 따름이다. 그것을 미루어서 독자들 스스로 광복 후 한국의 상태를 짚어보길 바라는 바이다.
신경육군군관학교의 전신은 1932년 봄 원 동북군 고급 장령 왕정수(王靜修) 등을 위수로 하는 친일파들이 심양 동대영(東大營)에 만주국을 위한 군관을 훈련하는 것을 종지로 세운 <<중앙육군훈련처>>이다. 1939년 중앙육군훈련처에서 분리하여 육군군관학교를 신경에 세웠는데 명의 상에서는 만주국의 학교이지만 실질 상에서는 일본사관학교의 만주분교였다. 학교는 일본인을 골간으로 하였고 교직원 중 교장과 간사 등 주요한 직위는 일본인이었고 학생 중에도 중국인과 일본인 학생이 절반씩이었다. 일본학생들은 신경에서 예과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사관학교에서 본과를 다녔으며 졸업 후에는 일본육군소위나 만주국 육군소위로 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학과목은 일본사관학교와 똑 같았다.
동북의 항일역량을 소멸하기 위하여 일제는 <<이화제화(以華制華 중국인으로 중국인을 다스리는)>>를 실행하였다. 동시에 만군(滿軍)의 반란을 막기 위해 1933년 8월 <<만주국 육군지도강요(滿洲國陸軍指導綱要)>>를 제정하였는데 거기에 만군 수가 6만을 초과하지 못하며 보병, 기병과 공병만 두며 비행기, 탱크나 대포를 가질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동시에 만군 속에 일본인 군관을 파견하여 군권을 장악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도강요에 따라 군관학교를 설립한 것이며 <<대화혼>>으로 무장된 군관을 배양하여 만주국에 대한 일제의 영원한 통치를 보장한다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군관학교는 매년 보통 대학시험을 치기 전에 학생모집을 마치었고 2, 3월이면 입학하였다. 학제는 4년 9개월, 예과 2년 <<대부근무(隊部勤務 부대실습)>> 반년이 추가되고 본과 2년 견습 군관생활 3달이 추가된다. 학교에서는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은 예과를 졸업하면 일본 관동군부대에 가서 대부근무를 하며 6개월이 지나 돌아오면 일본에 가서 육군사관학교 본과에서 학습을 한다. 그러나 한족이나 만주족은 예과를 졸업하면 만군에 가서 대부근무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와서 본교에서 본과공부를 하였다. 그만치 일본인과 중국인은 차별시하였는데 대체로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군관학교 7기생 여은홍(呂恩鴻 원 중국에네르기기술개발자문중심 총공정사, 현재의 이름은 呂震寰)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내가 입학했을 때 군관학교에는 9개 중대가 있었다. 본과 제1중대는 4기생이고 제2중대는 5기생이었다. 예과 7개 중대 중 3, 4중대는 6기생 이고 5, 6중대는 7기 일본학생중대었고 7, 8, 9중대는 7기 중국학생중대 었다. 1부터 4중대는 일본, 중국 혼합중대었는데 당시 조선은 일본에 병 합되었으므로 조선학생은 일본인으로 취급되었다.(<<장춘문사자료>> 35기 60페지)
유전(劉前 제2기생 원 광서장족자치구 사법청 노동교양국 부국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이 학교에서는 매기의 예과생 인수는 <<일계(日系)>>과 <<만계(滿 系)>> 두가지 학생들로 나누어 중대를 편성하였다. 우리들과 동기인 제 2중대는 <<일계>>학생중대였는데 우리 보다 생활대우가 월등했다. 매 일 세끼 같은 식당에서 중대끼리 집체로 식사를 하였다. <<일계>>의 학생들은 끼마다 쌀밥에 쇠고기무우졸임에 일본장국이 아니면 일본두부 였다. 그러나 <<만계>>학생중대는 춘절같은 때에야 쌀밥을 먹었고 평 시에는 수수밥이 아니면 옥수수떡에 배추무우탕이고 고기는 아주 드물 었다. 매번 당번이 <<밥을 먹어라.>>라고 호령하면 모두 함께 <<성은 에 감사합니다.>>라고 외치고 나서 밥을 먹을 때면 우리는 자기한테 차 려진 수수밥이나 옥수수떡을 남새국에 먹으면서 건너편에서 일본인 학 생들이 쌀밥에 쇠고기국을 먹는 것을 보노라면 가슴은 분노로 타 번졌 다. 망국 노의 쓰라림은 정말 참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예과 1년 동안에 420번이나 귀 뺨을 맞았다. 한편 맞으면서 일 본인 교관의 <<만주인은 돼지와 같다.>>라는 욕설을 그대로 받아야 했 다. 2학년 때 나는 또 일본교관한테 얻어맞았다. 그날 저녁밥을 먹고 나올 때 나는 1학년의 <<일계>>의 학생을 붙잡고 <<개자식, 왜 경례 를 하지 않는가?>>라고 욕하면서 뺨을 쳤다. 복수를 한 것이었다.(동상 서 105페지)
학교내에서 일본인 학생들은 <<대화민족>>의 우월성을 뽐내면서 중국인을 멸시하였다. 그럴수록 또 중국인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들을 증오했고 조선인 학생들을 일본인과 동일시해서 마음속으로 은근히 경계했다는 것이다. 건교 시작부터 중국인 교관과 중국인 학생들 속에서는 <<회복회(恢復會)>>, <<선주동맹(仙州同盟)>>, <<진용사(眞勇社)>>, <<항일건국청년군인회(抗日建國靑年軍人會)>>, <<동북청년갱생연맹회(東北靑年更生聯盟會)>>, <<반제대동맹(反帝大同盟)>>, <<공산주의대동맹(共産主義大同盟)>> 등 비밀단체가 있었다. 이 조직은 공산당 조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당 조직도 있었다. 그러나 각자 자기의 정치활동을 했고 모두가 조국의 광복을 위한 공동한 목표를 가지고 단결되어 있었다.
여은홍은 이렇게 회억했다.
군관학교에서는 정치활동이 반 공개적이었다. 다만 일본인만 모르면 되었다. 일반적으로 중국 군관은 피하지 않았다. 중국인 동창들은 고자질 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관학교에는 국공 양당의 지하활동이 모두 있 었다. 각자 자기의 정치활동을 진행하였는데 조국광복이라는 목표를 위 하여 단결하여 싸웠다. (동상서 62-63페지)
학교 내 중국인 학생들 속에서는 여러 가지 금서들이 읽혔는데 그 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을 최북교(崔北橋 제6기생 원 장춘시 교구 문화국 극작가, ), 유한중(劉漢中 제7기생 원 장춘시 상업학교 교장)은 <<영웅의 눈물(英雄泪)>>, <<애국자의 비애(國士悲)>>, <<우담화(曇花一現)>>을 꼽았다. <<영웅의 눈물>>은 일본이 조선을 병탐한 사실과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쏜 이야기를 다루었고 <<애국자의 비애>>는 짜리 노씨야가 볼스까를 침략한 역사사실을 쓴 것이고 <<우담화>>는 일본제국주의 중국 침략은 우담화처럼 잠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었다. 그 외에도 조우(曹遇) 극본 <<뇌우>>와 <<일출>>, 노신의 책들, 고리끼의 <<어머니>>, 지어는 모택동의 <<지구전을 논함>>이라는 소책자들도 전해졌다.
이 조직의 성원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켰는데 일본인(조선인을 포함)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절대로 항일선전을 하지도 않았거니와 시국에 대해 담론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극히 개별적인 일본인 교관이나 조선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가지기도 했다.
백국화(白國華 제2기생, 원 흑룡강성 이춘시에서 사업)의 기억에 의하면 일본인 중대장 大河內와 조선인 김태치(金太治 창씨개명 金江太治)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중대의 장우(張雨)라는 동창이 입학 한달 만에 집으로 도망을 쳤는데 일본인 중대장 大河內가 잡으러 갔다가 와서 우물에 빠져 자살을 했다고 보고를 했었다. 그런데 1980년에 이춘시에서 회의를 할 때 장우의 중학교 동창생을 만났는데 장우가 죽지 않았고 일본인 중대장이 거짓 보고를 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회상기에서 이 사실을 쓰고 나서 김태치에 대해 서술하였다.
우리 4중대에는 조선인 학생 김태치가 있었고 또 대만에서 온 채숭량 (蔡崇梁)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하고 한 침실이었다. 김과 채는 침대 가 붙었고 나와 김은 머리와 머리를 맞대었다. 김태치는 허우대가 크고 건실했고 성격이 오만해서 남을 깔보았다. 채숭량은 체질이 약하고 위 병이 있었는데 늘 집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중대장 영정(永井) 은 늘 그들 둘을 찾아서 담화를 했다. 동학들은 그들 둘을 경계했다. 김 에 대한 나의 경계심은 유난했다.
어느 한번 검술시간이었다. 나와 김태치가 붙었다. 그는 사정없이 단 숨에 세 번이나 나의 가슴을 찔렀다. 두 번은 꼼짝없이 당했고 세 번째 에야 겨우 비킬 수 있었다. ---
침실로 돌아온 후 김태치는 주동적으로 나하고 말을 걸어왔으나 나 는 응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중국말로 <<망국 노!>>라고 욕하 자 나는 참지를 못하고 <<네놈이야말로 진짜 망국 노>>라고 되받아 쳤다. 성질이 급한 그는 다짜고짜 나의 멱살을 쥐고 변소께로 끌고 가 는 것이었다. 그는 난로 옆에서 말했다.
<<네놈이 김일성을 아느냐? 김일성이 있는 한 조선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나는 대꾸했다.
<<김일성이 장백산 노야령(老爺岭) 일대에서 항일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김일성은 양정우(楊靖宇 동북항일연군 총 사령)의 수하이다.>>
우리 둘이 싸울 것 같아 옆에서 지켜보던 채숭량이 다가 와서 말렸 다.
<<싸우지 말라. 우리 모두 강을 건넌 새야.>>
<<강을 건넌 새(渡江鳥)>>란 노래의 제목이었다. 새가 바다같이 넓 은 강을 건널 때 배 머리에 앉았는데 날은 저물고 파도가 세차 자칫하 면 떨어져서 강물에 빠져 죽지 않으면 손님들한테 잡혀서 노리개로 될 위험을 묘사한 노래인데 당시 나라를 잃은 사람들의 처지를 슬퍼한 것 이었다. (동상서 154페지)
<<장춘문사자료>>(제35기)는 전문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졸업생들의 회고록으로 되었는데 그 중에는 박정희의 동창 제2기생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아쉽게도 박정희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진 사람은 없다. 유일하게 박정희를 이야기한 서수동(徐樹棟 제2기생 원 장춘시 34중학교 교원)의 문장 제목부터가 <<나는 박정희를 한번 때렸다>>로 되어 있어서 흥미롭다.
문장은 이렇게 썼다.
우리 2기생 240명중에 십여 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1979년 10월 26일 총에 맞아 사망한 대한민국 총통 박정희(朴正熙)도 있 었다. 당시 그는 나하고 같은 중대에 편입되었는데 제3중대 제3구대(區 隊)였는데 구대장은 장련지(張連芝)였다.
박정희는 우리들 2기생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았는데 내 기억에는 당 시에 22살이었다. 나는 전 학년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다. 그는 학습이 나 보다 좋았고 일어는 전 학급에서 최고였다. --- 나는 예과 1년 동안 일본교수의 강의를 절반도 더 알아듣지 못했 다. 늘 교수의 질문에 생뚱같은 대답을 해서 동창들을 웃기군 했다.
장련지구대장은 우리한테 전술과를 강의했다. <<작전요령>>이며 << 보병요령>> 등을 강의할 때 내가 알아듣지 못할 것 같으면 박정희를 시 켜서 나를 가르치게 했다. 비록 그가 하는 말이 옳고 아주 분명하였다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다. 더구나 그가 조선인이었음에랴! 나 는 더욱 밸이 꼬였고 언젠가 기회만 되면 한번 복수하리라고 별렀다.
예과 1학년 때 우리 구대에 2명의 지도생(指導生)이 파견되어 왔는데 유성지(兪成志)와 최창륜(崔昌侖)이었다. 최창륜도 조선인이었다. 우리들 에 대한 그의 요구는 아주 엄하였다. 한번은 내무를 검사할 때 내가 수 갑을 조금 잘못 놓았다고 한바탕 훈계를 받았고 내 평생에 다시없이 호 되게 얻어맞았다. 나는 눈앞이 아찔했고 눈물이 났다. 이 일을 나는 일평 생 잊지 못하였고 더욱 조선인 동창들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보복할 기 회를 노리게 되었다.
예과 2학년 때 철령 룡수산(鐵岭龍首山)에 가서 측량연습을 할 때었 다. 우리는 일본 수비대의 병영에 있었는데 매일 아침 삼각틀을 메고 그림판을 지고 줄을 서서 산에 올라가서 측량을 하고 밤이면 다시 메고 돌아왔다. 전 대에서 공용하는 표지대는 두명의 동창이 윤번으로 지고 오르고 내렸다. 열 개도 넘는 표지대와 그림판과 삼각틀을 메고 다닌다 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다 그것을 메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하루는 내가 <<취체생도(取締生徒)>>를 담임했다. 원래 아침에 산 으로 올라갈 때 박정희와 다른 학생이 메고 올라갔다. 그러므로 내려 올 때는 다른 사람이 메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잊고서 박정희하 고 메라고 했다. 박정희는 아주 못마땅해하며 한마디 툴툴댔다. 나는 즉 시 그의 앞으로 달려가 무엇 때문에 명령에 복종하지 않느냐고 훈계를 하면서 주먹으로 입술을 사정없이 한 대 쳤다.
오늘 이 일을 끄집어내는 것은 나 자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 다. 당시 특수한 환경에서 동창들 간의 비뚤어진 심리와 나 자신의 당 시의 심태를 후세인한테 알리기 위해서이다.(동상서 157-158페지)
이 책에는 50여 명 군관학교 출신의 사람들이 토막토막 학교생활을 적은 글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학교시절에 벌써 지하 공산당원이 아니면 비밀 항일단체의 성원이었다. 그리고 졸업하고 만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광복과 함께 기의한 사람들이었다. 일본천황한테 충성을 다짐하도록 강박하고 대화혼으로 무장하도록 노화교육을 시켰어도 나라와 민족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02년 5월 장춘시에 생존해있는 만주육군사관학교 제3기생 범적후(範迪厚 원 장춘시 감옥장)를 만나서 학교시절 조선인과 대만인들은 <<일계>>에 속하였다고 하는데 차이가 무엇인가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은 학교내의 반만항일조직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일본인 학생들은 구분해 보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일본인과 같이 보였지만 그들의 영혼심처엔 민족적인 감정과 애국심이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인 학생들과는 충돌을 일으켰지만 조선인이나 대만인 학생들과는 교내에서 싸우는 일이 없었지요. 우리가 일본인 학생들과 싸우게 되면 조선인이나 대만인 학생들은 강 건너 불 보듯 재미있게 구경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중국인 교관들도 은근히 중국인 학생들의 편이었답니다.>>
1942년 3월 중국인 3기생과 함께 입학한 일본학생과 중국인 2기생들이 동시에 예과를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식 다음날 식당에서 일본인 학생이 중국인 학생을 보고 경례를 붙이지 않았다고 욕을 하였다.
하여 싸움이 붙었다. 일본인 학생들은 안경을 낀 사람들이 많은데 중국인 학생들이 안경부터 채서 짓밟아 버리었으므로 결국 일본인 학생들은 더 많이 피를 흘렸다. 그런데 일본인 학생들의 도발로 일어난 싸움인데다 중국인 학생들의 중대장들이 만주국 황제 부의의 친척이 되는 사람들이어서 무마해버리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사상과 심리상 대화혼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강박적 교육을 실행하였다. 매일 아침 기상하여서 하는 일과는 신사참배이고 저녁이면 반성일기를 써야 했다. 그날 하루의 자기의 사상, 학습, 생활 등 방면에 대해 부족한 점이 무엇이며 하지 못한 일은 무엇이며 어떻게 더 잘 할 것인가 하는 등등의 내용이다. 다음날 구대장은 일기를 일일이 보고 지적한다. 매주 중대별로 정신과(精神課) 강의를 듣는다. 전체 학생들은 날창을 꽂은 총을 세워 들고 훈화를 듣는 정중한 분위기를 이루었다. 훈화의 내용은 학교의 규장제도에 대한 것, 학습에 관한 것, 내무, 군사훈련 등등 다양한 내용인데 결국에는 일만일가(日滿一家), 친선우호(親善友好)를 강조하고 일본천황과 만주국 황제한테 충성하여 대동아성전의 필연적인 승리를 맞아야 한다는 설교에서 마무리된다. 이러한 훈화는 윤리과에서 가장 돌출하게 표현된다. 윤리과를 강의하는 선생은 일본인인데 주요하게 삼강오상(三綱五常), 부자자효(父慈子孝), 형우제제(兄友弟悌), 부창부수(夫唱婦隨), 신하가 임금한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등등을 이야기하면서 <<천조대신(天照大神)은 창세주(創世主)이며 만주의 백성은 천조대신의 자손이며 일본과 만주는 동문동종(同文同種)이며 일본천황은 인간 인이며 어버이며 만주국 황제는 그 아들이다 라는 이론에 귀결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은 절대 들으면 들을수록 일본인 학생 외의 타민족 학생들의 가슴속에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역효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범적후는 말했다.
<<박정희와 같은 중대에 김동하(金東河)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하고 특별히 친했습니다. 졸업 후 나는 그하고 한 부대에 근무했는데 관전현 나고소에서 풍만수력발전소를 지켰답니다. 김동하는 자기의 여동생을 나한테 소개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는 벌써 약혼한 몸이라 사양을 했지요.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처남매부사이가 될 번했습니다. 1992년에 장춘에서 군관학교 동창회가 있었고 그때 김동하가 왔었답니다. 가만히 말하는데 한국군 중장이랍데다. 그는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것은 일계학생들에 대한 강박에 못 이겨서였습니다.>>
김동하는 당시 창씨개명 가나모리 다케오(金森武雄), 한국 5.16쿠테타 주역, 국가재건최고회의 운영위원장, 재정경제위원장을 지냈다고 한다.
김동하 뿐 아니라 창씨개명에 대해 불만을 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백국화씨는 이렇게 썼다.
괴뢰 만주국 황제 부의가 두 번째로 일본을 방문하고 <<천조대신>> 을 모시고 와서 도처에 신묘(神廟)를 만들었다. 학교 교문 안에는 <<원 신전(元神殿)>>을 세웠고 들어가고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90도 경례 를 하도록 강박했다. 그리고 부의는 일본을 우방(友邦)에서 친방(親邦) 으로 고쳐 불었고 지도상 조선, 대만, 만주국을 일본국토와 비슷한 색깔 로 칠하였다. 그리고 강제로 조선인 학생과 대만인 들은 일본인으로 창 씨개명을 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 김태치는 김강태치(金江太治), 강창 선(姜昌善)은 대산창선(大山昌善)으로 고치었다.
당시 永井구대장은 강의가 끝나면 김태치와 채숭량과 창씨개명을 강 박했다. 내가 김한테 개명할 것인가를 묻자 그는 손으로 목을 베는 시 늉을 해 보였다. 뜻인즉 개명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것이었다. ---나는 백병(白兵)이라고 개명할 생각이었다. 장차 일본 놈들과 백병전을 하여 조국의 광복을 이룩하리라는 뜻이었다. (동상서 제155페지)
그러한 정서를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특설부대에 근무해온 조선인 군관들한테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물론 박정희도 예외일 수가 없다고 주재덕선생은 증언한다.
특설부대는 1944년 1월 15일 일부분 인원과 병자를 명월구에 남겨두고 기타 부대원들은 기차를 타고 열하성(지금의 북경시)으로 옮겨갔다. 그때로부터 광복이 날 때까지 특설부대는 열하성과 하북성에서 팔로군에 대한 토벌에 참가했다. 1944년 가을부터 1945년 1월까지 열하성 밀원현 석갑진일대에서 토벌을 했고 1945년 1월부터 특설부대가 해산되기까지는 하북성 난남현(灤南縣) 사집진일대에서 토벌을 했다. 당시 주재덕선생은 특설부대 정보반에 근무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특설부대에 들어가 반년을 훈련을 하자 부대는 열하성으로 떠났습니다. 나는 일본말, 조선말, 중국말을 잘 했으므로 정보반에 안배되었습니다. 그 기간 죄를 짓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가는 곳마다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선전했고 포로를 직접 신문하면서 매도 댔지요. 내 손으로 두 사람을 죽였수다. 한번은 일륙장(一六庄)에서 팔로군과 접전을 했는데 멀리에서 볼라니 내가 쏜 총에 한 사람이 쓰러지데요. 역시 일륙장에서 젊은 사람을 포로해서 부대에 호송할 임무를 맡고 가는데 한 마을에 이르자 그 사람이 <왜놈이 왔다>라고 소리를 치면서 도망을 치기에 권총으로 탕 쏘았더니 면바로 정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좋은 일도 적지 않게 했답니다. 팔로군 정찰원 사광화, 장립귀, 등우룡을 총살하려는 것을 정보반에서 쓰겠다는 이유로 살려주기도 했고 사각장(司各庄)에서 경찰서장을 하면서 팔로군 정찰원으로 있던 유(劉)씨를 무죄로 만들어 살렸지요.>>
열하성 유수림자(柳樹林子)지구에서의 토벌 차수는 도합 28건, 피살된 팔로군이 22명이고 체포된 팔로군이 14명이었다. 당시 특설부대의 토벌수단의 잔혹성을 말해주는 예만 간단히 들고 본론으로 가기로 하자.
1944년 4월 팔로군과 접전, 마을을 점령하고 변소에 숨어있던 팔로군 병사를 죽였고 그 마을 패장(牌長)을 마을 사람들 앞에서 죽였다. 그리고 군의 梅原은 패장의 머리를 잘라서 부대로 가져다가 솥에 삶은 다음 두개골을 자기의 책상 위에 놓고 장식품으로 보았다.
1944년 5월 부대가 유수림자에 있을 때인데 하루는 약 40세 좌우의 사람을 체포하여 왔다. 포로를 사격장의 과녁에 묶어놓고 산 사람을 과녁으로 쏘아서 죽였는데 10여 명 정보반 성원이 매인 세발씩 쏘았다.
열하성 석갑진지구에서의 토벌차수는 34건, 살해한 팔로군과 군중이 39명, 체포한 사람이 62명이었다. 하북성 난남현일대에서의 토벌 차수는 36건, 살해한 팔로군과 군중이 103명, 체포된 사람이 62명이었다. 특설부대는 토벌에서 일본제국을 위하여 큰 공을 세웠는바 만주국 국무원에서는 선후로 특설부대원에게 무공장, 경훈장, 주국장 등 훈장을 수여하였는데 1945년 3월 21일 국무원 정부공보에서 각종 훈장을 수여한 통계수자를 보면 특설부대 군관과 병사 중에 훈장을 수여 받은 인수는 무려 175명인데 조선인이 167명이고 일본인이 8명이었다.
박정희 역시 무공장을 수여 받은 사람이었다. 그 공에 대해 주재덕선생은 이렇게 회상했다.
<<박정희는 졸업을 앞두고 우리 부대에 와서 석 달간 견습군관으로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북성 전각장, 동전각장, 주가장전투에 참가했고 팔로군 선전원과 부상을 입고 백성의 집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구장(區長)을 체포하여 우리 정보반에 넘겼습니다. 그도 팔로군에 기의를 하려고 했었습니다.>>
1995년 주재덕선생이 이야기했던 가슴 아픈 회억을 나는 <<압록강 2천리>>에 썼다. <<혈연의 강들>> 제2부 <<압록강 2천리>>에 서술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서 증언으로 삼는다.
팔로군 포로들을 신문하면서 주재덕선생은 각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의 개노릇을 하고 있는 자기를 자각한 그는 포로한 팔로군 정찰원을 통해 하북성 팔로군 사령 이운창(李雲昌)한테 기의할 뜻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오라지 않아 환영한다는 회신과 함께 팔로군의 삐라(선전물)를 보내왔다. 그는 가네가와중대장한테 속마음을 털어놓고 기의할 것을 창의했다. 가네가와도 동의하고 내부는 자기가 맡을 테니 주재덕한테는 팔로군과의 연계를 계속 가질 것을 명령했다. 얼마 후 가네가와, 기포중대장 히로가와, 제2중대장 마쯔야마, 그리고 박정희도 마음을 같이 했다. 4백여 명 전 부대원 중에 3분의 2가 기의에 뜻을 갖게 되었다.
<<사각장에서 우리가 팔로군과 강을 사이 두고 대치해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주둔지에서 2리 떨어진 난탁리(蘭托里)에서 쌍방 대표가 만나 회담을 하기로 했지요. 팔로군에서 기의를 환영하며 우리 부대를 주력으로 삼을 것이며 공로자는 특별대우를 하겠다 고는 하였지만 구체화되지 않아 군관들은 팔로군에서 죽일 가봐 두려웠던 것이지요. 그래서 가네가와중대장은 내가 대표가 되어 강을 건너가 대화를 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담판하기로 약속한 날 폭우가 쏟아지면서 강 다리를 뜯어갔지 뭡니까. 그것이 1944년 8, 9월이었습니다. 저녁 여덟시까지 기다리다가 강 건너에서 별 동정이 없자 나는 시름을 놓았지요. 그런데 아홉시쯤 되니 강 저쪽에서 팔로군 적공대(敵工隊) 대장이 큰 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큰 야단이 난거지요. 일본헌병대(한개 소대의 헌병대가 특설부대에 있었다)가 알면 모조리 총살을 당할거 아닙니까. 천방지축 달려가니 벌써 헌병대와 가네가와중대장이 강역에 나와 있더군요. 가네가와는 헌병소대장한테 저들이 투항하라고 소리를 치는데 너희들이 투항하라고 맞소리를 쳤다고 둘러대더군요. 그날은 무사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부대원들이 끼리끼리 모여서서 기의한다느니, 투항한다느니 하면서 수군대는것이었습니다. 가슴이 두군거렸지요. 그러는데 기포중대장이 박광섭씨를 데리고 와서 나를 보고 먼저 건너가서 팔로군에 참가한 다음 다시 연계를 가지자고 하데요. 그래서 그날로 강을 건너갔지요. 팔로군 장퇀장(연대장)이 반겨 맞았습니다. 나는 9퇀의 참모로 되고 박광섭씨는 부패장(부소대장)이 되었습니다. 그후 때가 맞지 않아 특설부대의 기의는 무산이 되었답니다.>>
특설부대는 광복이 난 후인 8월 29일까지 토벌을 계속했다. 팔로군과의 접전에서 일본이 투항했다는 소식을 알고 그제야 투항했다. 그리고 동북으로 오던 중 금주(錦州)에서 조선의용군부대와 만났다. 특설부대 전원은 조선의용군에 참가하려고 했었는데 의용군에서는 심양에 가서 심사를 거쳐서 받겠다는 대답을 주었다. 심양에 도착한 특설부대는 해산하고 군관들과 적지 않은 병사들은 신의주를 해서 남으로 가고 개별적으로 고향에 돌아갔다.
주재덕선생은 팔로군에 기의한 후로 줄곧 일제와 싸웠고 광복후에는 이홍광지대 중대장으로 공산당에도 가입했다. 후에 이홍광지대가 중국인민해방군 166사로 되고 그 부대 전체가 방호산을 따라 북한으로 나갈 때 주재덕은 역사문제가 있으므로 심양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56년에 군에서 나왔다. 그 이듬해에 그는 체포되었던 것이다.
<<체포 자체도 놀라왔거니와 사형판결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 였수다. 내가 죄진 몸이긴 했어도 기의를 했으니 지난 일은 묵과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더구나 혁명을 위해 숱한 공로를 세웠으니 공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요. 나는 판결에 불복하고 상소를 했습니다. 다시 법정에서 조사를 하고 사형, 유예집행 2년에 떨구더군요. 장춘 전범감옥에 갇혔지요. 2년 후에 무기도형이 되었구요. 문화대혁명 후에 신고하여 1983년에 무죄석방이 되었으니 꼭 25년을 감옥에서 살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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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기의를 하지 않고 특설부대 요원들과 함께 한국으로 갔더면 장군별 하나쯤은 달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감옥생활은 않았을 것이구요. 지금까지 3분의 1의 생애를 철창속에서 보내긴 했어도 후회는 하지 않아요. 일제의 총알받이나 다름이 없었던 특설부대에서 항일군으로 기의했다는 사실은 나의 역사의 오점을 씻어주기에는 충분하니깐요.>>
주재덕선생의 말처럼 당시 그가 팔로군에 기의하지 않고 특설부대의 요원들과 함께 한국으로 갔더라면 어깨에 장군 별은 지고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직속 상급이었던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되었고 또 기포중대장이며 여러 중대장들이 중장, 대장으로 군권과 정권을 손안에 구겨 쥐고 한 세상을 호령했으니 그것은 꿈이 아닌 현실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지난 날 일제의 침략도구로 되어 나라와 민족의 이익을 버리고 살았던 젊은 시절을 아파했을 것이다.
반대로 박정희 등 특설부대 군관들이 한국으로 가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 운명은 불 보듯 번하다. 특설부대의 병사였고 또 팔로군에 기의하여 항일투쟁에 참가하였고 광복 후에는 국내 해방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이었으면서도 종신형을 살아야 했으니---
대통령을 살던 옥살이를 하든 사람은 자기자신을 정확히 대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만 그 인생은 떳떳한 것이다.
참회하는 인생은 아름답다. 주재덕선생처럼 스스로 자기의 부끄러움을 참회할 줄 아는 사람은 영명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세상 위인들이 모두 그러하듯 박정희대통령께서는 만주에서의 치욕의 역사를 아름다운 포장을 하여 버렸다. 그러므로 한국의 정계에서는 친일세력이 득세하게 되었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워온 애국세력은 탄압을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보탤 수도 없고 덜 수도 없는 유일한 것이 역사이다. 치욕의 역사는 감출수록, 미화할수록 더욱 추하게 된다.
박정희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오라지 않아 만주에 와서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 자원 입대하였다. 특설부대에 있는 기간에 그는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고 그 공으로 신경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학교시절 그는 교내 반만항일비밀단체와는 거래가 전혀 없었고 일본인 교관의 총애를 받는, 일본어와 능하고 기타 모든 방면에서 우수한 학생이었다. 졸업 후 그는 간도특설부대의 군관으로 배치를 받아갔고 열하성과 하북성에서 팔로군 토벌에 앞장서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조선인으로서의 민족적 양심이 있었고 그리하여 항일대오인 팔로군에 기의하려고 결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 만다. 광복 후 그는 특설부대 전원과 함께 조선의용군에 참가하려고 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자 직접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 후 한국의 기득권자로 된 이들은 자기들의 재만 역사를 독립운동 못지 않게 미화하기에 광분했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의 초등학교 교과서를 접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극찬을 구구히 서술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일제강점시기 만주에서 일본군 중위가 되어 휘하에 일본군을 두고 호령했다,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몰아내기에 앞서 공산당을 소멸하는 것이 인류의 평화를 위한 우선 이라는 것을 깨닫고 열하에서 모택동의 팔로군을 소탕하는데 앞장섰다 등등---그 장황한 설교는 모순 투성이었다.
중국 말에 흑백전도(黑白顚倒)라는 성어가 있다. 검은 것을 희다고 하고 흰 것을 검다고 한다는 뜻으로 우리말로 해석하면 얼토당토않다는 뜻이 된다.
박정희는 중위로 일본군 생활을 마쳤다. 중위라면 겨우 졸병신세를 벗어난 계급이고 직접 상급인 대위의 호령소리에 움직이었을 것인바 자랑거리로 내세울 바가 아니다. 그것이 도리라면 일본군 장군을 지낸 홍사익(주해 15)은 민족영웅으로 되어야 할 것이며 2차대전이 결속된 후 전쟁 범으로 사형에 언도된 것은 잘못된 것일 것이다.
박정희가 열하에서 팔로군을 토벌한 것은 인류의 평화를 위한 것일 수가 없다. 당시는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물리치는 것이 한민족은 물론 동아시아 모든 국가와 정당과 민족의 의무이고 사명이었다. 중국 내에서도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은 불구대천의 원수였음에도 일제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한다는 하나의 목적아래 국공합작 공동 항일을 선택했다. 당시 모순의 초점은 일본제국주의침략이었다.
나라의 안녕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는 항일이 우선 이었다. 그러므로 반공을 앞세워서 일본군으로 되어 침략전쟁의 대포 밥으로 되었던 역사를 미화하려고 한 것은 시비전도이다.
요즘 한국에서는 친일파에 대해 왈가왈부하면서 박정희 역시 그 명단에 넣어야 한다는 견해와 대통령을 하면서 한국의 경제를 발전시킨 그 공으로 보아 한때 청년시기의 망동을 묻어두어야 한다는 견해가 엇갈리는 가운데 여전히 상술한 교과서의 견해가 살아 있는 실정이다.
한국 초등학교 교과서에서처럼 박정희대통령은 일본군 군관이 되어서 일본인 졸병을 호령한 적도 없고 공산당을 토벌하는 것이 세계의 평화와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광복을 위한 우선이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다. 일본군이 되어 항일 군을 토벌하면서도 못내 그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기회를 보아 항일 군으로 가려고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만주에서의 젊은 한때를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해 깡그리 바쳤다. 박정희는 한강을 기적을 창조한 뛰어난 영수인물로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공로가 그의 젊은 한때의 오점을 무마시킬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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