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시지 20051114
인류가 추구하는 가장 소망하는 그 모든 것을 이루어지는 날이 있고 이루어지는 세상이 있습니다.
그 실체가 없다면 바램도 없겠지요.
바램이라는 것은 어디엔가 그 실체가 있기 때문에 바램을 갖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아직 그 실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도 우리의 바램 속에서 그 실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 바램 이라는 것이 너무나 다양해서 마치 우주가 무한대인 것처럼 사람들의 바램도 너무 다양해서 사방팔방으로 흩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바램을 한 곳으로 집중해서 한 곳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빛과 사랑이 항상 넘치는 그곳입니다.
그 빛 앞에서 감추어질 것이 없고 숨겨질 것이 없습니다.
옳은 것은 옳은 것대로 드러나고 그른 것은 그른 것대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 빛 앞에서는 아무것도 위장할 수도 감출수도 없고 내가 가진 것이 옳다. 라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른 것은 옳음으로 고쳐야 되고 옳음은 더 옳은 것으로 완성이 되어가야 합니다.
결국은 빛은 우리를 온전한 사랑으로 이끌어주고 완성시켜주는 도구요 기능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저 높은 곳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 높은 곳 이 낮은 땅 어둡고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분쟁만 있는 이 낮은 땅이 아니라 저 높은 곳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까이 가는 것을 느낍니다.
점차 맛을 보기 시작하고 그 맛이 느껴지고 이제는 그 맛을 누리고 즐거워할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가까이 왔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소망과 닿아 있고 그 소망은 우리가 추구하는 지고지선인 사랑과 닿아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다만 이 세상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교각일 뿐입니다.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믿고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면서 이를 수 없는 그 사랑의 세계에 결국은 들어가게 됩니다.
어차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만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세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를 떠날 수밖에 없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정해주신 것처럼 그 나라를 준비해 놓고 계시기 때문에 더군다나 우리 주 그 나라에 계시다 오셨고 우리가 살 수 있는 그 나라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가셨다가 우리를 그 나라에 데려가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안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행해야 합니다.
어제 오후에 아가서처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내 양떼 발자취를 따라오라.
그리고 내 목자들 곁에서 숫염소를 먹이라
양떼의 발자취라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목자가 계신 곳이 나옵니다.
우리가 저 높은 곳을 향해서 가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라 붙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동행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이웃집에서 살던 사람들이 다 짐 챙겨서 떠나는데 어떤 애굽사람이 짐 챙겨서 같이 따라 나선다면 하나님께서 너는 안 돼! 라고 밀어내시겠습니까?
이제는 믿읍시다가 아니라 갑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더 이상 미련을 가질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먹을 것을 제대로 믿고 먹을 수 있는 세상입니까 누구를 제대로 믿고 의지할 대상이 있는 세상입니까?
저번에도 이발하면서 이발사하고 그 분이 저하고 연대가 비슷한데 우리 중고등 학교 때는 무전여행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돈 한 푼 없이 무조건 집 떠나서 얻어먹고 얻어 자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저 어디가든지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와서 세참 먹으라고 하고 어디 사랑방이든지 파출소든지 가서 얻어 자고 그러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이라고 그렇게 못할 것이 없지만 지금과 그 때의 인심이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에 정을 붙이고 살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야 합니다. 압박이 심합니다.
알지 모르는 힘이 우리를 밀어 내고 있습니다.
너희 갈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어디입니까?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는 그곳입니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는 아픔이 있고 찢어짐이 있고 고통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가야 합니다.
오늘 139편 14절 말씀입니다.
처음 말씀이 오데카로 시작을 합니다.
오데카에 레비야()가 붙어서 다음 나올 내용과 분리를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알 키에서 메후팍(<)으로 시작을 합니다.
지금 여기에 나오는 단어들이 어려운 단어들이 나오는데 신묘막측하심이라
노라오트라고 되어 있는 것은 놀랍다, 경이롭다. 그런 뜻입니다.
그 다음에 리플레티라는 나를 지으심이 라고 하는 말이 구별하다, 분리하다 그런 뜻입니다.
팔라동사입니다.
그런데 이 팔라 동사가 끝에 가서 헤로 끝나는 것과 알렙으로 끝나는 것이 뜻은 비슷합니다.
원래 그 사람들이 헤나 알렙을 일종의 모음으로 썼기 때문에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앞에 헤로 끝나는 팔라 동사는 내가 지음 받은 것이 아주 놀랍다, 경이롭다 그래서 뒤에 알렙으로 나오는 리프라이 라는 말은 기적, 이적 이라는 뜻입니다.
주의 만드심이 라아세카 주의 지으심이 그런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런 계획을 세우시고 이런 생각을 하시고 이렇게 나를 만드셨을까?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만족하고 그 속에서 모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런다면 사람이라는 것이 원래 다 그런가보다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구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 팔라 알렙으로 끝나는 동사를 찾아보면
창 18:14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여기서 팔라 동사가 쓰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적으로 그렇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역동사로 바뀌어 지면 하나님께 드리심이 됩니다. 레위기에서는 그리고 민수기에서는 서원이 됩니다.
어쨌든 이것을 통틀어서 해석을 하면 구별됐다, 특이하다, 대단하다, 기이하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욥기서 에서는 기묘하다, 기이하다, 참 이해하기 어렵다.
정말 문자 그대로 신묘막측 하십니다.
하나님의 묘하심을 측량할 수 없다. 그것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그것을 내가 주께 감사한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지으셨을까?
그러면서 15절에서는 로 니카드 하고 나옵니다. 숨기우지 못한다.
로 니카브
무엇을? 오츠미 이 오체미라는 단어는 세 번 쓰이는 것으로 나오는데 힘이나 그런 것을 말하는데 주로 실체, 존재를 말합니다.
뒤에 가서 야드라는 손이 나오면 힘이 되고 신8:17, 욥30:21에서는 야드가 나와서 힘이 됩니다만 여기서는 야드가 안 나오고 ‘민메카’ 라고 해서 주님 앞에서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그 다음에 아쉘 이하를 보면 내가 은밀한 중에 지음을 받고 땅의 가장 아래 부분에서 지음을 받았다.
그래서 아쉘과 연결이 되어서 그렇게 나를 지으신 주님 앞에서 오츠미를 숨길 수가 없다.
아주 비밀히 아주 깊은 곳에서 이것이 나쁜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몰랐잖아요?
어떻게 창세기1장대로 되어졌고 창세기 1장의 작정대로 그런 작정이 되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다음에 16절에서는 15절의 오츠미가 여기서는 갈레미로 나옵니다.
갈레미이라는 단어는 한 번 쓰이는데요. 일종의 두루 뭉실 이게 원래 접어 포개다, 말다. 라는 뜻으로 두루 뭉실하게 그냥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레가르메(」)로 막아 놨습니다.
지금 15절에서는 레비야()로 구분을 시켜놨는데 여기서는 레가르메(」)로 막아놨습니다.
주의 눈이 갈레미를 보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알 시프레카 그래서 세페르라는 단어는 책이라는 말입니다.
그것들 모든 것이 주의 책 위에 ‘알’ 있고 그 날들이 다 기록되어 있다.
어떤 말이냐 하면 유차루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어떤 모양을 빚다, 만들다, 주조하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만들어 가는 날들, 나를 이루어 가는 날들이 다 책에 있고 그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뒤에 가서 보면 베로 에하드 바헴 이렇게 나옵니다.
직역하자면 그들 속에 하나되기 전에 라는 말입니다.
이 날들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되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세 째날, 네 째날 등
날들이 기록되어 있고 그 모든 날들이 책에 씌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신묘막측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 그런 계획, 그런 작정을 하시고 그것을 끊임없이 이루어 가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것을 의지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만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형상이 무엇입니까?
어떤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주의 눈이 보시고 계신다 무엇을? 갈레미를
갈렘이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지금 내가 얼마만큼 되었을지 몰라도 어쨌든 나는 갈레미입니다.
그냥 두루두루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져도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 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갈레미가 지금 어떤 형태가 되어 있든지 간에 철물로 어떤 형태를 빚든 토기장이가 흙 한 덩어리로 그냥 두루두루 뭉쳐놓은 덩어리일지라도 언젠가는 그 손에서 멋있는 작품이 나옵니다.
그것이 주의 책에 있고 그 날들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7절 말씀 보면 베리 마 어쩜 내게 그러냐? 라는 것입니다.
베리 마 미 야케루 레에카 주의 생각이 이 야카루라는 동사는 아주 무겁다, 값지다, 위대하다, 희귀하다 그런 뜻입니다.
삼상 18:30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그럴 때 야카르 동사를 씁니다.
사 43: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그 다음에 두 번째 레가 나오지요 레리마 야케루 레에카
두 번째 레 아츠무 라쎄헴
여기서는 그 수가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지만 라쎄헴이라는 단어는 로쉬에 가서 뒤에 접미사가 붙은 것입니다.
이 아참이라는 동사는 단단히 묶다, 힘이 세다, 수가 많다, 강하다, 강성해지다
그래서 뼈를 에쳄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머리가 여기서 그들의 머리라는 것은 위대함이라는 뜻도 되고 첫째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아채무 그러면 어쩌면 그렇게 힘이 세고, 강하고, 많고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로세헴 이 단어는 아주 강하고 힘도 세고 보배롭다고 하는 가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수가 적은 희귀성 이런 데서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고 라세헴이라는 것은 오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 말씀 보면 내가 그것들을 헤아리려고 해도 모래보다 많다.
그래서 내가 깰 때에 당신과 함께 있나이다.
여기서 깬다는 말은 잠자다가 갑작스럽게 정신 차리고 보니까, 각성하고 보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도 우리가 제시하고 제안해서 한 약속이 아니라 그분이 스스로 사랑으로 한 약속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 높은 곳을 향해서 안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이시고 실질적이시고 대단히 현실적이시고 사실 적 이십니다.
왜냐하면 진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증명하고 역사가 증명합니다.
지구 사람들이 이렇게 부패하고 잘 못되어 있다고 해서 이 지구를 망가뜨리시는 하나님 아니십니다.
우리가 감당 잘 못해서 자연의 역습을 당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초한 것입니다.
우리가 칼을 잘못 놀려서 내 손을 베는 것은 내 잘못이지 누구 잘못이 아닙니다.
환경의 역습입니다.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환경을 망가뜨려놓은 그 대가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미물들은 살아있고 하늘의 구름은 여전히 떠 있고 비는 내릴 때 내리고 계절은 바뀔 대 바뀌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망가뜨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은 오늘 말씀의 첫 단어처럼 오데카 알 키 내가 이러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70인 역을 봤더니 에코모 로게소마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에코모 로게소마이라는 말은 내가 시인한다, 내가 고백한다, 내가 진술한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