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들아 그때는 엄마가 미안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 오래전 일이라 기억을 못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미안했다. 사과할게.
두 살 터울의 두 아들을 낳고, 힘든 육아 시기를 보냈다.
직업군인으로 또 부부군인으로 남편과 떨어져 지냈다. 군인 아파트에서 이웃에게 아이를 맡기고
출퇴근을 했다. 강원도 오지에서 근무할 때는 부대 안 낡은 관사에 살면서 돌봐줄 사람을 못 구해서
힘들었던 때도 있었다.
결국 딸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다 못한 부모님이 큰 아이를 데려 가셨고 둘째 아이가 태어난 후
둘을 맡아 키워주셨다.
큰 아들!
유치원 때 엄마가 빰 때려서 미안했다.
친정집에서 두 아이를 키우다가 부모님이 힘들어하셔서 무턱대고 큰 아이를 데리고 왔다.
고정으로 돌봐주는 사람을 못 구해서 어린이집에 보냈다. 당직근무를 서거나 훈련이 있을 때가 문제였는데
좋은 이웃분의 도움도 받고 남편과 교대로 시간을 맞춰 가며 아이를 돌봤다.
아이가 여섯 살 때쯤 어린이집 행사에 참석했는데.. 줄을 서서 기념품을 받아야 했다.
여름이라 덥고 지루해서인지 아이가 자꾸 자리를 벗어났다. 빨리 사무실로 들어가야 하는데 속 타는 마음도
모르고. 두 어번 얘기를 했는데도 자꾸 자리를 벗어나니 순서가 자꾸 뒤로 밀려났다.
초조함에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아이를 나무라며 뺨을 한 대 때렸다. 아이는 울었고 더 화가 나서 아이를
데리고(끌고) 왔다.
후일 잠자리에서 문득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유치원 때 친구들 보는 앞에서 엄마가 때려서 자존심이 얼마나 상했는지 알아?"
아이는 기억하고 있었고 상처가 있었다. 깜짝 놀랐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말에..
"그때는 네가 엄마 말 안 들어서 그랬잖아. 엄마 부대 들어가야 하는데.." 얼버무리며 급 사과를 했다.
둘째 아들!
그때 욕한다고 때려서 미안했다.
아이가 다섯 살 무렵이다. 집에 놀러 온 친척을 배웅하고 오는 길이었다. 애들끼리 토닥거렸는지? 뭐가
못마땅했는지 누구에게 그러는지 심한 욕을 한 마디 내뱉었다. "씨 x" 깜짝 놀랐다.
어디서 그런 심한 욕을 배웠는지.. 무슨 뜻인지 알고나 하는 건지?
초장에 욕하는 버릇을 고쳐야겠다 싶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방으로 아이를 끌고 와서(?) 매를 들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욕했어? 누가 그런 욕하데? "
정신없이 나무라며 매질을 했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몇 대 때리니 아이가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운다고 더 때렸다. 다시는 욕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고 나서 아이를 풀어줬다.
아이를 감정적으로 때린 것 같아 금세 후회를 했다. 훈육의 의미도 있지만 스트레스가 폭발해서 아이에게
화풀이를 한 것도 있었다.
회초리 자국으로 벌게진 아들의 다리에 약을 발라주며 울었다.
아들은 그때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에 느꼈을 상처와 공포를 생각하면 미안하고 부끄럽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아들아 엄마가 미안했다.
맞고 자란 기억은 별로 없다. 부모님이 체벌하지 않았고 회초리 들기 전에 잘못했다고 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아들은 엄하게 (?) 대했다. 남편이 너무 부드럽고 자상해서 애들 버릇이 나빠진다고 생각해서인데
그건 착각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육아서도 읽고 공부도 하면서 내 육아법이 잘못된 것을 알았다.
배우 김혜자 님이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는 책도 읽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야 할 아이를 회초리로
때렸으니 얼마나 무식한(?) 엄마였는지 반성했다.
'한 대 맞고 말을 듣는 아이는 다음번엔 두 대를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글을 읽고 충격도 받았다.
그 후 아이에게 회초리를 들거나 손을 대지 않았다. 속은 터졌지만 말로 타일렀다. 윽박지르기는 했지만.
주변에 아이를 때리면서 키워야 한다는 사람에게는 그 얘기를 들려줬다.
절대 때리지 말라고, 때리는 훈육은 성공할 수 없다고...
두 아들은 어려서의 아픈 기억을 잊었는지 잊은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 엄마가 미안했다고... 그땐 잘 몰라서 그랬다고.
어려서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은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공포스런 선생님을 본 후
깨졌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한다. 박 OO
그가 아이들을 때리는 도구는 신고 있던 슬리퍼였다. 숙제를 안 해오는 아이를 앞으로 불러 세웠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는 아이의 왼쪽 뺨을 꽉 잡고 "어금니 꽉 깨물어."
그리고 눈을 감은 아이의 오른쪽 뺨을 슬리퍼로 갈겼다. "찰싹"
교실의 아이들은 숨을 죽이며 공포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끔찍했다.
'저런 무서운 선생님이라면 난 선생님 안 할 거야.'
꿈도 직업도 바뀌었다. 선생님에서 군인으로.
남편도 그런 선생님이 있다고 했다.
여 선생님이었는데 플라스틱 자로 손톱 끝을 때렸다고 했다. 엄청 아팠다고... 그 이름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수 십 년이 지났지만 또렷이 기억되는 상처이고 공포다.
우리 때는 그랬다. 선생님한테 맞아도 집에 가서 얘기도 못 했다. 말 안들었으니 맞았을거라며
선생님 편을 드는 부모님이 많았던~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절 얘기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말해야 한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이런저런 실수와 잘못을 했다고.
아들에게 상처를 준 것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고.
늦은 후회와 사과를 받아달라고.
지난날의 실수와 상처 준 일들이 생각난다.
상처받은 일 보다 더 많이.
하나씩 사과 해야겠다.
잘못을 사과할 줄 아는 용기를 내어 볼 때다. 상대가 자식일지라도.
김태선의 브런치입니다. 전직 직업군인(육군대위 전역),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등 26년의 직장생활 후 퇴사, 현재는 텃밭 농사를 지으며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중년 여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