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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image above is of the pulpit and "sounding board" of the Maria van Jessekerk in Delft, The Netherlands. |
본문
이사야 6:1-8절
시편 29편
로마서 8:12-17절
요한복음 3:1-17절
설교 도우미 Preaching Helps
교회력설교, 주석(Chris Haslam) - 번역 이 기호 목사(평안교회담임)
이사야6:1-8
이 본문에서, 이사야는 예언자로서 그의 권위를 위한 근거들을 제공한다. “그해”는 BC742년이다. 앗시리아는 자신들의 국경을 확장하고 있었다(“웃시야”는 열왕기하14:21절에서 “아사랴”라고 불린다). 북왕국, 즉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서 유다를 강압적으로 군사동맹에 끌어들이려고 추구하였다.
이사야는 신하들로 둘러싸이고, 하나님 위를 맴돌며 경계하고 있는 “스랍들”(2절)과 함께,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다. 한 쌍의 날개들은 하나님의 엄청난 현존 앞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날개들은 그들의 생식기(“발”은 완곡어법이다)를 가리고 있다. 이것은 순결에 대한 약속(헌신)의 표시이다. 세 번째 날개는 하나님께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하는데 사용되었다.
“거룩하다”(3절)가 강조하기 위해서 세 번 반복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완전히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시고, 이 땅의 것들과 구별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인들 중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한 전사(용사)이시다. 하나님은 지구 전체와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신다.
본문의 배경은 성전인 것처럼 보인다. 지구의 떨림(하나님의 현존의 표시) 때문에 흔들렸던 “문지방의 터”(중심축, 4절)는 무거운 성전 문들이 움직일 때 사용된 것이다. “연기”도 역시 광야에서 영광의 구름이 존재했던 것처럼(출40:34), 하나님의 현존의 표시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전적으로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그는 “깨끗하지 않다”(5절)고 느끼고 있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것을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본다. 그는 또한 무가치한 것으로서 여겨지는 사람들을(유다백성 혹은 그의 제자들)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행자, 스랍(7절)이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말할 자격을 주면서, 그를 깨끗하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조언자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상의한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8절). 그리고 이사야는 유대의 예언자가 되기를 자원한다.
9-13절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의 자원함을 받아들이신다. 그리고 그에게 대부분의 백성들이 전통적인(타락한) 행실(습관)을 더 좋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실패할 것이다).
그러나 적은 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남은 자(그루터기)는 어려운 시기를 견디어낼 것이다. 9년 이내에, 앗시리아는 침략했고 유다를 자신들의 꼭두각시 나라로 만들었다.
시편29편
이 시편은 아마도 가나안의 신, 바알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바알은 해마다 정기적으로 천둥과 폭풍(땅을 위한 풍요의 근원)를 가져오는 폭풍의 신이다. 그러나 이 시편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우주적 통치로 표현된다.
1-2절에서, 모든 다른 신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에 합당한 영광을 아는 것에 초대되고 있다. 3-9절은 우리에게 폭풍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소리(3,4,5,7-9절)는 천둥이다(반복적인 소리들). 폭풍은 먼저 지중해를 넘어서 다가오는 것으로 보인다(3절). 폭풍은 남부 레바논을 가로질러 전진하면서, 큰 백향목(5절)을 무너뜨리면서 땅을 휩쓸고 있다. 폭풍은 레바논 산과 시룐 산 위에서, 자신의 힘을 발산한다. 그리고 폭풍은 광야(아라비아 사막,8절)로 진행한다. 7절의 “화염”은 번갯불이다. “가데스”(8절)는 아마도 사막의 부분인 “게달(Kedar)”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강력한 힘이시다. 9절에서, 모든 신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모든 신들은 주님께 영광이 있다고 외친다! 하나님은 그의 왕좌(10절)로부터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실 것이고 평화를 주실 것이다.
로마서8:12-17
바울은 육신의 욕구보다는 오히려 성령의 삶에 의해 지배당하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방식을 우리에게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고난에 종속되어 있다. 즉 십자가와 고통을 경험하는 고난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영원한 심판(책망)에는 종속되어 있지 않다. 심판(책망) 받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바울은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의무(“빚진 자”) 아래에 있다고 말한다. 즉, 성령에 따라 살아야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육체의 욕망을 거절하고, 성령에 따라 살아가면서, 우리는 육체적 죽음의 최후보다는 오히려 마지막 시대에 영원한 생명(13절)을 간절히 기다린다.
성령을 마음에 담아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14절),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갖는다. 세례를 받았을 때, 우리는 종살이에서 벗어난 자유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양자로 받아들여진다.
그의 자녀로서, 우리는 미래를 위한 소망을 가진 상속자(17절)이다 - 이것은 주인을 두려워하는(15절) 노예와 같지 않은 것이다(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유산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혹은 하나님을 아빠, 혹은 “아바! 아버지!”라고 선포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가지고 있는 친밀한 관계를 표현한다. 우리의 마음은 성령에 의해서 동기를 부여받는다(“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란 뜻이다. 노예들은 상속받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공유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영광을 입는다”).
요한복음3:1-17
탁월한 바리새인이며, 교사인 니고데모는 질문을 하기 위해 예수님께 온다. 그는 몰래 온다(“밤에”,2절). 왜냐하면 그와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실을 예수님의 기적들을 통해서 알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그가 아직 중요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신다. 그 중요한 것이란 바로 하나님나라를 보는 것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다음과 같이 오해한다: 그는 예수님이 생물학적인 재탄생(5절)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한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3절)은 세례를 받는 것(6절)을 요구한다.
“육”과 “영”은 생명의 구성요소로서 보여진다. 영(호흡, 바람, pneuma)은 생명을 주는 힘이다. 많은 것들이 오직 영의 영향력 속에서 보여질 수 있다. 영으로 태어나는 것은 그와 같은 것이다(8절). 아직도 니고데모는 다음의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그는 믿음을 가져야할 필요가 있다(“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여야한다,11절).
1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니고데모, 너는 비유(땅의 일, 즉 “바람”)로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너가 어떻게 신비함을 믿을 수 있겠느냐?
13-17절은 1인극이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내려가셨고 올라가셨다. “뱀”(14절)은 민수기21:9-11에서 언급되었다. 거기에서 사람들이 독뱀에게 물렸다. 어떤 사람들은 죽었고 다른 사람들은 심하게 병들게 되었다. 하나님에 의해 지시를 받은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걸어두었다. 이 표상을 보는(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치유되었다. 하나님은 믿는(16절) 모든 사람에게 그의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신다. 만약에 당신이 고의적으로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멸망할 것이다. 제3의 대안은 없다! 하나님의 의도는 당신이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믿는 것이다.
설교실마리 Sermon Cues
( 김성국 목사- 미 연합감리교회의 사이트 www.gbod.org/site 일부 참조)
설교 함께 구성하기
삼위일체주일의 본문은 우리에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찾게끔 도와준다. 성령 하나님의 엠블럼이기도 한 ‘바람’에 대해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신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거듭남(신생)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알고 개념의 언어로 증언하신다. 이사야의 하나님에 대한 비전속에 나타나신 성부 하나님(테오파니)은 이사야를 정결케 하셔서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로 봉사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드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각의 특성을 하나님의 구원사적 경륜 속에서 배후적으로 협력, 역사하심을 전제하지 않고 설명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우리는 삼위일체주일을 맞아 주어진 본문 안에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어떤 본문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2. 이사야의 하나님 비전이나 니고데모의 예수님과의 대화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가?
3. 이사야의 제단의 피어 오른 숯불에 대한 기이한 묘사를 예수님의 광야의 뱀에 대한 언급과 비교하여 보라.
설교 구상
이사야 6:1-8절, 모든 장벽을 제거하고
한편으로 이사야의 ‘거룩하지 못한 입술을 가진 자’라는 자신에 대한 자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 막는 장벽으로 규정지어졌다. 즉, 자신이 부정한 입술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는 물론이고 하나님의 종으로서도 부적합하다는 자기인식이 드러난다. 이와 비슷하게 모세 역시도 불붙은 관목 숲에 나타나신 하나님께 자신을 부정한 적이 있다. 모세는 자신의 어눌한 말솜씨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가질 사명을 가로막는 장벽이라고 생각했다.
이사야의 ‘장애’는 한편으로 자신을 정결케 하는 죄에 대한 고백이라고 여겨지며, 또한 하나님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의 은총을 불러드리는 고백으로까지 연결되고 있다. 이사야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그에 대한 비난이나 혐오가 아니라, 그의 장애물을 제거하시는 것이었다. 한 스랍이 와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하였고 그에 따라 그의 죄악도 사함을 입었다. 나중 구절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의 허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언급한다. 자신의 허물이나 결점에 대해 얼마든지 변호하고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음에도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다가간 이사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한다.
본문구절은 하나님께 다가가는 태도를 잘 보여주는 모델이 된다.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문제를 영적으로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의 관계를 어긋나게 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자신의 허물인 인격의 장애를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찬양한다!!
덧붙여 교회 안에 있는 우리 목회자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거기에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사야는 제사장가문의 출신이었다. 제사장인 그는 빈번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장소에 늘 있었다. 오늘날에 그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오늘 우리가 우리의 예배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과연 이상스러운 일인가?
요한복음 3:1-17절, 위험한 탐구
니고데모는 그 밤에 감히 예수를 만날 위험을 감수했다. 니고데모는 종교적 파격을 보이는 랍비를 방문하는 것이 주변의 오해를 충분히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예수를 만나 더 많이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어 그 위험을 기꺼이 감내한다. 만일 니고데모가 더 깊은 진전을 가져오는 탐구를 진행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거듭남(신생)에 대한 고전적인 대화의 기록을 결코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만남에서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주목하기 바란다.
1. 니고데모는 예수에 대한 풍문이나 군중들 틈에서 보여지는 예수에 대한 인상 그 이상의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니고데모가 많은 질문을 가지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니고데모는 영적으로 부유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꺼이 배우고자 질문을 서슴없이 던졌던 사람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 역시도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갖기 위해 좀 더 우리 자신을 바치려고 한다. 우리는 자주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기독교신앙만을 내세우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서있는 그곳에서 우리 각자를 계속해서 만나주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 안에서 더욱 자라가기를 원하는 우리의 수고스런 노력을 축복하신다.
2. 니고데모는 일과 후에 예수를 만나러 왔고, 예수는 군중의 시끌벅적한 눈들을 피해서 그를 만났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 안에 만연한 소그룹사역의 일반화를 경고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의 교회구조 속에서 일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만날 수 있는 공간이 과연 확보되고 있는가? 또한 그들의 신앙의 문제를 상담할 대화장소가 마련되어 있는가? 덧붙여서, 당신의 회중들이 자발적으로 찾아 올 깊은 대화의 공간을 설립할 생각이 있는가? (만일 니고데모가 예약을 잡아야만 만날 수 있었다면 과연 그 대화는 성사가 되었을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것은 대부분의 일상적인 인간관계가 사랑이 수반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수 십 세기를 거쳐 오는 동안에 성육신이라고 표현하는 그러한 사랑에 인류가 경이를 표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부행위나 통치수단 내지는 제국을 건설하는 도구로 잘못되게 사용한 적은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복음 메시지의 중심에서 벗어나 본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설교 예화
1) 마르틴 루터의 아내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도 개혁의 말기에는,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 누워 ‘모든 것이 끝났어!’하며 넋두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 때, 지혜로운 그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상복을 입은 아내를 보고 깜짝 놀란 그는 “아니, 누가 죽었소?”라고 다급히 물었습니다.
아내는 “예,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내의 황당한 대답에, 루터는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무슨 소리요?”라고 소리쳤습니다.
루터의 아내는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안 돌아가셨으면, 당신이 그렇게 누워 있을 리가 없지요.”
이 아내의 말 한마디가 루터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렇지! 살아 계시지.” 그는 벌떡 일어나 그의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2) 인간의 네 번째 생일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삶의 이유와 목적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길가에 부딪히는 돌멩이 하나에도, 이름 모를 풀 한 포기에도,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가 있겠고,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을 것이거늘, 하물며 사람인 다음에야 일러 무엇 하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존재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며,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을 아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고 긴급한 일이다. 어떤 이는 그것을 알게 된 날을 생일에 비유하였다. 일컬어,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데 4번의 생일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두 말 할 나위 없이, 부모로부터 태어난 생일이다.
둘째는, 각자가 반쪽으로 살다가, 자기와 맞는 다른 반쪽을 찾아 하나로 맺어지는 결혼식 날이다.
셋째는, 자신이 이 땅에 살아야 할 존재 이유를 깨닫고, 이 땅에서 수고하며 살아야 할 삶의 목적을 깨닫게 되는 날이다.
구약성서 잠언 16장 4절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목적을 가지고 지으셨다.’고 하였다. 그 많은 존재하는 것들 중에, 나 자신은 무슨 목적으로 지음 받게 되었을까, 그것을 깨닫게 되는 날이 세 번째 생일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네 번째 생일은 어떤 날일까?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하여 말해주고 있는 ‘거듭나게 되는 날’이다. 육으로 난 몸이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곧 땅에 속하였던 사람이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다. 성경은, ‘예수를 평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날’이 바로 그날이라고 일컫는다.
3) 리사이클링(recycling)
쓰레기는 분리 수거되어 버려진다. 처리하기도 수월할 뿐만 아니라, 재활용품으로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원마다 활용되는 기간이 있다. 경제도 일정한 패턴이 있다. 이 기간을 사이클(cycle)이라고 한다.
한 사이클이 지나면 폐기처분되는 물품도 있지만, 폐지나 폐타이어 등은 재생용지나 재생타이어로 활용된다. 다시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를 리사이클링(recycling)이라고 부른다.
사람 역시, 한때 쓰고 버림받을 운명이 결코 아니다. 일정 연령이 차면 은퇴해야 하지만, 고귀하게 제2, 제3의 삶으로 재활용될 수 있다. ‘은퇴하다’의 영어 표기는 ‘리타이어(retire)’다. 닳아버린 바퀴를 새 바퀴로 바꿔 달듯이, ‘새로 거듭날 수 있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리사이클링을 잘하면, 자연환경이 맑아진다. 리타이어링을 잘 활용하면, 사회는 골고루 건강해진다. 모두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4) 승자와 패자
승자는 문제 속으로 뛰어들고, 패자는 문제의 주변을 맴돈다. 승자는 눈 쌓인 벌판을 밟아 길을 만들고, 패자는 쌓인 눈이 녹기만을 기다린다. 승자의 주머니 속에는 꿈이 있고, 패자의 주머니 속에는 욕심이 있다. 승자는 등수나 포상과는 상관없이 달리나, 패자는 포상만 바라보고 달린다. 승자는 달리는 도중에 이미 행복감에 젖어 있으나, 패자는 경주가 끝나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 이규용의《아들아, 인생의 큰 그림을 그려라》중에서 -
5) 과유불급(過猶不及)
얼마 전, 어떤 식사 자리에서 교계 원로 목사님 한 분이 식사 도중 수저를 놓으시더니, 그 이후 제공되는 음식을 일절 안 드셨다. 함께 식사하던 분들이 “왜 그만 드십니까?”하고 물으니, “더 이상 먹는 것은 백해무익한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분의 지론인 즉, 몸에 아주 해로운 것이 ‘과식’이라는 것이다. 조금 모자란 듯 먹어야지, 배부르게 잘 먹으면 필요 이상의 것이 체내에 들어가 모두 뱃살, 즉 배에 기름만 끼게 된다는 지론이었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원로의 단호한 결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분은 팔순을 바라보는데 매우 건강하시다. 식욕을 비롯한 모든 생활에서, 절제하고 욕심을 버려야 건강해지고, 영적으로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씀이셨다. 사람은 필요한 음식의 120%를 섭취하고, 우리가 욕하는 돼지는 80%만 섭취한다고 한다.
올해는 어떤 욕심이든지 좀 절제하며 살면 좋겠다. 그것이 식욕이든, 물욕이든, 명예욕이든…. 성경이 이 원리를 말하고 있고, 옛글에도 과유불급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김경원 목사(서현교회)
6) 탐욕의 무덤
광야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공급을 경험하며 기적과 더불어 살았다. 하늘양식 만나를 매일 아침 공급받았고, 반석에서 터져 나온 생수를 마셨다. 하지만, 그들은 만족하며 감사하기보다 고기를 요구했다. 더 나아가, 과거의 애굽 종살이를 미화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광야의 메추라기를 몰아주었지만, 결국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도 전에’ 그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셨다. 욕심을 내었던 자들이 그 광야에서 장사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장소를 ‘기브롯 핫다아와’, 즉 ‘탐욕의 무덤’이라 칭하게 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넉넉한 자들이 작은 것을 탐하다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는 말씀의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