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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에 교섭하여 백방으로 설득한 결과 소시적에 한번 올라본 일이 있다는 노인 한명을
구하였습니다. 제주를 출발하여 도중에 노숙을 하고 다음날 상봉에 오른즉 야생우마는
떼를 지어 달리고, 사방은 구름으로 덮혔으며 번갯불이 번쩍이는데 과연 황홀한
광경이었습니다.
백록담 부근에는 여기저기 야생우마의 골격이 널려져 있고 아름다운 고산식물들이 만개해
있었습니다.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야생하는 말은 사람이 몰아와도 먹이를 먹지 않아 사육할
수가 없다고 하며 소는 몰아다 길을 들이면 되는데 고기는 나무껍질 씹는 것 같아 먹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곳의 특이한 현상은 집에서 사육하는 소도 고삐가 없고 그대로 방목을 한다고
합니다. 제대로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다 밤이면 집에서 찾아온다고 하며, 산에 갔다가 방목하는
것은 봄에 흩어놓고 가을에 주인이 높은 바위 위에 올라서서 부르면 몰려온다고 합니다.
참으로 알쏭달쏭한 일이지요. 현재에도 제주도 삼무(三無)의 하나로는 도둑이 없는 것을 들 수
있다하니 있을 법한 일입니다.
동혈(洞穴, 바위 밑)에서 쉬는데 밤부터 폭우가 나리기 시작하여 바위 밑으로 물이 몰려 닥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오전 6시에 하산키 시작하였으나 안내인이 길을 잃어 갈팡질팡하다보니 1,600미터의 초원에서
오후 7시가 되었습니다. 한라산의 산우라는 것은 우리들이 보통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병의 물의
쏟는 것 같은 폭우이며 몇 시간 동안에 길이 모두 강으로 변하여 길을 잃게되며 이곳의 바람이란
사람이 날려 갈 정도이고 운무가 끼면 2미터만 떨어져도 일행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것이 흔히 있는 조난사고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공포심을 느끼며 한사코 방향도 없이 무릎 위를 넘나드는 물을 헤치며 밑으로만 내려갔습니다.
9시경에야 겨우 토막 속에서 비쳐 나오는 불빛을 발견하고 함성을 올렸습니다.
이곳에서 횃불을 마련하여 목적지로 떠나는 도중 또 하나의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계곡에 물이 대창하여 건늘 길을 잃고 방황하던 끝에 천행으로 큰 나무가 쓸어져 도랑을 걸치고
칡과 다래넝쿨이 엉켜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까스로 도하작전에 성공하여 밤 12시경에야 목적지인
표고 재배하는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이때의 한라산 중턱의 표고재배란 유명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본산(本山)의 중턱(溫帶)의 삼림을 형성하고 있는 서-나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표고재배로 인하여 삼림은 완전히 절단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구사일생으로 표고장에 돌아와서 굶주린 창자를 채우던 밥맛이야말로 꿀맛 같았고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해방이후에 몰지각한 도민들이 계속하여 외화획득이라는 미명 하에 모조리
베어서 오늘에는 팔뚝만한 서-나무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제주도하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김녕(金寧)의 뱀굴(蛇窟)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1954년에 갔을 때 일입니다.
이때에는 6·25이후 4·3공비사건을 치른 후라 동리마다 현무암으로 성을 쌓고 문을 닫아 고대 로마의
도시국가에 온 것 같은 감을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당시 김녕중학교 교장 전문태씨의 호의로 뱀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앞에는 풍우침식된 초라한 비석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재미있는 전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씨의 설명에 의하면 옛날에 이 굴에 뱀이 한 마리 살고 있었는데 성주는 매년 처녀를 하나씩 갖다
바쳐야 풍년이 들고 도내가 평안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비석은 이 뱀을 처치해준 성주를 기념하여 도민이 세운 것이랍니다.
굴에 들어스니 서늘한 공기가 온 몸에 스며들어 삼복에 달은 몸을 식혀주었고 박쥐들이 사방에서
공격해 왔습니다. 이 굴은 옛날 화산 당시 지진에 의해서 생겼다고 하는데 높이 20미터쯤 되고 벽은
인공으로 가공한 듯 교묘하게 만들어져 있었으며 끝까지 들어가려면 15분쯤 걸립니다.
얼마쯤 들어가면 굴이 좁아져 고개를 이루었다가 다시 넓어지며 벽이 마치 뱀비늘 같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우리들은 횃불을 준비하지 못했던 관계로 후라시불을 사용했으므로 곤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굴속은 공기가 적어서 등불은 밝지를 않아 반드시 석유 솜방망이어야 합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김녕지서에서는 구경 오는 손님에게 뱀굴 안내에 들어가는 솜방망이용으로
석유가 한 초롱씩 들어간다고 합니다.
옛날부터 제주사람은 뱀을 대단히 신앙(信仰)했고 따라서 뱀을 사육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여자가 출가할 때는 뱀을 가지고 가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국경횡단 여행>
다음은 1914년 백두산 식물조사시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본 조사는 1914년 5월∼동 9월의 5개월 간에 걸쳐서 신의주로부터 압록강을 끼고 올라서 백두산을 넘어
두만강을 따라 웅기(雄基)에 이르는 약 2천 킬로미터의 국경횡단여행이었습니다.
이 조사에는 일인 나카이(中井)박사와 필자 그리고 松崎直枝(東大植物園)씨와 사진사 1명이 참가했고
장비로는 권총 일정씩을 휴대하고 말 세 필, 고정인부 2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경험한 최대의 채집여행이었고 이 결과는 백두산식물조사서 및 노봉(鷺峰)식물조사서
로서 발표되었습니다. 이 동안에 체험한 여러 가지 일들이 많습니다만 기억되는 몇 가지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백두산은 한반도에 있어 식물지리학상 가장 흥미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동아식물에 매력을 느끼는 많은 학자들은 백두산 일대 및 장백산맥의 식물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본산의 주체는 한국북부에서 만주에 걸친 태고기의 암석을 덮고 있는 현무암으로 되어 있고
상봉에는 백색의 부석으로 덮혀 있어 허옇게 보입니다.
이에서 백두산이란 이름을 얻은 듯 합니다.
본산의 식물침입의 순서는 백두산이 성립되어 대부석원으로 이루어진 나지(裸地)에 가장 먼저 침입한
것은 바람에 비산(飛散)하기에 가장 용이한 자작나무과 식물이었고 이어서 잎갈나무가 들어와서 현재는
잎갈나무의 대군락을 이루고 있으나 종당(終當)에는 현재 수하(樹下)에 침입하고 있는 전나무와
종비나무 등의 음수의 삼림으로 갱신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 조사에서 본산의 현산물 16종, 한국 미기록 87종을 합하여 307종, 19변종을 채집하였습니다.
그 주요한 것을 보면
갈마사초(Carex concolor),
난쟁이패랭이 꽃(Dianthus morii),
각씨투구꽃(Aconitum monanthum),
두메냉이(Cardamine resedifolia var. Morii),
왕제비꽃(Viola Websteri),
왕백산차(Ledum palustre var. maximum),
톱잔대(Adenophora curvidens),
껄껄이풀(Hieracium coreanum),
뿔분취(Saussurea triangulata var. alpina),
유령란(Epipogon aphyllum),
구름범의귀(Saxifraga laciniata),
나도황기(Hedysarum setigerum),
두메 방풍(Peucedanum Paishanense)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숲과 문화」로
첫댓글 옛날 전설을 읽고 있는것 같아요. 이렇게 고생하신 분들이 계셨기에 우리 자생식물의 연구가 이루어졌겠지요.
정말 옛날 이야기에 나올법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