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온 편지-멕시코(1)"신부님, 왜 사서 고생하세요. 이것 드시고 살 좀 찌세요"
공소에서 아이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김형준 신부.
성 요아킴 팔리사다(Palizada)본당에는 32개의 공소가 있다. 공소로 가는 길은 크게 3갈래로 나누어져 있는데 공소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려면 어림잡아 차로 3~4 시간 걸린다.
그러다 보니 미사 봉헌 수도 많다. 주일엔 본당 미사 3대와 공소미사 4대 등 총 7대의 미사를 봉헌해야 한다. 평일에는 그보다 적어 본당과 공소에 각각 1대의 미사가 있지만, 많을 경우에는 공소 미사 4대, 본당 미사 1대를 봉헌하기도 한다. 본당에서 먼 지역은 차로 2시간이 걸리고 미사 후 다음 공소까지 가는데도 1시간 정도 걸리는 걸 생각하면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리고는 2시간을 달려 본당으로 돌아와 본당 미사 주례를 하든지 각종 회합에 참석해야 한다.
선교지, 하느님이 주신 약속의 땅
팔리사다라는 지역의 공소들을 크게 분류하자면 강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 공동체와 소를 키우는 목장을 운영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나눌 수 있다. 강 근처 3~4개의 공동체를 방문하려면 배로 1시간 정도 들어가야 한다.
이곳에 와서 선교사로서 가장 힘들었던 건 역시 언어 문제였다. 게다가 3~5월이면 40도를 웃도는 무더위와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높은 습도로 고생해야 했다. 언어 문제야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해결된다 해도(비록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알 수는 없지만, 사실 언어적 한계는 평생을 두고 공부하며 살아가야 할 문제이라 생각된다) 더위와의 싸움은 그렇지 않았다. 몹시 더운 날은 밤에 3~4번 이상 잠에서 깨서 뒤척거려야 했다.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선교사로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육체적으로 힘들고, 모든 생활 여건이 한국보다 많이 열악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와 우리 선교사들에게 이런 문제들은 삶의 불만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환경이 열악해도 선교지를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라 생각하며 기쁜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 주셨다는 분명한 믿음을 갖고 그 사실에 감사하며 살면된다. 나를 위해 가장 좋은 자리를 그분 스스로 마련해 주신 것이다.
물론 누군가가 "너는 진정 이 땅 멕시코를, 멕시코인들을 사랑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래도 매일매일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 노력을 이어가며 사는 것이 내 소명이라 믿기에 기도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왜 선교사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하루를 시작한다.
미사 강론 시간에 신자들에게 "여러분들은 왜 그리스도인이 됐습니까?"라고 물었다. 또 "스페인어도 잘하지도 못하면서 왜 멕시코에 와서 멕시코인들과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들에 대답하며 사는 삶이라고 말했다. 그 삶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와 함께 변화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변화되는 사람들이다.
주일은 정말 바쁜 날이다. 사제관 내 방에 들어오면 보통 새벽 1시를 훌쩍 넘긴다. 본당 저녁 7시 미사를 마친 후에는 어김없이 신자들과 모임을 한다. 모임 중에 신자들은 간단한 파티를 열었고, 모임 후 한 공소의 신자들이 차로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갔다 오니 새벽 1시가 넘었다.
낯선 동양인 사제
그런데 신자들을 트럭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와서 성당을 청소하는 자매님에게 야단맞았다. 자매님은 "차 열쇠만 주고 다른 사람에게 운전을 맡기면 되는 것을 왜 굳이 신부님이 운전하며 그 고생을 하느냐"며 나에게 화를 냈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 공소 방문을 가야 할 것이 아니냐면서 말이다. 사실 미사 후 열린 모임이 끝나고 피곤했지만, 신자들을 배려하고 싶어 조금 무리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무거운 몸을 일으킬 때면 후회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일어나자마자 1시간을 달려 훈칼(Juncal)이라는 공동체를 방문했다. 미사 후 돌아오는 길에 공소 신자 한 분이 병자성사를 청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병자성사를 했다. 예정에 없던 병자 방문에 다음 공소로 이동하는 시간이 지체됐고, 미사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 다음 공소에 도착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런 일은 자주 있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성당에 앉아 묵주기도를 하며 나를 기다려 준다. 미사 후 본당에 돌아오니 성당에서 청소하는 자매님과 사제관 식복사 자매님, 그리고 본당 사무원들이 나를 굉장히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애처롭게 말을 걸어온다. 매일 땀에 젖어 돌아다니는 내가 좀 안쓰러웠나 보다. 그래서 내일은 맛있는 걸 좀 사와야겠단다. 나를 살찌우는 게 이 사람들의 최근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처음 이곳에 발령을 받고 이곳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낯선 외국인이며 동양인인 나를 많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선교지를 다니는 내 모습에 서서히 경계의 눈빛들이 사라져갔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거리감이 사라지자 성당 사무원들과 성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멕시코에 있으면서 조심해야 할 것들도 잘 가르쳐 준다. 특히 나는 여자들을 조심해야 한단다. 멕시코 여자들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아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지적해 준다. 인사할 때도 어떤 것이 예의이고 어떤 것이 예의에 벗어나는 것인지 등등 끝이 없다. 이러면서 또 하루의 여정이 지나가고 새로운 날이 밝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