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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유적지/ 동,식물 스크랩 갈릴리호수(바다)와 요단강
olivesan 추천 0 조회 265 08.05.01 14: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갈릴리호수(바다)
 

 
Lake Tiberias라고도 함. (아)Buhayrat Tabariya (히)Yam Kinneret.
이스라엘에 있는 호수.
요르단 강이 흘러들어 가는 곳이다. 1948~67년 북동쪽 부분이 시리아와의 휴전선에 바로 맞닿아 있었으며 성서와 연관되어서도 잘 알려져 있다. 호수 표면은 해수면보다 209m가 낮으며 표면적은 166㎢이다. 가장 깊은 곳은 북동쪽 부분으로 최고 수심이 48m이다. 남북길이가 21㎞, 동서길이가 11㎞에 이르며 배 모양을 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나오는 이름은 긴네렛(긴네롯)이었으나 BC 6세기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추방된 이후에는 겐네사렛(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렀다.
쾌적한 기후, 평평한 지형, 기름진 토양, 그리고 비교적 물이 풍부하다는 조건 때문에 갈릴리 호로 흘러들어가는 강들과 가까이 있는 평야들은 역사를 통해 여러 민족의 생계의 바탕이 되어왔다. 호수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엘우베이디야에 있는 40만~50만 년 전쯤의 호상(湖上) 구조물에서는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시기에 속하는 선사시대의 도구와 2개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가나안(고대 팔레스타인) 시대에 만든 구조물들은 BC 1000~2000년에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AD 1세기 무렵 이 지역은 번창했고 인구도 많았다. 유대 역사학자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호수 가까이에 있던 고대 9개 도시에 대해 쓴 적이 있으나 남아 있는 것은 티베리아스(디베랴)에 관한 내용뿐이다. 서쪽 해안에 있는 티베리아스는 유대인들이 신성하다고 여기던 4개 도시 가운데 하나였고, 북서해안에서 가까운 카페르나움(가버나움)에는 2~3세기경 지은 유대교 회당이 남아 있다. 이 회당은 갈릴리 지역에서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드루즈파(이슬람교·유대교·그리스도교의 요소들을 포함한 교리를 따르는 독립 종파로 11세기에 만들어짐)의 성전이 서부 해안 부근 케파르히팀 가까이에 있다. 갈릴리 호는 예수가 살아 있는 동안 많은 일화를 남긴 장소로서 그리스도교도들에게 특히 잘 알려져 있다. 1909년에 세워진 첫번째 유대인 키부츠인 데가니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갈릴리 호는 요르단의 대침하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에서 북서쪽으로 겐네사렛 평원이 둥근 곡선을 그리며 뻗어 있고 북동쪽으로 시리아의 베트자이다(부테이하) 평원이 뻗어 있다. 서쪽과 남서쪽 호수 가장자리에는 갈릴리의 가파른 구릉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중동부쪽에는 골란 고원의 절벽들이 솟아 있다. 고원과 연결된 남동쪽의 가파른 지형은 호수에서 남쪽으로 몇㎞ 떨어진 곳에서 요르단 강과 합류하는 야르무크 강 유역에 이르면서 점점 넓어지게 된다. 남쪽으로 요르단 강 줄기가 흘러가는 좁은 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알가우르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 지역 대부분은 약 2,600만 년 전쯤 시작된 마이오세(世) 이후 형성된 현무암지대로, 시리아에 있는 광활한 두루즈 산맥 일대에 연결된다.
마이오세가 시작된 이래 호상(湖上) 석회석과 이회토(석회질토)가 퇴적되었다. 동아프리카 지구대(地溝帶) 일부로 요르단 해구를 이루는 리프트벨리가 갈릴리 호 동쪽을 통과하며, 서쪽은 단층들로 이루어져 있다. 해구를 이루는 침하지대는 700만~250만 년 전의 플라이오세(世) 말기에 이루어졌으며 호수와 강의 침전물이 다시 일부에 퇴적되었다. 신생대 제4기(250만 년 이전) 습기 찬 시대 동안 사해(死海)가 이 지점까지 확장되었고, 지각운동이 일어난 플라이오세 중기(약 125만 년 전)에는 용융상태의 현무암 줄기가 야르무크 강 유역을 통해 침하지대 아래 끝부분까지 이르렀다. 약 2만 년 전에 있었던 마지막 우기시대 동안 리산 호(湖)라고 부르는 커다란 호수가 이 지역에 생겨나면서 이회토 구성물이 퇴적되었다. 그 후 물이 줄어들고 요르단 강물이 현무암 광상에 막혀 저수되면서 현재의 호수가 형성되었다.
주변지역으로 감싸인 위치, 낮은 고도, 호수라는 지형조건 때문에 겨울에도 1월평균기온이 14℃가 될 정도로 온화한 날씨가 계속된다.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없어 대추야자·감귤류·채소류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름은 평균기온 31℃로 더운 편이며 강우량(데가니아에는 거의 380㎜)은 50일이 채 안 되는 겨울 동안 세찬 소나기가 짧은 기간 내려 충당된다. 대체로 바람은 호수와 육지 양쪽 방향으로 매일 번갈아 부는데, 특히 여름의 경우 아침에는 호수에서 육지쪽으로, 밤에는 그 반대방향으로 바람이 분다. 겨울에는 요르단 침하지대로 돌풍이 몰려와 갈릴리 호에 폭풍우를 일으키기도 한다.
갈릴리 호는 요르단 강에서 흘러들어 오는 물줄기를 조절하고 끌어들여 주된 수원으로 삼는다. 갈릴리 구릉에서 갈릴리 호 쪽으로는 암무드 강과 잘몬 강 같은 작은 영구하천, 그리고 와디인 아르벨 강 등 북서쪽에서 시작되는 물줄기가 흐른다. 골란 고원에서도 4개의 중간 크기의 강줄기가 흘러내린다. 갈릴리 호에 이어진 강들과 갈릴리 호 바닥에는 많은 광물이 묻혀 있다. 이 광물들과 강한 증발작용 때문에 갈릴리 호의 물은 비교적 짜며 계절적인 변화가 있지만 여름과 가을에 염도가 가장 높다.
갈릴리 호에서 발견되는 어류는 동부 아프리카 호수의 어류와 비슷한 생태를 보인다. 자리돔·비늘없는 베도라치·메기·마우스브리더·돌잉어 종류가 있으며 회유어들도 찾아든다.
주변지역의 농업이 발달하면서 동물들의 생태도 변화를 겪고 있다. 이전에 많았던 야생 멧돼지들이 크게 줄어들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
몇 세기밖에 되지 않는 동안 북서쪽 겐네사렛 평원과 남쪽 데가니아 주변지역은 관개와 집약농경 방식을 통해 체계적으로 발달해왔다. 어업 또한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동부해안에 있는 티베리아스·겐네사렛·엔게브는 어업중심지로 특히 잘 알려진 곳이다. 매년 모터보트나 트롤선으로 1,000t에 가까운 어획량을 기록한다. 정어리는 다른 큰 고기들과 함께 주로 겨울에 잡힌다. 온천이 있어 현대식 건강 휴양지를 만들었다. 티베리아스에 있는 온천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훌륭한 겨울 휴양지로 손꼽힌다. 엔셰바(밧세바의 일곱 샘)라고도 부르는 북서쪽 해안의 타비가에도 비슷한 온천이 있다.
1960년대에 이스라엘 정부는 갈릴리 호에 송수용 수로를 만들었으며 그 후 여기에서 시작되는 큰 운하가 요르단 강에서 네게브 사막 남쪽은 물론 해안지대까지 물을 수송하게 되었다(→ 킨네레트-네게브 수로). 호수면은 강하류에 세운 댐으로 약간 높아졌다. 요르단 강하류로 흐르는 물은 수력발전에 쓰이며 일부는 호수면에서 240m 가량 되는 높이까지 파이프로 퍼올려진 다음 흡입관을 통해 암무드 강과 잘몬 강 하곡을 가로질러 이스라엘 서부지역을 관개하는 데 공급된다.
호숫가에는 작은 시장도시가 여럿 있다. 상품과 승객 수송은 주로 이들 도시를 이어주는 모터보트를 통해 이루어진다.
 
南玉京 옮김

 
                                                  요단강


                          헬몬산 갈릴리 바다, 요단강 발원지 동굴

 


                              갈릴리바다 남쪽에서  요단강으로

 


요단강이 흘러 사해로

 


                                         사해로 흘러들어감

 

요단강


요단강은 수원인 북쪽의 갈릴리 호수로부터 출발하여 사해로 흘러드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영구하천이다. 이 강은 동쪽의 요르단지역과 서쪽의 가나안 땅을 나누는 자연적인 경계선이 기도 하다. 요단강 주변 지역은 삼단식 계단구조로서 맨 위쪽은 경작과 취락이 가능한 평지 로서 고르라고 불린다. 중간 지대는 사막이나 다름없는 불모지이다. 맨 아래쪽은 요단강가로 조르라고 불리는 밀림지역이 형성되어 맹수가 출연하는 지역이었다(렘 49:19). 갈릴리~사해까지는 100km 이다. 사행천인 요단강의 길이 320km(비교: 한강 514km)이다. 

 

<지질과 지형>

 

1) 범람원, 충적토이다.

<렘 12:5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 욥 40:23 하수가 창일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놀라지 않고 요단 강이 불어 그 입에 미칠지라도 자약하니>

 

2) 물이 부족하고 여름에는 50도를 기록하는 무더운 날씨해서 거주지로는 적당하지 않다.

강의 물은 조르(zor)라는 덤불과 낮은 지역으로 인해 거주지로 이용하기가 어렵다.

 

3) 요르단의 야수, 정글 지역이다.

<렘 49:19 보라 사자가 요단의 수풀에서 올라오는 것같이 그가 와서 견고한 처소를 칠 것이라 내가 즉시 그들을 거기서 쫓아내고 택한 자를 내가 그 위에 세우리니 나와 같은 자 누구며 나로 더불어 다툴 자 누구며 내 앞에 설 목자가 누구뇨>

 

4) 홍해만큼이나 건너기 어려운 강, 강은 해수면보다 낮다.  

성경상으로 요단강은 요단강 도하(수 3)사건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강을 건넌 때는 보리를 수확하는 시기이므로(수 3:15) 3월이나 4월로서 봄이었다. 요단강은 평상시에는 폭이 약 27-30m이며 깊이는 약 1-3m이지만 봄에 늦은 비가 내리면 요단강 하류부근은 강물이 넘쳐 홍수를 이루게 되어 그 폭과 깊이는 더해지고 급류를 이룬다. 이때 강을 건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마도 여리고성의 왕이 이스라엘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고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은 그 무렵에 강을 건넌다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나 좀더 건너기 쉬운 상류 쪽에 군사들을 배치해두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쪽의 평지를 내려와 밀림지대를 통과하고 마른 땅이 된 요단강을 건너 다시 여리고 평지를 향해 올라가야 하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을 것이다.

 

 

<요단강 서안지역 >


요단강과 사해 서쪽지역에 해당되는 요단강 서안지역은 그 면적이 5860㎢정도이며 현재 210여만명의 아랍인이 그곳에 살고 있다. 요단강 서안지역은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영토 반환의 핵심 지역으로서 팔레스타인의 대이스라엘 테러가 계획되고 감행되는 지역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이 대대적인 테러범 소탕작전을 벌이는 지역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사마리아 벧엘 헤브론과 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를 순례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테러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단강 서안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거나 혹은 무력 행사 등 테러를 서슴지 않는다. 이유는 관광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간접적으로 돕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중동평화회담의 핵심 사안인 요단강 서안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군의 철군 문제는 다른 중동평화문제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강제 점령은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선언후 요르단에 의하여 감행되었다.요르단은 요단강 서쪽 지역과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이스라엘과 대립하였다.그러나 1949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소위 ‘녹색선’(the Green Line)이라고 불리는 경계선이 형성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요단강 서안지역’이라고 불리는 지역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이곳에 아랍인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그런데 요르단이 이스라엘과의 휴전협정을 어기면서 1952년 이 요단강 서안지역을 일방적으로 요르단 영토에 편입시키고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요르단 시민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67년 6일전쟁에서 완승을 거두고 요단강 서안지역과 동예루살렘을 점령한뒤 동예루살렘은 자국에 합병시켰으나 ‘요단강 서안지역’은 합병하지 않고 단지 군사적 점령지역으로 남겨두었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베긴 총리 정부가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규모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스라엘 주택성장관은 샤론이었다.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한 결과 요단강 서안지역에는 140여곳의 정착촌이 건설돼 20여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게 되었다.1978년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도 요단강 서안지역에서의 팔레스타인 자치권 확보를 위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목표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이 대이스라엘 무장 테러를 시작한 것은 1982년 ‘레바논 전쟁’ 이후부터이다.레바논 전쟁은 레바논을 거점으로 테러를 일삼는 PLO 본부를 섬멸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의도가 기폭점이 됐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안지역에 군사계엄령을 선포하고 병력을 증가시켰다.요단강 서안지역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극한 대립은 점점 고조되었으며 특히 1987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민족봉기(인티파다)가 발생했을 때 요단강 서안지역은 인티파다의 중심지가 되었다.

1993년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된 ‘오슬로 평화협정’은 이러한 양측의 첨예한 대립관계를 종식시키는 듯하였다.이 평화협정에 의하면 요단강 서안지역에서 팔레스타인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단계적으로 요단강 서안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1998년까지 철수하고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모든 권한을 팔레스타인에게 넘겨주어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이 자치정부를 수립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평화협정문에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여리고로부터 철수하는 시점부터 5년간의 과도기간을 가지며 과도기간 3년안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최종협상을 하되 그 협상에서 예루살렘 문제,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정착촌 문제,국경문제 등을 다룬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평화협정에 조인하면서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자치정부가 테러와 그밖의 모든 폭력행위를 배격하고 그 위반자를 징계해서 팔레스타인내의 모든 구성원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 협상과정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현격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즉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가 보장된 이후에 요단강 서안지역을 팔레스타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선안보 후반환’을 주장한 반면 팔레스타인측은 ‘선반환 후협상’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96년에 들어서면서 팔레스타인의 대이스라엘 테러행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수단에 대한 자살테러가 감행되면서 이스라엘 국민은 팔레스타인측의 평화협정 준수 의지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반면 팔레스타인측은 이스라엘이 선안보를 주장하는 것은 영토를 반환할 의사가 없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테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모든 책임을 이스라엘측에 떠넘겼다.

이러한 양측의 뚜렷한 입장 차이는 수십차례의 평화회담에도 불구하고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이러한 과정에서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개최된 최종 협상에서 양측이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 하자 같은해 9월 ‘요단강 서안지역’을 중심으로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고 이에 이스라엘 안보에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의 에후드 바라크 총리는 2000년 10월22일 중동평화회담의 전면 중단을 선언하였다. 2001년 2월 강경파인 샤론이 이스라엘 총리로 집권하였고 계속되는 팔레스타인의 테러 행위를 뿌리뽑기 위하여 그 동안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해 있었던 ‘요단강 서안지역’에 대한 재점령에 나섰다.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난 3월 예닌 사태가 발생했다. 이러한 입장 차이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상호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 서로 책임을 공감하기보다 국내 정세에 따라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평화는 요원하다. 진정한 평화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양측간의 상호 신뢰회복이 선결과제이다. 

 

 

출처 : 양지말 로뎀나무  |  글쓴이 : 輝景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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