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선생님은 허병구샘이셨어요. 1973년 6학년3반교실에서 46명의 친구들이 생활했더랬어요.
항상 5교시는 주산을 놓았고, 체육시간에는 조를 짜서 자전거타기(수행평가) 연습을 해야했고, 가을이 끝나면 집에서 배추와 소금과 양념류를 갖고 와서는 리어커에 싣고 정화리 빨래터(새마을운동으로 상받은 곳)에가서 배추를 씻어서 김장을 했고, 겨울에는 가래떡을 갖고 와서는 직접 산에 가서 해온 나무로 불을 지피는 난로위에서 구워먹었어요. 도시락 얹여 놓는 것은 기본이고 난로가에서 도란도란 얘기 꽃들도 피웠고요.
배운 자전거로 낙동강가의 모래사장까지 하이킹을 와서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편을 갈라 버려진 플라스틱 오강단지로 모래위에서 축구도 했어요.
하루에 시험은 다섯번은 더 쳤고(빡시게) 밤에 야자까지 하며 선생님은 유서동으로 동암동으로 학생을 데려다 주기까지 하고 뻑하면 가정방문도 하며 가정사도 모두 아시고 6학년 3반은 그야 말로 한 가족이었습니다.
아! 제일 중요한것 -선생님이 총각선생님이셨다는것인데 그래서 여학생이 더 선생님 사랑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우리가 사는길이 바빠서 선생님을 잊고 사는 어느날 이인옥이가 대구의 시민이 우리들보다 먼저 되었는데(중2때 대구 입성)
부(父)의 성명을 기억하시고는 전화번호부 책에서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주셔서 또 우리들과는 끈이 연결되었습니다.(1979년쯤)
지난 토요일(6월27일) 우리 6학년3반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습니다. 부지런한 박옥이가 고생을 해서 옥이, 언길이, 명규, 정수, 덕준, 인옥이, 전경숙이, 봉희, 4학년때 전학간 종수와 허병구선생님은 2009년토요일밤에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김치를 담은 것은 그때 반찬때문에 도시락을 못싸오는 친구를 위해서이고 자전거는 생활을 업시켜주는 기능이기에 못배우는 사람은 용서안한다 하셨고 학원을 못다니는 우리들이기에 방과후수업을 하셨고 그리고 나에게 대학을 가라고 계속 말씀해주셨던 유일한 분이십니다. 1973년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컴퓨터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당시에 구경도 힘든 탁상용 전자계산기 아닌 컴퓨터라는것을 앞으로 많이 쓸건데 우리는 못배우고 건너뛸거라며 6학년때 선행학습으로 가르쳐 주셨어요.
아니 어떻게 그때 컴퓨터 시대가 올지 알고 그 시골의 어린 저희에게 가르쳐주셨나고? 여쭈었더니 일본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길래 짐작하셨답니다.
6학년3반 담임샘은 성서 이마트부근이 고향이신데 선생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께서 가정사와 형제까지 꿰뚫어보신 가운데 반아이들을 지도하셔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다네요.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때 우리 6학년3반에게 기울였던 정성으로 농사를 지었으면 평생 먹고 살아도 남는다'고
우리는 그걸 알기에 6학년 3반 그러면 큰 자부심을 갖고 있고 빌게이츠보다 전 더 선생님을 존경합니다.
할일은 많은데 장마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월요일 아침에 여기 카페회원이기도 한 명규와 옥이와 언길이와 정수, 인옥, 덕준, 전경숙과 모두 모두 좋은 시간이었고 많이 고마워서 이렇게 두서 없이 우리들 이야기를 해봤어요.
*PS : 명인중 3회 선배들이 우리 5회 부러움과 쇼크때문에 어제 다시 명인중학교에서 동기회를 열었는데 80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렀대요.
첫댓글 그시절이 힘들기는 했어도 참 재미있었는데... 못가서 아쉽네.
배귀자가 운영하는 복어식당에 가서 저녁 먹고 명규의 '현 라이브 카페'에 가서 샘의 노래도 들어보고 옥이의 기타솜씨를 부러워하며 보고는 밤12시 되어서 집에 왔다. 네가 없어서 참 아쉬웠다.
그때 주산배운것 지금도 써먹고 있지 않나. 화식이는 성주중앙초등학교 전학갔었는데 주산 1등, 상운이도 대구에 전학가서 주산1등 정말 재미있는 나날들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