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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55
마태복음 9:27-34
보는 눈과 말하는 입
예수님께서 맹인이나 말하지 못하는 자를 고치신 이적은 본문 외에도 복음서에는 맹인 바디매오(마 20:29-34 / 막 10:46-52 / 눅 18:35-43), 벳새다의 맹인(막 8:22-26),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요 9:1-12), 귀신 들려 눈멀고 말하지 못하는 자(마 12:22 / 눅 11:14), 귀먹고 말 더듬는 자(막 7:31-37)를 고치신 이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늘 같은 방법으로 고치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고치셨다. 그러나 방법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표적으로서 나타내고자 하신 뜻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치신 다양한 방법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표적이 가리키는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27절). 맹인이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 질렀는데 마태복음 첫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바른성경)라고 선언한 것의 연결선상에 있는 표현이다. “계보는 이러하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톨레도트’이다 즉 아들을 낳는 새로운 역사를 나타내신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새로운 언약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언약을 이루실 분이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다고 밝힌 것이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서 다윗 이후 이어지는 솔로몬, 르호보암 등 모두 왕임에도 불구하고 다윗만 왕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다윗 언약의 성취를 의도적으로 강조한 표현이다. 이런 점에서 맹인이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친 것은 왕의 오심을 인정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죄를 폭로하고 고발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 23:15-17)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마 23:24)
그러니까 맹인과 같은 종교지도자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음을 맹인을 통해 증거하게 하신 것이다. 맹인은 예수님을 알아 보고 있는데 정작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 맹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마태는 “두 맹인”이라고 밝혔는데 ‘두 증인’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는데 ‘엘레에오’는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라는 뜻이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아가 불쌍히 여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이다. 따라서 두 맹인은 단순히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오심으로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사 42:1)라는 언약의 말씀에 근거하여 메시아를 보내시면 그가 맹인들을 광명이 되게 하는 길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이다.
내가 맹인들을 그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지름길로 인도하며 암흑이 그 앞에서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 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사 42:16)
맹인이란 당시 사회에서는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거지와 같은 상태로 보았다(막 10:46). 그런 그가 당시 회당에 두루마리로 보관되었던 성경을 읽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으로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베푸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28절). “집”이라는 표현에 헬라어로는 정관사가 붙어 있으므로 ‘그 집’이라는 말인데 평소 거처하셨던 가버나움의 집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불쌍히 여기심)을 베푸신 것이 믿음으로 드러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맹인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답한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29절). “만지시며”의 ‘하프토마이’는 고린도전서 7:1에서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라고 하였을 때 ‘가까이 한다’라는 표현은 성관계로 남녀가 하나 되는 뜻으로 ‘하프토마이’이다. 즉 단순히 만지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은혜 안에서 맹인과 하나 되었다는 의미로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하신 선언은 맹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믿음이 굳건하였기에 그들의 믿음대로 되라는 것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심이 이미 있었기에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주어져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믿음으로 된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인간의 것이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것이었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하나님의 복음이다(롬 1:1-4).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은 하나님의 복음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며 말하지도 못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율법에 담아서 주시니 인간들은 그저 문자의 율법을 잘 지켜 의를 이루고 영생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이심을 한눈에 척 알아보고 잘 믿는다고 자기 열심에 빠져 있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기 위하여 맹인을 집으로까지 끌어들여 믿음을 확인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셨다. 이런 점에서 “집”(28절)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늘의 집을 상징하는 것이다.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30-31절).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맹인과 같은 자들이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예수님의 소문을 퍼뜨려보았자 그 말을 들을 리가 없기에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30절)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온 땅에 퍼뜨렸다고 말씀한다.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복음은 온 땅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묵인하신 것이다. 복음이 복음으로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이다.
“그들의 눈이 밝아진지라”(30절)의 ‘아노이고’는 ‘(눈을) 열다’라는 뜻인데 히브리어 ‘파카흐’(눈을 열다)의 역어이다. 창세기 3:7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라고 말씀한 것과 같은 표현이다. 선악의 나무를 취함으로 눈이 밝아져 자기 죄를 보게 된 상태가 되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자기 죄를 보게 되고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이신 것을 보게 하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보여주신다. 요한복음에 보면 맹인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셨다.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1-3)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조상의 죄와 자기의 죄로 나누어 본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상의 죄도 아니고 자기의 죄도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죄의 권세에 매인 상태가 맹인으로 질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증상으로 말씀하지만 죄악은 하나님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 일시적으로 주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출 4:11)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맹인이었던 자를 다시 찾아가 만나신 것을 통해 보여주신다.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요 9:35-38)
맹인에게 고쳐주시면서 자신을 즉각 드러내고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후에 다시 맹인을 만나셨다. 그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믿음이라고 밝히신 것이다. 맹인의 눈이 떠져서 예수님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맹인을 다시 만나 자신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자 그때 비로소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답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맹인의 눈이 밝아져 자신의 죄를 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믿음이 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베푸시는 은혜이고 불쌍히 여기심이다.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32-33절). 예수님은 귀신 들려 말하지 못하는 자를 고쳐주심으로 죄의 권세에 매여 있기에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올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폭로하신다.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빼내심으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자로 고쳐주신다. 그러므로 맹인을 고치신 것이나 귀신 들려 말하지 못하는 자를 고치신 것이나 동일하게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의 권세에서 빼내시는 은혜를 베푸실 것을 보여주시는 표적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만 진리를 보게 되고 말하게 된다.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34절). 바리새인들은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에 귀신의 말을 할 뿐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도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라고 선포하였다. 결국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8:37, 44-45)
오늘 우리가 진리를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그의 영을 넘겨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202607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