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의 실패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의 주요 구성원이 치안 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조선어학회 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근거로 일제 당국은 조선어 말살을 더욱 강하게 억압하였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한국어를 쓸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조선어를 일상생활이나 신문 등에서 완전히 빼낼 수는 없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1921년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조선어 능력 시험에 합격한 직원을 승진과 급여 면에서 유리한 대우를 해주었다.
그런 와중에도 학교에서는 모든 수업을 철저하게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1943년 당시까지도 일본어를 해석하는 조선인은 1,000명 당 221.5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강요해도 80%의 조선 사람들이 일본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성씨와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억압해도 조선 사람이 일본 사람이 될 수 없고 일본 사람으로 만드는 일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2. 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조선말로 이야기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에게 발각되어 취조를 받으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일본 경찰은 취조 결과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사람이 서울에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였다.
같은 해 9월 5일에 정태진을 연행, 취조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로써 일제는 3.1 운동 후 부활한 한글 운동을 폐지하고, 조선 민족 노예화에 방해가 되는 단체를 해산시키고 나아가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을 모두 검거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한글 운동이 3.1 독립운동 뒤에 다시 일어나면서,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 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민족의 사전 편찬의 바탕이 되는 [한글맞춤법통일안] . [표준어사정]. [외래어표기] 등을 제정하는 등 말. 글의 연구 및 정리, 보급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두고 조선 민족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해 갔다. 1936년에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 을 공포한 후,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회원을,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 회원을 검거하였다.
조선 민족사상을 꺾고 나아가 조선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여 독립 운동가를 언제든지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이처럼 일제 탄압이 숨 막히게 조여들자 조선어학회는 사전의 편찬을 서둘러 1942년 4월에 그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를 하였다.
그해 10월 1일, 첫 번째로 이중화. 장지영. 최현배 등 11명을 서울에서 구속하고, 잇따라 조선어학회에 관련된 사람들을 검거하면서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체포되었다. 이들 모두를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몰았다.
기소된 사람은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되었다. 같은 해 12월 8일에 이윤재가, 1944년 2월 22일에는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장지영. 정열모 두 사람이 공소 소멸로 석방되어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 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 이중화.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이언징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가 각각 언도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자 8월17일 풀려 나왔다.
첫댓글 해방을 한해 앞두고 일제시대 함흥형무소에서 돌아기신 이윤재 선생님 한징이선생님
옥고를 치룬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33인의 선각자를 생각합니다.
이 나라는 남북한 말을 한마디도 합의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통일의 날이 멀지 않았는데 말에서 대 혼란이 일어날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말로 통일해야 합니다.
한글을 지키는데도 많은 선각자들의 희생과 헌신과 피 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독립운동과 궤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한글 지키기 위한 운동과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모든 서적과 SNS에
한문으로 꽉 찬 정보를 습득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위에 올리신 글을 읽으며 한글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습니다.
벌 키우는 용어도 가급적 한글을 사용해야 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우리말 쓰기와 함께
우리 말을 부드럽고 품위 있는 말로 가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꽃도 곶이라 하고 칼은 갈이라 했습니다.
몽고병란과 임진왜란을 거치며 우리 말이 거칠어졌고
일제시대와 6.25를 겪으며 더욱 거칠고 센소리가 되었습니다.
이재는 외래어 비속어까지 넘쳐나고 있습니다.
저는 사이ㅅ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징마비 기차길이면 되는데 장맛비 기찻길로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말은 가슴 속 마음의 표현입니다.
@한결 (예천) 맞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말에
'ㅅ' 이 붙어서 표현이 거칠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장마비,기차길, 진도개,세수대야,등 부드러운 표현을
왜 강한 액센트로 발음하게 바꾸어 거칠게 표현하는지
참 이상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