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죽음까지 예언한 남사고…천기누설의 응보일까, 부친묘 명당 이장 실패
<8> 예언가 격암 남사고와 유적지
By 김창원 기자 2015.02.24
해가 바뀌면 운세나 사주를 통해 길흉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늘어난다. 인터넷을 통한 무료 운세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도 많아져 재미로 또는 행운을 기대하며 운세를 보기도 한다.
이 같은 관심은 특히 음력 설날을 전후하여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 나타난다. 현대 사회에서 사주, 관상, 점술 등에 대해
권위적인 사람들은 부정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우리의 민속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미신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없애버리는 정책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주명리학은 큰 영향력을 가졌다.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에는 과거시험을 통해 명리학자를
뽑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라고 한다.
우리의 예언가 중에는 ‘동양의 노스트라다무스’로 불리고 있는 조선 성종 때의 유학자인 격암 남사고선생(1509~1571)이 있다.
그는 역학ㆍ천문ㆍ복서ㆍ관상에 능했다. 풍수학에도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동서분당을
비롯 문정왕후의 죽음, 선조의 등극에서 임진왜란에 이르기까지 국가 대소사에 대해 수많은 예언을 했고, 때가 되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에 대해 어떤 사람은 신라시대 점복술의 대가였던 김암에 비견하고 신라 문성왕 때 중국으로 건너가 신선술로 이름을 떨친
김가기에도 비유한다. 풍수가인 도선국사의 대를 이은 제자라는 특이한 소문도 있었다.
◆울진의 예언가 격암 남사고
그는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누금마을 지금의 성황당 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고 의지가 강한 성품이었다.
과거를 보아 사회로 진출하려 했으나 매번 낙방하고 말았다.
그 뒤로 매일같이 불영계곡 주천대와 남수산에 오르며 권세와 돈으로 사람을 뽑는 과거제도를 한탄하다가 뜻을 바꾸어 천문지리의
현묘한 이치와 복술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홀로 소학을 즐겨 탐독했고, 산세 수려한 울진의 계곡을 오가며 명상에 잠기길 즐겨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수곡리는 빼어난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마을 앞으로는 천혜의 비경을 감추고 있는 왕피천 맑은 물이 흘렀다. 어릴 적에는 물장구치고 헤엄치던 놀이터였을 것이다.
소년이 된 그는 북쪽 뒷산을 넘어 불영계곡의 기암괴석, 그리고 울창한 숲으로 어우러져 신비로운 대자연을 자주 접하면서 성장
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그는 경전을 익히기보다 자연현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끌렸다. 그는 흥망성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생로병사를 맞이하는 인간의 삶이 사계절의 변화와 밤하늘을 가르는 별의 운행에 묘한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지난여름 필자는 불영계곡에서 야영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손을 뻗으면 별을 잡을 것 같은 찬란함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남사고가 살았던 조선시대에는 더욱더 많은 별이 보였을 것이다. 훗날 그가 천문대를 관장하는 관상감이라는 벼슬에 오르는 바탕
에는 어릴 적의 소중한 체험들이 있었다.
소년 남사고는 어느 날인가 마을 뒷산을 넘어 물빛 맑은 불영계곡을 따라 걸어서 절 입구에 다 달았을 무렵, 문득 한 노승을 만
났다. 그는 “너가 하늘의 이치를 깨칠 자질이 보이므로 비결서를 주려 한다. 한 권은 복서와 관상에 관한 책이고 또 한 권은 천문과
역학을 기록한 책이니라. 명심해야 할 점이 있다. 책에 적힌 것은 천기에 관한 내용들이라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발설하면 집안의
대가 끊어질 터인데, 그래도 괜찮으면 받아라”며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수 년여에 걸친 독파에 들어가 조금씩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음양오행의 조화와 신묘함,
풍수지리록을 통해 산과 물, 그리고 방위를 읽어내는 법을 익혔다.
간룡과 장풍, 득수의 묘리를 깨우쳐 나갔다. 책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연구를 하던 어느 순간, 예전에 미처 몰랐던 수많은 비밀을
홀연히 깨닫게 됐다. 그것은 세상에 드러내선 안 될 하늘의 비밀을 밝힌 셈이었다.
미래의 일을 알 수 있게 된 그는 전국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많은 예언을 남겼다. 소년 시절 비결서를 넘겨준 노승이 책에 적힌
천기를 사사로이 누설치 말라는 다짐을 잊어버린 것으로도 보인다. 그래서 나중에 부친의 묘를 명당에 모시기 위해 아홉 번이나
이장했지만 끝내 실패했다는 ‘구천십장’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 비결서는 홀연히 사라졌는데 그 노승이 다시 거두어 간
것이라는 설화도 남아있다.
◆400여년 만에 생가터 복원으로 다시 태어나
남사고는 대학의 격물치지에서 딴 격(格)자로 자신의 호를 ‘격암’이라 지었는데, 그것은 ‘사물의 지극한 곳까지 이치를 궁리하겠다’
는 의미였다. 그는 당시 울진지역의 많은 유림들과 교류를 했는데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와 명필로 유명한
양사언이 강릉 부사로 와 있어 더욱 친하게 지냈다.
그는 늘 남사고의 천문과 지리, 음양학 등의 학문적 깊이에 경탄했고, 널리 쓰이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남사고의 큰 뜻과 달리
벼슬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1564년경 지역의 효성이 지극한 인재들을 발굴하는 ‘효렴’에 천거되어 비로소 종9품인
사직참봉직을 제수받고 벼슬길에 나섰으니, 이때 그의 나이 55세였다.
말년에는 종6품 관상감 천문교수직을 역임했다. 그와 관련된 행적이나 이력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시문과 편지, 묘비명 그리고
후학들이 쓴 글을 모은 ‘격안선생일고역’ 등이 있다. 뒤에도 여러 예언을 남기는 한편 학문연구에도 열중하여 많은 저작들을
남기게 되었다. 이 시기에 ‘격암천자주’나 ‘이기도설’, ‘남사고비결’ 등의 여러 책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만주땅을 할퀴는 형상이다.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꼬리에 해당한다”고 했다.
용맹한 호랑이 형상으로 보고 포항의 영일만 동쪽 끝 땅을 그 꼬리라는 뜻에서 호미라고 불렀다. 소학을 중시한 남사고의
실천철학은 지역문화의 전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 송나라때 유명한 소옹 강절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주역을 독창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정리하여 일가를 이룬 사람이었다.
후세의 선비들은 남사고를 ‘해동강절’이라 불렀다.
관상감 천문교수직을 끝으로 남사고는 낙향했다. “강물 남쪽에 경치가 좋은데 너무 늦기 전에 그곳에서 살아보리라”라며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평소 즐겨 찾던 불영계곡 주천대와 남수산이 가까운 기슭에 달팽이집 같은 오두막집을 지었다. 자신의 명운이 다했다는 그의
예언처럼, 조정을 사직한 다음 해인 1571년(선조 4년)에 향년 63세로 세상을 마감했다.
유적지를 찾은 날은 입춘을 넘겼으나 겨울 찬바람이 정신이 번쩍들게 하는 날씨였다. 한국 최고의 역학자 격암 남사고는
약 400여년 만에 그의 생가터에서 기와집이 지어졌고 다시 태어났다.
울진군은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서재, 사당 등의 복원을 완료했다. 대형 주차장을 마련하고, 공원 가로등을 설치하는 등
조경공사를 하여 부지 전체를 공원 관광지화 되어 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서재인 자동서원이 보이며, 출입문 좌측으로
강당인 수남정사, 그 뒤쪽으로 격암선생의 위패를 모신 치격사가 자리하고 있다.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의 푸르름을 안다지만 건물 앞에는 키가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어 추사의 세한도를 연상케
한다. 생가터에도 자료관 등 두 채의 건물이 지어져 있다.
뒤편으로는 거대한 노송이 위엄있게 서 있고 그 옆으로 400년 된 괴암나무도 보인다. 남사고가 즐겨 산책했다는 겨울의
불영계곡을 찾았다. 맑은 물이 흐르던 계곡은 꽁꽁 얼어 물소리도 없으니 스산한 바람소리만 적막한 공간을 스쳐 지나간다.
한겨울을 견디는 모든 것들을 눈물겨운 아름다움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 생각난다. 남사고가 노승을 만났다는 불영사
입구에도 인적이 끊기어 겨울산사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조선시대 도가적 성향을 지닌 학자들의 계보를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이 17세기 홍만종이 쓴 ‘해동이적’이다.
단군부터 곽재우까지 38명 인물들의 신기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인물 21명 중에는 격암 남사고, 토정비결의
이지함, 전우치 등이 있다.
저자는 불로장생의 가능성과 초능력 획득의 실례들을 여러 자료에서 찾아 인물 중심으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 그중에 전우치도
TV드라마화 된 것을 보면 남사고에 대한 현대적인 문화콘텐츠화는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사물인터넷과 빅데이터의 연결 등으로 점차 가능해 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최첨단 영상미디어를
이용한 영화 ‘반지의 제왕’이나 ‘헤리포트’도 신비와 초능력의 콘텐츠이다.
유림에서는 흥미위주의 내용으로 흐름을 바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자체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지역 변별성을 부각
시키는 데 있어서 문화콘텐츠의 발굴과 개발은 매우 유효한 정책이다. 그러한 점에서 남사고의 철학은 불안한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보물이 될 수도 있다.
박순국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