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춘천 자전거 종주 외 9편 / 박은우
굽이치는 북한강 물길 따라 산길 따라
연둣빛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4월 하순
봄바람의 애무가 첫 키스처럼 달콤하다
갈래머리 소녀의 심장으로 물길을 달리는 자전거
헐떡일 때 진한 향이 더욱 붉어지던
내 안에 표본화된 소녀가 앞서 달린다
향기로운 여인은 뒷모습이 더 아름답다
표본실을 빠져나온 소녀는
젖가슴이 탱탱한 처녀가 되었다가
엉덩이가 푸져서 매혹적인 아줌마가 되었다가
은발이지만 도톰한 허벅지가 푸근한
훗날에 있을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는
봄바람이 주는 환상으로 파랗게 달린다
호수가 된 강이라서 새소리 더욱 도드라지고
바람도 순한 연둣빛 북한강
더러는 숨이 차서 필름이 끊기기도 하지만
언덕에 오르면 새소리 더욱 청아해
어느 누덕 진 겨울을 꿰맬 때 쓰기 위해
악마의 독한 얘기를 알기 전의 감성으로
실꾸리에 뻐꾸기 소리를 감아둔다
나비와 민들레와 제비꽃과 노닥거리며
세월의 속도를 늦추어 보는 자전거
춘천 호반의 물길은 새싹처럼 부드러워
바람은 가만가만 나비를 따라다니고
갈아엎은 이내 가슴에는
훗날에 쓸 파란 그리움이 촘촘하게 돋아난다.
제주도 자전거 일주
삼월 초순의 제주는 이미 가슴이 봉긋하고
향기 제법 상큼해진 비바리가 되었구나
애마도 신이 난 듯
단숨에 용두암을 삼키고 애월 한림을 누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남풍이 떼 지어 춤을 추고
장다리 노란 꽃물에 낡은 무릎이 젖는다
달음질로 살던 시절
몇 번이나 돌아본 제주지만
잔잔한 감동으로 영혼을 얼러주는
이런 길은 알지 못했으니
느림의 아름다움 그 본질인가
소라 향 맘껏 마시며 물 위를 미끄러져간다
천국에도 시험은 있다는 걸
가파른 중문 고개가 심장을 시험한다
생각조차 버거워 다 버리고 오르는 길
고갯마루에서 남풍이 빙그레 웃는다
성산포 해의 집을 지나 4·3 기념관
카멜레온의 거짓말들이 켜켜이 싸여 있는 곳
침묵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아
눈으로만 합장을 하고 바다를 향한다
한라산 하얀 머리에서 구름을 껴안고
백설공주에게 이별을 준비하라는 삼월의 여신
남국의 성수를 뿌려 곶자왈*
을 적시는구나
이제 신선이 아닌 나는 똥이 마렵다
세월호*
야 밤새 어둠을 헤쳐
개똥밭 같은 서울로 돌아가자.
* 곶자왈 : 가시덤불과 나무들이 혼재해 있는 제주도 한라산의 암괴지대
* 2014년 3월 초순에 인천-제주간 세월호를 이용하여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해 4월 16일 비운의 세월호 침몰사건이 발생하였음. 한 달만 늦었어도… 아찔!
섬진강 자전거 종주·2
옥정호 명경明鏡으로 심장을 점검하고
섬진강을 통째로 담아가기 위해 몸을 푼다
4대강에 들지 않아 모가지가 성한 강
흰 바위가 바람의 음률을 음미하면서
끊임없이 물의 등을 토닥여주는 소리
청매실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세살배기 아이처럼 싱그럽게 귀 기울이는 곳
태고적 소리가 지리산을 타고 내려와
섬진섬진 모여 않아 은모래 찜질을 한다
휘감아 도는 내력을 바위마다 새겨두고
때로는 조잘조잘 속닥이는가 하면
은둔하는 철학자처럼 웅덩이에 누워
멍 하니 나비들의 날갯짓을 바라보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걸어가는 곳
이윽고 바다가 마중을 나오는 하동 땅에 이르러
소금기를 머금고 득도의 길로 접어든다
머무른 듯 흐르다가 밤이면 별을 품고
뱃속 가득 은어를 품은 은하수가 되는 강
젖가슴 싱그러운 처녀의 살내음이 난다
노을빛이 윤슬로 부서져 그리움이 되는 곳
쇠가마를 빠져나온 사람들이 도란도란 모여앉아
해풍으로 불머리를 식혀가며 별빛에 젖는 곳
해풍으로 고단함을 씻어낸 자전거도
내일에 쓸 그리움 아름 품어 안고
정지된 시간 속 천국의 밤을 맞는다.
영산강 자전거 종주
1.
유달산 전설 속으로 승천하던 영산강
이미 모가지가 몇 차례 비틀리면서
내장이 시커멓게 타버렸다
거꾸로 흐르고 싶어진 강의 심정을 헤아려
목포에서 담양까지
아픔을 추스르며 거꾸로 달린다
2.
꿈에서도 탄식의 날 예감했던가
아픈 역사를 움켜쥔 몽탄대교를 지나
혀를 빼물고 오른 느러지전망대
백제의 슬픈 역사가 굽이쳐 흐른다
물결치는 낮은 능선들의 조용한 함성
빼앗긴 그들의 심정이 내 심정인 걸
음률이 돼버린 머언 시간 이전의 역사
말달려 대들 힘으로 노래를 불렀던 강
그 역사를 쓰다듬으며 천년을 흘렀구나
3.
전망대를 내려가는 자전거의 라쳇소리
내려가는 길이 행복하다는 걸 가르쳐 준 자전거
나주땅 영산교에서 붉은 노을을 만나
홍어삼합에 뚝배기 두어 사발 주고받으며
백제 복신福信
*
의 안부를 물어보지만
근황을 모른다 하니 저승은 어디 있단 말인가
4.
먼동은 소리 없이 다가와
벙어리 영산강에 성수를 뿌렸구나
젖은 들꽃들이 구슬모자를 쓰고 앉아 빙그레
있는 대로 봐달라는 자연의 바램인가
승촌보에서 비틀어진 강의 모가지를 본다
부러진 쇠골사이로 삐져나온 울음의 흔적들
행동하는 양심을 외면한 채
그저 눈을 감고 달린다
5.
저승사자처럼 보자기를 눌러쓰고
태양에 항거하며 광주 담양으로 향한다
떠도는 원혼들의 울부짖음인가
대숲에서 바람이 바람을 피우는 건가
요상한 소리는 슬프다가 흥겹기도 한 담양
휘어진 강을 따라 달리는 나의 주인
담양댐 뚝방에 앉아 흐르는 구름에 고한다
내가 영산강의 이데아를 가져가노라고.
* 복신福信 : 백제 무왕의 조카로 나당연합군에 백제가 망하자 승려 도침과 함
께 백제부흥을 시도하다가 피살됨.
서울~부산 자전거 종주
1.
단내 나는 문경새재 그 팍팍함이라니
한강을 되감아 잿마루 옹달샘에 밀어 넣고
물결치는 산하를 굽어본다
멍청한 신립장군은 왜 이 좋은 요새를 버리고
탄금대 모래벌판에 역사歷史를 묻어버렸는지
신라의 젖줄 낙동강을 향해
신선의 날갯짓으로 하강하는 행복
문경의 탁배기 한사발로 안동을 끌어당긴다
안동댐 검푸른 물속에서 산 하나를 건져 올려
짝 잃은 새 한 마리 풀어 놓는 얄궂은 보시
물비늘 다독여주는 눈빛으로도 행복한
외짝울음 켜켜이 쌓아가는 삶이겠지
2.
칠곡보 고령보 달성보 창녕보 함안보
강의 모가지를 비틀어 놓은 곳
시체들이 고약한 냄새로 절규하는 곳
하얀 돌맹이와 은모래를 장사지내버린
눈먼 지도자는 일찌감치 사라지고
천년을 이어갈 민초들은 발을 동동 굴러보지만
무성한 역귀 풀만 말없이 시체를 뜯고 있다
3.
굽이돌아 바람은 달려들고
묵은 갈대들의 유령소리 구슬픈 삼랑진
갈매기들이 마중 나와 하얀 손을 흔든다
옥수수수염차로 땀구멍을 메워 주고
불거진 장단지의 심줄을 쓰다듬어 주는데
고향 잃은 물오리 한 마리
아득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4.
이민족에게 대륙을 넘겨준
김춘추의 역한 냄새가 사라지고
강들의 모가지를 비틀어 놓은
이상한 왕도 사라진 하구
전장의 추억 속에서 입사 동기였던
부산 친구 영덕 친구가 빙그레 웃는다
세상은 철없이 바뀌고
강물도 색깔이 변했지만
바다를 향한 흠모의 빛은 똑같은 걸
5.
을숙도를 향해 도열한 벚나무들이
환영의 꽃향기를 뿌려대는 길
간간히 해당화가 붉은 입술로
묘한 웃음을 짓는 낙동강 하구 뚝방길
정감情感 성성한 노을이
을숙도를 품고 잠자리를 고르고 있다
대양을 향해 점프를 준비하는 청년들이
야무지게 바다를 바라보는 가장자리
점프할 수 없는 나는 홀가분하게 마침표를 찍고
맥주 한잔으로 이정표를 접는다.
동해안 자전거 종주·1
어젯밤
밤꽃 향 그윽한 하현달이 찾아와
불현듯
내 가슴에 동해바다를 들여놓았다
이른 아침 강릉행 고속버스
고독한 환희에 절은 자전거를 싣고
무명 빛 새벽을 가르며 동해로 간다
가슴이 잔뜩 부풀어 오른 대관령
바튼 숨소리를 받아먹고 살던 산
이제는 온갖 시선을 받아먹고 산다
희로애락이 어우러진 초록의 군무群舞
바람의 지휘로 연주하고 춤을 추는
초록빛 처녀들의 뮤지컬 오페라
헐거워진 눈빛은 이내 녹아
성근 내 가슴뼈를 파랗게 적신다
동해안 자전거 종주·2
자전거가 수면 위를 달릴 때
바다는
연둣빛 배경음악이 되고
나는
갑옷을 벗은 광대가 된다
땀내 절은 각본들이 하나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팔지 못한 암표들은 새가 되어 날아간다
관객이 사라진 텅 빈 무대
바람에 살랑대는 쓸쓸함이 향기롭다
빈 모래톱에 앉아
캔맥주로 목구멍을 소독하고
회한의 심장을 해부하면서
고비마다 오도송悟道頌을 외고 나면
궤적을 이탈한 무거운 기억들이
제 발로 걸어 나와 바다로 사라진다
동해안 자전거 종주·3
끊임없이 역할이 교차하는
주인과 하인 사이
내가 바튼 숨을 몰아쉬며
한티재를 감아오를 때
자전거는 나의 등에 업혀
고단한 기억들을 지우고 있었다
잿마루에 앉아 춤을 추는 바다를 바라본다
해풍에 밤꽃 향이 춤을 춘다
하현달이 산밤나무 꼭대기에서
매미의 뱃가죽을 만들고 있다
하모니카는 막연한 그리움으로
바람의 장단에 맞춰 온몸을 떨고 있다
살구 빛 추억 하나 바람처럼 빠져나가고
갇혔던 새 한 마리 훨훨 날아간다.
동해안 자전거 종주·4
닳고 느슨해진 나는
어긋나거나 다 못 간 길이었는데
그 길들의 이데아를 찾았으니
더 이상 헤맬 필요가 없는 허무와
이 홀가분함
해쓱해진 하현달이 산을 넘는다
밤꽃 향이 오래된 그리움처럼 가벼워지고
헝클어진 기억들이 가지런해진다
가혹한 슬픔이 남긴 흉터가 이제는
참 이쁘다는 생각
빙그레 웃는 팔자주름 골을 따라
투명해진 날들이 흘러내린다
이슬이 사라지듯
흔적을 남기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그 길 위에서
비로소 나는
형상을 만들지 않는 무른 바다가 된다.
동해안 자전거 종주·5
- 아름다운 중년
자꾸만 뒤집히던 여인의 맹세도
내 가슴속 풍차를 돌려주던 뜨거운 입김도
맥주 거품처럼 소화돼 버린 지금
버거운 야망의 손에 이끌려
사막에서 신기루를 만들었던 기억들이
은하수처럼 흐른다
늦가을의 마지막 한 송이 장미꽃은
왜 그리도 아름다웠던가
외로워서 아름다운 중년
혼자 마시는 맥주거품이 살아온 세월이다
휘어진 자갈밭에서 중년의 밤바다는
탬버린소리를 쏟아내는가 하면
검은 빛 모퉁이 절벽 아래서는
북 치는 소리가 당당하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빛나는 별처럼
조명을 벗어나서 더 아름다운 중년.
ㅡ『우리詩』2016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