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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미국, 영국, 중국, 일본)의 장례문화
▣ 미국
장미의 언덕
묘지에서의 약속
이번 연수중 LA의 Rose Hills Momorial Park & mortuary를 방문하기로 한 날 LA인근에 살고 있는 친척들의 성화에 못이겨 결국 친척들과 만나기로 했다. 이렇게 약속을 하고 난 뒤 미국에 오랫동안 살고있는 친척들 조차도 의아해 하였고, 사실은 당사자인 나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의아함과 어색함은 이곳 입구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해소되었다
묘지에 온 것 맞아?
Rose Hills Memorial Park & mortuary의 입구에는 약 4,160평 규모에 세계 각국의 600여종 장미 7,000여그루가 어우러진 장미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과연 말 그대로 Rose Hills (장미언덕)이었다. 그런데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장미정원은 유족 및 일반인들이 평소 쉽게 묘지에 다가갈 수 있도록 연중 각종 이벤트를 열고 있다는 점이었다.
1월에는 장미 보호 세미나, 3월이면 아마추어들을 위한 장미 사진 콘테스트, 4월이면 부활절 일출 예배, 5월 어머니날을 기해 열리는 ‘엄마와 함께하는 어린이 예술 축제’, 10월에는 미국 전역의 장미애호가들이 모여 벌이는 ‘Annual Rose Hill Rose Show’ 등등 모든 시설이 한곳에 입구부터 묘지에 대한 어두운 이미지를 ‘확’ 바꾸게 만든 Rose Hills Memorial Park & mortuary는 1914년에 18에이커 규모로 개발이 된 이래 점차 확대되어 지금은 171만평 규모이고 향후 343만평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이곳은 Forest Lawn Memorial Park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한곳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완벽한 서비스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사무실, 회의실, 꽃집, 대기실 등이 있는 장미정원 관리동, 장례식장 (Rose Hill Mortuary), 매장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매장시설, 화장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화장장과 납골시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채플등이 곳곳 마다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결혼식이 열리는 SkyRose Chapel
특히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우리의 눈을 사로잡은 건물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SkyRose Chapel이었다. 뾰족지른 슬라브형 지붕이 인상적인 이 채플은 서쪽으로는 San Gabriel 계곡이, 동쪽으로는 Sycamore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가장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Fay Jones라는 미국의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한 Rose Hills의 명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의 내부와 야외 정원을 둘러 보고 나니 ‘이곳에서 주말에는 결혼식도 열린다’는 말이수긍이 갔다.
미국에서도 벌초하는 한인들 Rose Hills는 전체적으로 전날 방문했던 Glandale의 Forest Lawn Memorial Park에 비해 훨씬 소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독 아시아인들, 특히 한인, 일본인, 중국인들의 묘비명이 눈에 많이 띄었다. 특히 한인들의 경우 교회를 단위로 군데군데 집단적으로 조성되어 있었고, 묘비명에는 한글과 영문이 병기되어 있었다.
평분으로 되어있고 잔디관리가 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된 자리를 따라 직사각형 모양으로 잔디를 다시 곱게 깍아 놓은 묘지를 접하면서 ‘짠’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관습중의 하나인 ‘벌초‘를 한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묘지 앞에서 간이 의자를 놓고 오랫동안 책을 읽고 있는 한 여성을 보면서 추모문화의 차이를 엿볼 수 있었다. 이제 우리의 실정에 맞는 진정한 추모의 형식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이제 장례보험제도의 도입을 고려해야 할 때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장례를 미리 준비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장례보험제도 였다.
이 제도는 장례식 때 필요한 관 등 비품과 염습 등 서비스비용을 미리 준비하는 것으로서 10년, 5년, 3년 단위로 나이에 맞게 보험을 들어 지불 방식도 매월, 3개월, 1년 등으로 자기의 형편에 따라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부조에 의지해 장례를 치루고 있는 우리 실정에서 보면 아직 먼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체면과 과시문화로 왜곡된 장례의 거품을 빼는데 일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영국
주민들과 마찰 전무,영국의 선진 장묘문화
지자체서 의무분양
리무진 「꽃상여」가 묘지정문으로 들어온 뒤 화장장 건물 앞에 멈춰 선다. 서너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뒤따라온 검은 예복 차림의 가족 친지 10여명은 1층 장례식장에서 간소하게 예배를 드린 뒤 삼삼오오 모여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1시간쯤 후 유골을 항아리에 넣은 다음 묘지 관리인의 도움을 받아 화장장 뒤쪽 잔디묘지에 묻고는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한 뒤 조용히 집으로 돌아간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묘지는 빼곡히 들어선 나무와 이름 모를 새소리가 어우러져 자연학습장이나 공원같은 느낌을 준다.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로 다람쥐가 노니는 광경도 자주 눈에 띈다. 어디를 가나 끝없이 이어진 구릉지대와 초원, 그 위에 듬성듬성 누워 있는 마을,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떼의 모습 등 목가적 풍경이 펼쳐져 있는 나라. 유럽대륙 서북부의 섬나라 영국은 깨끗하고 아름 다운 연경관과 함께 간소한 장례식, 공원같이 잘 가꿔진 묘지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4개 지방 가운데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산간지방을 제외하고 국토의 대부분이 완만한 구릉지와 평원지대다. 15~17세기 제1차 인클로저 운동에 이어 18세기이후 인구증가에 따라 식량수요가 늘어나자 경작지확대를 목적으로 2차 바뀌었다. 이에 따라 주거가능 면적비율이 64%로 높아져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와 비교해 3배이상 국토이용여건이 좋아졌다.
남북한 면적의 1.1배(약 24만4천㎢) 땅에 5천7백여만명이 살고 있는 영국에서는지방자치단체가 의무적으로 주민들에게 묘지를 분양, 시신처리문제를 해결토록 하고 있다. 상제를 개인사로 간주해 관청이 나몰라라 하는 우리와는 이처럼 시작부터 다르다.
이런 제도는 아무 곳에나 무덤을 쓰지 않고 생전의 숨결과 추억이 깃든 주거지 가까이에 묘지를 만들어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문화를 일궈냈다. 신분과 지위,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죽어서는 모두가 잘해야 1평남짓 차지한 공간에 비석만 세워진다.
한곳에 4구까지 합장
영국 사람들은 출퇴근길 점심시간 주말 등에 틈틈이 꽃을 들고 묘소를 찾는다.
공원처럼 휴식공간으로 묘지를 활용하기도 한다. 힘이 있거나 돈푼깨나 있다고 해서 호화로운 분묘를 만든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런던에서 북동쪽의 대학도시 케임브리지 방향으로 20km쯤 가면 그레이트케임브리지 로드 오른쪽 마을 한복판에 엔필드 공동묘지가 나온다. 1936년 개설한 5만여평의 공설묘지로 39년 화장시설까지 갖췄다. 약 2m 높이로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문 조경목 사이를 지나 2백여m 들어가면 관리사무실과 화장장을 겸한 2층건물이 있고 뒤편에 잔디로 덮인 묘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매장 또는 화장한 뒤 재를 땅에 묻거나 항아리에 담아 납골당에 안치하는 등 여러 형태로 시신을 처리했으나 현재 공간이 부족해 매장은 거의 중단한 상태다.
2층건물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1백m쯤 돌아가면 양쪽에 가로 80cm, 세로 2m40cm 크기의 무덤들이 맞대고 누워 있는 널따란 묘역이 나온다. 땅을 3.3m 깊이로 파고 사망한 순서대로 관을 차곡차곡 묻은 곳으로 가장 위쪽의 관이 지표에서 1m 깊이에 묻혀 있다.2차대전때 6.6m 깊이로 6~7구의 시신을 층층이 묻기도 했으나 지금은 한 무덤에 4구까지만 「합 장」하고 있다.
바둑판처럼 반 듯하게 정렬된 무덤들 사이에는 매장작업할 때 소형굴착기가 드나들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다. 무덤마다 가로 75 세로 30 높이 90cm의 기념비가 서있고 기념비 앞에는 참배객들이 갖다놓은 꽃들이 향기를 뿜고 있다. 기념비는 크기를 엄격히 제한하고 재질도 자연석만 허용하기 때문에 플라스틱이나 나무로 만든 십자가 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화장장 건물 뒤쪽 나지막한 둔덕에는 가로 세로 2m의 간격으로 높이 1m안팎의 나무를 심고 그 밑에 유골을 묻는 잔디광장이 자리잡고 있다. 나무 밑에는 꽃을 심거나 꽃을 꽂을 수 있는 병 또는 받침대가 설치돼 있고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물연대를 적은 손바닥만한 표석이 걸려 있다.
「사랑하는 새뮤얼 리드 체이스를 기억하며. 1913년 12월 16일 태어나 1993년 11월 16일 사망하다. 우리의 머리속에 영원하라」고 쓴 표석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장 건물 오른쪽에는 「존 워커 납골당」이라 부르는 서가식 실내납골당건물이 있다.
뒤쪽으로는 1m 높이의 벽돌담에 가로 50cm, 세로 30cm 크기의 네모꼴로 30cm쯤 움푹하게 판 뒤 유골을 담은 항아리를 넣고 봉한 실외납골당이 있다. 실내 납골당안 중앙 탁자위에는 꽃이나 회사의 표장 및 문장과 생물연대, 가족 친지들이 죽은 자를추모하는 말들을 컬러펜으로 기록해 영구 보존하는 두툼한 「추억의 비망록」이 높여 있다.
이 공동묘지는 원칙적으로 30년동안 임대 사용하되 1백50파운드를 추가로 내면 다시 30년을 연장할수 있다. 매장할 경우 맨아래층 1천5백만파운드에서 맨위층5백40파운드까지 위치에 따라 차등을 두어 임대료를 받고 있다.
주민들과 마찰전무
화장할 때의 임대료는 1백80파운드(약22만원)에 불과하며 유골을 뿌리지 않고 땅에 묻을 경우에 한해 1백30파운드(약17만원)을 추가로 징수한다. 남의 무덤이라도 사자가족 등의 동의를 얻을 경우 같이 매장하거나 유골을 뿌릴 수 있다.
이안 하프 관리소장은 『예전에는 대부분 매장했으나 94년의 경우 3천8백구의 시신중 매장은 1백여구에 불과할 정도로 화장이 부쩍 늘고 있다. 화장한 뒤에도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납골당에 안치하는 것과 땅에 뿌리는 것이 절반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화장장이 딸린 묘지가 마을 한복판에 있지만 주민들과의 마찰은 없다』고 말했다.
화장률70% 유럽 최고사설 공동묘지 주민기금 출연
자선단체식 운영 기념비 등 정교하게 다듬어 조각공원 온 듯
영국은 1831년 콜레라가 런던 등 전역을 휩쓴데다 산업혁명이 숨가쁘게 진행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연간 수만명의 사망자를 교회구내 묘지에 모두 안장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에 따라 영국의회는 한 변호사가 주도한 켄살 그린 사설묘지 설립을 허용하고 교회지하에 시신을 두는 비위생적 장례관행을 금지시켰다.
콜레라 창궐 묘터난
그러나 초기에는 교회구내에 묻혀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켄살 기린 묘지를 찾는 경우 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교회구내에 시신을 처리해 주는 대가로 매장수수료를 받아온 교회조직도 이권이 없어지는 것을 꺼려 신자들이 사설 묘지를 찾는 것에 반대했다.콜레라 창궐과 함께 묘지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자 의회는 소액의 헌금을 교회에 내고 사설묘 지에 시신을 묻도록 의무화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개장 7년만에 켄살 그린의 주가가 7배이상 폭등하는 성공을 거두면서 15년만에 런던외곽에 7개의 공동묘지가 만들어 졌다.
이어 1895년 런던교외에 화장장이 들어서고 1902년에는 화장법이 공포됐다.
현재(柱: 1995년) 영국의 화장률은 70%정도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하며 정부에서는 더욱 적 극적으로 화장을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설공동묘지는 점점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주민들 이 기금을 출연, 법인성격의 자선단체를 만들어 운영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당시 만들어진 묘지 중의 하나로 런던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10km쯤 떨어진 해링 게이 자치구 스웨 인스 레인의 '하이게이트공동묘지'를 들 수 있다. 마을을 관통하는 2차선도로 양쪽 나지막한 언덕기 슭 아늑한 숲속에 공원같은 묘지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에게는 혐오시설로 인식되는 묘지가 약 2m 높이의 담장을 경계로 주택가 한가운데 들어서 있 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곳은 빅토리아여왕 재위초기인 1839년 만들어진 4만5천명 크기의 사설묘지로 런던으로 이주했던 독일태생 사상가이자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를 비롯, 많은 명사들이 묻혀있어 참 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묘지는 빅토리아왕조시대 특유의 건축 및 조각양식에 바탕을 두고 정문과 건물들을 기품있게 만 들었다. 또 엄숙한 느낌과 종교적 분위기가 살아 남도록 묘지를 설계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었다.
때문에 런던공동묘지회사가 변두리에 세운 '하이게이트묘지'는 점차 인기를 끌어 부지가 부족해짐에 따라 1854년 인접지역에 또 하나의 묘지를 만들어 확장했다.
이후 먼저 묘지를 서부지역묘지, 뒤에 만든 묘지를 동부지역묘지로 각각 부르고 있다.
기자가 묘지 에 들렀을 때 마침 지하묘지(카타콤베)가 있는 서부지역묘지가 문을 닫아 1파운드의 입장료를 내고 동부지역묘지를 둘러봤다. 사진촬영 대가로 1파운드를 추가로 냈다.
마치 공원산책로 같은 진입로를 따라 50m쯤 들어가자 양쪽으로 가로 80cm 세로 2m 가량 크기의 무덤들이 화강암이나 대리석 평석 에 덮여있는 묘역이 나타났다.
1902년 화장법 공포
머리맡에는 검고 희거나 불그스름한 색깔로 십자가 모양을 하거나 죽은 사람을 기리는 글귀와 사진 등을 새겨넣은 기념비들이 크고 작은 높이로 줄지어 서 있었다. 검은 돌을 굴뚝처럼 우뚝 세우거나 흰색의 여인상을 정교하게 조각한 기념비들로 세워져 있어 조각공원에라도 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무덤에는 바구니나 꽃병에 담긴 소담한 꽃들이 놓여 있다. 안쪽에는 시신을 화장한 재를 항아리에 담아 가로 60, 세로 40cm 넓이로 묻은 다음 네모난 돌로 덮어 놓은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한 무덤에 4개의 항아리를 묻은 곳이다.카를 마르크스는 동부지역 동북쪽 정문으로부터 약 1백m 떨어진 길모퉁이에 동쪽을 바라보며 외롭게 잠들어 있다. 2m 높이의 화강암 좌대위에 청동으로 만든 마르크스 두상이 설치되어 있고 묘비 상단에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 인 "전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평범한 마르크스 무덤
마르크스와 아내 제니, 가정부이자 정부 헬렌 데무스, 셋째딸 엘러노 등 모두 6 명이 묻혀 있는 마르크스 무덤에는 엊그제 참배객들이 다녀간 듯 시들지 않은 꽃송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철학이 적어도 1백년이상 전세계의 절반이상을 지배했던 사상가요 혁명가의 묘답지 않게 공동묘지 한구석에 평범하게 잠든 모습이 놀라웠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는 마르크스 말고도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 ,여류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허버트 스펜서, 여류소설가 메어리 앤 및 중남미 트리니다드토바코 출신 여성혁명가 클로디아 베라존스 등 많은 명사들이 잠들어 있다.
묘지 관리인 '다운 스퀴어씨(35.여)'는 "이곳에 묻힌 6만여명 중 80%가 화장한 재를 땅에 묻은 것"이라면서 앞으로 10년 가량 지나면 묘지가 꽉차 "새식구" 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퀴어씨는 "이곳은 미리 묘터를 살 수 없고 죽은 뒤 국적에 관계없이 장소를 골라 사용 할 수 있다"며 "사설묘지이기 때문에 임대료가 공설묘지보다 훨씬 비싸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매장할 때 묘지 임대료 2천 파운드와 땅 파는 비용 5백파운드 등 모두 2천5백파운드(약3백 37만원-注:1995년기준))가 들지만 화장의 경우 훨씬 적은 5백파운드(약 67만원-注:1995년기준))를 받고 있다.
런던 해링게이 자치구는 1856년 만들어진 관할 토튼햄 묘비가 꽉 차고 런던 북부지역 주민들의 묘지로 사용하는 엔필드 묘지마저 포화상태에 육박하자 지난해 11월 구입식물원과 '화이트하트' 운동장 사이 공터에 60년간 사용할 약6천평 크기의 새묘지를 만들었다.
이 우드그린 묘지는 모슬렘에게는 이슬람교가 요구하는대로 동쪽을 향해 시신을 묻도록 하는 등 주민들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에 맞춰 운영하고 있다.
'알란 도비' 구청장은 "새 묘지를 만들어 시급한 묘지 부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돼 자랑스럽다"며"이제 런던북부지역 주민들은 먼곳에 '영원한 휴식처'를 마련해 성묘를 하는 걱정과 번거로움에서 벗 어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 중국
1956년장묘문화혁명
납골당도 부족 유골 뿌리기 캠페인/ 매장금지 불구 묘지면적 남한크기/ 지도층 솔선수범
장례식도 화장장에서
중국에서는 장례식 일체를 화장장에서 치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사람이 사망하면 우선 화장장에 신고를 하며 화장장에서 운구차를 보내 시신을 운반해 온다.
그런 다음 시신을 염하고 입관식을 치른다. 입관한 시신은 고별실로 옮겨지고 그 곳에서 장례식을 마친 다음 불에 태워진다.
시신의 유골은 유족들이 선택한 함에 넣어져 3일 동안 화장장에 보관된 후 납골당으로 옮겨진다.
화장장에는 염을 하는 정용실, 장례식을 하는 고별실 등 각 과정마다 별도의 방들이 마련돼 있어 전혀 이용에 불편이 없다.
봉분 찾아 보기 힘들어
풍수지리사상의 원조인 중국대륙은 모택동이 공산주의 혁명을 완수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거대한 묘지'라고 불릴 정도로 어디를 가나 묘지가 빽뺵히 들어차 있었다.
1933년 중국 남경 금릉대가 전국 22개성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당시 중국묘지의 총 면적이 10만3천평방키로미터로 남한면적보다 넓었다.
세계인구의 20%가 넘는 12억의 인민들이 세계경작지의 7%밖에 안되는 땅에서 먹고 살아야만 하는 현실에 비춰 볼 때 묘지문제는 무엇보다 심각한 것이었다.
연간 평균 사망자 수가 6백만명에 달해 매년 엄청난 규모의 땅이 묘지터로 변하고 있었다.
결국 모택동이 이끄는 혁명정부가 1956년 화장을 법으로 정하고 시신을 관에 넣어 매장하는 토장제도를 금지시키는 '장묘문화혁명'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40년이 지난 현재 중국은 눈에 띌 만큼 달라졌다.
이제는 전국 어디에서나 봉분을 한 무덤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한발 더 나아가 지금 북경시에서는 '장묘문화 제2혁명'운동이 한창이다. 지난 94년부터 북경시 빈장관리처와 빈장협회가 공동으로 시작한 이 운동은 시신을 화장한 뒤 그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것. 지금까지 6차에 걸쳐 모두 246명의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실적을 보이고 있다.(1995년기준)
시 당국의 한 책임자는 "이 운동의 확산을 위해 일체의 비용을 무료로 해 주고 있다."며 "특히 지식분자나 간부들이 많이 참여하는 등 각계에서 좋은 반응을 보여 머지않아 정착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이어 "지난 79년에 사망한 주은래 전국무원총리도 유언에 따라 화장을 했으며, 그 유골이 비행기로 전국에 뿌려졌다."고 하고, "89년 호요방 공산당 총서기가 사망 했을때도 부인의 희망에 따라 화장된 유골이 강서성 개척지에 뿌려졌다."고 강조했다.
중국의 장묘제도를 한 눈에 볼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북경시 서북부 지역에 있는 팔보산이다.
북경시내에서 지하철로 30분 거리에 있는 팔보산에는 혁명공묘를 비롯해 인민공묘, 화장장인 빈장관, 노산골회당 등이 들어서 있다. 또 북경시 빈장관리처와 빈장협회, 중국국제운구서비스센타, 북경판사처가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 얼마 안 떨어진 거리에 납골묘지와 납골당이 있는 만안공묘가 있다.
팔보산 빈장관 최대
북경시에서 가장 큰 규모의 화장장인 팔보산빈장관은 한 해 2만여명을 화장 처리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화장된 시신은 당원과 군 지도자 등 모두 60여만기. 1957년에 건설된 이 화장장은 면적이 43여평방키로미터이며 화장로는 모두 14대가 설치돼 있다.
현재 2백여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40대의 영구차가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비용은 68콰이(원)부터 4백콰이까지로 다양한 편이다. 우리돈으로 6천원부터 4만원정도다.
관의 종류와 골회를 넣는 함에 따라 비용이 많이 달라진다. 북경시에는 귀왕화장장, 서부화장장 등 지역마다 비슷한 규모의 화장장이 설치돼 있다.
팔보산빈장관에서 처리된 유골을 담은 함은 모두 노산골회당으로 옮겨진다.
주은래 전국무총리가 직접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노산골회당에 모셔진 함의 안치 기간은 3년, 비용은 2백콰이로 한 번만 내면 된다. 우리 돈으로 2만원정도가 드는 셈이다.
그 후에는 각 자 회수해 집에서 모시거나 공묘에 평장한다.
이곳의 책임자인 리썽밍씨(40)는 "지난 58년부터 운영돼 현재 6만여기가 안치돼 있다."고 밝혔다.
지난 58년, 명.청시대의 강공호국사를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팔보산혁명공묘에는 유골을 보관하는 방이 29개가 있으며 유골을 쌓아 놓는 벽이 8개가 있다.
이곳에는 국가영도자나 고위 간부들만 모셔진다. 70여평방키로를 자랑하는 방대한 규모의 이 혁명공묘 내부는 골회당과 묘구 2부로 나뉘어져 있다. 각 묘구에는 국가유공자들의 유골이 모두 평장으로 가지런히 묻혀 있다. 북경시 빈장관리처가 관리하고 있는 만안공묘는 중국정부의 화장정책이 낳은 납골묘지와 납골당 등 중국의 묘지형태를 모두 갖춘 곳이다.
부부합장식인 묘지면적은 각 0.5, 1, 1.5, 2평방미터 이상 등 4가지가 있으며 최근에는 묘지가 모두 바닥나 골회당, 골회정, 골회랑 등 다양한 형태의 납골당이 세워져 묘지를 대신하고있다. 입구에서 마주 보이는 골회당에는 모두 1만여기의 유골이 빽빽하게 안치돼 있다.
안치기간은 3년. 그 뒤에 있는 골회정과 골회랑은 유골을 20-30년 안치할 수 있다.
연간 안치비용은 30콰이부터 80콰이까지로 위치에 따라 다르다. 우리 돈으로 3천원에서 8천원 정도
연간 안치비 3-8천원
북경시에 비해 섬서성의 서안시는 1년정도 늦은 59년부터 화장문화가 도입됐다. 일찍 장안으로 불리던 서안시는 기원전 1134년 서주서부터 11왕조의 도읍으로서 1천년 이상을지 낸 세계 제일의 고도다.
세계 8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병마용갱과 진시황릉을 비롯 양귀비가 노닐었다는 화청지 등이 주변 에 산재한 서안시에서 남쪽으로 5km 정도 거리에 서안시 삼조빈장관골회공묘가 있다. 이곳 삼조빈장관에서는 지금 '모택동을 위시한 혁명지도자 사람화장 의식개혁 40주년 기념행사' 가 한창이다.
서안시의 한 당국자는 "지난 59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13만9천여기가 화장됐다."며 " 그 때문에 토장하는 것에 비해 841평방키로미터이상의 농토가 늘어난 셈"이라고 말했다.
삼조빈장관에서 얼마 안되는 곳에 삼조국유 영구골회공묘가 있다.
현재 묘역 정리작업이 한창인 이공동묘지에는 입구에 정자모양의 납골당 2채가 나란히 세워져 있으나 아직 빈 자리가 많이 남아 있다.
납골함을 묻는 묘 1기의 면적은 평균 0.5평방미터로 모두 부부 합장묘다. 묘는 3-4종류의 일정한 크기의 비석과 상석으로 이뤄져 있으며, 비석에는 한결같이 부부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부부 가운데 사망한 사람의 이름에는 붉은 색으로 표시를 한다. 나중에 남은 사람이 사망하면 합장하게 된다
강력한 정책으로 화장문화정착
화장률 100%/ 40년 장묘개혁결실/ 직장내 사망자 화장 안하면 책임자처벌/의복 등 장구사용 엄금,
장례간소화 못 박아
우리에게 '봉천'으로 더 알려진 심양은 동북 3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치우쳐 있는 요영성의 수도이 다. 중국에서 북경 상해 천진에 이은 4번째로 큰 도시인 심양은 8만명을 넘는 조선족들이 시내 서 쪽에 위치한 서탑 지역에 '한국의 거리'를 만들 정도로 우리 문화를 가장 많이 받아 들이고 있다.
인구는 약 6백만명.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20km쯤 거리에 '회룡강혁명공묘'가 있는데 이곳에서 심 양시 일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장례가 대부분 치러진다.
화환도 화장장 것 빌려 써야
1989년에 제정된 '심양시장례사무관리잠행규정(심정발73호)은 장례식은 반드시 화장장에서 간편하게 해야 하며 예외없이 모두 화장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또 국가규정에 의해 예외로 인정되지 않는 한 관에 넣은 채 땅에 묻는 '토장'을 하지 못하며, 시 신을 불에 태운 후 그 유골을 지정된 장소에 묻을 수는 있으나, 될 수 있는 한 깊게 묻어야 하고 봉분을 남겨서는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장례를 치를 때 사용하는 화환도 모두 화장장측에서 만든 것을 빌려 쓰도록 하고 있으며, 장례식에사용할 목적으로 옷을 만들거나 종이꽃이나 돈과 기타 용구를 일절 사용하지 못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밖에 개인이나 단체를 막론하고 누구도 화장장을 벗어나서 어떠한 장례행사를 못하도록 하고 있다. '회룡강혁명공묘'에 있는 화장장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망자를 위한 제단이 마련돼 있는 '제전원'이 있다.유족들은 화장한 시신의 유골을 매장하기 전에 공원처럼 잘 가꿔진 '제전원'으로 모시고 가 마지막 분향을 한다. 고인의 유골을 납골당에 모셨을 경우에는 유골이 든 함을 이곳으로 가져와 향을 피우고 넋을 위로하기도 한다.
'회룡강혁명공묘'입구에는 서민들을 위한 납골당인 '골회당'이 있으며, 중앙에는 국가 유공자들을위한 '영구성골회당'이 자리잡고 있다. 두 곳 모두 가로 30cm, 세로25cm 크기의 납골함을 넣는 칸이 촘촘히 설치돼 있다.
그 칸에 고인의 유골이 든 함과 유품을 넣고 정면을 대리석으로 봉한다.
대리석에는 고인의 사진과 이름 및 사망시기 등이 새겨져 있다. 유족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앞에꽃을 들고 와 고인을 추도한다.
그러나 '회룡강혁명공묘'의 가장 큰 자랑은 40평방키로를 넘는 방대한 '묘원'이다.
지난 92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해 현재 17평방키로가 완성됐다.
이곳의 관리원 '쟝웨이'씨(55)는 "회룡강묘원은 1개 특구와 10개 보통구로 이뤄졌다."며 대부분 가족 합장묘로 20년 동안 사용할 수 있 다."고 말했다.
가격은 평균 4백콰이로 다른 지역에 비해 비싼 편이다. 특구는 보통구와 달리 묘터를 넓게 사용 할수 있으며 비용은 3천콰이에서부터 5천콰이까지로 다양하다. 우리 돈으로 보통구가 4만원, 특구인 경우 30만원에서 50만원 정도 드는 셈이다. 심양시 장례사무관리처가 풍수지리를 따져 가장 뛰어난명당에 조성했다는 '회룡강묘원'은 그만큼 요령성 일대에 이름이 나 있다.
회룡강 묘원 40평방키로 '방대'
쟝웨이 씨는 "가장 먼데서 온 경우는 올 봄에 안장한 사천지방 사람"이라며 "최근 하루 평균 15기 정도 새로 묻힌다."고 밝혔다.
'회룡강묘원'은 특구를 제외한 보통구의 경우 1개구에 약 800기가 들어서 있다. 묘지면적은 일반적으로 0.5평방미터.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크기의 비석에 가족둘의 이름을 새겨넣고 망자의 이름에 붉은 색으로 표시한다.한 개 묘지에 2-3명의 가족이 안치돼 있는 것으로 볼 때 2만여명의 유골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음력으로 4월5일 청명절이나 7월15일 귀신절에는 묘원을 찾는 유족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 평소에도 깔끔하게 잘 정리된 묘원에 유족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묘지를 살피고 돌아간다.
조선족 선우옥연씨(33)는 "직장 구성원 가운데 한 시람이라도 화장을 하지 않고 토장을 하면 직장 최 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등 정부에서 강력히 화장정책을 편 결과 이제 대부분의 중국 인민들은 화장풍 습에 익숙해져 있다."며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이 토장문화에 대한 인민들의 의식 변화를 가져오게 한 가장 큰 힘이 됐다."고 설명했다.그는 이어 "일부 소수민족들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고유의 장례 풍습에 대해서 정부에서도 소수민족 보호 차원에서 모르는 척 넘어가는 등 까다롭게 규제하지는 않는다."며 "그러나 조선족 사회에서는 이제 토장을 고집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실정으로 모두가 사람이 죽으면 당연히 화장을 하고 납골당에 모시거나 평장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수민족도 화장제 동화
현재 중국에서 토장을 고집하는 민족은 회족 뿐이다.
실제로 심양시 동부 외곽 '따뚱취'에는 회족들만 이용하는 '성경침원'이라는 이름의 '영구성회족공묘'가 약 3평방키로미터 정도 조성 돼 있다. 물론 정부에서 인정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전통적 회족풍습에 따른 묘지가 봉분형식으로 조성 돼 있다. '성경침원'의 한 관리자는 "최근 회족사회에서 조차 반드시 시신을 관에 넣어 토장하는 것이 전통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며 "멀지 않아 회족공묘도 상당히 축소될 것으로 보고 자리를 옮길 계획으로 있다."고 밝혔다.
아직까지 당국의 감시를 피해 경작지 한 구석에 몰래 봉분을 만드는 사람들이 가끔 있기는 하지만중국의 장레문화는 이제 완전히 토장에서 화장으로 바뀌었다.
정부의 공식발표는 화장률이 100%다.
우리나라 보다 1백배나 큰 국토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40년전부터 '장묘문화혁명'을 시작해 오늘에 그 결실을 맺고 있는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와 같은 문화권으로 장묘제도도 비슷했던 중국이 정부의 강력한 정책과 지 도층의 솔선수범에 힘입어 심각했던 묘지문제를 해결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 일본
천황을 제외하곤 모두 화장한다.
일본의 장묘문화는 동북아의 '돌연변이'에 속한다.
100%에 육박하는 화장률, 검소한 장례식. 오래전부터 국가 주도로 정비돼온 깔끔한 공원묘지 등이 같은 유교 영향권에 들어 있는 우리나라나 대만의 현실과는 크게 다르다. 사회주의 권력으로 화장을 강제해온 중국조차도 일본만큼 사회전체나 개인을 위해 효율적인 장묘제를 정착시키지 못한 실정이다.
일본 후생성에 따르면 93년 일본의 화장률은 97.9%로 집계됐다. 사망자 94만3천여명 가운데 매장은 2만여명에 불과했다. 특히 도꾜나 ,교도 등 대도시의 화장률은 그야말로 100%다. 봉분은 일본안에서도 도서지역에나 가야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의 화장률은 단연 세계최고다.
영국화장협회가 92년을 기준으로 세계각국의 화장률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일본은 97.6%로 체코의 87.6%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1위를 차지했다.3위는 영국(69.2%), 4위 덴마크(68.2%), 5위 스웨덴(63.8%), 6위가 스위스(61.2%) 등으로 서양국가들이 순위를 잇고 있지만 1천년이상 유교 영향을 받아온 일본의 화장률을 크게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이노 고타로' 후생성 기획법령계장은 "화장률이 높아진 것은 인구의 도시 집중화로 부동산 가격의 엄청난 상승에 따른 묘지난, 국민의 경제의식과 위생관념 등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매장금지법령을 제정한 적이 없으며 자치단체가 위생 및 사회복지 이유로 토장 금지구역을 정할 수 있게 돼 있지만 실제로 지정한 경우는 많지 않다.
또 '사이토 마사루' 도쿄도 생활환경부 지도계장은 "특이하게 높은 일본의 화장률을 종교적인 배경에서 해석하는 시각도 있지만 그러나 불교가 화장을 보편화 시킨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일본의 고서인 '속일본기'에는 몬무왕(문무왕) 4년(700년)에 승려 도쇼(도소)가 화장된 것이 효시고,이후 지토(지통)왕에 이어 4명의 왕이 잇따라 화장됐다고 기록 돼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유층의 호사스런 장례였을 뿐 일반인에게 완전히 확산된 것은 아니라고 그는 지적했다.
에도막부시대에 접어 들면서 토장이 부활됐고 메이지유신때인 1873년에는 왕의 신격화를 위해 화장을 금지 했다가 전염병 때문에 2년만에 해금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영향보다는 일본인 특유의 경제관념이 매장이 어려운 현실에서 무리하게 매장을 고집하기 보다는 간편한 화장쪽으로 자연스럽게 선회, 세계최고의 화장국이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일본의 화장률은 1925년까지만해도 43%수준이었고 태평양전쟁 직후인 45년에는 30.1%까지 떨어 졌다. 그러나 고도 경제성장기였던 65년에 화장률이 71.8%로 치솟았고 75년 85.7%, 85년에 94.5%를 기록했다.
1925년까지 43%에 그쳐
'경제동물'로 비유되는 일본인들의 경제관념은 장례식과 묘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일본에서는 화장날짜가 잡히면 바로 장례를 끝낸다. 그래서 우리보다 장례일자가 짧다. 오츠야(통야)라고 해서 화장 전날 밤 고인의 가족친지들이 모여 음식을 들며 밤을 세우는 의식이 일본에도 있다.
그러나 화투장을 때리는 왁자지껄함은 찾아볼 수 없고 조촐하고 검소하게 치러진다. 검은색 양복이나흑색 개량 기모노를 입은 남녀 유족들이 단출하지만 엄숙하게 화장장에서 고별식을 치른 뒤 유골을 챙겨 납골당이나 납골묘로 떠나는 게 이들 장례식이다.
일본인들의 무덤은 더욱 실속 있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묘 크기에 특별한 제한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크기가 2평을 넘지 않는다. 건설성 자문위원회에서는 4평방미터(1.2평)를 적 정한 묘지 크기로 권장하고 있지만, 유족들은 이보다 작게 묘지를 쓰고 있다.
도쿄도 '하찌오지'시에서는 사설 묘지업자들의 무분별한 상혼을 막기 위해 묘지를 너무 작게 하지 말 라는 규정을 두고 있을 정도로 작은 묘를 찾는 일본인들의 경제관념은 확고하다.
일본의 묘는 대부분 가족묘다.
보통 2-3명, 많게는 6명까지의 유골항아리를 알뜰하게 묻는다. 묘는크지 않지만 묘석은 비싼 것을 쓴다. 묘 옆에는 잊지 않고 정원수를 심어 놓는다. 묻힌 사람이 많다 보니 성묘객도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오래된 묘는 정원수가 마치 분재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 이런 일본이지만 묘지걱정이 살아 있는 사람을 짓누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일본의 가족묘는 장남이 승계한다. 장남이 아닌 자식들은 가족묘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핵가족이 늘면서 묘지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또 납골당 이용이 완전히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점도 묘지난을 가증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장남이 가족묘 승계
건설국에서는 묘지의 칸막이를 없애 공간 활용도를 높인 '시바후(지생)묘', 반평짜리 묘지들을 옆으로 연결해 높은 벽면묘지도 확산 시키고 있다. 그러나 건설국에서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묘지 를 확보하지 못 했다는 응답자가 40%나 됐다(1995년기준)
이들 가운데 12%는 자신이 들어갈 묘가 아니라 매장하지 못한 유골을 임시로 보관 중이어서 당장묘지가 필요하다는 경우였다. 이에 따라서 일본 정부는 늘어가는 미혼 사망자를 위해 일정기간만 묘지를 관리해 주기로 계약을 맺는 시한부 묘, 시한부 납골당을 검토중이다.
또 납골당을 보다 현대화하는데 예산을 집중하고 있다. 이 밖에 현재 법적으로 금지돼 있는 산장(바다나 산 등에 유골을 뿌리는 장례법)을 허용하기 위해 '묘지 및 매장에 관한 법룰'을 개정하는 방안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등 만성적인 묘지난 해결에 고심하고 있다.
묘지마다 작은 정원
에이엔(영원)이라 불리는 일본의 공원묘지는 잘 가꾸어진 정원과 같은 느낌을 준다.
진입로에서부터 묘지 중심부까지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곳곳에 심어져 있고, 주변 녹지도 깔끔하게정리돼 있는 등 을씨년스러운 우리네 공원 묘지와는 크게 다르다.
깨끗하게 포장된 도로는 나무와 조화를 이뤄 호젓한 산책로로 이용되고 있다.
절서정연하게 구획된묘역에 들어 찬 묘들도 규모는 작지만 일본인 특유의 조경감각이 살아 있어 하나하나가 작은 정원을 방불케 한다. 화강암이나 대리석 등 값비싼 석재로 만들어진 묘석은 잘 다듬어진 조각물 같다는 느낌 을 준다. 도쿄 중심가에서 경원선을 타고 1시간 가량 가면 후추시 다마역, 이곳에서 버스로 5분거리 에 일본 최초의 공원묘지인 다마영원이 있다.
23년에 건설됐으니 우리보다 공원묘지 역사가 40-50년 은 앞서 있는 셈이다.
이 다마영원은 독일의 삼림묘지를 모델로 만들어 졌다.
잘 포장된 3차선 아스팔트 길 옆으로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적송과 단풍나무, 시다레사쿠라(벚나무)등이 눈에 들어 온다. 일본의 국조(國鳥)인 카라스(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여유있게 조깅이나 산책을 하는 주민도눈에 띈다. 다마영원의 '오쿠마 테츠오' 관리계장(42)은 "이곳에 심어진 나무는 100여종 2만본에 이른다."며 "설립 당시부터 2000년까지 매년 적송 200그루씩을 심도록 계획이 잡혀 있다."고 말했다.
일본인들의 치밀한 계획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묘역뿐 아니라 진입로 양편에도 벚나무가 심어 져 있어 11만-13만명의 참배인파가 몰린다는 춘분에는 꽃터널을 이룬다.
다마영원의 총면적은 128만 평방미터, 이 중 묘지면적은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 60만평방미터다. 녹지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묘 지면적을 줄였기 때문이다.
묘지수는 65257기. 묘당평균면적이 10평방미터에도 못미친다. 이곳에 34만5천6백83명의 유해가 안장 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망자 1명이 차지하는 묘지공간이 평균 5평방미터도 되지 않는다는 계산이다.
매년 200그루씩 심어
다마영원은 개장 당시 일반인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유명인을 무료로 유치했고, 넓은묘도 허용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혼자만을 위한 묘를 쓰지 않고 가족묘로 쓰기 때문에 공간활용도가 우리와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다. 37년 이곳에 만들어진 '이노시카 기요시' 다마영원 개설자의 묘는 29평방미터지만 4명의 가족이 함께 묻혀 있다. 80년 숨진 '오히라 마사요시' 전총리의 묘역도 56평방미터로 매우 크지만 3명이 같이 잠들어 있다.
다마영원 정문 오른쪽에는 실내 체육관을 연상시키는 화강암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미타마납골당이다. 도쿄도가 오랜 연구 용역 끝에 설계와 내부설비를 결정해 47억엔의 공사비를 쏟아 부은 역작이다.
이름도 일반인의 공모를 거쳐 정했다. 93년 완성한 이 건물은 높이 20m, 최대 직경이 61m로 건평은3518평방미터에 이른다. 6개층으로 나눠져 5200개의 금고식 납골함이 배치돼 있다.
한 개의납골함에 2-6명분 유골항아리를 보관할 수 있어 최대 21840명의 유골을 안치할 수 있다.
납골함은30년 시한부로 분양되며 계약을 갱신할 수 있다.
관리사무소에 따르면 지난해 7월 현재 2411개의 납골함이 분양된 상태다.
납골당 내부는 저승세계를 형상화 했다는 파스텔톤의 벽들이 둘러 싸고 있고, 중앙 홀에는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6m 높이의 원추형 기념조형물이 서 있어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착각을 준다.
아오야마 최고 명당 꼽혀
납골함들은 벽들 뒤에 가려져 있다.
알루미늄 금고형태의 납골함들은 6개층으로 나뉘어 위쪽의 것이아래쪽의함을 누르지 않도록 경사지게 설계했다. 만성적인 묘지난을 해결할 유일한 해법을 납골당이라고 보고 있는 도쿄도청의 세심한 배려다. 다마영원에서 묘지를 조성하는데는 석재비까지 포함해 200-300만엔이 든다. 그래도 매년 한번씩 청약을 받는 분양 경쟁률은 40대1을 넘는다. 사설묘지의 500만엔에 비해 훨씬 싸기 때문이다.
사용료 22만5천-37만5천엔과 연간 2400-4000엔의 관리비만 내면 납골당을 사용할 수 있지만 아직 일본인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납골당보다는 가족묘다.
신쥬쿠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아오야마영원'은 1874년에 조성된 일본 최초의 공영묘지.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산기슭에 옹기종기 조성된 마을단위 묘지에서 벗어나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묘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도쿄시민들은 유서가 깊고 유명인들이 묻혀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참배길이 멀지 않다는 현실적인이유 때문에 이곳을 최고의 명당으로 꼽는다. 빌딩숲에 둘러 쌓인 '아오야마영원'은 삭막한 도심에신선한 휴식공간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120년을 넘은 오랜 묘지지만 깨끗하게 관리돼 온데다 오랜 풍상을 겪어온 나무들이 분재마냥 아름답기 때문이다. 묘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2차선 도로주변에는 벚나무가 울창하게 심어져 있어 교통체증을 피하는샛길 역할을 하고 있다. 점심시간 때면 택시 운전자들이 이곳의 이면도로 곳곳에 차를 세우고 밥을먹거나 피로한 눈을 잠깐 붙이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러나 26만4천평방미터인 묘역에 14644명이 묻혀 있는 이 영원은 현재 묘지기능을 상실했다.
계획된 묘지수요로 공간이 동나 60년 이후 묘지를 분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오야마' 뿐아니라 도쿄도내 8개 공영영원 가운데 4곳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도쿄도 건설국 '이시이 코이치' 영원녹지과장은 "무연고 분묘를 정리해 납골당으로 전환하고 토지활용도가 높은 새로운 형태의 묘지를 확산시키지 않는 한 도쿄교외의 나머지 4개 묘지도 멀지 않아 포화상태에 도달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참배 후엔 가족 휴일 나들이
교토시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인 우지시 아마가세 묘지공원은 교토부의 유일한 시영 공원묘지다.
이곳은 일본의 천년고도 교토는 물론 오사카 등 일본 관서지방의 장묘정책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풍향계 역할을 하고 있다.관서지방의 장례법은 관동지방인 도쿄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관동지방은 화장한 유골을 유골항아리에 담아 묘석아래 설치된 납골실에 넣는 방식으로 매장하지만, 관서지방은 유골항아리를 쓰지 않고,납골실 바닥에 그냥 유골을 넣어 보관한다.
동부에서는 유골을 전부 수습하지만, 서부는 유골중 일부만 선별 수습한다. 묘석도 관서지방은 관동보다 다소 규모가 작다. 그러나 관동이건 관서건 100%에 가까운 화장률에는 차이가 없다.
교토시를 포함한 교토부의 지난해 사망자 수는 21044명, 이 가운데 20898명이 화장해 화장률이99.3%에 이른다. 오사카부의 경우도 지난해 사망자 67276명 가운데 매장은 10명에 불과했다. 화장률뿐만 아니다.
묘지 하나를 만들어도 허술하게 만들지 않는 일본인들의 알뜰함은 우지시영(市營) '아마가세'묘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묘지마다 알뜰한 정성
20억엔의 공사비를 들여 92년 완성된 이 공원묘지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빼어난 경관과 넓은 녹지. 일본에서 손꼽히는 차 생산지인 우지의 관광명소 우지천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아마가세 묘지에서는 가족단위 참배객들이 묘소에 들렀다가 관광보트를 타고 휴일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또 주변의 울창한 삼림을 살리기 위해 관리사무소, 휴게실, 화장장 등의 건물을 모두 검은 색 삼각형 지붕으로 지어 마치 큰 오두막 집처럼 만드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안락한 죽음의 세계를 상징한다는 아담한 못을 갖춘 정원, 삶의 활기를 주는 분수대, 널찍한 초지 (草地)가 펼쳐진 시바후광장 등을 곳곳에 조성해 마치 위락공원과 같은 느낌을 준다.
40년 공직생활을 마치고 이곳 관리원으로 근무한지 5년째라는 '사와다 쇼지'씨는 "이곳의 사업면적11만3천평방미터 가운데 묘지면적은 6만2천평방미터에 불과하고 나머지 5만1천평방미터는 보존녹지로 남겨 두었다."며 "묘지에 포함된 녹지까지 합치면 묘역의 2/3이상이 푸른 공간"이라고 말했다.
큰 곳도 1.5평 미만
묘가 들어선 묘역은 더욱 깔끔하다. 묘의 규모에 따라 묘역을 달리해 정돈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묘석의 규격을 제한해 <튀는 묘>를 없앴다. 묘의 바닥을 이루는 묘대는 높이가 30cm, 묘석은160cm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이 이곳의 엄격한 규정이다. 때문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똑같은 크기의묘비들이 가지런하게 늘어선 광경은 마치 조각공원과 같은 느낌을 준다.
교토부 생활위생과 '이마무라 토루' 주임은 "묘지를 조성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죽은 사람보다 참배하러 올 사람"이라고 말했다.
묘지를 아름답고 깔끔하게 만들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찾는 사람도 없는 지역사회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아마가세' 묘지에서는 한 사람이 묘지를 여러 개 분양 받아 연결 사용하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그러나 호화분묘를 조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게 관리사무소측의 설명이다. 묘석의 크기를 제한해 놓은데다 4평방미터 묘소를 조성하는데 석재값 까지 4백만-5백만엔이 들기 때문이다.
이곳의 묘지는 2, 3, 4평방미터의 세 종류로 가장 큰 곳도 1.5평을 넘지 않는다.
묘지값이 2평방미터가 50만엔, 3평방은 75만엔, 4평방은 100만엔이고, 묘지 관리료로 연간 4천-5천엔을 내야 한다.
이마무라 주임은 "이곳에는 우지시(市)에 거주하는 사람들만 매장이 허가되며 묘지 사용 허가를 받은지 5년안에 묘석을 세우지 않으면 허가를 취소하는 방식으로 묘지 가수요를 없앴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아마가세공원이 인구밀도가 높은 교토남부지방의 묘지난 해소와 보다 효율적인 국토이용을 목적으로 오랜 계획 끝에 조성된 만큼 이런 정도의 규제는 모든 시민들이 이해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일교포들 어떻게 하나
1세대 줄어 납골당 선택 급증/ 묘원은 간사이공항옆 '센난' 인기 일본에 거주한지 반세기를 넘기면서 오사카 한국교포 사회에도 화장에서 납골당으로 이어지는 장례법이 자리잡혀 가고 있다.
30만 오사카 교민 중 5만명이 모여 사는 '오사카 이쿠노'. 이곳에 80년 동안 뿌리 내리고 있는 오사카 교회는 최근 교회 부근의 땅 2만5천평을 매입했다.
교회는 이곳에 1만명을 수용하는 초대형 교포전용 납골당을 건설할 계획이다.
노정일 오사카교회 목사(53)에 따르면 이 같은 계획은 교포들의 장묘의식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이를 수용할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련됐다.
노목사는 "불과 10년전만해도 화장을 받아 들이지 못해 고국행을 택하거나 최소한 땅에 묻히기를 고집하는 교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고국이나 일본 모두 묘지값이 오른데다 참배의 번거로움 등을 고려해 납골당을 선택하는 교포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재일교포 가운데 1세대의 비율이 10%가량으로 줄어 들면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현재 교포들이 첫 번째로 꼽는 묘지는 '센난 메모리알 파크'. 이곳에서는 고국행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간사이 공항이 바라다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의 묘지 값은 석재비를 제외하더라도 1백만엔이나 된다. 또 오사카 사카이시(市)에 교포단체가 운영하는 전용납골당이 있지만 3백명의 유골밖에 모실 수 없는 소규모에 불과하고 참배를 위해서는 교통체증 시간대를 피해 가더라도 버스로 한시간 이상 소요되는 불편을 겪어야 한다.
노 목사는 "교포 2세들이 장례를 치르면서 고인의 본명을 쓰지 못하고 '쑤메이'라는 일본식 이름을사용하는 등 일본인의 눈치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고국으로 돌아가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차라리 오사카 시내에 번듯한 한국인 전용 납골당과 장례식장을 한시 바삐 세워야 한다는 게 교포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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