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使者)의 방문
그날 동기 모임은 전례없이 높은 참석율을 기록했다. 희수(喜壽)를 지나 산수(傘壽)가 내일인 늙은이 22명이 회원인데 6명이 외국에 살고 있거나 요양원에 있거나 암으로 투병 중이거나 아주 소식이 돈절되었고, 최대 16명이 참석이 가능한데 그 중 11명이나 참석했으니 말이다.
귀가 어두워지면서 목소리가 커진 우리 친구들은 대통령 탄핵을 화제로 갑론을박하면서 막걸리와 소주를 곁들인 점심을 먹었다.
회비로 식대를 계산한 다음 식당 입구에서 우리는 헤어졌는데 3호선 지하철을 타려고 개찰구에 이르러 보니 나와 P군 그리고 C군만 일행으로 남게 되었다. 셋은 오후 한담을 종종 즐기는 동아리였기에 나의 제안에 따라 셋은 카페에서 5천 원이 넘는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아까 모임에서 미진하게 행했던 인사치레를 제대로 행한 다음 내가 화두를 던졌다.
“오늘 신문을 보니까 무함마드 깐수 정수일 교수가 아흔 한 살로 돌아갔더구먼. 그런데 그 양반 참 언어 재능이 대단하데. 12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꿈도 아랍어로 꿀 정도였다네. P군! 자네만큼 재능이 뛰어났다 보아.”
겸손한 성품인 P옹이 손사래를 치며 겸양의 말씀을 했다.
“천만의 말씀이야. 나야 주재원 생활 하면서 익힌 외국어 영어, 독어, 서반어어, 그리고 중국어, 그 정도일 뿐이야. 조족지혈이지.”
C군도 참여했다.
“5개 국어 능통이면 대단한 거지 난 이적지 영어 회화 하나를 붙들고 있어도 마스터 못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그 양반 인생 이력서가 어떻게 되는 거야?”
C의 물음에 나는 신문에서 읽은 내용을 간략히 전했다.
“조선족으로 연변에서 태어나서 중국인으로 북경대를 다니고 중국 외교부에 들어가 중동 지역 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네. 나이 서른이 되어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 인민이 되어 학교에서 실크 로드 교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쳤대. 그러다가 간첩으로 남파되었는데 레바논 출신 역사학자로 위장하고 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수로 가르치면서 간첩 활동도 했다가 붙잡혔지. 4년간 복역하고 나와서 한국인 역사학자 정수일 교수로 살은 거야.”
“파란만장한 생애로구먼.”
“그런데 무함마드 깐수 시절이었겠지만 밤에 꿈도 아랍어로 꾸었다네. 사람이 꿈을 꿀 때 쓰는 언어가 모국어라던데 그럼 그 사람 모국은 중국이 아니고 아랍인가?”
내가 의문을 제기하자 P옹이 분석적으로 어프로치했다.
“꿈에 미국인을 만나서 영어로 말하는 건 당연하고 모국어 운운에 해당되지 않지. 꿈에 아랍어로 말했다는 건 혼자 생각할 때에도 아랍어로 생각했다는 의미일 텐데 아랍어가 모국어 수준이 되도록 훈련하고 세뇌했다는 것이겠지. 무서운 간첩 교육이야.”
“나는 꿈속에서는 평소에 되던 영어도 더 안 되던데 P공 자넨 꿈속에서도 외국어 회화가 잘 되나?”
“난 평소와 별다르지 않던데. 그리고 자네가 자꾸 꿈 이야기를 해서 생각이 났는데 말이야. 며칠 전에 내가 아주 묘한 꿈을 꾸었는데, 아니 생시인 지도 모르겠는데 그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지.”
< P군의 이야기>
요즈음 우리나라 아파트들 이름이 외국어를 집어넣어서 아주 기억하기 어려운 게 많잖아. 뭐 엘리움 로얄 카운티니 아이유 쉘 메가시티니 스카이 스테이니 우습지도 않지. 시어머니가 못 찾아오게끔 일부러 어렵게 지었다고들 하지. 이 꿈에서도 그와 비슷한 착오가 생겼어.
어느 날 새벽녘, 비몽사몽간에, 그러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어렴풋한 중에 죽음의 사자가 날 찾아왔어. 갑자기 서늘한 한기에 눈을 떠 보니 방은 아주 깜깜하지 않았는데 그 박명 속에 수도원의 수사가 입는 검은 색 후드가 달린 긴 로우브가 내 앞에 버티고 서 있더군. 얼굴과 팔이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빈 채 어둠만이 가득했네. 별로 겁이 나지도 않아서 누구냐고 물었지. 그래서 이런 대화가 오고 갔네.
"누구요, 당신? 사이보그요, 휴머노이드요?"
"그대의 단잠을 깨워서 미안하다. 난 사이보그도 휴머노이드도 아니며 그 구별도 할 줄 모른다..나는 태양의 신, 케찰코아틀이 보낸 사자다. 너는 생명의 원천인 심장을 케찰코아틀께 바칠 공양물로 선택을 받았다.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옷을 제치고 네 가슴을 내보여라.”
어느 새 그 로우브와 나 사이에 날카로운 단도가 둥둥 떠있었는데, 약간 주눅이 든 채 나는 항변했지.
“아니 잠깐 기다려요! 여긴 한국인데 왜 당신은 서반어어로 말합니까? 내가 멕시코에 산 적이 있어 이렇게 서반어어로 응대하고 있지만 여기 한국에서 케찰코아틀이라니 말이 됩니까? 뭔가 잘못이 있는 거 아닙니까?”
“절대 잘못이 있을 수 없소. 당신은 서울시 구로구 디메언 아파트에 사는 라울 산체스요. 나는 당신 라울 산체스의 심장을 원하오.”
순간 나는 일생일대의 기쁨을 맛보았네. 이런 조크가 있지. 구소련 시절 한 밤중에 KGB가 찾아왔지. “이반 세르게예비치, 간첩죄로 널 체포한다!” “동무들! 저는 표도르 알렉세예비치입니다. 이반 세르게예비치는 바로 옆집입니다.” 이 표도르가 느낀 기쁨과 안도감을 내가 느꼈지.
“선생! 난 한국인 아무개요. 라울 산체스는 여기 살지 않아요. 잘못 찾아오셨군요.”
“아니 여기가 109동 맞지오?”
“예! 109동입니다.”
“이 집이 10층의 1호가 맞지요? 대문에 101호라고 써있는 걸 내가 똑똑이 봤다오.”
“여기는 1층의 1호입니다. 10층 1호는 1001호를 찾아가야지요. 여기는 그라운드 플로어인 줄 오면서 보시지도 못했습니까?”
“난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그건 몰랐소.”
“하마트면 땅에 헤딩하실 뻔 했네요.”
“당신과 농담할 시간 없소. 그럼 잘 있으시오.”
그 로우브가 없어진 다음 나는 긴장이 확 풀려서인지 쏟아지는 수마를 견디지 못하고 잠으로 굴러 떨어졌네.
아침에 잘 일어나서 조반을 먹는데 집사람이 식탁으로 다가와 입술을 쫑긋쫑긋 달싹이더군.
“뭔데? 할 말 있어?”
“당신 식욕 떨어질지 모르는데.”
“그래도 말해 봐!”
“저 위 10층에 사는 서양 사람이 밑으로 떨어졌대요. 조금 전에 실어갔어요.”
내 손이 나도 모르게 떨려 쥐고 있던 잔의 커피를 흘렸다네. 그래서 난 짐즛 태연한 척 일부러 헛소리를 지껄였지.
"피가 흔건했겠지. 일찍 알았더면 아페리티프 한 잔 떠다가 마셨을 텐데 아쉽다."
"에이! 끔직하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애들처럼 드라큘라 시늉을 내고 참."
정말 죽음의 사자가 다녀간 걸까, 아니면 꿈이었고 추락사는 우연의 일치일까? 그 후 아내는 그 사람이 남미사람이라는 소문을 나에게 전해 주었는데, 그러면 나는 그의 국적을 확인해 보아야 할까, 그 사람의 심장이 없어졌는지 알아보아야 할까?
후기
그로부터 두 달 후 우리들은 다시 모임을 가졌다. 화창한 봄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P군의 얼굴은 해쓱하게 보일 정도로 볼살이 빠졌고 무엇보다도 염색하지 않은 머리칼이 하얗게 백설이 내린 듯하여 예전과 다른 상노인의 모습이었다. C군과 나는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 P군에게 그간 별일이 있었는지 캐물었다. 쓰디쓴 웃음을 웃던 P군이 다음과 같은 후일담을 털어놓았다.
<다시 P군의 이야기>
호기심은 아홉개의 목숨을 가진 고양이까지 죽인다는 옛말이 하나 그르지 않더군. 자네들 전에 캐찰코아틀의 사자가 날 찾아왔다는 걸 기억하지? 그 때 그냥 끝냈으면 좋았을텐데 나란 인간이 호기심이 많아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개망신을 당했다네.
그만 경찰서에 가서 죽은 서양인이 멕시코인 라울 산체스인지 그리고 가슴에 칼로 찔린 상처가 있는지 물어보았다네. 바보 같은 미친 짓이었어. 형사가 묘한 표정을 짖더니만 이름과 상처는 공표한 적이 없는데 선생이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하더군. 그 순간 나는 살인사건의 프라임 서스펙트가 되었네. 난 꿈에서 그 사람이 죽는 걸 보았다고 일종의 신비한 예지몽을 내가 꾸었다고 주장했네. 그러나 경찰은 그런 변명을 쉽사리 납득해 주지 않았어. 나는 용의자로 입건되었고 장시간 심문을 받았네. 다행히 구속은 면했지만 집안이 온통 발칵 뒤집혔지. 경찰은 아무리 수색을 하고 야단법석을 떨었지만 아무런 물증과 증인도 확보하지 못하자 결국 나를 증거불충분을 사유로 검찰로 넘기지 못하고 미제사건으로 처리했다네.
그러고 나서도 내가 살던 그 아파트에서는 별의 별 소문이 다 떠돌았다네. 마약 카르텔 범죄라는 둥, 나와 독신의 산체스가 그렇고 그런 관계였고 괴한의 침입 흔적이 없는 것은 라울이 나에게 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라는 둥, 어쩌면 내가 베란다를 타고 10층까지 올라가 침입했을 지도 모른다는 둥 별 뒷다마 까는 소리가 낭자했다네. 내가 내일 모래면 팔십인데 무슨 동성애 관계고 베란다를 기어 올라가나, 그럴 몸이라면 정말 좋겠네. 할 수없이 그간 해왔던 머리 염색을 그만 두었지 그랬더니 늙은이로 보아주는 빛이고 동성애와 거미노인 이야기는 없어지더군. 그래도 정나미가 떨어져 아파트를 팔고 이사를 했다네. 그러고 나니까 이렇게 상늙은이 꼴이 되었지 뭔가. (끝).
첫댓글 재미있는 글이네요.
모임에서 막걸리와 소주를 섞어 많이 마셔서 취했던 터라 귀가 후 일종의 술주정으로 쓴 글입니다.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문재는 여전하시네요. 계속 재밌는 얘기 들려주세요. 그렇지만 출판은 n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