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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수업 : 텍스트 8장
10. 실재의 수용
1
신의 뜻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낸,
가장 이상한 믿음 중의 하나이다.
마음이 이미 깊이 분열되어,
자신의 참된 정체를 두려워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두려움은 생겨났을 리 없다.
실재는 오직 진리만을 옹호하기에,
환상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위협’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신의 뜻이
- 이것은 그대의 참된 정체이다 -
그대에게
두렵게 지각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대가 정녕 그대의 정체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입증해준다.
그렇다면 그대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바로 그대의 뜻이다.
그대의 뜻은
에고의 뜻이 아니며,
그것이 바로
에고가 그대를
적대하는 이유이다.
신에 대한
두려움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오직 그대 자신의 실재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2
공황 상태에서는
무엇이든 일관되게
배울 수 없다.
이 수업의 목적은
그대의 정체를 배우는 것인데,
만약 그대가
이미 그대의 정체를
두려운 것이라고
결정해 버렸다면,
그대는 당연히
이 수업을 배우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대는
이 수업을 하는 이유는
그대가
그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대의 실재를 모른다면,
그것이
두려운 것인지 아닌 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3
진리와
두려움을 관련짓는 것은
- 이것은 기껏해야
지나치게 인위적일 뿐이다 -
진리가
참으로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의
마음에서 특히 적절치 않다.
이런 식의 관련짓기가
의미하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그대의
의식 저 너머에 있는 것이,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마음대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대가 이렇게
이상한 상황을 설정해 놓았기에,
그대의 실재가 무엇인지를
정말로 아는 안내자 없이,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이 안내자의 목적은, 단지
그대가 원하는 것에 대해,
그대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는
그대에게 이질적인 뜻을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대가
그에게 부과한 한계 안에서,
그대 자신의 뜻을,
그대의 의식 안에 재확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4
그대는
그대의 <무의식 안에>
<그대의 뜻>을 가두었다.
그대의 뜻은,
여전히 사용될 수 있도록
그곳에 남아 있지만,
그대를 도울 수는 없다.
전에 성령의 기능은,
그대의 무의식 안에서
거짓된 것으로부터
참된 것을
가려내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이 그대가
감춘 것을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신의 뜻을 지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의 뜻에 대한
성령의 지각은,
그 뜻을 그대에게
실재적으로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대의 마음 안에 있으며,
따라서 성령은 정녕
<그대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 마음에 대한
성령의 지각이
그대에게
그대 마음의 실재를
가져다준다면,
성령은 정녕
그대에게 그대의 정체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5
이 전체 과정에서
두려움의 유일한 근원은,
그대가 잃는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대는
오직 성령이 보는 것만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여러 번에 걸쳐
성령은 결코 그대에게 어떤 희생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대가
그대 자신의 실재에 대한
희생을 요청한다면,
성령은 반드시,
그것은
그대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신의 뜻이 아니라고
그대에게 상기시켜 줄 것이다.
그대의 뜻과
신의 뜻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만약
너희 마음이 분열되지 않았다면,
뜻을 세우는 것이 곧 소통이므로
그것이 구원임을 인식할 것이다.
서로 다른 언어로는 소통할 수 없다.
그대와 그대의 창조주는
창조를 통해 소통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 오직 그것만이,
정녕 그대와 그대의 창조주의
결합된 뜻이기 때문이다.
6
갈라진 뜻들은 소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같은 마음에
다른 것을 대변해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통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혼란스런 소통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메시지가 의미가 통하지 않는 한,
그 메시지는 소통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요청한다면,
그대의 메시지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대가 그대의 뜻을
두려워하는 한,
그대는 정확하게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요청하게 될 것이다.
그대는
성령이 그대에게
응답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대가
어떤 것을 요청하는지,
숙고해 보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7
그대는 오직
그대가 원하는 것만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단지
그대가 원하는 것을,
받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인데,
그대는 그것을
정녕 받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대의 뜻을
전혀 가르쳐 줄 수 없는 교사에게,
그대가 고집스럽게
계속 묻는 진짜 이유이다.
그 교사로부터는, 그대는
결코 그대의 뜻을 배울 수 없으며,
이것은 그대에게
안전하다는 환상을 가져다준다.
그렇지만 그대는 결코
진리로부터는 안전할 수 없으며,
오직
진리 안에서만 안전할 수 있다.
실재가 유일한 안전이다.
그대의 뜻이
바로 그대의 구원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뜻은
신의 뜻과 같기 때문이다.
분리는,
그대의 뜻이 신의 뜻과
다르다는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
8
어떤 마음도
자신의 뜻이 신의 뜻보다
더 강하다고 믿을 수 없다.
따라서
만약 어떤 마음이 자신의 뜻이
신의 뜻과 다르다고 믿는다면,
그 마음은 오직
신은 없다거나,
신의 뜻은 두려운 것이라고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전자는 무신론자를,
후자는 순교자를 설명해 준다.
순교는
많은 형태를 취하는데,
그 범주는
신께서 어떤 종류이든,
희생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하는
모든 교리를 포함한다.
이런 기본적인 유형의
정신 나간 결정들은
어느 쪽이든
공황 상태를 일으킬 것인데,
무신론자는
자신이 혼자라고 믿고,
순교자는 신께서
자신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버림받음과 보복을
너무나 두려워하지만,
무신론자는
버림받음에,
순교자는 보복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9
무신론자는 신께서
자신을 떠났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매우 두려워할 것이며,
따라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신께서 그를 떠나지 않으셨다고
넌지시 말해주면
매우 화를 낼 것이다.
반면에 순교자는
죄의식을 더 의식하며,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믿기 때문에,
처벌을 좋아하도록
자신을 가르치려 한다.
그러나
아주 간단히 말해서
사실은, 어느 누구도
버림받음이나 보복 중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둘 다 추구하지만,
진정으로 그렇게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대는 과연 성령에게
그런 ‘선물’을 요청해서
그것들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령은 그대로 하여금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하도록 만들 수 없다.
보편적 제공자
(Universal Giver)에게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요청할 때,
그대는
주어질 수 없는, 어떤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니,
그것은 결코
창조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창조된 적이 없는 이유는,
그것은 결코
그대를 위한 그대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0
궁극적으로, 모든 이가
반드시 신의 뜻을 기억할 것인데,
궁극적으로
모든 이가 반드시 자기 자신을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사람의 뜻과 신의 뜻이
하나라는 인식이다.
진리가 있는 곳에는,
믿지 않는 자도 없으며,
희생도 없다.
실재의 안전함 안에서,
두려움은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오직 두려운 것처럼 보일 뿐이다.
두려움은
원인 없이는 실재할 수 없다.
그리고 신께서는
유일한 원인이시다.
신께서는 사랑이시며,
그대는 정녕 그분을 원한다.
이것이
정녕 그대의 뜻이다.
이것을 요청하라. 그러면
반드시 응답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그대에게 본래 속한 것만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1
그대가 성령에게
그대를 해칠 무언가를 요청할 때,
성령은 응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그대를 해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대는 무(無)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고에서
비롯되는 어떤 갈망도 정녕
무(無)에 대한 갈망이며,
따라서 그것을 달라고
청하는 것은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요청의 형태를 취한
부정일 뿐이다.
성령은 오직
의미만을 알아차리고 있기에,
형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에고는 성령에게
아무것도 요청할 수 없으니,
에고와 성령 사이에는
완전히
소통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대는
성령에게 모든 것을
요청할 수 있으니,
그대의 요청은
그대의 뜻에서 나오므로,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신의 뜻을 부정하겠는가?
또한, 성령이
신의 아들들 안에서, 신의 뜻을
인식하는 것에 실패하겠는가?
12
그대는
창조로부터 빼낸 에너지를
두려움에 써버린다.
이것은
그대의 에너지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그대의 에너지를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진리를 부정하는데
그대가 써버리는
엄청난 에너지의 낭비를
인식하지 못한다.
불가능한 것을 이루는 것이
성공이라고 믿으면서 끈질기게
그것을 시도하는 자에 대해
그대는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대가 행복해지려면 반드시
불가능한 것을 가져야 한다는
믿음이야말로,
창조의 원리에 전적으로 어긋난다.
신께서는 그대의 행복이
그대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의존하도록 뜻하실 수 없다.
13
신께서 사랑이시라는 사실은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받아들임은 정녕 필요로 한다.
비록 그대가
사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대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정말로 가능하다.
손으로 눈을 가린다면,
그대는 보지 못할 것이니,
그대는 시각의 법칙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부정한다면, 그대는
사랑을 알 수 없을 것이니,
그대의 협력이
사랑의 존재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대가 만들지 않은
법칙들을 바꿀 수 없다.
그리고
행복의 법칙들은
그대를 위해
창조된 것이지,
그대에 의해
창조된 것은 아니다.
14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려는, 어떤
종류의 시도라도 두려울 수밖에 없고,
그런 시도가 너무 강하면, 그것은
반드시 공황 상태를 일으킬 것이다.
실재에 반하여 뜻을 내는 것은,
비록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아주 오래
지속되는 목표로 만들어질 수는 있다.
비록 그대가 진정으로
그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이상한 결정의
결과에 대해 잘 살펴보아라.
그대는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것에
그대의 마음을 바치고 있다.
이런 헌신이 과연
얼마나 실재적일 수 있겠는가?
그대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창조된 적이 없다.
그것이
결코 창조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무(無)이다.
그대는 정말로 그대 자신을
무(無)에 바칠 수 있겠는가?
15
그대에게
헌신하시는 신께서는
모든 것에 헌신하는
그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대에게, 그대가
헌신하는 대상을 주셨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완벽하게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재는 정녕 모든 것이다.
따라서 그대는 모든 것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대는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실재가 아닌 것들을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실재의 부재는 두려우며,
두려움은 그야말로
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가능하다고 믿는 한,
그대는 창조하지 못할 것이다.
실재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은
실재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리고
실재는 정녕 의미이다.
16
그렇다면,
신의 뜻은 이미 가능하며,
그 밖의 것은
아무것도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임을 기억하라.
이것이 바로 실재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이것만이
정녕 실재이기 때문이다.
실재를 왜곡시키고서는
실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대가
실재를 정녕 왜곡시킨다면,
그대는
불안과 우울, 결국에는
공황 상태를 경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비실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들을 느끼고 있을 때,
그대 자신 너머에서,
진리를 구하려고 애쓰지 말라.
왜냐하면
진리는, 오직 <그대 안에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라:
“그리스도는
내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신께서 계시니,
그리스도는
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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