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 축령산휴양림과 몽골문화촌
여러차례 다녀온 축령산이지만,
여름성수기엔 처음이다. 숲이 우거져 산책하기에도 쾌적하였다.
서리산정상(832m)과 축령산정상(886m)은 지도에서 보듯이
축령산휴양림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곳은 매표소에서 제1주차장을 지나 500m 오른 지점이다
좌측으로 2.64Km 오르면 서리산정상이고
우측으로 2.74Km 오르면 축령산정상이다
우린 산에 무리하게 오르지 않고 휴양림을 돌기로 한다.
야외교실
이 통나무 길로 접어든다. 둥글둥글 쉽지 않은 길이다.
숲속의 집도 지나고
솔내음 쉼터는 통과
아래로 내려오니
넓은 임도옆에 멋지게 지어진 쉼터가 있어 쉬어가기로 한다
밧줄을 잡고 안전하게 오른다.
통나무 다리를 건너서 다시 임도따라 산을 오른다.
잔디광장이 보이지 않아 여기까지요.
발길 되돌려 하산하지요.
하산길에서
산속 큰돌에 푸르게 기어 오르는 담쟁이를 만난다.
도종환시인의 '담쟁이' 詩가 생각난다.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을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을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산림휴양관으로 건너는 다리에 이른다.
다리밑 계곡에서 피서객 세분이 사진도 찍으며 즐기고 있었다.
산림휴양관이 계곡을 낀 바로 다리옆에 위치했다.
주차장쪽으로 하산하면서 주변 풍경들을 담는다.
해당화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의 노래가 입속에서 절로 나온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따라 찾아 온 총각선생님~
열아홉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숲속 계곡에 웬 색색이 선녀들이 이리도 많은고
나뭇군이 눈이 부셔 감히 근접을 못한다는군.
솟대도 만난다.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혀
마을 수호신으로 믿는 상징물이다.
솟대는 삼한시대의 소도(蘇塗) 유풍으로서 ‘솟아 있는 대’로 인식하기도 한다.
세우는 목적에 따라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 마을의 액막이와 풍농·풍어 등을 기원하여 세우는 일반적인 솟대,
두 번째 풍수지리상으로 행주형(行舟形)인 마을에 비보(裨補)로서 세운 솟대,
세 번째 급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솟대인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마을신앙과 긴밀하다. 솟대는 대체로 마을 어귀에 세워진다.
솟대를 만나김에 장황하게..
산책로 따라 사뿐사뿐
새소리에 눈을 돌리니 작고 귀여운새 한마리가 나무에..찾아 보세요.
바로 요 쉼터에서 하늘을 천정삼아 누워서
쉬기도 하고, 작은새도 바라보았다. 천국이었다.
몽골인이 운영하는 몽골문화촌 바로 앞에 있는 식당이다.
산채비빔밥과 몽골 군만두로 점심식사다.
양고기로 만든 몽골 군만두..5개 한접시 1만 이천원
산채비빔밥은 1인 9천원..합 3만이다. 다 먹었냐구요?
아무리 胃大하다 한들 어찌 다 먹을 수 있겠나요?
군만두 3개는 싸와 저녁식사로 '냠' 사진을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간다.
몽골촌엔 해마다 여러번 찾는 곳이어서 이번엔 민속공연만 보려고 했는데
그 민속공연은 15명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오후 2시40분엔 단체 예약이 있어 공연이 있다기에 그 시간을 겨냥하다보니
점심먹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마상쇼도 있지만 그 쇼는 여러번 보아서 접기로 했다.
하여 몽골문화촌 전시장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낸다.
야트그(가야금)
13C대 우리나라의 한 왕자가 몽골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전래되었다.
아름답고 애절한 선율로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악기이다.
몽골문화 체험관에서
몽골문화체험관
몽골역사관
제국의 영웅 징기스칸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윗글은 게시물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옮긴 글이다.
하단은 몽골문화촌 역사관에서 옮겨 온 역사게시물 여러점이다.
마이홈에서 시간나는대로 차분히 정독하며 몽골을 알아 보련다.
사진촬영및제작 찬란한 빛/김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