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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6일 주일설교 2부 _ 요한복음 12장 20-36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독일에 있는 벤처 회사에서 중국 공장을 지었습니다. 중국공장을 지었는데 중국공장에서 만드는 벤츠가 독일원래 공장에서 만드는 벤츠보다 훨씬 더 품질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여전히 독일 벤츠 로고가 붙어 있는 차를 생산했습니다. 중국과 독일 벤츠회사는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독일 벤츠회사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중국 벤츠 회사가 자율적으로 움직입니다. 중국 벤츠 공장의 특징은 모양은 똑같은데 브레이크 파열을 일으킬 수 있는 불량품을 한 두 개씩 끼어 넣습니다. 타이어가 순식간에 펑크 날 수 있는 약간의 문제가 있는 겁니다. 독일에서 소송을 걸었습니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 벤츠는 고물차 똥차 협착과 거짓과 모든 고장품의 대명사가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엄청 애를 썼지만 소송할 때마다 중국 변호사 중국 판사가 하기 때문에 항상 독일은 패소를 했습니다. 독일 벤츠 차가 벤츠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딴 이름을 하려고 합니다. 이건 전부 다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구원독과점업을 했는데 세상의 기독교가 하나님과 다른 짝퉁 하나님을 보여줌으로써 세상 만민에게 하나님에 관한 진짜 본질을 다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소송을 하려고 하더라도 미가엘 천사가 법정에 올수 없습니다. 일단 천사가 들어오면 보이지가 않습니다. 천국 변호인 입장 하면, 미가엘이 왔다 갔다 하지만 지상에서는 아무도 안 보입니다. 결석 재판이 되겠습니다, 하면 인간의 판사 재판이 온갖 변론과 검사 판사를 다 구워삶아서 항상 이런 결론이 납니다. 지상에서 이미 프랜차이즈를 내기로 한 이상 하나님은 더 이상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것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부5권 <대심문관>에서 대심문관과 예수의 대화입니다. 지상의 일을 하나님이 간섭할 수 없다고 판결내리고 지상은 교회에게 맡겨달라고 하는 대제사장의 요구, 오늘날 교회는 구원독과점 업체입니다. 구원 독과점업체로 교회는 구원 받고 싶은 사람이 유일하게 찾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일반적으로 무당이나 불교 같은 다른 종교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구원 받는다는 구원의 확신감을 유포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감을 유포하는 종교는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주는 구원의 유포, 구원의 느낌 구원의 본질은 보통 이성과 양심을 가진 자들에게 조롱을 받기에 합당할 정도로 조잡하고 내용이 졸렬하여 모든 사람을 불가지론자 또는 무신론자로 만들어버립니다. 요한복음 12장 19절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온 세상이 저를 왕으로 따른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이 따를 것이다도 아니고 온 세상이 따라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매우 힘겹게 세상 만민을 찾아가서 예수를 왕으로 섬기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대로 대표되기만 하면, 예수님이 올바로 대표되고 재현되기만 하면 represent 되기만 하면 사람들은 예수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세상 만민의 자발적인 순종과 동의를 이끌어내며 다스리는 왕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우리를 섬겨주는 왕이 아니면 도저히 왕으로 섬길 마음이 없는 종자로 창조가 됐습니다. 인간은 예수님에게만 복종하도록 창조됐습니다.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와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특권을 십자가에 못 박는 왕에게만 인간은 우주적 안정감을 가지고 통치를 당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인간은 비록 타락했지만 타락한 인간마저도 압제적인 지배자와 통치자를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계는 영원한 반란 상태입니다. 어떤 왕도 세계만민의 마음을 잠복하는 반란기운, 억지로 참아내는 무서운 용수철 같은 rebounding 하는 저항의지를 해소시키지 못합니다. 예수님에게 와서야 진정한 순복과 복종을 경험합니다. 저도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진짜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인상을 보십시오. 누구에게 복종하게 생긴 얼굴이 아닙니다. 저는 주체성이 시퍼런 사람이었고 정신이 흐느적거려서 연체동물처럼 돼서, 아이고 어디 귀의할 데 없나? 이렇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귀의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고 함부로 절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는 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저를 자유케 하신 후에 저를 무한히 자유케 하시고 저의 존엄성을 100% 회복시킨 후에 자기를 0으로 축소시킨 후에 나를 다스렸습니다. 종처럼 나를 섬겨주는 이런 왕 앞에서 내가 절할수록 내가 고귀해지고 내가 경배할수록 내 존엄성이 고양되고, 내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릴수록 자유로워지고 내가 그분에게 속박될수록 자유를 느끼기 때문에 예수님께 절해야 하고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고 났을 때는 시퍼런 자유인이 됐습니다. 제게 얼마나 큰 자유가 왔느냐? 스물두 살 스물세 살 때 이런 자유를 얻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가난뱅이가 되어도 아까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으로 캠퍼스 선교사역에 뛰어들었습니다. 캠퍼스 선교사역은 83년에 정말로 신종벤처기업인데 국세청에 분류가 안 되는 직업이었습니다. 면세점 이하의 직업이었기 때문에 저의 결혼식 주례를 했던 목자님은 하객들에게 뭔가 설명을 해야 할 텐데 아무런 설명을 하지 못하고 계속 빙빙 둘러서, 고귀한 뜻을 가지고 청년을 위하여 인생을 바친, 이러니까 처부모가 놀라서 이 양반이 뭐하는 양반인가 했습니다. 하객들은 돈 내는 사람은 아무도 오지 않고 200여명의 학생만 와서 밥만 먹는데, 돈을 낸 사람은 10명도 안 됩니다. 백낙청 교수, 영문과 교수 몇 명, 동기 몇 명, 온통 돈을 낼 수 없는 거렁뱅이 같은 80년대 학생들이 와서 결혼식장에 와서 끝까지 가지도 않고 후식까지 먹었습니다. 그걸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언제 그 일이 끝날지 모르고 30년 그렇게 갈수도 있는 일을 했다는 것은 완전히 세상의 가치들을 우습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유로웠기 때문에, 내가 예수 안에서 시퍼런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에 두렵지 않았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일이 끝날 수도 있고 안 끝날 수도 있는데 저 같은 미친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해야 합니다. 12년 만에 미친 사람이 나타났는데 84학번 서울대 기계공학과, 목자님 제가 목자님의 일을 할 테니까 목자님은 유학을 가십시오, 그러자마자 그 부모가 목포에서 올라왔습니다. 제 자취방을 찾아왔습니다. 신림2동 130-20번지에 와서, 김 선생님 제발 내 아들 감동 그만 시키십시오, 아들 때문에 죽겠습니다, 하루 종일 성경만 펴서 읽고 보면 김선생님 설교 노트만 하루 종일 봅니다, 자기가 천 번을 들었다면서 확신이 섰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했던 말입니다. 살려 달라고, 그 당시 운동권이 있어서 분신 투신을 하지만 분신 투신은 장렬하게 멋은 있습니다. 일생동안 작은 건물에서 화장실 청소하면서 전도하러 다니며 후배들에게 경멸을 당하면서 형사들한테 쫓기고 의심 받으면서, 한 번도 친구 결혼식 장례식을 못 가면서 사는 것은 명예의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왕권과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가치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저를 100% 가능한 김회권, 원래 저를 창조한 그 모습으로 회복하신 후에 제 마음을 얻으셔서 제 마음을 통치해주신 겁니다. 힘없는 생명의 물길이 흘렀고 자유가 흘렀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염세주의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을 시기한 것도 아니었고 행복하게 만드는 그 일이 재밌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잘 풀리는 게 좋았습니다. 다만 제가 주님 앞에서 이렇게 자유로워진 이유는 주님의 통치가 내 마음에 임하자 내 안에 있는 거짓된 임금, 내가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던, 나를 이 정도만 만들어줘야만 행복할 것이라고 했던 세상의 모든 가치관들, 거짓된 임금들이 추방되었고 폐위되었고 주님만 내 마음 보좌에 딱 서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복종자가 되었고 고분고분한 자가 되었고 주님 앞에서는 순종의 누적된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헬라인들의 방문을 받았고 헬라인 세계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헬라인들이 뵙자고 한 말씀을 듣자마자 이 말씀을 한 것입니다. 헬라말이라는 말은 로마제국의 언어인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로서 유대 팔레스타인 바깥에 있는 모든 땅입니다. 제가 볼 때 그리스에서 왔을 수도 있고 입달라에서 왔을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주님을 뵙자고 하는 이유는 주님을 헬라인들의 삶의 공동체까지 데려가기 위해서 불러들인 겁니다. 주님을 뵙자고 한 말은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주님 헬라인들의 동아리, 헬라인들의 삶의 변경까지 와 주십시오, 라는 초청의 말이었습니다. 그러자마자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아멘 레고 히미, 에한 메 호코코스 투 시투 헷손 에이스텐데 아포타네 아우토스 모노스 메네이, 에한 데 아포사네, 펄룬 카루푼 페레, 카루푸스 할 때 열매입니다. 만일 땅에 떨어지는 곡식알이, 밀알이 아닙니다. 곡식알 코코스가 아포사네, 죽지 않으면 아우토스, 곡식 알 자체는 모노스, 홀로 머물게 될 것이고, 만일에 아포사네, 죽으면 펄룬, 많은 열매를 맺는다, 직설법으로 돼 있습니다. 직설법이라는 것은 모든 농사에서 씨를 뿌려 본 모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내가 죽어야 헬라인들에게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 열매가 여러분에게 갈 수 있다, 지금 바로 여러분이 나를 찾는 것을 보니까 내가 죽어야 한다, 이런 말입니다. 세계만민이 나를 찾는다면 내가 죽어 열매를 맺어서 세계만민 가운데 갈 수밖에 없다, 주님은 헬라인이 찾는 이때를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할 때로 파악한 겁니다. 굉장히 절묘한 말입니다. 이 한 알의 떨어져 죽는 밀알 비유는 예수님의 지혜로운 통찰과 신적 총명의 절정이라고 봅니다. 밀도 보았고 땅도 보았고 곡식도 보았고 다 보았지만 이 멋진 문장을 조합해서 말한 사람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자기 삶을 이렇게 해석한 겁니다. 여러분 이 간단한 원리가 예수님 논리입니다. 기독교의 존립은 땅에 떨어져 썩는 밀알이 되기로 결단한 개개인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목사님에게 달려 있지 않고, 개개인의 평범한 신자의 삶이 풍겨내는 열매, 그 평범한 신자가 맺는 열매가 기독교의 존립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만일 교회 다니지 않는다면 우리 모든 개개인이 교회처럼 사명감을 가질 텐데, 교회 다니는 관계로 집단 은닉 속에서 무책임의 분자로 바뀌어버립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지 않고 내가 교회다, 내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곳이다, 하면 우리는 분명히 멋진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한 데 모여서 기독교인이 동아리가 되고 세력이 되면 기독인은 갑자기 야수적인 이익단체로 바뀌어 버립니다. 교인이 혼자 있을 때가 가장 멋있고 무리지어 있을 때 무서운 집단이 됩니다. 전철 같이 타는 구역인들은 무서운 집단입니다. 권사님 목사님 앉으세요, 하면서 엉덩이로 밀면서 자리를 확보합니다. 목사님 혼자 산에 갈 때는 거룩하잖아요. 200명의 목사가 노회에서 이쑤시개를 쑤시면서 갈비 먹고 나올 때 무서운 집단이 됩니다. 거룩한 아우라가 완전히 사라집니다. 우리가 그렇게 모여 있지 않을 때는 굉장히 놀라운 신령한 기운이 나오고 광채가 나옵니다. 교회가 안 모였다면 차라리 한 알의 썩는 밀알의 비유를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중국에 있는 벤츠회사처럼 정확한 설계도처럼 차를 만들지 않고 다르게 만들어서 벤츠 회사 이름을 더럽혔던 중국인 회사처럼 그렇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주님을 바로 알려줬다면 바로 대표했다면 온 세상이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온 세상 중에서 주님 같은 왕에게만 복종하도록 만들어진 인간이 주님을 본능적으로 자기 왕으로 영접할 수밖에 없는 거거든요. 누구든지 독재자와 압제자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솝우화에 그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호수에 개구리들이 제우스신에게 우리에게 왕을 주십시오, 라고 하니 제우스가 나무 막대기를 던져주었습니다. 개구리들이 왕인 줄 알고 할렐루야 하다가 가만히 있으니까 개구리들이, 이 왕 말고 다른 왕을 주십시오, 좀 살아 있는 왕을 주십시오, 생동 감 있는 왕,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왕, 그랬더니 이번에 개구리 한 마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이게 네 왕이다, 개구리는 왕이 아닙니다. 개구리도 싫다고 진짜 참 왕을 주십시오, 우리를 감동을 주는 왕을 주십시오, 우리에게 복종을 일으킬 왕을 주십시오, 라고 하니까 뱀을 주었습니다. 이 뱀이 개구리를 다 잡아 먹었습니다. 이것이 사무엘상 8장 18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인간이 자기 수준의 왕 때문에 부르짖는 날이 온다는 경고처럼 지금 인간 전 세계 만민은 자기가 뽑은 왕 때문에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한 사회의 최고 지도자, 한 사회의 지도자는 그 사회가 표현할 수 있는 도덕성의 표현입니다. 만일 사회가 음란하고 부패했다면 부패하고 음란한 사람이 반드시 지도자가 됩니다. 그게 바로 이탈리아입니다.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가장 부패했습니다. 가장 부패했던 이탈리아, 인터밀란이라는 축구 구단주는 이탈리아가 축구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축구 구단을 거느린 사람입니다. 너무나 음탕한 플레이보이, 너무 음탕해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없는 걸레 같은 그 사람이 수상을 그렇게 오래합니다. 그렇게 나쁜 일을 오래 했는데도 지금 여전히 감옥에 가지 않습니다. 왜? 이탈리아 사람 자체가 축구와 결혼했고 축구 우상에 빠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 자체가 음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양심이고 의고 정의고 싫습니다, 잘 살게만 해주십시오, 이렇게 내가 살아가도록 결단하면 잘 살게 해줄 욕심을 가진 사람이 정의를 무너뜨리면서 왕이 반드시 되게 됩니다. 그런 왕들은 대개 540만 표 차이로 왕이 됩니다. 지금 우리는 정의가 무너져버린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정의가 무너진 건 보통 사람은 느끼지 못하지만 제방방천이 무너져 버린 겁니다. 앞으로 무서운 사법폭력이 일어나도 잡을 길이 없는 겁니다. 공무원들이 도덕적 방종,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어떤 조롱을 합니까?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나? 실제로 민주주의가 밥 먹여줍니다. 일베라고 하는 이상한 데서 민주화하면, 비추천, 왕따, 혐오감을 주는 언어입니다. 혐오감을 주는 언어가 민주화입니다. 이게 일베충들의 세계에서 쓰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왕이 만일 음란과 폭력과 불법을 대표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시민들의 누적된 불법의 화신이라고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선택한 왕, 우리가 섬기는 왕은 총체적으로 한꺼번에 우리 정체를 폭로한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왕으로 모시면 예수님이 우리시민 표준도덕의 대표자가 됩니다. 우리 왕은 시민들의 표준적인 윤리감과 도덕감의 화신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어떤 거짓 임금도 뿌리를 못 내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왜 우리 주님을 왕으로 모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 세상은 나쁜 짓이 이렇게 판을 칠까요? 우리가 주님을 진짜 왕으로 영접했다면 대한민국 개개인의 마음속에, 기독교인의 마음속에는 거짓된 지도자가 추방돼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를 주로 모시는 사람이 어떻게 세습하고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을 목사로 대우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예수님께 순복하고 나면 느부갓네살의 모든 우상숭배자들은 같잖게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참된 경배, 예수님을 참된 주로 영접하는 진정한 신앙의 결심을 못하는 대한민국의 교회는 모든 사악한, 가장 교인 중에 가장 악랄하고도 도덕적으로 저열한 자가 교회를 대표하도록 둡니다. 우리 주님은 로마제국의 체제 아래 살았죠. 이 당시의 로마제국의 황제 이름은 티베리우스입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42살에 아테네 올림픽에 가서 낙타경주에서 챔피언 우승트로피를 탄 우골지도자입니다. 긴 황제의 통치 시간에 엄청난 우골호위를 받는 자가 이 티베리우스입니다. 티베리우스의 특징은 법적 강제와 통치입니다. 그래서 항상 로마의 황제가 시리아 및 유대 총독으로는 가장 계엄군 진압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냅니다. 빌라도가 계엄군 진압능력이 많았던 강경파입니다. 그를 보낸 겁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통치를 100% 대현한 일종의 아바타입니다. 주님은 로마황제의 통치권이 실제로 뼈저리게 느껴지는 가이샤라 벳새다, 주님은 로마황제에 모든 통치흔적들이 요소요소 있는 도시에 목수 일을 하러 18년 동안 다녔기 때문에 로마황제의 통치가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을 얼마나 왜곡시켰는가를 철저히 본 겁니다. 주님께서 제일 일을 많이 하셨을 곳이 세포리스라는 도시입니다. 세포리스가 바로 헤롯분봉왕의 수도입니다. 그 헤롯 분봉왕 수도에 로마제국의 축소판 로마마차경기장이 큰 산안에 있었습니다. 목욕탕이 있습니다. 지금도 있습니다. 오페라장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목수 일을 마치고 연극을 관람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쓰셨던 말 중에서 회칠한 무덤 또는 위선자라는 말은 연극에서 쓰는 단어입니다. 히포크리트, 연극에서 가면 쓴 배우를 히포크리트라 불렀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을 쓰셨다면 일을 마치고 나서 집에 가시기 전에 연극을 한 편 땡기시고 가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건 학자들의 논문에 나옵니다. 주님이 쓰는 용어가 연극 용어입니다. 주님이 일하셨던 스키트폴리스, 세포리스는 로마의 통치체제가 뼈저리게 있고, 착취체제가 몸서리치게 경험되는 농민들의 땅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가복음 10장 42절 이런 말을 쓰셨습니다. 소위 이방인의 집권자들, 이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표현이 기가 막힙니다. 지금 개혁개정에는 소위라는 말이 빠졌어요. 잘못됐습니다. 원래 소위라는 말이 들어가야 합니다. 호이 도쿤케르스 아르케인 콘 에스논 카간큐리오스 인 카타 엑소시아조, 소위라는 말은 다스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열국 백성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는 그 자들은 다스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고 사실은 카타 큐리오 카타 엑소시아조, 권력을 남용하고 임의로 사람을 압제하는 자들이지, 다스리는 자들이 아니다, 아르케인, 진짜 다스리는 자는 나귀 새끼를 타고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사람들이 각각 가져온 잠재능력을 100% 발휘하도록 도와주는 자유의 챔피언 그가 다스리는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로마제국 체제를 두 단어로 요약합니다. 카타 큐리오 카타 엑소시아조, 이 두 단어로 로마제국 체제와 헤롯 분봉왕 체제를 요약합니다. 주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자기가 십자가에 못이 박혀서 세계만민을 이끌어 가면 이 모든 거짓 임금들은 더 이상 통치기반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확신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들려 죽는 이 방식을 선택하여 사람들의 성령의 능력으로 이끌어 가면, 자기를 참 왕으로 섬기는 세상이 되면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와 같은, 빌라도와 같은, 헤롯 분봉왕 같은 가짜 압제자들은 왕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쫓겨날 것을 예견했어요. 여기서 방대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우리는 봅니다. 줄 세 개 빵빵 칩니다.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아멘 아멘 레고 히미 에안 메 호 코코스 펩손 에스톤 게네스 아포사, 여러분 어떤 희망을 가져야 합니까? 여러분이 지금 압제적인 지도자에게 카타 큐리오 당하고 있죠? 원세훈 국정원장 사건 보셨죠? 모든 국정원 직원들은 무죄, 기소유예 됐어요. 위에서 시킨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공무원법에 보면 양심에 반하는, 정의에 반하는 지키지 않을 의무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분별력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임금은 나에게 나를 비인간화시키는 일을 하게 하는 자입니다. 이 세상 임금은 나에게 이익을 주지만 나의 인간의 고귀성을 파괴하는 일을 시키는 자입니다. 나쁜 임금은 내가 그 명령에 복종하는 순간 나다움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명령을 지시하는 자입니다. 그 나쁜 임금이 언제 쫓겨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영접하는 순간에 나는 나쁜 임금의 통치로부터, 내 마음의 보좌를 장악하고 있던 그 나쁜 임금을 쫓아냅니다. 우리 아버지가 평생 꿈꾸었던 소박한 꿈, 저희 아버지는 부산시청 공무원 하시다가 5.16을 만났습니다. 부산시청의 공무원들을 전부 다 서정쇄신이라는 이름으로 잘라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잘리는 그 심각한 순간에 권세가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내가 이 곤경을 벗어났을 텐데, 하면서 저를 낳자마자, 너는 권세를 모으는 자가 되어라, 하면서 회권이라고 지었습니다. 항상 어렸을 때부터 권세를 모으는 자가 되라고, 네가 아빠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은 고정 면서기가 되는 것이다, 둘째 네가 면서기가 되는 것보다 더 한 일은 군수가 되는 것이다, 네가 군수가 되는 것보다 더 하려면 하동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원을 풀어다오, 하면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잘한다는 말은 약간 해석이 필요합니다만, 저희 아버지가 항상 사명감을 주셨습니다. 밥상머리에 앉자마자, 공부를 잘 하는 건 뭐냐? 신문을 읽어야 한다, 외국어를 잘 해야 한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가 제가 기독교를 믿자마자, 내가 내 아들한테 너무나 큰 스트레스를 주었구나, 89년 여름에 편지를 쓰셨습니다. 한자를 쓰면서 김회권 방심하여라, 최근에 네가 종교적 견문을 넓히면서 심각한 마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네게 준 말이 너무나 부담이 되면 공무원 문제는 더 이상 잊어버리자, 종교에 귀의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네가 얼마나 힘들면 그랬는가 아버지는 이해한다, 이제 아무 것도 안 되어도 좋으니까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이렇게 저희 아버지가 화해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모든 문제가 우리가 실제로 권세를 얻는다고 해결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권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주님의 영에 자유함에 도달하는 것, 이것밖에는 이 세상 원리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주님과 접붙인 자가 된 사람 외에는 이 세상의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를 좋아했던 84학번, 저를 너무나 과감하게 추종하고 일찍이 저의 지도자 될 것을 예견한 후배는 우리 집에 뻔질나게 다니면서 모든 인생의 고민을 다 털어놨습니다. 김앤장에 들어가서 1년 만에 저랑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그는 소득이 높아갈수록 제 삶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제가 유학 갈 때 22층 신라호텔에서 5만 7천 원짜리 뷔페를 사주면서 목사님 공부 잘 마치고 오면 크게 힘이 돼 드리겠습니다, 축복기도 하고 차라리 돈을 주지, 왜 이렇게 비싼 걸 사줘, 이렇게 기도 하고 왔습니다. <복음과 상황> 380만원 적자나는 잡지를 맡아 발행인이 됐는데 전화를 했습니다. 김변호사님 제가 이번에 잡지를 맡았는데, 1년에 10만원씩 2년만 도와주십시오, 하는 말에, 목사님 아직도 그런 일 하세요? 목사님 유학도 마치시고 사람이 바뀌었을 줄 알았더니 왜 아직도 그런 일 하세요? 참 답답하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얼마나 저랑 가까웠느냐 하면 나이 어린 주일학교 학생과 결혼하는 문제로 제가 무료로 멘토링을 20시간 30시간 해줬습니다. 밥까지 먹이면서, 우리 집에서 직접 먹였습니다. 10만원 도와주는 것에, 그런데 그 친구 차 엄청 좋은 것 탄다고 소문났더라고요. 그 친구 때문에 제 보험료가 올라간다고요. 왜 아직도 그런 어설픈 청년 문제, 하나님 나라 문제에 매몰됩니까? 지금은 좀 어른이 돼야 될 때가 아닙니까? 이런 식의 핀잔을 제게 주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보면 상처가 깊은 것 같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또 한 변호사는 큰 변호사회에 가서 제가 월급이 2천만 원이 넘었습니다, 하는 순간부터 저랑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그 친구도 저를 멘토라고 하면서 다니면서 엄청나게 많은 편지를 보내고 찾아왔는데 점점 저랑 멀어집니다. 1년에 전화도 안 하고, 결혼식 주례를 제가 했기 때문에 꼭 결혼기념일에는 6만원 상당의 꽃을 보냈습니다. 이제 국물도 없고 점점 멀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소득이 높아지면 제가 이렇게 사는 것이 아직도 복상, 성서한국, 루저들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니까요. 이 세상의 임금은 안전보장을 주면서 우리를 파괴합니다. 세상의 임금은 악만 행하지 않고 작은 선을 주고 큰 악을 시키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은 허접하게 다가오지만 우리를 100% 나답게 만드시고, 이 세상의 어떤 정사와 권세로부터도 자유케 하는 절대 자유인을 만들어주시고, 영원한 희락 가운데 살도록 만들어주시고, 영생까지 가는 생명의 삶을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그분이 지금 매우 현실감 넘치게 성령 안에서 우리를 통치하시고 우리 마음의 보좌에 들어오십니다. 그런 성령의 감화 감동 속에 살면서 예수님께 절을 한 번 하는 사람마다 이 세상 거짓 임금의 배척하는 힘이 생겨서, 세상의 거짓 임금의 통치영역은 축소되고 왕이신 예수님이 온 세상만민을 이끌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시대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제가 너무 심한가요? 저희 어머니가 너무 순진하다, 너는 그걸 다 믿냐? 이렇게 하시는데 혹시 여러분 중에서도 그런 생각할지 모릅니다. 제가 너무 순진해요. 그러니까 집 살 생각을 안 하죠. 제가 어머니께 용돈을 주면 집도 없는 놈이 무슨 용돈이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 수 있어요, 어머니 그런데 제가 안사는 거래도요, 왜냐하면 제가 말씀의 종이 돼야 하는데 세상의 종이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에이 쓸 데 없는 농담하지 말아라,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가끔 조카에게 돈 10만원을 주면, 집도 없는 놈이 뭐하냐, 우리 어머니도 끝까지 깊은 오해가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십자가에 달린 그 주님을 영접하고 예수를 내 마음의 보좌에 영접하는 순간 내 마음의 보좌에서 세상 임금들이 쫓겨 갑니다. 나는 어떤 직장, 어떤 곳에 있더라도 절대적 자유, 절대적 평안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산 사람은 그 생명을 영생하도록 보존한다, 이 약속이 우리의 약속입니다. 이런 주님을 믿고 일주일 동안 당당하게 사십시오. 실업자도 주 안에서 실업자 생활하는 것은 존엄성 있습니다. 노처녀도 주 안에서 노처녀 생활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아우라 있습니다. 희망의 빛이 있어요. 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노처녀의 시선이, 그러나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노처녀가 아니라 멋진 신랑을 메시아적 기대감으로 앙망하는 일종의 열 처녀 같은 아우라가 있죠. 아무도 나는 노처녀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나는 실업자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나는 주 안에 있는 자유인이다, 예수를 왕으로 영접한 이후에 어떤 거짓 임금으로부터도 나는 자유케 된다, 이렇게 말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세상 모든 임금을 거짓 임금으로 폐위시킨 주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절대자유, 절대 평안, 절대희락이 생겼습니다. 주님 세상은 우리를 지배하면서 약간의 선을 주면서 큰 악을 강요하는 세상의 임금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할 때 그 멍에를 벗어젖힐 수 있도록 과감한 자유를 주시고 담력을 주소서. 성령께서 우리를 나날이 매일 감동시켜 주셔서 우리 마음의 보좌에 주님을 영접하여 절대자유 절대평안을 누리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마무리기도) 아버지 하나님 저희 교회에 맡겨진 귀한 새싹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무럭무럭 자라게 도와주시고 우리교회의 미래가 되게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들 중 환우가 있고, 교우들의 가족들 중 주님의 어루만지심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 그 누워 있는 자리, 자기 목숨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밤을 맞이하기를 어려워하는 가녀린 영혼들에게 주님 찾아가셔서 부활의 새 소망을 심어주시고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절대 평안을 선사해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모든 치료과정의 가족들이 이 병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위축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해서 불타는 사랑, 신앙을 회복할 수 있도록 창조적인 재난의 회개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주님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이 우리 눈 밖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 자녀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오른 손으로 붙들어주시고 우리의 기도대로 키워주시길 원합니다. 우리 간구와 소원대로 빚어주시길 원합니다. 주님 산모가 순산하도록 태교하는 귀한 딸들 있습니다. 지영자매님 최정안 자매님, 정혜영 자매님, 새생명을 순산하기 까지 완벽하게 안보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의 위로하심과 교통하심이 오늘 예배드린 모든 교우들과 그들의 일터와 가정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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