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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전술 기지의 맹호 장병들 생활
세계가 최초로 인정해준 한국형 중대 전술 기지에 대한 시리즈물 중 세 번째 글이다. 작가의 확신인데 국군은 전투 상황에서 혁신적인 전술을 개발해 놓고도 기록에 무심해서 이 전술이 후배들에게 전해지지 않아 휴지화한 사례들이 여러 번 있었다.
여기에 월남전에서 그 진가를 발휘했고 세계가 알아주었던 이 최초의 한국형 전술인 중대 전술 기지의 전술을 초대 맹호부대 재구대대 대대장이었던 박경석 장군의 조언을 얻어 후세를 위해 가능한 한 세세히 기록하고자 한다.
앞글에서 월남전의 중대 전술 기지 전술이 채명신 장군이 독창적으로 창안했으며 맹호부대는 도착 즉시 대대 단위로 크게 분산 배치되었던 부대들을 더욱 세분해서 중대 단위로 분산 전개하고 한 달 만에 전투 준비를 완료했다는 글을 썼다.
먼저 월남에 파견된 대대장이나 연대장들은 6.25 전쟁 때 죽음을 무릅쓴 전투를 수없이 겪었고 전투 경험이 풍부해서 전술에 대해 나름의 의견이 있는 유능한 지휘관들이었다.
그런 전투의 베테랑들에게도 채명신 장군의 소부대 진지 개설의 명령은 날벼락같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쟁점은 소병력이 방어해야 하는 방어력의 취약점이었다.
그 바로 10여 년 전, 1954년 월남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서 프랑스군 1개 여단이 베트민 부대 5개 사단의 포위 공격을 받아 지탱하지 못하고 모두 궤멸되어 항복했던 사례가 이들 지휘관들 뇌리에 생생했을 때였다.
이 선진대국 프랑스의 대패배를 잘 알고 있는 간부들은 만약에 적의 대군이 집중적으로 일개 중대 전술 기지를 공격한다면 절대 버티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두코와 짜빈동에서 이런 공격이 있었다.]
매사 아주 신중했던 김정운 연대장부터 대대장들과 사단 간부 사이에서도 사령관이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설왕설래했다. 그러나 원체 리더십이 뛰어나고 실전 경험도 많은 채명신 사단장 앞에서 감히 누구도 정면으로 도전할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말을 꺼내지 못했을 뿐이다.
더구나 채명신 사령관의 시범 기지를 만들라는 첫 명령에 박경석 대대장이 "하명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대답했으니 불만이 있어도 진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박경석 대대장의 자신있는 대답은 그의 한 경험에서 유래 되었다.
그는 17살 육사 생도 2기 때 6.25 발발로 소대장이 되어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하고 북한군 10사단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되어 끌려간 북 10사단의 사단 사령부가 있던 강원도 정선에서 다른 포로 전우들과 두 달간 억류되었다.
북한군 10사단은 군단장 최현의 명령을 받은 10사단이 1950년 12월, 남한 깊이 침투해서 안동까지 내려오며 유명한 문경전투 등의 후방 교란 작전을 하다가 1951년 2월 말에 북으로 복귀했다.
남하했던 사단 병력 4,000명 중에 1,000명만 살아 돌아갔지만 후방에서 마구 날뛰어 미 해병대까지 투입되는 등 큰 혼란을 주었다.
박경석 장군의 증언으로 10사단 사령부가 강원도 정선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단장 전문섭은 상당히 인간적이어서 이 어린 포로들을 잘 대우해주고 북한 사단이 북으로 철수할 때 석방해주었다.
▼CLICK! 국군 포로와 북 사단장 이야기▼
박경석 대대장은 억류기간 남한으로 침투한 북한군 10사단이 주로 작은 소부대로 분산되어 움직이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 기억이 있었다.
그는 그 기억을 바탕으로 적어도 포병과 미공군의 항공 지원이 지켜주는데 베트콩들이 힘들게 대부대를 만들어서 공격해 올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박경석 대대장은 휘하 중대장 중에서 성실하고 창의력이 뛰어난 9중대장 용영일 대위에게 시범 중대 전술 기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중대장들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박경석 대대장은 한마디로 일축한다. "다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데 무슨 의견이 있겠어? 그저 명령만 떨어지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혈기만 있을 때였으니까."
그러나 그때 맹호부대가 월남으로 데려간 연대장들과 대대장들도 최고의 인재들이었지만 중대장들도 50년대 말, 60년대 초 육군사관학교 커트라인이 서울법대를 상회할 때 입학해서 4년간 단련한 육사 출신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선발했던 최고 우수 인재들이었다.
여기서 나타나는 용영일 대위는 월남전 참전 동안 수십 번의 전투에서 놀라운 전공을 세웠다. 나중에 육군 중장으로 전역했으나 그의 월남전 무공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언젠가 한 번 용영일 중장의 전공을 소개할 계획이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박경석 중령은 이들 정예 중의 정예인 중대장들을 마치 어린이처럼 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박경석 중령과 용영일 대위는 서로 상의해가면서 진지 구축을 준비했다. 사단도 방문해서 공사 자재의 지원 문제도 미리 의견 교환을 했고 부사관들의 의견도 청취했다.
그러나 이미 채명신 사령관이 중대 전술 기지를 건설하는 기본 방침을 다 내려준 터였다. 그는 첫 명령 때 그림까지 그려가며 - 나중에 중대 전술 기지의 특징이 되는 - '원형기지'를 제시했다.
'원형기지'의 직경은 150mm에서 200m가량 되었고 이 기지 안의 교통호와 LMG 기관총, 60mm 박격포 진지의 개략적인 위치까지 말해주었다.
나는 관심 있는 동료들과 이 진지들을 적의 공격 시 화력 집중을 위해서 느슨한 형태의 십자형이나 삼각형 등으로 만들어 봤으면 어떻겠느냐고 이야기 해본 기억이 있는데 그런 것은 만약에 적의 진내 진입이 있을 때 부대 차단이 있을 수가 있어서 역시 원형기지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결론을 낸 바 있었다.
현재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의 적성지역에서 연합군이 설치하는 일종의 중대 전술 기지인 전방 작전 기지[FOB]가 대체로 사각형인 것과 대조가 된다.
채명신 사령관은 이미 파월 전에 연구와 궁리 끝에 앞으로 어떻게 싸우겠다는 전술 교리를 이미 다 개발해놓고 월남에 도착하자 그대로 실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채명신 사령관은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용영일 중대장은 즉시 중대 전술 기지 예정지에 부대 이동을 해서 진지 공사부터 실시했다. 필요한 철조망이나 철제 지주 등은 미군 헬기가 모두 공수해주었다. 야전 삽 하나로 강행했던 공사는 일주일 조금 지나서 완공되었다. 시범 후 이 원형의 중대 전술 기지는 청룡부대나 후에 파월한 백마부대의 표준 모델이 되었다.
샌드백으로 벽을 친 참호들을 연결하는 교통호가 연결된 원형 교통호가 중대 전술 기지의 내부 골격이었다. 이어 외곽에 3중의 철조망이 처지고 중간의 공간은 아주 낮게 철조망들이 지그재그로 설치되어 적들이 뛰어넘거나 기어서도 통과하기가 힘들었다. 더 외곽에는 원형 철조망이 가설되었다.
용영일 대위는 창의력을 발휘해서 진지 내의 긴 야자수 위에 원두막 같은 감시 초소를 세워 사주 경계를 하게 하였다.
여기서 나는 박경석 장군에게 사병들의 생활관이나 행정반 같은 막사는 만들었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박 장군은 한심하다는 듯 대답한다.
"그런 것이 어딨어? 파월초기에 우리 장병들, 고생 많았어!"
즉 막사 같은 것은 없었고 그때 초기 파월 장병들은 개인천막이라고 불리던 A형 텐트의 지급도 없이 월남으로 갔다. 장병 숙소는 교통호가 연결된 개인 참호에 마련되었다.
사병들은 자기에게 지급된 판초 우의 두 장을 이어서 A형 텐트를 만들었고 나중에 미군의 비상식량인 C-ration[미군 전투 식량]이 지급되면서 생긴 빈 박스를 바닥에도 깔고 나뭇가지와 박스로 지붕을 만들어 조금은 여유 있는 잠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판초 우의는 고무를 입힌 것이라서 비가 새지는 않지만 앞뒤가 훤하게 뚫려서 폭우라도 오면 장병들은 죽을 고생을 해야 했다. 박경석 장군은 폭우가 밤새 내린 뒤에 부대 방문을 해보면 중대원들은 엉성한 개인호에서 물에 흠뻑 젖어 덜덜 떨고 있었고 이 중에는 너무 추워서 울고 있는 사람도 있어서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자주 내리는 우기의 소나기는 샤워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중대 전술 기지에 목욕이나 샤워 시설은 없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대대장 이하 모두 한 달 정도는 목욕 없이 버텨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 당시는 목욕 없이 지내는 것이 별로 불편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식사 문제는 미군 헬기가 이동식 식수 탱크와 함께 매끼 식사인 C-ration[미군 전투 식량]을 정기적으로 공수해왔다. 파월 5개월 뒤에 채명신 장군이 미군과의 교섭한 결과 C-ration 외에 개인당 쌀이 600g씩 지급되었는데 취사 방법은 중대마다 달랐다.
취사 방법은 대대에서 관여하지 않고 중대에 일임했기 때문에 각 중대의 사정에 따라 중대원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특색있게 했다.
원칙적으로 중대 취사반은 없었다. 월남 시장에서 대형 솥을 사다가 중대 취사를 하는 중대도 있었고 분대별로 취사를 하는 중대도 있었다. 안남미인 쌀들은 대개 남아 돌아가 대민사업을 할 때 잘 활용하기도 했다. 또는 C-ration들을 모아서 현지 농민들의 농산물이나 축산물과 교환하기도 했다.
방충망은 생각도 못 할 처지라서 밤마다 엄습하는 모기떼는 그저 미군이 지급하는 모기 방지약으로 방어해야 했다.
이 엉성한 장병 주거 시설은 대대 본부도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가져간 24인용 대형 텐트가 하나 있었고 대대장 숙소로서 조금 작은 텐트만 있을 따름이었다.
대대 참모들은 낮에 대대 본부 행정반으로 쓰던 이 대형 텐트에서 합숙했다.
시간이 가면서 중대 전술 기지의 중대장들 중에 포대에서 포탄 목제 상자를 얻어다가 지상에 중대 행정반이나 분대 단위 내무반을 짓는 경우가 있었다.
초기에는 미군의 무기 지원도 없어서 M1 소총과 칼빈 소총 나아가 LMG 기관총까지 몽땅 한국에서 가져간 기본 화기들로 베트콩들과 싸웠다.
파월군 최대 전투인 두코 전투나 짜빈동 전투도 모두 6.25 전쟁 때 사용하던 이런 2차 세계대전의 무기로서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