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六臣
2. 각자의 행동 ¶
- 김시습 : 호는 매월당. 8개월에 글을 알고, 5살에 중용과 대학에 통달하여 세종이 찬탄한 천재였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삼일을 통곡하고는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1],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서울 노량진에 암장했다고도 하고, 엄흥도와 함께 단종의 삼년상을 치렀다는 말도 있다.
공주에 동학사 숭모전을 지어 사육신의 초혼 제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다음해(1457년) 세조가 동학사에 들렀다가 초혼단을 보고 감동하여 팔폭 비단에 억울하게 죽은자들의 명단을 적어 유교와 불교 양식을 섞어 제사를 지내도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정말?남효온, 김종직 등과 교류했다. 이미 중종때 이조 판서, 선조때 전기가 쓰여지게 되는 등 빠르게 복권되었다. - 성담수 : 자는 미수(眉叟) 또는 이수(耳叟), 호는 문두(文斗)이다. 성삼문의 육촌 동생. 사육신의 난에 얽혀 고문 받고 김해로 귀양을 갔다가 풀려났다. 아버지 역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그로 말미암아 사망. 세조는 그에게 감시 목적으로 참봉, 봉사 등의 관직을 내렸지만 받지 않았다. 벼슬을 단념하고 파주의 외진 곳에서 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며 일생을 낚시와 독서로 소일했다. 사후 정숙(靖肅)의 시호가 내려졌다.
- 원호 : 문종 때 집현전 직제학에 이르렀다. 단종이 수양 대군에 의해 영월로 쫓겨가자 세상과 접촉을 끊고 살았는데, 단종이 살아있을 때에는 조려, 이수형과 함께 영월을 찾아 관란정(觀瀾亭)에 유숙하며 단종의 문후를 드리기도 했다. [2] 1457년 단종이 죽자 원주에 내려가 있는 것을 세조가 호조참의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생전에 손자 원숙강(元叔康)이 출사하였으나 예종 때 사관으로서 〈세조실록〉편찬에 참여하던 중 직필로 인해 살해당하자, 자신이 쓴 책을 모두 소각하고 자손들에게 글을 읽어 명리를 바라지 말라고 타일렀다 한다. 은거중인 선비 원자허가 꿈에서 사육신과 단종을 만난다는 줄거리의 소설 원생몽유록의 주인공이다. 자허(子虛)는 원호의 자. - 이맹전 :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거창 현감 등을 지냈다. 세조의 찬탈 후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났다.[3]그 후 선산으로 내려가 김종직 등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훗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조려 : 호는 어계. 단종 원년 성균관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명망이 높았다. 그 뒤 국자감에 입학하여 학문 연구를 하던 중 세조가 즉위하자 바로 고향 경남 함안 원북에 은거했다. 단종이 살아있을 때에는 원호, 이수형과 함께 영월을 찾아 단종의 문후를 드리기도 했다. 사육신의 난이나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 등에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문후, 문상을 자유롭게 드리는 등 국문을 받지 않은 걸 보면 근거는 없다.
단종이 사사당하자 문상을 하러가던 그는 영월 청령포 앞에 이르러 배가 없어 통곡하였으나, 호랑이가 나타나자 조려가 호랑이를 보고 "네 녀석이 충절이라는 것을 안다면 내가 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울 수 있느냐" 며 하소연하자 호랑이가 그를 등에 업고 영월 동강을 도강하여 문상했다는 야사가 있다. 3년간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벼슬을 받지 않고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사후 시호는 정절(貞節) .
3. 남효온, 권절의 포함 여부에 대한 논쟁 ¶
- 권절(權節, 1422~1494)은 집현전 교리로 용력이 남다르고[4] 무예와 학문에 두루 뛰어나 세조가 계유정난 전부터 끌어들이고자 한 인물이었으나 이를 거절[5]하였고, 이후 세조가 그를 다시 등용(계유정난 이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발탁되고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나 조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다시 첨지중추부사(!!)[6]의 벼슬을 내렸다)하려고 하니 평생 귀머거리에 실성한 척을 하다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시호는 충숙.
- 남효온은 수양대군의 쿠데타인 계유정난이 일어난 1년 후에 태어났고,(1454년생) 단종에 사망했을 때는 4살이었다. 그러니까 단종, 세조 치세에는 어린아이였다. 그런 남효온이 삼육신 계통에 포함된 것은 남효온의 스승이 바로 '조의제문'을 지어서 나중에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는 김종직이며, 그 김종직의 글을 사서에 넣었던 김일손과는 사형제가 되기 때문. 이렇게 생육신은 사림파와 직통으로 이어진다.
다만 남효온 자신은 세조에 의해서 물가로 이장된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릉인 소릉을 이전해야 벼슬에 나가겠다고 했다가 바로 대신들에 의해서 무시당했다. (김종직은 세조때 이미 출사한 상황이긴 했었다.) 이후 주변의 반대를 무릎쓰고 전기소설 육신전(六臣傳)을 저술하는 등의 행적을 보이며 방랑생활하다가 사망하여 생육신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무오사화 때는 이미 사망한 이후이지만 김종직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 이전을 청원한 것으로 인하여 부관참시 당했다.
역시 태어난 시기 때문에 생육신에 넣기가 애매한 것도 사실이며, 당대의 절의의 주요도로서는 권절이 더 높다. 그러나 육신전을 짓는 등 기록을 남겼으며, 또 김시습을 제외하면 제일 네임드인 것도 사실(...)생칠신 어떨까
4. 기타 ¶
사육신이라는 말부터가 남효온의 "육신전"이라는 정의에서 비롯되었으며, 생육신 또한 나라에서 정한 공식 명칭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생"육신" 역시 사육신보다 훨씬 더 짜맞추어진 감이 있다. 김시습, 성담수, 원호, 남효온은 정조때 모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봉향되었으며, 일찌기 숙종 때인 1706년 이들 여섯명이 조려가 배향된 서산서원에 봉향되었다. 이것이 생육신의 유래로 추정되며, 그런 만큼 조려에게도 여러 야사와 행장이 따라 붙어있다.
그 외 앞서 거론된 이수형[7]이나, 단종을 묻은 호장 엄흥도 등도 절의를 지킨 주요 인사로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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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만 47세에 안씨의 딸을 맞아들여 아내로 삼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 [2] 이들은 치악산에 올라가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을 것을 굳게 맹세하고 치악산 정상에 이름을 나란히 새기기도 했다.
- [3] 일부 야사에서는 세상을 볼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아예 평생 눈을 감고 장님 행세를 했으며, 90살의 나이로 죽기 직전에 눈을 뜨기 전까지는 가족들조차 그게 진짜인 줄 알았다고 한다.
- [4] 힘이 꽤 셌는데, 야사에서는 집안 기둥을 들어올렸다고 할 정도였다. 누이도 마찬가지로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 [5] 세조가 직접 찾아와 노려보듯 이야기하자 "소신이 귀가 안 들리는 탓에 잘 못 들었사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대답을 피했다. (즉 거부한 셈.)
- [6] 앞의 통정대부와 첨지중추부사는 각각 문반과 무반 품계란 차이만 있을 뿐 정삼품 당상관에 해당된다.
- [7] 음보로 관직에 올라 선교랑(宣敎郞) 전생서령(典牲暑令)을 거쳐 조봉대부 평시서령(平市署令)이 되었다.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 경상도 영천 도촌리로 은거하였다. 단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산으로 들어가 삼면은 벽이고 북녘으로 문이 있는 집(공북헌)을 짓고 평생을 숨어 살았는데, 이는 단종의 장릉이 영천의 북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북.. 북향집!21살에 은거해 73년간을 단종을 추모하며 상경하지 않다가 중종 23년이 돼서야 죽었다. 철종때 돼서야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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