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65)는 192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1938년 무렵 유럽에 진출한 당대에 드문 서양 음악가였다. 그는 철저히 주류, 그것도 권력 지향적이었던 사람이었다. 나치 독일에서 활동할 당시엔 일본인 '에키타이 안(Eak-tai Ahn)'으로 살았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직전 독일의 우방국이자 파시스트 프랑코가 집권하던 스페인으로 ‘도주’ 후 스페인으로 귀화해 스페인인으로 죽었다.
조국의 독립과는 무관하게 음악가로 살다가 조국이 독립한 뒤, 25년 만에 귀국해 이승만 탄신 기념 연주회를 지휘했고, 1962년엔 박정희를 예방하고 쿠데타를 혁명으로 경축했다. 안익태는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묻혔으나, 2000년대 이후 각종 자료를 통해 일본의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일본 정신'이 담긴 음악을 만드는 등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친일 부역자로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르게 된다.
안익태의 친일 전력이 처음 드러난 것은 2006년,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던 유학생에 의해서였다. 2000년에 발굴된 안익태의 베를린필 지휘 영상이 일제가 세운 괴뢰국가인 만주국 축전 음악회의 실황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발표 작품 교향적 환상곡 '만주 환상곡‘은 만주국 건국을 경축하고, 그것을 주도한 '구원자' 일본이 되찾은 평화와 만주국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세계 신질서 확립을 일관되게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 발표는 국내 음악계를 이른바 '멘붕' 상태로 만들었다.
안익태는 일제와 나치 독일의 고급 나팔수였다
그가 친일파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면 어떨까? 이해영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부)가 최근에 출간한 <안익태 케이스-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 그동안 알려진 일본명 ‘에키타이 안’의 친일 행적만이 아니라 친나치 활동까지 고발하는 문제작이다.
안익태도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35년께 미국에서 ‘애국가’를 초연할 때만해도 “우리 민족운동과 애국정신을 돕는 데 대단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안익태가 본격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였다. 1941년 독-소 전쟁이 벌어지자, 일제는 유럽지역 자국민 소개령을 내렸다.
하지만 그대로 귀국하게 되면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오기까지 이룩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안익태는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의 유럽 첩보망 총책이었던 에하라 고이치를 찾아가 “상담을 요청”한다.
그 덕분에 안익태는 1941~44년까지 만 2년 반 동안 에하라의 베를린 자택에 머물 수 있었다. 44년 히틀러의 생일 기념으로 파리에서 열린 ‘베토벤 페스티벌’을 비롯해 그는 동맹국(독일·이탈리아 등)과 점령국(프랑스), 우방국(스페인)에서만 30차례의 공연을 지휘한다. 자신이 작곡한 <에텐라쿠>, <만주국 환상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일본 축전곡> 등도 연주했다.
특히 그는 나치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음악원 회원이 됐다. 그 회원증에서 그는 출생지를 평양이 아닌 도쿄로 속여서 적기도 했다. 저자는 “안익태는 2차 대전이 발발한 이후엔 약한 민족주의 성향마저 탈색되면서 적극적인 친일로 전향했는데, 본래부터 음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출세욕이 강한 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안익태의 ‘애국가’가 관행상 ‘국가’로 불려왔지만, 현재 법적으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애국가는 없다. 그래서 1960~70년대에도 새로운 애국가를 제정하자는 운동이 있었고, 전두환 정권 때에도 ‘국가 제정 위원회’를 구성해 애국가의 가사와 감상적인 곡조의 문제점을 들어 새 국가를 만들려고 했었다.
저자는 “안익태 애국가의 치명적 흠결은 그 선율이나 가사가 아닌 그것을 지은 사람에 있다”며 “애국가를 만든 이는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애국가는 가장 중요한 나라의 상징체계 가운데 하나로, 집단 정체성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핵심적인 제의적 절차다. 그런데 비애국적인 국가를 부르고 있다는 이런 문제를 과연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애국가’ 같은 기본도 정리하지 못한 채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이야기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이제는 답변해야 한다.” - 책 본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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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개탄스럽네요 ㅠ
어릴 때 역사를 배울 적에 안익태와 애국가를 배울때 이 관계에 대해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랑스러워야 되는데 만든 사람은 자랑스립지 않은 인물이고 꺼려지고 애국가 부르기도 싫어지는데 불러야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