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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진의 정치카페'를 듣다가 손아람 작가가 경향신문 신년사로 기고했다는 이 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손아람 작가는 용산참사를 소재로 한 영화, "소수의견"으로 각본상을 수상한 소설가이자 가수이다. 명문이라 칭송하는 유시민 작가의 낚시에 걸려 검색하여 읽어보았다. 내 청춘엔 선언문이 많았다. 그런 선언문의 어조, 더구나 '망국'을 선언하는 선언문이라니... 기대가 되는 정조가 있었다. 기대를 저버리는 담담한 문체, 담담하다기엔 아픈 내용이다.
문득, 요 몇 일동안 만났던 연극인 강사가 되려 하는 연극인들이 얼굴이 떠올랐다.
양평에 새로 지었다는 '현대블룸비스타'라는 호텔에서 2박 3일을 묵다 돌아왔다. arte(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주력 사업인 예술인 강사 파견 사업의 일환으로 신규 연극인 강사 연수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드라마 수업의 교육적 의의"라는 제목으로 3개로 분반된 반에서 총 13시간의 수업을 소화했고 지금은 그 후유증으로 계속 피로 속을 헤메는 중이다. 신축호텔이라지만, 나는 그런 답답하고 폐쇄적인 건물이 싫다. 수감되었다 풀려난 느낌이다. 호텔은 암튼 싫으니 럭셔리하게 살기엔 글렀다.
'예술 강사 파견 제도'는 15년 전 쯤 시작되었다. 이 제도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일반인들의 문화예술의 향유와 자기 표현에 대한 욕구가 커져 가면서 다양한 집단, 연령을 대상으로 문화예술 교육을 하기 위해서, 한편은 예술인들의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전문 예술가와 교육자에게 요구되는 태도와 기능이 같지 않으니 교육에 예술을 접목하기 위한 태도와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의무 연수를 실시하고, 시간이 흐르면 재교육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신규연수를 받은 예술인들은 진흥원에서 임금을 받으면서 수요가 있는 기관으로 파견되어 일년 정도 계약을 하고 교육행위를 하게 된다. 어느덧 15년이 흘렀다. 사실, 교육보다는 예술 창작을 하고 싶은 것이 예술가들의 진정한 욕구일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는 그렇게 만만한게 아니니... 별 수 없이 신청을 하고 연수를 받는 예술가들이 많았다. 초창기엔 그랬다. 그래서 연령대도 다양했다. 당시 나보다도 훨씬 연배가 높은 아저씨들도 많이 보였었다.
그래서 당시엔 매력적인 '폭탄'들이 많았다. 길들여지지 않은 연극인들. 아침 이른 수업 시간 술 냄새를 풍기며 잠이 덜 깨 졸기도 하고, 괜히 딴지를 걸기도 했지만, 한 번 진심으로 꽂히면 열정으로 피어나던 사람들. 엉뚱하고 파괴적인 아이디어에 뭉클한 인생사를 진실된 연기로 재현하던 이들... 연극인들은 인간적이다. 어수룩해 보인다. 호불호를 따질지언정 유불리를 따지지 않는다. 삐딱하지만 한 번 마음에 들인 사람과 일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있다. 자신을 잘 드러낸다. 그런 폭탄들이 훨씬 연배가 아래인 강사들의 열정을 감지하면 그 수업은 파티장이 되곤 했다. 이론이 아닌 몸으로 세상을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가끔 그 시절 만났던 그 '폭탄'들의 얼굴을 떠올릴 때가 있다.
그 '폭탄'들의 인성은 교육과도 진실되게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파견되는 현장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정교사 신분도 아니기에 소신을 가지고 수업을 하기도 어렵고 학교 시스템도 관리자들도 예술 교육에 대해서 무지하니 학교장의 욕구를 맞춰 주느라 소모되어 버리기 일쑤이다.
.... 그렇게 어느덧 15년이 흘렀다. 이 겨울 연극 전공자인 나 역시 공연을 한 편도 보지 않았다. 대학로의 무명 배우들은 어떻게 이 혹독한 계절을 견딜까? 그래서 이 제도는 가난한 연극인들의 밥법이로 공고히 자리 잡았다. 문제는 창작의 에너지가 고갈된다는 것이다. 한 번 예술인 강사 자격을 얻으면 쉴 수가 없다. 한 해를 쉬면 다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으니 한마디로 고삐가 매이는 것이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인데 지방의 어떤 연극인들은 한 주에 40시간을 소화하기도 한단다.
이제는 예술인 강사가 되고 싶어 신청을 해도 그 경쟁률이 만만치가 않다. 이번에 내가 수업을 한 이들은 연고지가 모두 지방이지만 사실은 거의 대부분 서울 거주자들인데 서울로 신청하면 경쟁을 뚫을 수 없으니 지방으로 주소지를 옮겨 신고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지방으로 파견되면 교통비를 자비로 부담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잡고자 한다.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이 정권 들어 청년 일자리 창출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숫자 놀음 때문이다. 일자리의 질은 문제가 아니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 버린 형국이다. 이러니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가진다 해도 지칠밖에... 교육도 예술도 실종되는 현실이다.
이번 연수에선 젊은 층이 대다수였다. 아주 간혹 40대가 보인다. 정말 열심히 그 빡빡한 일주일의 연수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그 열심이 기특하다가도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이젠 '폭탄'이 없다. 자신을 드러내는데 주저한다. '폭탄'으로 보이는 분들도 있지만 고립되어 있었다.
'홍길동전'을 텍스트로 해서 드라마 활동을 통한 연극만들기 작업을 했다. 홍길동은 10세에 집을 떠났다고 한다. 열살이라니!!! 신출귀몰하고 통쾌상쾌하기만 할 것 같았던 홍길동의 여정을 드라마로 탐구해 보니 씁쓸했다. 홍길동을 추포하라는 방문이 붙고 계층별로 모여 그에 대한 반응이나 소문을 만들기 즉흥 활동을 하고 난 후 그 결과를 들으면서 나는 홍길동의 외로움에 가슴이 아팠다. 작금의 현실이 똑 그렇다. 머슴방에선 상금을 받으면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분배할지 머리를 굴리고, 주모는 의금부에 정보를 제공하는 댓가로 돈을 받는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한편 활빈당이 함경도 감영을 터는 장면에서 활빈당 역할을 하게 된 참여자들은 정의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고 했다. 그러나 고립된 신념이었다. 먹고 사는 일이 가까우니 왕이든 홍길동이든 잘 먹여주는 편에 서겠다는 관군들의 태도에 슬픔을 느낀다고 했다.
맞다. 모든 권력은 동질적일지도 모른다. 권력이라는 속성은 말이다. 그 권력에 대한 뿌리 깊은 냉소...
하지만 권력이 부재한 세계는 없다. 그 권력을 어떻게 창출하고 길들일 것인가에 고민은 냉소로 대체되어서는 안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오래된 속담... 우리 시대는 다시 그 신념으로 회귀 중이다.
10세에 세상을 뒤집자고 집을 나오지는 못하지만 투표장에도 나오지 않는 젊은세대는 이해하기 어렵다.
<망국선언문> 속의 젊은이들을 생각해본다. 촘촘히 관리되는 세상에서 작고 또 작아져 가는 현대인들. 예술을 한다면서도 현실 너머의 상상이 허락되지 않은 이들. 이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예술이라는 행위의 현 주소이자 예술가들의 장애인 것이다. 그럴 때 예술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지만 수업은 열기가 넘쳤다. 우리 모두 우리가 창조한 현실의 적나라함을 직면하고 경악했으며 슬퍼했다. 홍길동의 외로움에 가슴 아팠고 먹고사는 문제에 속박된 이상을 보았다. 그래.. 내가 하는 이 일이 이런 의미가 있으려니. 하고 많은 방법론의 전수보다 바로 그 순간이 가슴에 깊이 남겨지길... 그렇게 소망해 보며 양평을 떠나왔다.
그렇지 우리는 사정이 나쁠 뿐이지 마음이 아픈 것이 아니라는 자존감....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젊은 예술가들이 부디 잊지 말길... 그 마음이 희망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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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한 해 보내셨습니다. 새해 인사 올립니다. 올해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이곳을 지옥으로 단정하지 마십시오. 미래의 몫으로 더 나빠질 여지를 남겨두는 곳은 지옥이 아닙니다. 종말을 확신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상상력은 최악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등 뒤로 멀어지는 모든 시점을 우리는 그나마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만 과거와 작별하고 미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는 조만간 이 순간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연초마다 마음을 들뜨게 하던 나긋하고 아름다운 거짓말의 목록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진짜로 치유하는 희망의 언어를 들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습니까? 천냥 빚을 탕감해준다는 말 한마디의 가능성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면, 대통령의 신년사에 귀기울이십시오. 작년의 첫 날 대통령은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의 기반을 다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국민소득은 4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고, 1인당 부채가 소득을 앞질러 3만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그걸로 부족하다면 작가인 제가 더 시도해 보겠습니다. 이 정도면 어떨지? 로또를 사십시오, 새해에는 모두 1등에 당첨될 것입니다!
잠시 청년들에게 물어 주십시오. 줄줄이 늘어선 초록색 빈 병으로 어지럽혀진 대학가의 술집 취객에게, 외로움을 둘 공간조차 없이 비좁은 고시원의 세입자에게, 자정의 어둠을 몇달째 지켜온 무표정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이 나라에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 주십시오. 그들은 서슴없이 멸망을 입에 담을 것입니다. 감히 멸망을 말하지만 악의조차 감지되지 않는 평온한 목소리에 당신들은 경악해야 합니다. 멸망은 저주나 농담이라기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외치던 백범의 소원처럼 간절하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으며, 불공평한 생존보다는 공평한 파멸을 바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국호를 망각한 백성들처럼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릅니다.
어쩌면 멸망이 우리를 덮치도록 두는 대신, 우리가 먼저 멸망의 모습을 선택할 때가 도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멸망을 고민하는 논쟁에 참여할 자격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한국은 위기가 아니다”거나 “혼란을 야기하는 세력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격앙된 반론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20여년 전, 똑같은 문장들이 신문의 표제로써 조국의 미래를 진지하게 점치는 논쟁을 극적으로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불과 몇달 뒤 외환 위기가 들이닥쳤을 때 비로소 누가 진짜 애국자인지가 명확해졌습니다. 다만 그때 경험한 것은 멸망이 아니라 추락이었고 해법은 분명했습니다. 금붙이를 녹이고, 외화를 뒤져 내놓고, 회생 가망이 없는 회사의 제품과 주식을 구입하는 운동을 청년들은 지지했습니다. 이 나라는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청년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가난과 전쟁과 경제 위기를 이 나라는 극복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맞닥뜨린 갈등은 너무나 낯선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진짜 위기인지 철부지의 투정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어 버렸습니다. 역사는 세대를 건너뛴 채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한 세대가 통째로 삶을 포기한 불모지에서는 누구도 살 수 없습니다. 멸망이 공공연하게 선언된 땅을 독차지한 외로운 승자가 된다한들 개선행진조차 불가능할 것입니다. 지긋지긋한 패배자로 남기보다는 차라리 멸종을 바라는 젊은이들이 환영의 인파를 조직해줄 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망한다면 신라와 고려와 조선이 망하듯이 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역사가들은 망국일을 정하지 못한 채 이렇게 선언할 것입니다. 그 나라는 증발했다!
언어로 달래는 처방전은 위약으로나마 효과를 다했습니다. 누워버린 말에게는 질책도 들지 않습니다. 청년들의 정신이 그 어느 시대보다 가난하므로, 사라진 것은 헝그리 정신이 아닙니다. 정작 사라진 것은 가난의 필요성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부유해지는 나라에서 더욱 가난하게 살기를 강요받는 국민이 된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저 착각일까요? 이 나라는 꾸준히 성장하고 있지만, 대기업 매출액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을 뿐 기업소득과 개인소득의 격차는 점점 벌어져 OECD 최하위권에 머뭅니다. 오로지 기업만이 암세포처럼 무한히 자라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봅니다. 국민소득이 30만 달러를 돌파하고, 세계 100대 기업 명단이 모두 대한민국으로 채워진들, 우리 각각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도 살 수 없는 높다란 탑을 쌓아올린 뒤 먼 발치에서 그 웅장한 풍채를 감상하는 게 이 나라 경제의 목표였습니까?
5년 전 저는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국 청년들의 삶을 취재했습니다. 대학생인 전태일들은 모두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마련하는 중이었고 그 가운데 두 명은 등록금 부담으로 휴학중이었습니다. 새해를 앞두고 전국의 전태일들에게 다시 안부를 물었습니다. 전주의 고시생 전태일은 끝내 대학을 자퇴했고, 고시에 낙방한 뒤 여태껏 아르바이트를 해왔습니다. 위험한 일이라도 돈이 벌린다던 거제도의 선박공 전태일은 사고로 팔이 부러져 퇴사했고, 아직 식당 주인의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거꾸로 영화감독이 꿈이라는 부산의 극장 직원 전태일이 조선소에 들어갔습니다. 고용주인 인천의 유통업자 전태일은 오히려 자신이 약자라고 항변했었습니다. 그가 운영했던 편의점은 건물주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전태일은 우리 모두의 이름인가 봅니다. 착취의 삼투 현상은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천의 전태일처럼 가게와 권리금을 빼앗긴 홍대 인근의 상인들은 세입자 모임을 만들어 건물주와 싸우고 있습니다. 같은 처지의 칼국수집을 응원하다 만난 홍대 인근의 젊은 음악가들은, 임대료 압박으로 상업화된 클럽을 떠나 음악조합을 결성했습니다. 소속 음악가 한받씨는 리어카를 끌고 길거리 순회 공연을 벌입니다. 홍대를 벌써 등진 작곡가 김인영씨는 방송 음악을 만듭니다. 사정이 절박한 젊은 작곡가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작곡을 할 줄 모르는 음악감독은 그녀의 음악을 사서 자기 이름으로 방송에 내보낼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예술가들만의 문제일까요? 이장균씨는 한의사가 된 뒤 5년 동안 제대로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그는 길목과 성격과 직종을 탓하다 마침내 사회구조를 탓하게 됐습니다. 의사 김주영씨는 식사가 끝난 뒤 작가인 저에게 계산을 부탁했습니다. 학자금 대출 수천 만원이 빚으로 남아있다는 것이었습니다. 20대 중반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던 변호사 김상현씨는 외국어를 배워 해외로 취직했습니다. 대기업 10년차 직원 최한영씨는 월셋방에 살며 여전히 첫 차를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부채를 감당할 배짱이 없다면 이 시대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청년들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누구와 살지 결정하는 것으로는 어디서 살지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집 갖기’ 로 검색되는 기사의 대부분이 90년대에 쓰였다는 사실을 눈치채셨습니까? 혹시 검색해볼 의미조차 없어서 모르셨나요? 신문 경제면은 이제 그런 주제를 다루지 않고, 은행들은 그런 이름의 예금 상품을 없애고 있습니다. 어떤 상품의 수익으로도 집값을 따라잡을 수 없음이 명백해졌으니까요. 부동산은 투자 수단으로서 매력을 잃기 전에 주거 수단으로서 기능을 잃었습니다. 출근길 차창 바깥으로 보이는 빽빽한 주택들이 다 누구의 것인지 청년들은 신기해 합니다. 누군가 벌써 세상을 남김없이 소유했기에, 집을 갖는 게 왕국을 갖는 것이나 다름없어진 걸까요? 생활의 삼대 요소인 의식주의 한 축은 완전히 붕괴했습니다. 주거 빈민 생활이 당연한 삶의 양식이 되었기에, 이 시대는 가난을 유례없이 엄격하게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생활을 영위할 집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중산층이라는 단어는 사어처럼 더는 쓰임새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공허한 정치 구호처럼 오로지 ‘중간시민’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중간이란 장소가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을 향한 환상을 포기 못해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덧없는 치유의 주술을 그만 거두십시오. 지금 즉시 변화에 동참해 주십시오. 우리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 사정이 나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