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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야기들을 저작의 본문에서 가능한 설명하겠다. 실제에 있어서 동양학자들에게 생소한 내용은 전혀 없지만, 비교적(秘敎的) 관점에서의 해석에는 서구 학생들이 지금까지 전혀 들어 본적이 없는 내용이 많이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그림은 단순한 원반 이고, 두 번째 그림 은 태고의 상징이다. 그 가운데 찍혀진 점은 추상적 우주의 영원한 자연력의 주기적 현현에 있어서 최초의 분화를 의미하고, "그것 안에 있는" 무성(無性)과 무한(無限)의 "아디티"(Rig Veda)이며, 절대공간 안의 잠재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제 3단계에서 이 점은 직경으로 바뀐다. 이 점은 뻗어나서 직경으로 바뀐다. 이 세 번째 그림은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절대무한 속에 있는 신성하고 때묻지 않는 순결한 어머니의 성질을 갖고있다. 이 수평 직경은 수직 직경으로 바뀌고, 수평과 수직은 교차 를 이루게 되는데, 즉 이승의 십자가 된다. 이것은 인류의 세 번째 뿌리가 된 제 3근본인종에 도달했음을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 생명의 기원이 시작됨을 상징한다. 원의 테두리가 없어지고 십자만이 남는 것은 물질로 인간이 내려온 것이 완료되어, 네 번째 인종이 시작됨을 상징한다. 원안에 십자는 순수한 범신론을 상징하고도 있다. 둘레에 원이 없는 십자는 자연의 생성의 뿌리인 남근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것에는 원에 안으로 접하는 "다우" 또는 소위 "자이나교에서 말하는 스바스티카(SVASTIKA) 또 다른 뇌신(雷神)토르의 금퇴, 혹은 단순하게 원안의 스바스티카로서 성적인 뜻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뜻도 가지고 있었다. 세 번째 상징을 말하자면, 수평직경에 의해 둘로 나뉜 원은 창조적(여성적이므로 수동적) 대자연의 시초의 현현이라는 뜻도 있었다. 인간이 생식에 관하여 최초로 어렴풋이 지각한 것은 여성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신이 남신보다 더 신성시되었다. 따라서 자연은 여성이고 대단히 객관적이며 실체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실을 맺는 영적원질(精靈)은 숨겨져 있다. 수평선의 어느 원안에 둘러 나눈 선을 추가함으로 가장 오래된 글자모양 타우가 형성되어졌다. 이 문자는 세 번째 근본인종의 상징적인 "타락"(자연적인 진화에 의해 성의 분리가 일어남)의 날까지는 제3근본인종을 표시하는 상형문자였다. 이때 상징으로 변화되었다. 다시말해 무성(無性)의 생명을 상징하는 원이 분리된 것이다. 수정된 원은 이중의 상형문자, 즉 이중의 상징이 되었다. 이것은 우리들이 속한 다섯 번째 근원인종의 모든 아인종들에게 상징학에서 이야기하는 최초로 형성된 인종의 세크르(sacr')(히브리어로는 네케바(n'cabvah))가 되었다. 그로부터 이집트의 (생명의 상징)로 바뀌었고 더 훗날 금성을 상징하는 표시가 되었다. 그 다음은 스바스티카(토르의 금퇴ː지금은 헤르메스의 십자)가 되고, 끝내 원에서 떨어져서 순전히 남근(男根)의 상징이 된다. 칼리 유가(KALI YUGA)의 비교적 상징은 거꾸로 세운 꼭지점 다섯의 별이다. 두개의 꼭지점이 하늘을 향하게 하는 것은 인간적 마법의 기호이다. 이러한 위치의 별은 모든 오컬티스트가 "좌수(左手)의 길"의 표시로서 인정하는 것으로 의식적 마술에 쓰여진다. 신비주의자들은 이것을 사도(邪道)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어 가는 동안에 범신론에 관한 일반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바란다. 불교도와 아드베티파의 오컬티스트들을 무신론자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 모두가 철학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의 반론이나 의론을 엄밀한 논리에 기초를 둔 논리학자이다. 실제로 힌두교의 파라브라흐맘(Parabrahmam)이 다른 여러 나라의 숨겨지고 이름 없는 신들의 대표로 받아드려진다면, 우주의 절대원리가 다른 나라의 모든 신들의 원형이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파라브라훔(Parabrahm)은 하나의 개체적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라 할 수 없다. 만두키야 우파니샤드 2장 28절을 보면, "그것은 지고한 것이며, 지고가 아닌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원인으로서는 지고하지만, 결과로서는 지고하지 않다는 뜻이다. 파라브라훔은 유일무이의 실재로서, 최고의 영적인 뜻에서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우주이자,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원불변의 무한한 우주공간이다. 유일의 불변이고 청정(淸淨)이며, 자유롭고, 쇠태하지 않는 브라흐마(中性) (여기서 말하는 브라흐마(brahma)는 힌두교의 창조신 브라흐마(brahm)가 아니다. 우주의 본질인 브라마를 뜻한다)는 지고의 근원이며 "유일의 진실한 존재 파라마티카(Paramarthika)"인 것이다. 또 절대적 칫트(Chit)와 차이탄야(Chaitanya(지성, 의식))는 인지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에는 인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불꽃을 본질이라 말할 수 있는가? 불의 본질은 "우주의 생명과 빛이고, 눈에 보이는 불과 불꽃은 파멸이고 죽음이며 악이라." "불과 불꽃은 아라한의 체를 파괴하며 본질은 아라한을 불사의 것으로 만드나니" 「보디무르(Bodhi-moor) 제2권」(편주9) 베다 철학자 상카라차리야는 이렇게 말한다. "절대 영의 지식은 태양의 광휘처럼, 또는 불속의 열처럼, 절대본질 자체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불의 영"일 뿐, 불 자신은 아니다. 따라서 "불의 속성", 즉 열기나 불꽃은 영의 속성이 아니고, 오히려 그 영이 무의식적 원인으로 되어 있는 것들의 속성이다". 이것이 후일 장미 십자회 철학의 진정한 중심사상의 기초가 아니었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파라브라훔은 무한하고 영원한 우주의 집합의 총계이고, 각개의 집합체로 맞추어질 수 없는 "그것"이고 "이것"이다. "태초에 "이것"은 유일무이 자아(Self)였다." (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위대한 상카라차리야는 "이것"이란 곧 우주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태초에"라는 단어의 의미는 현상우주의 재현(再現)이전을 뜻한다. 그러므로 범신론자들이 씨크릿 독트린에도 쓰여 있듯이, 우파니샤드에서 이야기하는 "이것"은 창조를 행할 수 없다는 진술을 반복할 때, 그들은 창조자 혹은 창조자들의 집합의 총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창조" 특히 형성과 같은 유한의 활동을 무한의 원칙에 끼워 맞추는 것을 매우 논리적으로 부정할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파라브라흐맘은 절대적 원인이고, 한정되어 있지 않는 묵타(Mukta)임으로 수동적인 것이다. 파라브라흐맘에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인 전지와 전능뿐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인간의 지각력의 반영에 여전히 귀속되기 때문이다. 파라브라훔은 불변하며 영원한 "지고의 일절"이고,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자 자연의 진수임으로 속성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그의 절대성은 유한, 말하자면 조건이 붙여져 있는 것들과는 맺어지려는 개념이 처음부터 배제된다. 만약 베단다파가 모든 속성을 단순히 파라브라훔의 발산에 속하는 것으로 해서, 그와 같은 발산을 "이쉬와라 프러스 마야(Iswara plus Maya)", 와 아비드야(Avidya)(무지라기보다는 불가지론에 가깝다.)라고 설명한다고 하면, 이 개념 안에서 무신론을 찾아 낼 수는 없다. 무궁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우주에서 두개의 절대자나 두개의 무한이란 없는 것임으로, 이런 자존하는 것들에서 인격신적인 창조를 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안된다. 유한인 "존재"의 감각과 지각에서 본다면, 유일의 유성(有性)이라고 말하는 뜻에서, 「그것」은 "비존재"이다. 왜냐하면 영원히 공존하는 발산은, 말하자면 생득 방사란 것이 이 일절(一切)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방사는 주기적으로 브라흐마(음양이라 말하는 이중 에너지)가 되는 것이고, 스스로 현현한 우주가 되고 스스로 넓어져간다. 공간의 (추상적인)물위에 움직이고 있는 나라야나(Narayana)는 자신이 움직이게끔한 구체적인 실질인 물로 변질되어 현현한 "로고스"가 된다. 범신론자와 아트베이타파에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는 정통 바라문들은 그들을 무신론자라고 말하지만, 만약「마누의 법전」이 이 문제에 있어서 어떤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창조신의 각 시대의 끝 무렵에는(100신년(神年), 이것을 우리들 인간의 연월로 표시하면 15행의 수가 더 필요함) 창조자인 브라흐마의 죽음을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죽음을 존재의 현현계에서는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 다시 말해 주기적 휴식으로 보는 것 외에 다른 뜻으로 보는 철학자가 정통파 안에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오컬티스트들은 앞에서의 교의에 관해서는 아트베이타 베단타파의 철학자들과 견해를 같이 하고있다. 절대적 전(全, ALL)은 "황금알(우주의 알)"의 알속으로 들어가, 후일에 이르러 브라흐마와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우주가 될 수 있게끔 스스로 전개하는 것으로 변질된다고 말하지만, 절대 전(全, ALL)이 황금알을 창조한다는 생각 또는 황금알을 진화시킨다는 생각은 철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베단타파는 말한다. 그들은 절대 통일체는 "무한"으로 바뀌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한"이란 어떤 끝이 없는 연장과 그런 어떤 것의 지속을 전제로 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일의 전(全, ALL)」은 우리의 존재의 터전인 지구상의, 즉 우리들 존재계에서 「유일의 전(全, ALL)」이 단지 멘탈(정신적)적 물질적 표현을 하고 있는 공간과 같은 지각의 대상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다. 만약 영원무한의 전(全, ALL), 즉 편재하는 통일체가 영원 속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기적인 현현을 통하여 다양한 우주 혹은 여러 가지의 인격이 된다고 생각 할 수가 있는 것이라면, 그 통일체는 유일한 것이 아닐 것이다. "순수공간은 저항하지도 못하고, 운동하지도 못한다"고 말한 존 로크의 생각은 바른 것이 아니다. 공간이란 "무궁한 허공(limitless void)"도 아니고 "조건화된 충실(conditioned fulness)"도 아니다. 그러나 양쪽 모두이다. 절대적 추상의 세계에서는 영원히 감지할 수 없는 신이고, 유한의 인간 마음에서만 공허(空虛)이다. 또 마야적(현상)인식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간에 질료가 충만한 공간이자 만물의 절대적 용기(容器)이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절대적 전(全, ALL)이다. 그리스도교의 사도가 "신의 안에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도다"라고 말한 것이나 "우주는 브라흐마 안에서 살고 브라흐마에서 생성되며 브라흐마로 회귀하도다"라고 힌두교의 리시가 말한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현현 되지 않는 우주 브라흐마(중성)는 곧 잠재상태에 있는 미현현된 우주이다. 그리고 현현된 브라흐마는 정통종교에서의 상징적 교의에서는 남성-여성(male-female)으로 되어있는 "로고스(logos)"이다. 말하자면, 비전을 전수받은 사도 성 바울의 신과 리쉬(스승)의 신은 보이지 않는 공간과 보이는 공간 모두이다. 공간은 비교의 상징학에서는 "일곱 개의 피부를 가진 영원한 어머니-아버지"라고 표현된다. 공간은 미분화상태에서 분화한 층에 이르기까지 일곱 층의 표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주가 존재하던 존재하지 않던 간에,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은 무엇이겠는가?"라고 비교의 센쟈르어 문답집에서 묻는다. 그 답은 "공간"이다. 이에 거절당하는 것은, 유일의 알아낼 수 없으면서, 늘 존재하고 있는 자연의 신(즉, 의식하지 못하는 자연의 신)이 아니고, 인간의 독단의 신이며, 그 신의 인격화되어 버린 "말"이다. 한이 없는 자부심,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온 교만과 허영에 찬 인간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작은 뇌 조직 안에서 느낀 재료를 써서 자신의 모독적인 손으로 인격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나타난 적이 없는 하나의 공간에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啓示)라고 하여 인류에게 강요한 것이다. 오컬티스트는 이 계시가 신성(神聖)으로부터 온 것이기는 하지만 유한인 실재, 말하자면 현현된 생명으로부터 내려온 것이지, 결코 미현현의 "유일한 생명"에서 온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그러한 현현된 생명을 최초의 인간, 혹은 드야니-붓다(Dhyani-Buddha) 또는 드얀초한(Dhyan-Choan)이라 부르는데, 힌두교에서는 리쉬프라자티(Rishi-Prajarati, 우주의 창조신)라하며 엘로힘(Elohim) 또는 신의 아들들이라 불린다. 이들은 여러 나라 국민들이 숭배하며 별의 혹성영들로 언급되는데 인간에게는 신적인 존재들이다. 또 오컬티스트는 "아디삭티(Adi-Sakti)", 말하자면 "물라프라크리티(Mulaprakriti)"에서의 직접의 발산, "그것"의 영원한 뿌리, 또는 우주혼의 아카사(Akasa)형체를 감아 쓰고 있는 창조적 원인인 브라흐마의 여성적인 면을 철학적으로 "마야"(현상계를 창조하고 움직이는 원동력)로 해서 인간 "마야"의 원인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도 오컬티스트는 "마야"가 존속하는 동안, 즉 대현현기(Mahamanvantar)동안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또 세계(우주)혼은 과학에서 알던 모르던 모두의 자연현상과 연관되었음으로, 실제적인 사안에 아카사 즉, 물라프라크리티(Mulaprakriti)의 방사를 적용할 수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는 비교(秘敎)적인 것으로 뿌리나 기초는 "하나"였지만 현교적으로는 인도와 페르시아, 이집트의 종교이다. 그 다음에 온 것은 앞의 종교에서 나온 "칼데아(chaldea, 고대 바빌로니아 남부 지바의 왕국)"의 새 종교이다. 현재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완전히 잊혀진 채 그 원형이 많이 잘못 전하여져 사바교(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의 신들을 숭배)로만 알려져 있다. 그 후의 여러 종교가 생겨난 것을 거쳐서 유대교가 나온다. 이 교리는 비교적인 측면에서 카발라(Kabala)와 바빌로니아의 메이지즘(Magism)과 일맥 상통하는 계통이고, 현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창세기」나 「모세오경」에서처럼 우화적인 전설로 가득 차 있다. 조하르(Zohar, 히브리 신비교 경전)를 토대로 「창세기」를 읽어보면, 처음 네 개의 장은 우주 발생론의 심오한 철학적 대목의 일부라 할 수 있다. (SD 3권 구푸타베이티야와 조하르 참조) (편주10) 그것들은 상징적인 가려진 문구 그대로 읽으면 한편의 동화로서, 과학과 논리의 측면에서 볼 때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는데, 이는 분명한 카르마의 결과라고 하겠다. 「창세기」를 기독교 교리의 성서의 머리말로 삼도록 한 것은 「모세오경」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던 랍비(Rabbis, 유태교율법학자)들의 잔혹한 복수에서였다. 그것은 그들의 성전을 강탈 당한데 대한 랍비들의 무언의 항변이었다. 유태인들은 현재 그들의 전통적 박해자보다는 확실한 우위에 있다. 지금까지 언급한 현교적 교의를 지금부터는 절대적(보편적)교리에 비추어 차츰 설명해 가겠다. 오컬트 교리 문답 안에 아래와 같은 질문과 대답이 있다. "언제나 항상 존재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공간, 즉 어버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Anupadaka)입니다." "언제나 항상 존재했던 것은 무엇인가?" "뿌리 속의 씨눈(우주 생성의 근원)입니다." "언제나 항상 들락날락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커다란 숨(우주의 호흡)입니다." "그러하다면 세 개의 영원(永遠)이 있는가?" "아닙니다. 그 세 개는 곧 하나입니다. 언제나 있으면서 있는 것은 하나이고, 언제나 있었던 것도 하나이며 언제나 있음직 할 것도 하나입니다. 이것은 공간입니다." "오, 제자야! 설명해 보라." "유일한 것은, 원주가 없으며 끊어진 곳이 없는 완전한 원(輪)입니다. 그의 원주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서도 있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것은 현현기 동안만 직경을 나타내는 원의 무한의 평면입니다. 유일한 것은 현현기 동안 어디에서 발견되지 않고, 어디에서도 지각되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그것은 수직이고 수평이기도하며, 아버지이고 어머니이며, 아버지의 정상이고 맨 밑(바닥)이며, 실제에 있어 어디서도 잡을 수 없는 어머니 양손입니다. 왜냐하면, 유일한 것은 윤(輪)이고, 또 그 윤 안에는 또 다른 윤들이 많이 있는 윤이 때문입니다. 암흑 속(어둠)에 빛이고, 빛 속에 암흑, "영원의 숨"입니다. 이것이 어디서나 존재해 있을 때는 밖으로부터 안으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아니했을 때에는(마야, 중심의 하나) 안에서 밖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합니다(숨을 뱉고 숨을 마시고). 팽창할 때 어머니는 사방에 뿌립니다. 수축 할 때, 어머니는 뱉은 것을 거두어 넣습니다. 이것은 진화와 붕괴, 즉 만반타라와 프랄라야를 만들어 냅니다. 씨앗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입니다. 뿌리는 차갑습니다. 그러나 진화하는 만반타라 동안 그녀의 옷은 차갑고 반짝입니다. 뜨거운 숨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다양한 면으로 구성된 원소로 인해 생겨난 것을 먹어치웁니다. 동종으로 된 한 면으로 이루어진 원소만이 남습니다. 차가운 숨은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형상을 잉태시키고 바깥으로 내보냈다가 새벽이 오면(브라흐마의 하루, 즉 만반타라), 새로운 형상으로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가슴으로 거두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