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데이>와 <순지>가 3월17∼18일, 연이틀에 걸쳐 광주에서 선보였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두 영화는 광주전남 출신의 감독이, 같은 지역을 배경으로 극영화를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요 스태프들 또한 ‘향토자원’이고, ‘독립영화’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세상에 출사표를 던졌다는 특징도 같다. 작품 자체의 리뷰와 더불어, 지역적으로, 또 제작환경에서 ‘변방’의 예술로 분류되는 이들 영화의 등장을 통해 몇 가지 영화적 관점들을 논의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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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현필 감독의 <뷰티풀데이> |
ⓒ 전라도닷컴 | 상업영화 영화는 역사상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예술매체이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 하고, 모은 돈은 제작-배급-마케팅에 쓰인다. 당연히 이 돈들은 ‘회수’를 전제로 뿌려진다. 산출을 기대하지 않고 투입만 하는 자본가는 없다. 나아가 자본가는 투입한 금액보다 더 많은 산출액을 원한다. 영화는 이윤을 좇는 상품예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윤을 갈구하는 투자행위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 투자처가 영화라고 해서 예외를 적용할 논리적·도덕적 기준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느 예술매체보다 많은 돈이 들기 때문에, 즉 리스크(위험부담)가 크다는 이유로 영화를 통한 이윤추구는 오히려 더 정당하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어느 정도 폄훼의 의미를 얹어서 말하곤 하는 ‘상업영화’라는 명칭은,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예술영화 예술영화를 이야기하는 이들은 그 반대편에 상업영화를 세워 놓는 습성이 있다. 히치콕이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들이 상업적 속성이 강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영화들은 예술이 아닌 것일까. 레오 까락스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들이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 영화들의 예술적 가치가 저절로 더 높아지는 것일까.
예술음악, 예술연극, 예술미술… 이라는 말은 없는데 예술영화라는 말은 있다. 깊이 있는 비평문일수록 예술영화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작가주의나 형식주의 영화이론이 ‘예술영화론’에 근접해 있기는 하지만, 그들조차도 예술영화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앙드레 바쟁은 작가주의 영화이론의 부정적 측면을 경고했다. 그는 “나쁜 영화를 칭찬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좋은 영화를 나쁘게 평가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고 말했다. 예술이 아닌 영화를 전제해야 예술영화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 있다. 이 전제는 곧 배제다. 예술영화라는 개념 속에는 건강한 상업영화를 나름의 ‘예술적 기준’으로 배제, 곧 나쁘게 평가할 수 있는 심각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독립영화 여기서 독립은 자본과 배급망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하지만 이는 형식요건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독립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자본과 배급에서 자유롭다 하더라도 제작 동기와 내용이 자본과 배급에 종속된 영화와 다를 바 없다면, 그 영화를 독립영화라고 부르는 데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다만 저예산영화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대부분의 독립영화가 ‘저예산’인 점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저예산영화가 독립영화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독립영화의 한 특징일 뿐이다. 독립영화를 규정하는 ‘핵’은 감독의 스타일, 의도에 있다고 봐야 한다. 기존의 영화제작환경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 스타일과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해 감독이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작업하고, 그 이유 때문에 자본과 배급의 ‘투자’를 받지 못한, 그런 영화가 좀 더 엄격한 의미에서 독립영화일 것이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감독 샘 레이미가 대학시절 무명배우 다섯 명과 함께 만든 <이블데드>는 할리우드의 B급 상업영화 스타일이지만 독립영화라고 부르는데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제작환경, 감독의 스타일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오션스> 시리즈의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 역시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잎>이라는 독립영화로 세상에 얼굴을 알렸다. <주먹이 운다>의 류승완 감독이 단편 세 개를 묶어 만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역시 독립영화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독립영화라고 해서 심오하고 복잡한 어떤 주제를 꼭 담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미학의 새로움, 혹은 어떤 실험, 혹은 남들이 미처 하지 못한 말을 하기 위해 기존 영화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그 작업이 ‘독립’에 다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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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광만 감독의 <순지> |
ⓒ 전라도닷컴 | <뷰티풀데이>와 <순지> <뷰티풀데이>는 경제적 몰락으로 딸까지 잃은 ‘한 남자’와 우울증을 겪고 있는 여자 무용수,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노파 등 세 남녀의 자살 죽음에 대한 서술이다. 영화는 ‘한 남자’가 겪은 삶의 중요한 국면들을 회고조로 보여 주는 한편, 이 한 남자가 오늘 이 시간에 다른 주인공들과 상징적 관계를 맺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순지>는 5 18 당시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둔 여주인공 순지가, 아버지의 실종으로 쓰러져버린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살아가는 내용을 뼈대로 삼고 있다. 이 삶에 5 18이 재현행사라는 맥락으로 개입해 들어오고, 순지는 실제와 재현을 구분하지 못하는 혼돈 속에서 5·18을 판타지처럼 ‘체험’한다.
글머리에서 말한 형식적인 공통점 외에도 두 작품은 비슷한 내용과 표현들을 공유하고 있다. 닭이나 생선의 죽음이 영화의 도입부에 제시된다는 점, 자살모티브, 세상에 대한 냉소, 열린 결말 등이 그렇다. 내용과는 상관없이 <뷰티풀데이>의 ‘아버지’, <순지>의 집배원이 같은 배우인 것도 숨은그림을 찾은 것 같은 즐거움을 준다. 세련된 카메라워킹,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 속도조절하기, 열린 화면과 닫힌 화면의 자연스러운 교차, 완성도 높은 후반작업(관객이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는 대목은 소리의 또렷함과 화면 톤의 일관성이다) 등의 덕목을 두 작품 모두에서 느낄 수 있었다. 욕먹을 각오로 잘난 체 해서 말하자면, 독립영화라고 해서 관객인 내가 ‘인내’해야 하는 ‘어설픔’이 <뷰티풀데이>와 <순지>에는 없었다. 그래서 좋았다.
이 좋음은 역설적으로 다른 아쉬움을 제공했다. <뷰티풀데이>와 <순지>가 담고 있는 내용은 상업적 가능성이 낮아서 자본이 외면했을 수는 있겠으나, 영화미학의 새로움을 추구하거나 의도적으로 불온한 주제를 제시한 작품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니까 굳이 난해할 이유가 없는, 좀 더 경쾌하게, 관조적으로 촬영 가능한 주제로 생각됐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지 못했다. 재능이나 자본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전략, 혹은 용기가 충만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때의 경쾌함·관조가 ‘웃음코드’를 끼워 넣거나 ‘장르양식’을 차용하자는 뜻은 아니다. 영화와 영화의 주제를 대하는 감독의 태도가 필요 이상으로 경건한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이 경건함이 감독의 재능을 경직시키고, 스스로 ‘표현의 가능성’을 제한시켜버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적어도 내용적인 측면에서만큼은(배우·배급·마케팅이 아니라는 뜻에서) <뷰티풀데이>가 <세기말>(송능한·1999)을 능가하기를 바랐고, <꽃잎>(장선우·1996)을 넘어선 문제제기를 <순지>에게 기대했는데, 돌파지점을 눈앞에 두고 멈춰버린 듯한 인상이다. 이 즈음에 이르면, 우리가 두 감독에게 기대해야 할 것은 ‘독립’이거나 감독 예우 차원에서 쓰곤 하는 ‘예술’이어서는 곤란할 수밖에 없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외적인 요인을 끌어들여 애써 '후까시’를 넣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상업이든, 예술이든, 독립이든… 이제는 장현필, 박광만이라는 이름이 수식어가 되는 그런 영화를 기대하고 싶다. <뷰티풀데이>와 <순지>는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다. 이 작가들에게 합리적이고 정당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광주전남 관객으로서 우리가 취할 최선의 태도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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