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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컴퓨터공학, 경제학 전공을 한 청년. 딱히 더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더 못 사는 것도 아닌 대한민국 중간인 보통 사람. 그래도 보통 사람의 의견이 더 소중하다고 믿는 시민. 현재 암컷 고양이의 집사(?)이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전 세계를 덮치면서 생긴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혐오주의였다. 경제적 빈곤 앞에서 자신들과 동등하거나 또는 더 잘 사는 타민족에 대한 혐오는 정치권력으로 비화되었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나치즘이였다. 나치는 1945년 패망하였고, 정치권력으로서 제노포비아(Xenophobia : 외국인 혐오주의)는 유럽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최근 유럽을 보면 이러한 외국인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권력이 재부상하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진짜 핀란드인당’이 제 3당, 노르웨이에서는 국수주의를 표방하는 노르웨이 진보당이 이미 2009년에 제 2당이 되었다. 거기다 스웨덴에서조차 극우 정당인 민주당이 원내에 진입하는 결과는 유럽 사회에서 극우와 민족순혈주의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 주요국가인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정치인들마저 다문화주의 포기를 선언(일종의 책임전가이다)했는데, 이런 관점에서 7월 22일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베링 브레이빅’의 참혹한 반 이민주의 테러는 사실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유럽의 극우세력이 득세하는데에는 반 이슬람으로 대변되는 문화적 충돌과 같은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다름 아닌 경제적 원인에 기인하고 있다.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 유럽 경제 또한 위기를 맞았고, 그에 따른 고용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는데, 경제적 호황에서는 부각되지 않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진 셈이었다. 불황 거의 대부분의 경제적 선진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은 가장 값 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력난을 해소하는데 일정부분 기여를 하지만 반대로 임금을 동결하는 역할도 한다. 문제는 호황이 아닌 불황에서 표출된다. 호황일 때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값 싼 노동력 때문에 수출 경쟁력 강화와 경제 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그에 따른 문화적 갈등은 대중에게 크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불황일 때에는 위에서부터 정리 해고된 원주민 노동자들의 갈 곳을 막아버리는 역할을 하게 되면서 계층간 갈등이 강화되는 것이다.
특히나 북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표면적 갈등이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이유는 해당 국가들의 인구수가 적다는 공통점에서 출발한다. 유럽의 주요 강국들은 최소 3천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국가들에서 이민자들은 여전히 소수에 해당한다. 하지만 북유럽 국가들의 인구는 가장 많은 스웨덴이 908만 명이며, 노르웨이와 핀란드는 각각 464만 명과 546만 명 정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규모 이주민들의 등장은 해당 국가의 전통 문화를 흔드는 결과로 이어지며, 그에 대한 반발이 더 강해지는 것이다. 테러 용의자인 ‘베링 브레이빅’의 명분 또한 바로 이런 문화적 경제적 방어기제에 의존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이미 이주 노동자들은 단순히 반 다문화의 감정보다 안보적 문제 의식이 더 큰 것이다. ‘베링 브레이빅’의 무모한 행동이 제노포비아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경고를 할 수 있지만, 필자가 예상하기로는 그렇다고 북유럽에서 진행되는 반 다문화주의가 멈춰질 것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경제적 갈등과 안보적 위기 의식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서 오늘날 우리나라는 유럽과 사정이 많이 다를까? 필자는 유럽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다문화주의를 정책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는 민족주의와 순혈주의를 핵심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당장 국사 교과서만 펼쳐보아도 우리의 역사는 혈통 중심의 역사로 기술되어 있다. 한마디로 대외적 정책과 실질적 교육은 다른 방향인 것이다. 필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관을 비판할 생각은 없지만 단재 신채호의 역사관은 철저히 실체 없는 국가에서 구심점을 만들기 위한 민족주의 중심의 역사 기술을 강조했다. 일제 강점 당시에는 이것이 독립심을 고취시키고, 민족 자긍심을 유지하는데 효과적이었겠지만 다문화를 표방하는 단계에서는 혈통 중심의 역사관은 당연히 아킬레스건이 된다. 스스로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편이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공교육 체계에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학생들에게 주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 상황은 갈등구조에 대해 유럽보다 더욱 취약하다. 유럽은 블루컬러에 대한 노동 복지가 보장되어있고, 차별도 적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가장 노동시간이 긴 국가 중 하나이며, 화이트 컬러와 블루 컬러 사이의 임금 격차도 상당하다. 또한 두 시장을 불문하고 평균 임금도 일인당 국민소득이 비슷한 국가들에 비해 열악하다. 한 마디로 고강도 저임금 노동시장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3D 업종은 구인난이 지속되고, 사무직은 구직난이 계속되는 이유도 이러한 임금 격차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는 내국인이 담당하지 못 했던 3D 업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내국인들에게 임금 동결의 원인과 노동 복지 개선의 저해 요소로서 지목되었을 때이다.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제노포비아의 잠재 가능성이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는 것은 외국인 노동자 때문은 아니다. 재벌 중심 경제에서 기업 간 불공정 거래가 만연한 탓이 더 크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원인 분석은 대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서 극단적으로 분노가 쌓여있는 상황을 한 번 가정해보자. 여기서 가장 손쉬운 비난 대상은 어디일까? 서민들의 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경제적 낙수효과를 차단한 대기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중들이 대기업을 대상으로 노동 복지와 고용 촉구를 위한 정치적 힘을 행사할까? 아니면 외국인 노동자들일까? 안타깝지만 손쉽게 표출되는 감정은 다름 아닌 후자를 향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제일 만만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보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낙후된 국가 출신들이다. 거기다 우리와 이해관계가 적고, 소수이다. 이보다 좋은 먹잇감은 없다. 거기다 화룡점정으로 한국인의 상당수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정서를 지니고 있다. 사실상 우리는 반 다문화주의의 시한폭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정치인들 또한 이러한 점을 십분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 진실을 알고 있지만 선뜻 대기업을 대상으로 불공정거래를 시정하고, 임금을 현실화하며, 근로 복지를 강화하는 움직임은 사실 정치인 개인의 입장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결정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외국인은 참정권이 없고, 표심을 좌우하는 대상도 아니다.
가장 안정적인 지지를 얻는 방법이 다름 아닌 국수주의를 자극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기업의 지위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공고하다. 외국인 노동자로 인한 원가 절감의 혜택은 실제로 대기업들이 누려왔지만 정작 반 다문화 정서가 확산되는 상황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주요 주체인 중소기업의 고용 정책과 외국인 노동자들 개인의 문제로 바뀐다. 혹자는 한국의 다문화는 유럽의 노동 이민과 달리 국제결혼으로 인한 것이므로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이것은 진실과 다르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상당수의 국제결혼은 결과적으로는 인신매매와 다름없다. 그래서 다문화 가정이 다문화에 대해 가장 관용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이주 여성에 대한 폭력과 야반도주로 얼룩져있다. 다문화 가장의 상당수가 사랑과 믿음 그리고 관용으로 결합된 단위가 아닌 경제적 이해관계로서 결합된 단위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우리의 다문화정책이 잘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엉망 그 자체이다. 진실은 합법적 노동에 필요한 한국 국적과 이주 여성들의 몸값 거래를 잘 포장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문화와 문화가 융합되기 보다는 일방적 강요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대중들에게 크나큰 반감(다문화가정에 제공되는 복지가 한국인 차상위 계층의 복지보다 우선되는 경우가 실제로는 적지만 오히려 부각되어 인식된다)을 사고 있다. 물론 정책 입안자들은 믿고 싶지 않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반 다문화 정서가 폭발하는 순간이다. 그때가 되면 다문화주의의 당사자들인 외국인 출신 노동자와 이주 여성들은 표적이 된다. 대중들이 진실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그야말로 ‘약자’로서 도움이 없는 탄압을 받는다. 바로 다수의 한국인에 의해 외국계 이주민들이 전면적으로 차별과 억압을 받는 상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는 애국으로 둔갑한 극우를 극복할 내성이 한국의 시민사회에 존재하는지 조금 의문스럽다. 노르웨이의 이야기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우리는 더 위태롭다. 우리나라의 정당은 사실 유럽의 기준에서는 그야말로 극우주의와 기회주의 그 자체이다. 경제적 이유로 다문화주의를 채택했지만 정치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책임을 전가할 준비가 되어있다. 만약 우리사회에서 반 다문화주의가 고개를 들게 된다면 소수 외국인 노동자들을 지켜주는 것은 시민사회가 가진 진실의 눈 밖에 없다. 아마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과연 우리가 그렇게 어리석은 일을 할까?’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반 다문화주의는 그나마 성숙된 시민 의식을 지닌 독일, 프랑스, 스웨덴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다. 본래 관용이라는 것은 자신이 여유있어야만 가능한 미덕이다. 경제적 불황은 우리에게서 여유를 잃어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쉽게 분노하게 만든다. 또한 분노는 쉽게 대중을 선동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정책은 과연 올바르게 진행되고 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우토야섬의 메세지는 중요한 교훈이 될 수 있다.
같은 날 한겨레닷컴에서
정재승 카이스트 바이오/뇌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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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스웨덴은 한때 유럽 제국주의의 정신적 메카였으며, 그 한복판에는 스웨덴이 낳은 가장 유명한 식물학자 칼 폰 린네가 있다. 그는 1730년대 스톡홀름 근교에 있는 웁살라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뒤, 동식물학 체계의 표본이 된 <자연의 체계>(1735)를 저술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린네가 사용한 종과 속의 이명법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분류하는 체계를 만든 린네는 유럽이 제국주의로 팽창하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린네의 자연체계법을 바탕으로 과학탐사대를 조직했고, 그들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가 동식물을 채집해 본국으로 보냈다. 또 그곳의 원주민들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18~19세기, 식민지에서 온 온갖 동식물과 원주민들을 전시했던 식물원과 동물원이 탄생한 것도 바로 그 무렵이다. 린네의 체계 안에선 인간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는 네발 달린 짐승 중 ‘호모’(Homo)라는 카테고리에 분류되었고, 백색 유럽인, 적색 아메리카인, 황색 아시아인, 검은색 아프리카인이라는 하위 카테고리 안에 나뉘고 분류되었다.
린네의 동식물 분류체계는 유럽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의 과학적 토대가 되었지만, 이에 대한 가장 깊은 반성이 이루어진 곳도 바로 이곳 스웨덴이다. 종의 다양성이 자연의 생존력이듯, 인간의 다문화는 그 자체로 축복이라는 개념이 스웨덴을 중심으로 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로 퍼져나갔다. 린네의 학문적 고향인 웁살라대학이 지금은 세계 평화와 분쟁을 연구하고 평등주의자들을 배출하는 데 가장 헌신적인 곳이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스웨덴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웃나라 노르웨이에서 왜 불행한 테러가 발생했을까? 불행하게도 ‘관용의 반도’에도 극우주의자는 있는 법. 이교도를 배척하고 다문화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백인우월주의자가 노동당이 주최하는 청소년캠프에서 테러를 저지른 것이다. 그가 꿈꾸는 낙원으로 ‘단일문화를 유지하고 가정중심주의가 남아 있는 곳’이라며 우리나라를 들먹였다고 하니 부끄럽고 가슴 아프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타 문화에 배타적인 우리가 스칸디나비아반도의 극우주의자가 꿈꾸는 지상낙원이었다니 말이다.
첫댓글 좋은, 유익한, 잘 쓴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북구의 문화와 오늘의 현실,, 우리나라에 비추어 생각케 한 귀하고 필요한 글입니다. 저는 1970년대 후반에 스웨덴에 간 적이 있습니다. 나도 북구의 인간들을 좋게만 보았는데 .. 옛날 애급의 폭군이 히브리인들을 학대한 출애급의 이야기.. 오늘날도 변하지 않았군요.
심지어 다문화 사회에서일지라도 인종문제를 '시한폭탄'으로 보는 식자들이 많습니다. 피부색, 용모, 행태에 기초한 '다름'에 대한 원초적 이질감/혐오감, 우열의식이 언제든지 밖으로는 증오의 텃밭이 되기 때문입니다. 글쓴이 임형찬도 지적했듯이 경제가 어려워지면 곧바로 이방인들에게서 희생양을 찾는 난폭한 정서의 회로로 연결되고요. 향강 님이 걱정하듯이 그 점에서 한국에 시집온 외국여성들과 이주 노동자가 백만 명을 훌쩍 넘긴 우리 사회도 경각심을 가져야 할 줄 압니다. 돌이켜 보면 21세기의 인류, 적게는 서구 문명사회는 이 따위 '피의 신화'쯤은 저만치 날려보냈으리라 보는 게 상식일 터입니다.
헌데 사민주의 전통이 강하고 평온했던 노르웨이에서 이런 증오의 씨앗이 잠복해 있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며칠 전 오슬로 광장에 모였던 15만의 시민들이 치켜들은 장미꽃을 보게 됩니다. 스톨겐부르크 총리가 대답했지요. 더 많은 민주주의와 개방성, 인간애가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요. 또 다른 테러위험에도 지금처럼 경찰들이 평시에 무장하지 않고 시민권의 가치를 우선하겠다는 노르웨이 정부와 시민들께 감동합니다. 노벨 평화상을 주는 나라가 거저 이룩한 게 아니었음을 웅변해주더군요.
열린 사회와 관용의 정신이야말로 참된 인간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좀 오래 된 얘긴데요. 1980년대 쯤 프랑스에서도 외국 노동자 문제가 터져 나왔었죠. 또 그제나 이제나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이민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 왔는데... 그때 여러 지식인들과 파리 시민들이 쳐들었던 구호-"우리는 모두 이주민이다."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터졌을 때 르몽드 지가 말했지요.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 윗글에서 정재승도 말합니다.-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 여기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정신의 소유자다. 하지만 전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