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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땅을 점령하기 위한 규례들과 여호와의 사자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네가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물리치고 네 모든 원수들이 네게 등을 돌려 도망하게 할 것이며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그러나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내가 네 경계를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강까지 정하고 그 땅의 주민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네가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낼지라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들과 언약하지 말라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출23:20~33).”
가. 인생에게는 영원히 살 땅이 필요함
출애굽기 10장부터 13장까지 여러 가지 하나님의 규례들이 그 백성에게 선포가 되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이다. 우리가 공간적으로 생각한다면 애굽이라는 땅에서 광야라는 땅으로 옮겨오고, 광야라는 땅에서 다시 가나안땅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생각이 되지만, 사람만 그렇게 옮겨간다 해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땅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그 사람 자체가 옮겨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애굽에 있는 사람이 광야에 있는 사람으로, 광야에 있는 사람이 가나안에 있는 사람으로, 사람 자체가 바꿔져야 되는 문제다.
규례가 먼저 선포된 것은 그런 사람이라야 가나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나한 땅에 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런 규례를 선포한 후에 약속된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라고 약속을 하고 있다.
약속된 땅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살 곳이다. 그들은 땅이 없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땅이 없는 인생의 형편을 묘사하는 백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대표적인 백성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그 동산에 두셨다. 동산은 하나님의 거처이며 또 사람의 거처였다. 하나님과 사람이 같이 살 수 있는 그런 땅이고 거처였는데, 결국 그 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담은 근원적으로 자기 땅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치 자기 땅을 잃어버리고 객지에서 유랑하는 것처럼 모든 인생은 지금 자기가 정말로 살아야 할 땅을 잃어버리고 유랑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은 땅을 잃어버린 인생의 대표자들이다. 다른 면에서도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모든 면에서 이렇게 우리 인생을 대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인생의 거처, 영역, 이것은 바로 동산이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산이었다. 그런데 그 동산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너는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가인도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었고 그 다음 사람도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무엇인가 자신의 거처를 찾아서 헤매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이와 꼭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이 없어서 땅을 찾아 헤매는 백성이다.
가나안 땅까지 부름 받아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3대가 살았는데 그들은 양식 때문에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서 그 땅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400년 동안 땅이 없는 민족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출애굽을 통해서 애굽을 나오게 되었는데 나온 목적은 가나안땅으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가나안땅으로 간다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자기의 영토로 간다, 자기 땅으로 간다, 자기가 살 곳으로 간다는 뜻이다.
인생은 결국 살 땅을 찾아 가는 것이다. 우리도 지금 자기가 살 땅을 찾아 간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보통 천당이 살 땅인 줄 생각하고 천당으로 가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땅에는 인생이 영원히 살 수 있는 땅이 없고 천당이 인생이 영원히 살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그런데 과연 천당이 우리가 살 곳인가? 그렇지 않다. 인생이 살 땅은 어디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가나안 땅이었다. 오늘 인생에게는 어디가 영원히 살 땅인가? 이것이 바로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가 살 땅이다.
미국에 갈 것이냐? 중국에 갈 것이냐? 그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가야, 그리스도가 내 땅이 되어야, 그리스도가 내 영토가 되고 거처가 되어야, 그때 비로소 사람은 안식에 이르게 된다. 가나안 땅의 궁극적인 실재는 그리스도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 땅을 약속했다. 그리고 400년 후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모세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약속된 땅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한 민족은 가나안 땅이 필요한 민족이지만 그러나 그 인생 자체의 땅은 가나안 땅이 아니다.
우리 모든 인생, 모든 인류의 땅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영원한 땅이다. 그 땅에 가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 거기는 곡식을 재배해서 먹을 수가 있었고 양이나 소를 키울 수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나오는 땅이다.
인생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나오는 그런 궁극적인 실재는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나오는 궁극적인 실재이다. 거기에 이를 때까지 사람들은 가나안 땅도 찾고 천당도 찾고 극락도 찾고 이렇게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모두 헤매는 것이다. 참 실재가 있는데, 그 실재 아닌 다른 것을 찾고 있기 때문에 헤매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 성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육체가 된 한 인격이었다. 그런데 그 인격이 오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거처가 땅 위에서 물질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 역시 헤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거처가 없어서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했다. 땅에 와도 있을 곳이 없었다는 뜻이다. 땅을 찾아왔는데 땅이 물에 덮여 있어서 있을 곳이 없어서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서 너풀거렸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막을 통해서 간신히 한 약속 안에 하나님이 거기서 머무르시는 집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약속일뿐이고, 하나의 형상일 뿐이고, 예표일 뿐이지 실제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어떻게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시겠는가?
결국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 인격이 나올 때까지 하나님도 역시 헤매는 분이셨다. 집을 찾을 때까지 사람은 사람대로 동산을 잃었기 때문에 땅을 찾아서 헤매고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땅 위의 자기의 거처가 없으니까 헤매고 있는 것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그리스도가 옴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참 성전이 나타났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19,21).” 그래서 그 분 자신 속에 하나님께서 집을 마련하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집이 확대된 것이 바로 교회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속에 거하셨고 신약 안에 와서는 교회 안에 거하시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 속에 거하실 때는 물질적이고 시공간적인 곳에 거하셨지만, 오늘 교회 안에 거하실 때는 영적이고 인격적인데 거하신다. 교회는 인격적인 단체이다. 하나의 인격체인데 단체적인 인격체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필요로 했던 것과 같이 오늘 교회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거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의 땅을 찾고 있는 백성들이다. 이스라엘이 땅을 필요로 하고, 땅을 찾고 있다는 것 속에서 우리인생이 땅이 필요하고, 우리인생이 가나안 땅을 찾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그 수백 년 동안 땅을 잃고 헤맸고 또 땅을 찾아냈지만 얼마 있지 못하고 또 뺏기고, 또 뺏기고 하는 역사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뺏겨서 2000년 동안 땅을 잃어버렸다.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결국 다시 자기 땅으로 들어갔는데 그 땅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들은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매일같이 전쟁이 일어나고 총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우리 인생에게 땅이 이렇게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이다.
그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인생에게 땅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물질적으로는 민족만 있어서는 안 되고 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인생에게 참 땅이 필요하다는 것은 모른다.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인생에게는 참 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나. 그 땅에 살기위한 규례들을 주심
이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여러 가지 말씀과 규례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 그 내용들은 여러 가지다. 그냥 보면 사회적인 법률이다. 이런 일은 이렇게 하고 저런 일은 저렇게 하라는 법률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는 말씀들이다.
예를 들면 유월절이나 만나, 생수 등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표라고 할 수 있다. 규례들과 법률들은 그런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적용하는 문제이다. 만나를 적용하는 문제고 생수를 적용하는 문제고 유월절을 적용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런 법률을 따라서 살고 그 법을 지킨다는 결국 내가 그리스도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기름부음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 인격 안에서 살 때만 이 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이 법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적용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이 법을 도저히 따를 수가 없다. 이 법 속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절기, 이런 것들이 들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관계,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이것을 통해서 절기에 이르게 되는데 일 년 세 번씩 절기를 지키라고 했다. 이 절기는 무슨 일이 다 이루어져서 축제를 벌인다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과의 관계가 완성이 되어야 축제가 된다. 이 관계가 완성되지 않고서는 축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마지막에 절기가 나왔다. 여러 가지 규례들이 선포된 다음에 마지막에 세 절기가 나왔다. 이것은 이런 관계가 완성되어졌을 때 그것이 절기로 표현된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 축제로 표현된다. 절기는 잔치와 마찬가지다.
다. 여호와의 사자를 앞서 보냄
이 잔치 다음에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서로 관계가 있다. 잔치 후에, 절기 후에, 절기를 지킨 후에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말이 나온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먹고, 적용하고, 그리고 잔치를 할 때, 그때 우리 앞에 길을 평탄케 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데 앞에 사자가 있어서 적을 다 물리쳐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도 우리 가는 길에 하나님의 사자가 앞에 있어서 다 정리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이것이 그냥 오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를 먹고 그리스도를 적용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잔치를 벌인 후에 이 사자가 온다. 결국 이 사자는 누구인가? 먹고 적용하고 잔치를 한 결과로 나타난 그리스도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이웃과 나와의 관계가 정상화되어서 이것이 잔치가 될 때 그 때 우리에게서 무엇이 나타나는가?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 그리스도가 적을 파하기 위해서 우리보다 앞서 가는 장군이 되고 여호와의 사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앞에 가서 물리쳐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출애굽기에서는 그렇게 묘사가 되었지만 그것은 절기를 지킨 결과이다.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면 모든 일이 다 만사형통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 안에서 무엇이 발생한 결과로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앞서 가신다, 그리스도가 나타나신다는 말이 된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이 나타난다. 문제 해결에 어떤 힘이 드러난다. 규례들과 여러 가지 말씀들은 인격이 된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그 규례들은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자는 누구인가? 능력이 되신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인격이 있는 다음에 능력이 있다. 기계가 있는 다음에 기계에서 힘이 생겨난다. 기계가 없으면 그 힘이 생겨날 수 없다. 자동차가 1500cc 자동차도 있고 2000cc 자동차도 있고 3000cc도 있고 그런데 왜 휘발유 많이 드는데 배기량이 큰 자동차 엔진을 달고 다니느냐 하면 능력 때문이다. 조금 높은데 올라갈 때 보면 힘이 없어서 못 올라가고 에어컨을 켜면 못 올라간다. 결국 능력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2000cc, 3000cc 되면 높은데 올라가도 올라가는 것 같지도 않고, 에어컨을 틀어도 마찬가지다. 능력이 좋다. 먼저는 인격이고 다음에 능력이다. 사람들은 인격 없는 능력을 사모하고 있다. 아담은 모두 다 인격을 제쳐놓고 능력을 구하고 있다. 그래서 모두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다.
세상에서 구하는 능력은 전부 인격이 배제된 그런 능력이다. 사람들은 그런 능력을 추구한다. 그러나 사실은 세상에서도 참 능력이 있으려면 그 사람 자신이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만한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능력이 나오지 그렇지 않고 그냥 능력이라는 것만 갑자기 튀어나올 수 없다.
불량한 사람에게 회사를 잘 경영하는 능력을 입혀 놓는다고 해서 회사가 잘 경영될 수가 없다. 성실한 사람이 회사를 잘 경영할 수 있는 것이지, 성실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어떤 능력만 있으면 잘 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가보면 그 사람이 모든 일을 한다. 능력이 하는 것 같은데 능력 뒤에는 누가 있느냐? 사람이 있다. 공부도 공부하는 요령, 공부하는 방법만 알면 공부를 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 부지런한 사람이 공부를 하는 것이다.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공부하는 많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 해도 공부에 성공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공부 못하는 사람일수록 기술만 찾아다닌다. 영어단어를 외우는 비법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맨날 비법만 찾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은 대부분 공부를 못한다. 공부를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 자신이 체질적으로 공부를 좋아한다든지 아니면 성실하다든지 이런 어떤 것이 있어서 공부를 하는 것이지 기술을 배워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도 그렇다. 사람들은 기술만 배우려고 생각하지만 기술만 배워서는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없다. 사람이 먼저 갖추어져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그 자격이 없는 사람이 기술만 가진다해서 될 수 없다. 돈 버는 방법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자본이 없으면 돈을 벌수가 없다. 자본이란 게 있어야 한다. 이 인격은 자본이나 마찬가지다. 이 인격이 있는 위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러 가지 규례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인격이 되면 그 인격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원수를 진멸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그 가나안에서 점령해야 할 족속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앞길을 방해하는 적들이다. 이 말은 결국 인생을 방해하는 적들이다. 궁극적으로 사탄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이르러야 할 그 길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이 사탄이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땅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방해하는 사람들로 묘사가 되어 있다. 그들은 가나안땅에 이미 살고 있던 백성들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가 옳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이라고 하는 땅에 이미 살고 있는 사람을 쫓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쫓아내고 자기들이 그 땅을 차지한 것이다.
마치 미국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가서 인디언들을 다 쫒아내고 자기들의 땅으로 만든 것과 똑 같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본다면 정당하지 못하다.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고 이 역사 속에 비유되고 표현된 우리 인생의 길을 보는 것이다.
우리 인생 앞에는 우리 인생의 길을 가로막는 가나안 칠족이 있다. 그들이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그 적을 물리칠 수가 없다. 날마다 와서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는데 무슨 수로 내가 그것을 물리치겠는가?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그것을 물리칠 수가 없다.
날마다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면서 유혹하는데 무슨 수로 물리치겠는가? 내가 그것을 물리치려면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물리칠 수가 없다. 매일 같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을 하는데 어떻게 물리치겠는가?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것을 물리칠 수가 없다.
물질적인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것이라면 능력 있는 신이 앞에 나가서 물리쳐주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인생의 앞길을 가로막는 사탄이라면 그리스도가 아니고선 물리칠 수가 없다.
결국 규례들은 한 인격을 위한 것이고 능력은 이 규례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는 사자가 되게 한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출23:20,22).”
그 말씀을 잘 듣고 청종하고 따른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분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따르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일 때만 가나안 땅이 점령될 수 있고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세상을 점령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사자를 통해서 결국 말씀하시고 점령하시는 셈이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말씀하실 때도 사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그 땅을 점령할 때도 사자를 통해서 점령하신다. 그분 자신이 모든 걸 하셨다. 그런데 모든 걸 하셨지만 우리를 통해서 하고 있지 우리를 통하지 않고 하시는 건 아니다. 우리를 통해서 그 분은 모든 걸 하셨다.
그리스도는 사람을 통해서 보내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냥 와서 규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와서 말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와서 사자가 되는 게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규례가 되고 말씀이 되고 사자가 되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설탕을 예로 들면 설탕의 원료는 사탕수수에서 나오는 당밀인데 그것을 어떤 기계 속에 넣어서 통과시켜 나오면 설탕이 된다. 유한비료, 요소비료는 공중에 있는 질소가 비료 공장의 기계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요소 비료가 된다.
충주 옛날에 비료공장에 가보면 가끔가다 ‘뻥뻥’ 하는 소리가 난다. 그것은 공기를 빨아들이느라 그렇게 한다. 그런데 나올 때는 하얀 설탕처럼 생긴 요소 비료가 나오게 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이 기계를 통해서 말씀을 발하시고, 이 사람이라는 기계를 통해 가지고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게 된다. 사람 없이는 그분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라. 보내신 이와 보냄을 받은 자는 하나임
그래서 보내신 이와 보냄을 받은 자가 하나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출23:19~20).” 내 이름이 그에게 있다는 말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뜻과 마찬가지다. 이름은 그 자신이다.
이 사자와 사자를 보내신 하나님이 둘이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이다. 설탕과 당밀은 모양은 다르지만 하나다. 원재료가 하나이고 본질이 하나다. 당밀이라는 상태에서 설탕이라는 상태로 변했을 뿐이지 그 원료 자체가 똑같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래서 보내신 이와 보냄을 받은 자가 하나다. 사람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리스도가 되고,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표현될 때 그리스도가 된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으로 표현되는 게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모세를 통해 나타날 때 그리스도가 되고, 다윗을 통해 나타날 때 그리스도가 되고, 예수를 통해 나타날 때 그리스도가 되고,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나타나시면 그리스도가 된다.
당밀은 설탕 기계를 통해 나타나면 설탕이 된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다른 기계를 통하게 된다면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떡집에 가보면 같은 쌀을 가지고 어떤 기계에 넣느냐에 따라서 절편이 나오기도 하고 그냥 인절미가 나오기도 하고 여러 가지 나온다. 둥그런 떡이 나오기도 하고 고물 넣은 떡이 나오기도 한다. 쌀은 같은 쌀인데 어느 기계에 넣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지게 나온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나타나시면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히 모양이 다르지만 하나라고 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하나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하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마. 그리스도가 땅을 점령함
설탕으로는 음식을 만들고, 그리스도로는 땅을 점령한다. 이 땅, 이것은 사람이 살아야 할 땅이고, 그 곳은 사탄이 이미 점령하고 있는 땅이다. 사람이 살 곳을 사탄이 점령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땅에서 살고 있다. 남의 땅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면서 종노릇하는 이유는 남의 땅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영역 속에 들어있다.
설탕으로는 음식을 만들고 과자를 만들고 그리스도로는 땅을 점령한다. 그리스도만이 그 땅을 점령할 수가 있다. 아담은 그 땅을 잃어버린 사람이고, 그리스도는 그 땅을 찾은 사람이다. 우리의 대표자로서 아담은 땅을 잃어버렸다. 우리의 대표자로서 그리스도는 땅을 찾았다. 사람이 살 곳을 찾았다.
사람이 살 곳이 어디인가? 그리스도가 바로 사람이 살 곳이다. 사람은 영원히 어디에 살아야 하느냐?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살아야 하고 사람은 어디 살아야 하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야 한다. 이걸 위해서 아브라함을 불렀다. 이걸 위해서 약속을 하셨고, 이걸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서 먼저는 규례들을 주시고, 그 다음에는 사자들을 보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점령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실 때, 어떻게 하려고 불렀나 하는 것이 여기에 역력히 드러나 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참 인생의 영역 안에 살게 하려는 것이다. 참 인생의 영역 안에 있으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되고, 마치 에덴동산에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었듯이 그렇게 함께 있는 곳이 된다.
이것을 한 건물로 묘사해 놓은 것이 성막이다. 성막 안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있도록 되어 있다. 이것을 확대해 놓은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하는 백성이다. 이것이 신약에 내려오면 그리스도와 교회가 된다. 오늘 교회 안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속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자기 백성을 당신의 말씀으로 키우고, 당신의 말씀으로 번성케 하는 이유는 당신의 말씀으로 키워서 당신의 거처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동시에 또 우리는 어디에 살아야 되는가?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만일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빈 그릇과 같고, 우리가 없다면 하나님은 그릇이 없는 셈이 된다. 그 분은 알맹이고 우리는 그릇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라는 알맹이, 생명이 필요하고, 하나님에게는 우리라는 그릇이 필요하다. 이걸 위해서 우리는 가나안으로 가야한다. 어차피 하나님과 사람은 가나안 땅에 살아야 한다.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은 마치 애굽에서 사는 것과 같고, 광야에 사는 것과 같다.
많은 종교들은 광야 안에서의 생활이다. 광야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모든 종교의 생활이다. 가나안 땅에 가기 위해서 그들은 거기서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방황하기도 하고, 불교적으로 방황하기도 하고, 모두다 무엇인가로 방황을 한다. 아직 들어가야 할 땅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 방황을 어떻게 하더라도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만 들어갈 수 있다. 그리스도만 들어갈 수 있다. 불교를 믿든지 기독교를 믿든지 간에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 때 그들이 말하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불공을 많이 드린다고 해서 그 땅에 들어가는 게 아니고 어떤 사람이 되었을 때 그들이 말하는 불국정토에 들어가고, 그들이 말하는 그 극락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안 되고는 그 땅에 갈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그 땅, 가나안 땅, 인생이 영원히 살아야 할 그 땅도 그 사람이 가는 것이다. 그 사람이 되면 그 땅에 가지만 그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 땅에 갈 수가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와서 천당을 믿느냐 안 믿느냐 이렇게 묻는다. 이런 답답한 사람들이 있다. 천당이 어디 미국처럼 있는 땅이라면 돈 있으면 가고, 무슨 방법이 있으면 가는 것이지만 천당이 그런 방법으로 가는 곳이 아니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인격이 가는 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어떤 인격이 가서 살아야 되는, 어떤 인격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 그것을 천당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그 인격이 아니면 거길 갈 수가 없다. 그런데 천당이 있냐 없냐, 믿느냐 안 믿느냐 물으니 얼마나 답답한가!
자기 자신이 그 땅에 살 수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그 땅을 점령하는 사람인지 점령하지 못할 사람인지 그걸 모르고 천당이 있으면 무엇을 하고 없으면 무엇 하겠는가? 아무리 있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내가 물고기가 되지 않는 한 물 속이 있으면 무엇하고 없으면 무엇 하겠는가? 내가 천당에 갈 수 없는 사람인 한 천당이 있으면 무엇하고 없으면 무엇 하겠는가? 자기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질문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점령하기 위해서 이런 수순을 밟으셨다. 우리에게 그 분의 말씀을 주어서 우리를 한 인격으로 조성하시고, 그리고 난 후에 그 인격을 통해 한 사자를 앞에 보내서 그 땅을 점령해 나가도록 하셨다. 이것은 실제적인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로 본다.
율법은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신 것이고,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는 어떤 신비한 능력을 가진 분이 앞에 나타나서 길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들을 한꺼번에 쫓아내지 않겠다고 했다. 한꺼번에 쫓아내면 공동 현상이 나타나서 들짐승들이 거기 번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땅이 황폐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출23:29~30)” 차츰차츰 그 땅을 점령할 때까지는 그들을 다 쫓아내지 않고, 조금씩 쫓아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 안에서도 똑같다. 우리 안에서도 우리가 사람 된 것만큼,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대치된 것만큼, 그 어떤 부분들이 쫓겨나고 물러나간다. 갑자기 공동을 만들어 버리면 다른 것이 들어가 버린다.
이것은 결국 어떤 생명이 성장하고 번식해서 되는 일이지 천사가 와서 싹 치워주고 이런 일이 아니다. 어떤 약속을 했기 때문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그 땅을 점령하게 될 것이고, 어떤 사람이 번성할 때 그 땅을 완전하게 점령하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 할 것인가? “내가 네 경계를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강까지 정하고 그 땅의 주민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네가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낼지라(출23:31).”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불행한 일일 수도 있고 잘못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보려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우리 인생의 길을 보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길을 아주 잘 묘사해주는 그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꼭 가야할 곳을 묘사한 것이고, 꼭 가는 길을 묘사해준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그 길에 갈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잘 묘사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길을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심이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이라는 지역적인 목표를 향해서 이런 길을 갔지만, 허나 우리에게는 이런 가나안이라는 지역적인 목표가 아니고, 그리스도라는 그 영원한 영토를 향해서 우리가 갈 수 있도록 이 길을 예비하여 주시고,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스라엘이 갔던 길에서 우리가 가는 길을 알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한 일에서 오늘 우리가 당한 일을 알게 하시고 이스라엘에게 두신 하나님의 목표에서 오늘 우리에게 두신 목표를 깨달을 수 있는 길을 이렇게 미리 열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들이 가는 걸 보고 우리도 가게 하시고 그들이 당한 일을 보고 우리고 경성하게 하시고 그들께서 점령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점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