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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주 g9inlove@naver.com
경남 진주 출생
창원대학교 경영학 박사
경남대학교 AI·SW융합전문대학원 박사과정
창원대학교 신산업융합경영학과 초빙교수
저서 : 『호모워커스』 『ASK독서법』 등 5권
인제수필문학회 부회장.
나를 모르는 너
나도 사람 볼 줄 안다. 사람들만 보는 눈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나를 좋아해 주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왜 보지 못하겠나.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좋다. 나를 업신여기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싫다. 돈을 욕심낸다고 무작정 나쁜 사람 취급하는 건 옳지 않다. 표리부동하게 내가 하찮은 것처럼 말하는 인간들은 때려주고 싶을 정도다. 어쩌다가 그런 자의 주머니에 들어갈 때가 있는데, 그땐 딱 질색하고 말지. 화류계 여인처럼 착 달라붙어서 영혼을 주물럭거리듯 너희들 삶에 깊이 개입도 하지. 희망의 환영을 보여주다가도, 절망의 나락에 빠트리기도 하지. 나도 속이 있는 터라 나를 아껴주면서, 사랑을 쏟는 자에게 마음이 끌리는 건 당연지사란 얘기야.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어. 돈이 다가 아니잖아”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그럼 궁핍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는 건가. 그딴 말은 나를 꾈 자신이 없고, 나의 마음을 훔칠 기술이 없는 졸장부의 커밍아웃이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면, 사랑의 감정으로 썸 타다가, 한쪽에서 더 대시하면 마음이 움직이는 법. 나도 사랑을 듬뿍 쏟아주는 자에게 마음을 주고는 하지. 돈, 돈, 돈 한다고 천박해 보인다고 하는 옹졸한 비겁쟁이를 좋아하는 일은 없지 않겠나. 내가 자존심이 있는 걸 모르나 봐. 나를 창조해준 사람들도 쥐락펴락하지. 나를 탐하고 싶어도 뜻대로 되지 않는 갈망의 대상이지. 욕망이 빚은 헛것인 줄도 모르는 채, 신전에 머리 조아리며 돈벼락을 맞게 해달라고 기도하여도 함부로 마음 주지는 않지. 이렇게 위대한 존재를 왜 대놓고 좋아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입으로 말하고, 사랑을 듬뿍 담아 표현해야 알아차릴 수 있지 않겠나. 속으로만 나를 갖고 싶다는 욕망을 내 어찌 알리오. 내 눈치가 탁월하다지만 전지전능하신 신에 비하면 조족지혈인 것을.
오랫동안 너의 주머니를 내 집처럼 들락거렸지. 헌데 넌 내 마음을 훔치지 못하더라. 그러기에 네 주머니에서 뛰쳐나올 수밖에. 주머니에서 숨죽이고 있자니 나를 놓고 많이들 싸우더라. 지지고 볶는 가장 큰 이유가 나였다는 것. 그때의 기분을 너희들이 알랴. 나는 너의 사랑에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내 능력을 알잖아! 너의 가정에 활력을 불어넣고, 삶의 풍요를 좌지우지할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어떤 땐 술값으로 질러버리고 말았으니 짝지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수 있겠나. ‘내가 무슨 돈 버는 기계냐’고 언성을 높이고, 결국에는 부부싸움으로 확전하더라. 한편으론 측은하기까지 하더라. 삶은 고뇌의 연속이지. 그럴수록 내 도움이 필요할 터. 입으로는 제발 돈, 돈 하지 말라며 애써 외면하는 언행은 이해할 수 없었다네.
너는 참 나를 사랑할 줄 모르더라. 그래도 관심이 있다는 건 내가 알지. 일확천금의 욕심은 없다면서 속으로는 벼락 맞고 싶다며, 큰돈이 움직이는 부동산 중개와 부동산 투자를 하더라구. 하지만, 너는 나의 진심은 너무 모르더라. 손님을 위해 십수 년을 파고 또 후벼파서 좋은 정보를 줬지만, 내가 싫어하는 짓만 했잖아. 돈 안 되는 지식 사는 데 몽땅 다 갖다 바치고. 너를 떠난 나를 다시 불러들이는 눈치는 없더라. 내 맘에 울림도 못 주고, 내 맘을 훔칠 줄도 몰라서 관심을 놓아버리는 너. 나를 쟁취하겠다는 억척스러움도 없고, 나를 꼭 데리고 살겠다는 간절함도 없더라. 뭇 인간들의 사랑을 받는 메신저는 될 수 있었겠지만, 내 마음을 훔치지는 못했지. 결국에는 나를 꼬드기지 못하여 두 손 들고 말았지. 삶의 도박판에서 큰 생채기만 남기고 돈과는 거리가 먼 학교로 돌아가더라. 나의 환심을 살 좋은 기회였지만, 살리지 못한 것은 사랑의 속을 몰라서였으리라. ‘사랑은 상호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더라. 그래서 나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다가 나가서 떨어진 꼴이 되었지. 속으로는 좋아하면서 정녕 마음과 몸은 허튼짓만 일삼았으니까.
나도 감정을 가진 인격체나 다름없지. 너희들과 어울리기 좋아해서 몰려다니고, 어떨 때는 숨어서 우울하게 지내기도 하지. 우리도 자주 가는 곳이 따로 있고 유행에 따라서 모였다가 흩어지기도 해.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붙어 있기를 좋아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겐 패가망신의 저주를 퍼붓기도 하지. 너는 나에게 평안한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기는커녕 내가 주머니에서 떠나게 하기만 하더구나. 읽지도 않을 책을 사서 모으고, 배운다고, 공부한다고 은행에 있던 나까지 데려와서 질러대면서 뿌듯해하더라. 손실과 비용을 투자라고 거짓부렁까지 하면서. 차라리 몰랐다면 배운다고 나를 귀양보내지 않아 너한테 붙어 있었을 텐데. 알량한 지식이 너의 지름신을 날뛰게 했었지.
그래도 긍정적인 것은 너의 실행력만큼은 인정해. 네가 추구하는 것이 메신저이지 않나.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도와주면서 함께 성장하는 메신저! 하지만 온전히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정신은 아니지. 반대급부로 칭찬받고, 사랑받고 싶은 탈을 쓰고 있기에.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고 싶은 미친 존재감이라고 할까. 너의 자존감을 위한 가식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 이런 가식적인 생각이 나에 대한 편견을 만들었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너를 떠나게 했다는 것을 모르더라. ‘비교하는 지옥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입으로는 떠들면서, 정작 너의 삶은 비교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더라.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할 일 또한 누구보다 많아야 마음이 안정되고, 지식을 과하게 갈구하고, 여러 장르의 책을 읽으려고 애를 쓰고, 오히려 비교의 늪에 빠진 게 아닐까.
내가 생명력이 없는 종이로 보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힘을 가진 요물임은 알아야 하느니라. 누군가는 나를 욕망이 빚은 헛것이라고 하고, 악의 근원이라고도 하지만, 어떤 이는 나를 불과 같은 존재라고도 하지. 나를 달래고 얼러서 사용하면 너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해주지만, 나를 천대하거나 과한 욕심을 부리면 화마로 변해 재앙을 안겨다 줄 수도 있지. 이런 능력을 소유한 나를 편하게 해주라. 구겨 넣으면 아프다고 비명 지르고 싶다. 안락하고 평안하게 쉴 수 있도록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줘. 그리고 너의 생각부터 바꾸어라. 나에 대한 개똥철학을 완전히 버리고 사랑하는 맘 듬뿍 담아 다시 정렬하거라.
지갑은 내가 사는 집이다. 근사한 양택에 들이면 얼마나 좋을까. 율곡 선생은 문간방에, 서재에는 세종대왕, 안방마님은 신사임당을 입주시키고 싶으니까. 방안에서 내가 뒤집히거나 거꾸로 처박히지 않게, 얼굴이 곰보가 되지 않게, 오직 사랑하는 맘이 온전히 느껴지는 손길로 말이다. 그리고는 너의 향기 짙은 목소리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 다오. ‘꿈은 삶의 밭에 뿌리는 놀랍고 소중한 씨앗’이라고. 글 쓰고, 책 읽고 나누며, 그림을 그리고, 전시하여 함께 즐기며 어울리는 너의 꿈인 문화공간 작은 도서관. 나도 너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 주마. 이 역시 온전히 네게 달렸지. 모든 게 너의 몫이야. 과거는 잊고 지켜보리라.
<심사평>
성남주의 「나를 모르는 너」
백남경
문학평론가 김현은 문학에서 내용과 형식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문학 작품이란 내용+형식이 아니라 내용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좋은 작품은 좋은 내용을 좋은 형식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되고 내용이 형식이 되는 유기적 관계 속에 작품이 통일적으로 구성되어 있느냐의 여부가 관건이란 점을 강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성남주의 이번 호 신인상 당선작 「나를 모르는 너」는 이와같이 김현이 주장한 문학 작품의 내용+형식 또는 내용형식을 놓고 검토해보기 좋은 수필로 생각된다. 내용적으로, 돈의 속성과 돈에 대한 인간의 심리, 돈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예리하게 짚고 있다. 형식면에서, 1인칭 주인공 시점과 2인칭 주인공 시점을 동시에 채택하여 내용과 형식의 통일성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는 평이다.
우선 서술 관점부터 살펴보자. 이 수필은 대상을 화자로 전도시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1, 2인칭 주인공 시점을 동시에 적용하였는데, 여기서는 1인칭은 3인칭의 변형이고 2인칭은 1인칭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점이 이 글의 소재(돈)와 주제(돈의 아이러니)를 형상화함에 있어 적절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돈이라는 소재를 놓고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풀어나갔다면 참신성을 구현하기가 어려워 그저 그런 글로 전락하고 말았을지 모른다. 따라서 이 수필은 시점의 채택부터 참신성과 독창성을 확보했다는 평이다.
다음은 내용상의 문제를 짚어보자. 지금은 황금만능주의 시대다. 돈이면 다 되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은 사느냐(to be), 죽느냐(not to be)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돈은 실생활에서 수단이기도 하고, 목표이기도 한 지위를 차지했다. 돈이 우상화된 지 오래된 세상이다. 돈 가진 자는 거만을 넘어 권력도 정의도 살 수 있다.
돈을 거머쥐는 데 실패한 자는 욕망도 꿈도 대폭 축소하거나 포기한 채 살아가야 한다. 심하면 결핍과 불만을 넘어 생존의 벼랑 끝에 서야 한다. 이 평문을 적는 순간에도 tv에서 사업에 실패한 40대 가장이 처자식을 차에 태우고 바다에 돌진했다가 본인만 살아나 형사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이 글은 돈의 이러한 지위와 돈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위선을 역지사지로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수작으로 평가된다. (돈이 너무 많아 주체를 못하거나 무노동으로 졸부가 되어 욕망을 추스르지 못해 마약과 방탕,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서거나 하는 문제는 별론으로 함)
이를 조금 더 디테일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어. 돈이 다가 아니잖아” 하는 물음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하고 일갈한다. 그딴 말은 나(돈)를 꾈 자신이 없고 나의 마음을 훔칠 기술이 없다는 졸장부의 커밍아웃이지, 하고 재차 쐐기를 박는다. 돈에 대한 인간의 위선과 모순을 이렇게 심리적으로 그려냈다.
이 글에서 작가는 또 돈과 인간 간의 사랑(욕망)은 상호주의로 규정했는데, 깊은 공감을 준다. “사랑은 상호주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걸 인간은 모른다는 것이다. 돈은 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붙어 있기를 좋아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에겐 패가망신의 저주를 퍼붓기도 하지. 그러면서도 돈 스스로 요물임을 털어놓는다. 욕망이 빚은 헛것, 악의 근원 등. 그러나 나를 달래고 얼러서 사용하면 너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해주지만 나를 천대하거나 과한 욕심을 부리면 화마로 변해 재앙을 안겨다 줄 수도 있지. 이 문장도, 문학은 내용+형식이 아니라 내용형식임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너는 참 나를 사랑할 줄 모르더라. 그래도 관심이 있다는 건 내가 알지. 일확천금의 욕심은 없다면서 속으로는 벼락 맞고 싶다며, 큰돈이 움직이는 부동산 중개와 주식 투자를 하더라구. 하지만, 너는 나의 진심은 너무 모르더라. 손님을 위해 십수 년을 파고 또 후벼 파서 좋은 정보를 줬지만, 내가 싫어하는 짓만 했잖아. 돈 안 되는 지식 사는데 몽땅 다 가져다 바치고. 너를 떠난 나를 다시 불러들이는 눈치는 없더라. 내 맘에 울림도 못 주고, 내 맘을 훔칠 줄도 몰라서 관심을 놓아버리는 너. 나를 쟁취하겠다는 억척스러움도 없고, 나를 꼭 데리고 살겠다는 간절함도 없더라. 뭇 인간들의 사랑을 받는 메신저는 될 수 있었겠지만, 내 마음을 훔치지는 못했지. 결국에는 나를 꼬드기지 못하여 두 손 들고 말았지. 삶의 도박판에서 큰 생채기만 남기고 돈과는 거리가 먼 학교로 돌아가더라. 나의 환심을 살 좋은 기회였지만, 살리지 못한 것은 사랑의 속을 몰라서였으리라. ‘사랑은 상호주의,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더라.
이 글은 갑남을녀의 입장에서 돈과 인간의 심리적 관계를 형상화하면서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에서만 머물지 않은 것도 돋보이는 점이다. 지갑은 내(돈)가 사는 집이다. 해서 율곡 선생, 세종대왕, 신사임당이 입주할 양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돈을 진정으로 사랑해서 꿈은 꿈대로 실현하고 행복을 챙취하되, 이왕이면 잘 간수하라는 공익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요컨대 이 글은 내용과 형식을 유기적으로 직조해 문학성과 독창성, 참신성, 예술성을 한껏 끌어올린 보기 드문 수작이라 하겠다. 내용과 형식,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 가로와 세로, 절대와 상대, 부분과 전체를 제각기 환치하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고, 그런 과정에서 주제가 선명하게 그려진 것이다. 작가가 이번에 응모한 나머지 수필 「담치기」, 「김치 국밥」, 「아버지의 눈물」도 따뜻한 주제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형상화하는 등 고른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가 그동안 수많은 칼럼과 다수의 저서를 펴낸 글쓰기의 내공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앞으로도 그런 역량을 꾸준히 연마하고 발휘하여 수필 문단을 빛내주리라 기대한다.
등단을 축하드리며, 『에세이스트』 가족이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이다.
첫댓글 성남주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멋진 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